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92화 (192/200)

오해는 쉽고 풀기는 어려워(6)

1회 초부터 양 팀 모두 홈런이 나오며 화끈한 타격전을 예고하는 듯했던 챔피언십시리즈 1차전이었지만.

정작 경기 종료 후의 스코어보드는 큰 변동이 없었다.

[PHI 1 : 2 LAD]

승부를 가른 것은 5회 말 세 번째 타석.

3회 말에 이어 연타석 볼넷으로 1루에 나가자마자 2루를 훔쳤고.

무사에 득점권 주자라는 부담을 안고도, 진루타와 희생플라이로 1점만을 내준 필리스 투수였지만. 이 점수는 그대로 결승점이 됐다.

서로 낼 수 있는 최선의 선발 카드를 내고, 필승조까지 투입했지만, 끝내 한 점 차이로 갈린 경기.

스코어만 놓고 보면 타자들이 욕 처먹어도 할 말이 없지.

야구를 가볍게 즐기는 사람들은 그냥 1대 2? 빠따놈들 점수 못 냈네, 하고 조롱하기 바쁠 테니까.

특히 경기 시작 전 X밥이니 뭐니 서로를 향해 날을 세우던 나와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타깃이 되기 쉬울 테니.

이번에는 또 우리 야린이 친구들이 어떤 참신한 소리를 해댈 것인지 기대하면서 인터넷이 접속했더니.

[기자회견장에서 서로를 물어뜯었던 ‘친구이자 라이벌’ 두 유격수, 나란히 2타수 2안타 1홈런 기록!]

정작 유탄을 날려보낸 것은 기자 놈들이었다.

백 보 양보해서 라이벌까지는 어떻게 참아보겠는데, 친구는 지랄.

내 멘탈을 흔들려는 고도의 전략인가 싶었는데, 심지어 다저스 쪽 기자가 작성한 거였더라.

[선공 필리스였다. 굳이 따지자면 니가 크리스토퍼 따라 친 거야.]

‘내가 치고 싶은 대로 타이밍 맞춰 칠 수 있으면 투수들 죄다 실업자 될 거란 생각은 안 드냐?’

첫 타석 홈런에 연타석 볼넷, 그리고 안타까지.

공교롭게도, 짜증나는 우연이 여럿 겹치면서 타석에서의 결과가 크리스토퍼랑 완전히 똑같아졌다.

그러니 친구니 라이벌이니 하는 짜증 나는 기사들이 쏟아져 나왔던 거고.

아무튼.

커뮤니티를 휩쓸고 다니는 야구팬들의 앙칼진 손가락은, 각자 4출루 경기를 펼쳤는데도 홈런을 제외한 득점을 고작 1점밖에 만들어내지 못한 다른 타자들을 건드리면 건드렸지.

정작 인터넷을 뜨겁게 달궜던 크리스토퍼와 나는 비껴갔는데.

‘내가 욕을 먹는 한이 있더라도 크리스토퍼가 더 심하게 욕을 처먹는 게 훨씬 행복할 것 같다면, 내 심보가 너무 고약한 걸까?’

[니가 언제부터 그런 걸 걱정했다고 그러냐?]

나를 너무 잘 아는 박도현은 이게 뻘소리라는 걸 바로 눈치챘다.

크리스토퍼가 살짝 애매하긴 한데, 욕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짓을 저지르긴 했거든.

[(영상) 크리스토퍼 엘리엇 얘 지금 뭐 하는 거임?? 같은 팀 동료가 홈런 맞았는데 지 혼자 처웃고 있는 거 실화냐??]

└ 크리스토퍼가 웃었다고? 그러면 그 상황이 웃긴 거다.

└ 홈런 이후로 출루 3번을 더 했는데 한 번도 홈에 못 들어가는 미래를 읽고 미리 헛웃음친 겁니다만?

└ 대신 빠따 맞을 놈들이 줄을 섰는데 왜 우리 크리스토퍼한테 그러냐?

└ 욕해도 우리가 욕해 XX놈들아

팀이 동점 홈런을 허용한 상황에서 웃고 있는 모습이 전파를 타면서, 그 기행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타났지만.

곧바로 옹호 댓글이 다다닥 달렸다.

딱히 팬서비스에 적극적이거나 팀을 향한 충성심을 드러낸 적도 없는데, 묘하게 팬들을 구워삶을 줄 아는 크리스토퍼.

험악하기로 이름난 필리건들도 잘 치는 선수 앞에서는 한없이 관대해지는 건가.

[4출루 타자가 나왔는데도 1점밖에 못 낸 것보다는 안 신기한데.]

‘우린 2점이야.’

[알아. 보고 있자니 개빡쳐서 하는 소리야.]

필리스 2선발을 상대로 득점권 찬스를 여럿 만들었지만, 기회를 아쉽게 날리는 장면이 여러 번 나왔던 오늘 경기.

그런 아쉬움을 떨쳐내듯, 다음날 경기에서는 상황이 정반대로 흘러갔다.

찬스를 허무하게 놓치지 않고 최대한 점수를 짜내는, 전날보다 한결 공격의 활로가 살아나는 플레이를 선보였으니까.

상대편도 마찬가지라는 게 문제였지만.

* * *

챔피언십시리즈 2차전 선발투수는 다니엘 슈미트.

헛스윙을 유도하는 하이 패스트볼을 쏠쏠하게 써먹는 좌완 선발.

얼마 전 디비전시리즈에서도 2차전에 등판해 7이닝 무실점으로 팀 승리의 일등공신으로 활약했지만.

정작 팬들의 반응은 뜨뜻미지근했다.

[오늘은 졌네……. ALCS나 봐야겠다.]

└ 얘 왜? 나 야구 본 지 얼마 안 됐는데, 얘 별로야? 포스트시즌엔 제일 잘하는 투수 올리는 거 아닌가?

└ 얘는 문제가 없는데 얘가 등판하는 날엔 팀에 문제가 생김

└ 아무리 뉴비라도 패배요정 다니엘쯤은 들어봤을 줄 알았거늘

└ 애초에 다저스 팬 맞기는 해?

└ 솔직히 잘은 모르는데 개쩌는 타자 한 명 있다고 해서 Koo 유니폼도 샀어!

└ 제대로 배웠네

└ Koo 시즌 하이라이트만 보고 와도 올해 야구 다 본 거지

ERA 3.34에 6승 12패.

다니엘의 올해 정규시즌 성적이었다.

어지간한 스몰마켓 에이스급 성적을 찍고도 승과 패가 뒤바뀌었다고 오해할 만한 승률 덕분에, 다저스 팬들에게는 패배 요정이라는 장난 어린 비난을 받고 있는데.

디비전시리즈 2차전에서 당당히 선발승을 거두었던 기세를 이어가듯, 경기 초반 안정적으로 피칭을 이어갔고.

심지어 1회와 2회에 정신을 못 차리던 필리스 3선발을 상대로 타자들이 3점의 득점 지원을 안겨주기까지 하면서.

패배 요정이니 뭐니 하는 말들을 그저 농담거리로 만드는 듯했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악―!

3회 초 투아웃.

좌익수 말릭의 슬라이딩 캐치 실패로 단타가 3루타로 둔갑했을 때부터 뭔가 삐걱대는가 싶더라니.

볼넷과 사구가 연달아 나오면서 만루까지 허용했고, 다음 타자가 기어이 담장을 넘겨버렸다.

“크리스토퍼!!! 이 X나게 사랑스러운 새끼!!!”

“퍼랭이 놈들아!! X 같냐?! 근데 이게 원래 야구야!!! 스윙 한 방에 3점 차 경기가 뒤집히기도 하거든!!!”

“느그 Koo 줘도 안 가져!!! 우리한테 크리스토퍼가 있는데 4억 달러까지 써가면서 뭐하러 데리고 오냐?!”

“방금 어떤 새끼야?! 그건 아니지!!!”

“정 오겠다면 받아주기는 할게!!! 1루에 세워두면 밥값 정도는 하겠지!!”

저 멀리 동부에서 다저 스타디움까지 찾아와 기어이 원정팬 전용석을 가득 채운 필리건들이 고함을 질러댄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조금은 어설픈 빠던을 시전하고는 베이스를 도는 크리스토퍼.

표정이 좀 뚱한 게, 전날 감독이나 코치한테 뭐라 잔소리를 듣긴 한 모양이다.

“계속 던질 수 있겠지?”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일 수도 있지만, 살짝 늦은 타이밍에 열린 마운드 모임.

투수 코치의 물음에 다니엘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저스에 FA로 막 합류했던 작년 초까지만 해도, 이런 상황에서 연달아 출루를 내주며 급격히 투구 수가 늘어나던 다니엘이었지만.

자신의 승리투수 요건이 눈앞에서 날아가는 대참사를 반복해서 겪다 보니 멘탈이 다져지기라도 한 걸까.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깔끔히 비워진 루상에 더 이상 주자를 내보내지 않은 채 3회를 마쳤고.

이날 경기에서 다니엘의 실점은 크리스토퍼 엘리엇의 그랜드슬램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수고했다, 다니엘.”

“아, Koo.”

3회 이후 양 팀의 공격이 소강상태에 접어들면서, 스코어는 여전히 4대 3.

다저스가 한 점 지고 있는 상황에서 다니엘이 오늘 등판을 마쳤다.

어제와 오늘, 이틀 연속으로 다저스 선발 투수에게서 홈런을 뽑아낸 크리스토퍼 엘리엇.

다저스를 집요하게 찔러댄 그놈한테서 맞은 홈런이니, 괜히 데미지가 더 크진 않을까 염려되어 슬쩍 떠봤는데.

“이기고 있을 때 내려왔으면 어차피 역전됐을 테니까, 차라리 지금이 나아. 아마 한 7회 초 상위 타선에서 점수가 나오지 않을까?”

아무래도 괜한 걱정을 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얘는 다저스가 욕먹는다고 해서 딱히 신경 쓸 것 같지는 않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다저스 욕은 얘가 더 했을걸?]

다니엘의 예언은 귀신같이 들어맞았다.

앤서니 아우젤로가 7회 초를 삼자범퇴로 삭제하자마자, 다저스 타선이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으니까.

8번 헨리부터 시작하는 공격에서, 선두 타자 헨리가 볼넷으로 출루하고.

곧이어 투수 타석 대타로 나선 조나단이 1타점 적시 2루타를 때려내며, 일단 다니엘의 패전은 지워졌다.

따악―!

“아웃!”

그나마 조지를 뜬공으로 잡아내며 아웃카운트 하나는 벌었지만.

우익수가 타구를 처리하는 사이 2루 주자 조나단은 태그업으로 3루에 입성했고.

희생플라이 하나면 역전까지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가, 2번 타순인 나한테 찾아왔다.

‘볼넷 줄 수 있으면 줘 보던가.’

오늘의 다저스 타선은, 홈런을 빼고 3번 출루했던 나를 홈으로 한 번밖에 불러들이지 못했던 어제의 답답이 모드가 아니었다.

산발적으로 나오면서 득점은 3점에 그쳤지만, 어쨌든 7회 말인 지금까지 10개 이상의 안타를 만들어낸 타자들.

“볼!” “볼!”

장타를 억제한답시고 낮게 깔린 공만 연달아 던졌는데, 손도 대지 않으면서 투 볼.

보통 이럴 땐 병살을 기대하며 눈 딱 감고 고의사구 사인이 나오기도 하지만.

강타자들이 눈을 부릅뜬 채 줄줄이 대기하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 섣불리 주자를 늘리기 어려운 투수가 던질 수 있는 공은 한정되어 있었고.

따아아아악―!

[PHI 4 : 6 LAD]

3루 주자가 옆구르기로 들어와도 넉넉하게 세이프될 만한 2루타.

이 점수는 그대로 결승 득점이 되었다.

“전날은 1점 차, 오늘은 2점 차 승부였습니다. 조금만 삐끗했더라도 맥없이 내줄 수도 있었던 아슬아슬한 경기, 이 선수가 없었다면 절대 가져올 수 없었다는 데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데일리 MVP, Hyun! Ki! Koo!!”

오늘 경기 5타수 2안타로, 페이스 자체는 전날에 비해 떨어졌지만.

결정적인 순간에서 활약한 점을 높게 샀는지, 이틀 연속 맞이하게 된 MVP 인터뷰.

인터뷰야 메이저리거라면 밥 먹듯 하는 거라

나랑 하도 자주 봐서 쓸데없이 편안해지기라도 한 걸까.

리포터가 갑자기 선을 넘는 질문을 던진다.

“최근 친구이자 라이벌로 주목받고 있는 크리스토퍼 엘리엇과의 맞대결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타석에서의 결과가 완전히 똑같았던 어제와는 달리, 오늘은 각각 그랜드슬램과 결승 2루타로 서로 다른 활약을 선보였는데요. 혹시 지금 이 자리에서 당신의 친구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으실까요?”

음.

마음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붙잡고 날뛰고 싶지만.

똥오줌 못 가리고 날뛰는 크리스토퍼와는 달리, 나는 사회생활이란 걸 할 줄 아는 교양인이다.

“우선, 친구라는 말은 이 자리에서 적합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저는 다저스의 캡틴이고, 포스트시즌에서 상대 팀의 주요 전력을 맡고 있는 선수를 친구로 부르고 싶지 않아요.”

어떻게든 알아 처먹기를 바라면서, 친구로 부르기 싫다는 말을 꾹꾹 누르듯 강조했다.

“팬들이 저와 크리스토퍼의 맞대결을 즐겨주신다면 저 역시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그건 저한테는 솔직히 크게 중요하진 않아요. 제가 어제 오늘 합쳐 10타수 무안타였더라도, 팀이 똑같이 2연승을 했다면 저 역시 똑같이 기뻐했을 겁니다.”

내가 한 경기에서 4홈런씩 뻥뻥 날려댄들, 단기전에서 팀의 패배를 막지 못했다면 어떻게 기뻐할 수 있을까.

만약 그랬다가는 크리스토퍼 엘리엇마냥 눈치 없는 놈이라고 쿠사리나 먹겠지.

그러나 이틀 뒤.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자신의 홈 필라델피아로 돌아가서 치른 NLCS 3차전 데일리 MVP로 선정된 후.

인터뷰에서 내 말에 정면으로 반박했다.

“어떤 타자가 그러더군요. 10타수 무안타라도 팀이 이기면 기뻐할 거라고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안타를 하나도 못 때리는 동안 팀이 여유롭게 이길 수 있었던 기회를 대체 몇 번이나 날려먹었겠습니까?”

[LAD 3 : 8 PHI]

4타수 3안타 2홈런 1볼넷.

적지인 다저 스타디움에서도 펄펄 날아다녔던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홈으로 돌아가자마자 본격적으로 깽판을 부려댔다.

인터뷰에서 굳이굳이 나를 언급하는 바람에, 전날 인터뷰 이후 수그러든 줄 알았던 나와 크리스토퍼 사이의 라이벌리가 다시 불타오른 것은 덤이고.

[왜 그러냐? 또 데릭한테 연락해서 기자들 좀 어떻게 해달라고 징징대려고?]

‘그건 걔랑 나랑 찍힌 사진 걸어놓고 데이트니 뭐니 쌉소리했던 놈들 조지려고 그런 거잖아. 일단 좀 닥쳐봐.’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기본적으로 실력이 있는 타자고, 안정적인 수비력을 갖춘 유격수인 건 맞는데.

다저스만 만나면 미친 듯이 맹타를 휘두른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지금 성적이 지나치게 하늘을 찌르고 있다.

약물의 도움을 받았을 가능성은 없다.

아마도 나와 제리를 제외하면 도핑 테스트를 가장 많이 받는 선수 중 한 명이 크리스토퍼일 테니까.

대체 얘가 왜 이 지경이 되었는지를 고민하고 고민한 끝에.

문득 한 가지 가능성이 머릿속을 스쳤다.

‘이 새끼 설마…….’

내가 생각해도 허무맹랑한 얘기긴 한데.

크리스토퍼 엘리엇 같은 미친놈이라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곧바로 숙소 방을 빠져나와 어딘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어? 갑자기 어디 가냐?]

‘감독님한테.’

시리즈 스코어 2대 1로 앞서고는 있지만, 야구는 원래 다음 장면을 예측할 수 없는 스포츠다.

필라델피아에서 시리즈를 끝내려면 할 수 있는 건 전부 동원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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