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는 쉽고 풀기는 어려워(7)
필라델피아 필리스가 승리를 거둔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 3차전.
승리의 주역으로 뽑힌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집에 돌아가 흡족한 표정으로 샤워를 하고 있었다.
흡족하다는 표현은 정확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가 보면 복권이라도 당첨된 거 아니냐고 오해할 수도 있을 만큼 희희낙락한 표정.
경기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이 표정을 한 번도 무너뜨리지 않았던 크리스토퍼는, 지나가던 동료에게서 이런 말을 들었다.
“어, 음. 크리스, 내가 널 오해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네가 이기고 지는 데는 신경조차 안 쓰는 괴짜라고 생각했거든.”
물론 승리는 기쁘다. 팀이 이기든 말든 아예 관심조차 없는 선수였더라면, 지금처럼 필리스 팬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다만, 그는 승패에 집착하지 않을 뿐이었다.
오늘 MVP 인터뷰에서 했던, 이겨야겠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실력이 안 나온다는 말은 입바른 소리가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다.
대신 전혀 엉뚱한 곳에 집착하고 있다는 게 문제였지만.
‘내가 Koo를 찍어 눌렀어.’
그가 직접 설계했던 구현기와의 라이벌 구도.
야구팬들에게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격수가 자신과 구현기 둘 중 하나라는 인상만 심어주기만 해도 만족할 일인데.
심지어 그 구현기를 성적으로 찍어 누르기까지 했다.
3차전에서 구현기는 4타수 2안타 1볼넷으로, 자신보다 안타 하나가 적을 뿐 절대 부진하다고는 볼 수 없는 성적이었지만.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자신에게 비교적 관대하고 남에게는 박한 편이었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너무 잘했나? 설마 그런 소리까지 나올 줄이야.’
유일하게 기분이 상했던 것은, 이따금 필리스 팬들이 구현기 따위 필요 없다며 외쳐댔다는 것.
그것 말고는 모든 게 순조롭게 흘러갔다.
코치가 제발 돌발행동 좀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퍼부어 대긴 했지만, 딱히 귀담아들을 생각은 없었기에 기분이 상할 일도 없었다.
샤워를 마치고, 구현기와 함께 필리스 유니폼을 입고 함께 뛰는 상상을 하며 거실로 나온 크리스토퍼.
그는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가 조금 놀랐다.
좀 전에 헤어졌던 타격 코치에게서 부재중 전화가 여러 통 와 있었으니까.
[뭐야, 크리스토퍼. 전화 왜 안 받았어?! 혹시 내가 잔소리 좀 했다고 뚱해서 연락 피한 건 아니지?!]
“네? 무슨 잔소리요?”
[너 그때 또 안 듣고 있었냐?! 아니, 그건 됐고. 전에 전력분석팀에서 보내줬던 Koo 피칭 자료 아직 갖고 있지?]
자료야 어디 갖다 버리지는 않았으니 찾아보면 있겠지만, 그게 대체 왜 필요할까.
이번 챔피언십시리즈는 내셔널리그의 왕좌를 가리는 시리즈인 동시에, 최고의 유격수를 가리는 시리즈이기도 할 텐데.
듣자 하니, 마치 구현기가 투수로 등판하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는 게 아닌가.
[반응이 왜 그래? 너 혹시 방금 들어온 거야?]
“어, 아뇨. 좀 전까지 샤워하고 있었습니다.”
[어쩐지. 그래서 몰랐구만? 지금 뉴스에 대문짝만하게 났는데.]
타격 코치가 뉴스라는 말을 언급하기도 전에, 크리스토퍼는 이미 옆에 놔둔 태블릿을 조작하고 있었다.
그리고, 스포츠 뉴스란에 접속하자마자 최상단에 올라온 기사의 제목을 눈으로 읽었다.
[(속보) LA 다저스, NLCS 4차전 선발투수 Koo로 교체!]
사람이 지나칠 정도로 뜻밖의 소식을 접하면 머릿속이 새하얘진다고들 하는데.
지금 크리스토퍼가 딱 그 상태였다.
[갑자기 이게 뭔 난리인지 모르겠다. 뭐 그래도 다저스가 옛날에 경기 시작 6시간 전에 선발투수 변경 통보하는 양아치 짓거리도 했다는데, 그것보단 낫지 뭐.]
“…….”
Koo가 마운드에 오른다.
왜? 어째서?
분명 이번 챔피언십시리즈를 최고의 유격수가 누구인지 가리는 시리즈로 만들자는 자신의 제안에 흔쾌히 동의했었는데.
[아무튼, 딱 봐도 오프너긴 한데 어쨌든 너까지는 상대할 것 같거든? 일단 오늘 영상 좀 보면서 대비는 해두라고. 만약 Koo 그놈 상대로 안타라도 뽑아내면 우리 팀 사기에 큰 도움이…… 여보세요, 크리스. 듣고 있는 거 맞지?]
크리스토퍼는 자신을 애타게 부르는 타격 코치에게 대답할 수 없었다.
들고 있던 핸드폰이 힘이 빠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바닥에 떨어졌으니까.
* * *
‘감독님. 이건 어디까지나 일개 선수의 의견일 뿐이고. 감독님의 권한을 침범하려는 의도가 절대 없다는 걸 먼저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선발투수가 짧은 이닝만 책임지고 실질적 선발에게 마운드를 넘기는 오프너 전략.
여러모로 변수가 많고, 그래서 이런 식으로 주절주절 사족을 붙여가며 부탁드려봤는데.
감독님은 생각보다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신 나간 놈을 상대하려면 정신 나간 전략으로 맞대응하는 게 상책이지.’
때마침 감독님 역시 구상은 하고 있던 전략이었다고 한다.
타격감이 살벌하게 올라온 크리스토퍼 엘리엇을 한 타석이라도 확실하게 틀어막아 주면, 필리스의 득점 루트 일부를 봉쇄할 수 있으니까.
다만 확신 없는 상태에서 일찌감치 올렸다가 실패해버리면 오히려 손해니까 접어뒀을 뿐.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자네만 한 적임자가 없겠더라고. 그놈이랑 사이가 좋은 만큼 어떤 타자인지도 속속들이 알고 있지 않겠나?’
굳이 안 해도 되는 말씀을 덧붙이셔서,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칠 뻔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투구 수 제한 20개라는 조건을 달고 선발투수로 나가게 된 4차전.
[근데 진짜 이런다고 크리스토퍼 그놈이 흔들릴까?]
경기 시작할 시간이 다 돼 가는데 이제 와서 초를 치는 박도현.
‘그거야 나도 모르지.’
투수로 등판하자는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은, 크리스토퍼의 인터뷰 영상을 보고 나서였다.
괜히 나를 걸고넘어지면서 이래저래 입을 터는 거야 딱히 신경 안 쓰였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박도현이 살아 있을 때 종종 인터뷰를 저 꼬라지로 하는 것 같더라고.
‘왜 그런 거 있잖아. 전교 2등 하는 애가 어쩌다 1등이 한번 삐끗했을 때 세상 다 가진 것처럼 구는 거.’
물론 이건 저놈이랑 나의 1대 1 대결 구도가 아니고, 월드시리즈 티켓을 걸고 팀끼리 벌이는 진검승부였지만.
저놈 머릿속에서는 조금 사정이 다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그때 처음으로 들었다.
애초에 크리스토퍼의 제안으로 시작된 대결 구도.
저놈이 생각보다 여기에 과몰입하고 있는 게 아니냐는 거지.
그렇다면 유격수끼리의 맞대결이라는 프레임 자체를 부숴버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준비해본 수.
경기 전 훈련 시간에 슬쩍 보기로는 과연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이었고.
다저스의 1회 초 공격도 삼진―좌익수 플라이―중견수 플라이로 끝나면서, 유격수 크리스토퍼의 컨디션이 어떤지 확인할 기회도 없었지만.
따악!
“아웃!”
내 예상이 틀렸다면, 그냥 평범한 오프너 전략이 되는 거지 뭐.
그냥 투수가 아니라, 빅리그에서 풀타임 선발 경험이 있는, 올해 정규시즌 클러치 상황에서 단 한 점도 허용하지 않았던 투수가 1회를 철저히 틀어막으면 그만이다.
3구 만에 하이 패스트볼을 건드려 파울 플라이를 때리면서 본인 몫을 하지 못한 필리스 리드오프가 내려간 후.
타석으로 다가오는 2번 타자를 꼬라보면서 스위치 피처용 글러브를 왼손으로 바꿔 꼈다.
내가 타자에 맞춰 투구하는 손을 바꾼다는 것 정도는 당연히 파악했을 테고, 우투수 상대로 성적이 나쁘지 않기도 했으니.
나름대로 자신감을 표현하듯 힘차게 연습 스윙을 하던 2번 타자였지만.
“스윙! 스트라이크!”
치기 좋게 들어가는 듯하다가 거의 발목 높이까지 떨어지는 슬라이더.
연습 스윙 때와 똑같이, 타자가 허공을 향해 시원하게 선풍기를 돌렸다.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나?’
아무래도 커브가 컨트롤이 어려운 구종이다 보니.
나를 상대하는 타자들 중 릴리즈 포인트에서부터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는 커브는 아예 버리고, 패스트볼 계열이나 체인지업을 노리는 놈들이 적지 않은데.
커브에 비하면 덜 위력적이라서 그렇지, 다른 변화구를 머릿속에서 지워버리면 곤란하다.
따악!
“아웃!”
2구는 포심.
노리던 코스에 공이 들어왔는지 다시 한번 풀스윙을 갈긴 타자였지만.
타이밍을 제대로 못 맞추면서, 93마일짜리 패스트볼이 힘없는 땅볼로 바뀌었다.
나를 대신해 선발 유격수로 출장한 채드윅이 손쉽게 처리하면서, 공 다섯 개 만에 투 아웃.
허무하게 물러선 타자를 향해 쌍욕을 쏟아내던 필리건들은, 그들이 사랑하는 3번 타자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했다.
“크리스토퍼!!! 설마 니가 깔아뭉갠 X밥한테 삼진 처먹는 건 아니겠지?!”
“타자 주제에 시티즌스 뱅크 파크에서 선발 등판을 자처한 저 건방진 애새끼를 찍어 눌러버려!!!”
“Koo!!! 이 쫄보 새끼야!!! 타격으로는 안 될 것 같으니까 우리 유격수한테 헤드샷이라도 날리려고 올라왔냐?!”
평소와 똑같이 3번 유격수로 출장한 크리스토퍼 엘리엇.
팬들이 저런 식으로 부담을 팍팍 주는 게 하루이틀 일이 아닌데, 저 정도 성적을 내는 게 신기할 지경이다.
[야, 쟤 지금 눈 피한 거 맞지?]
투수 대 타자로서의 맞대결.
아예 지금 이 상황이 성사될 가능성을 생각조차 하지 못한 듯, 조금은 혼란스러워 보인다.
평소처럼 관중석을 향해 여유로운 웃음을 지어 보이거나, 손을 흔들어줄 생각도 못 하는 걸 보니.
‘그러거나 말거나.’
주심이 투구 시작을 지시하면, 투수는 공을 던져야 한다.
타자가 준비가 됐건 안 됐건 그건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란 거지.
따악!
“파울!”
초구는 저놈한테 배트를 낼 정신이 있는지 시험해볼 생각으로 선택한 하이 패스트볼.
나름 원하는 코스로 정확하게 들어갔는데도, 이미 올라올 대로 올라온 타격감이 사라지지는 않은 듯.
어떻게든 배트 컨트롤을 해내며 뒷그물을 때리는 파울을 만들어냈다.
‘가운데로 몰린 실투였으면 넘어갔겠는데?’
다음은 선구안이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해볼 생각으로, 바깥쪽 멀어지는 코스와 몸쪽 떨어지는 코스로 연달아 변화구를 던져봤고.
둘 다 반쯤 배트를 내기는 했지만, 노 스윙 판정으로 카운트는 2―1.
다시 패스트볼 타이밍이라는 걸 나도 알고 저놈도 알 테니.
최대한 구석을 찌른다는 생각으로, 헨리의 미트만 바라보며 힘을 실어 던진 4구.
따아아아아아아아악―!
살벌한 소리에 잠시 등골이 오싹해졌지만.
최대한 티를 내지 않고 뒤돌아 확인해보니, 파울 폴대 바깥쪽 외야석으로 타구가 떨어지고 있었다.
‘진짜 미친놈이네.’
패스트볼은 고작 2구째인데, 벌써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고 있다.
아주 조금만 더 제대로 맞았으면 빼도 박도 못하고 홈런이 됐을 타구.
챔피언십시리즈 3경기 동안 홈런 4개를 괜히 때린 게 아니었다.
공을 이쯤 봤으면 크리스토퍼 쪽도 슬슬 혼란이 가라앉았을 텐데.
그 빈자리를 채운 감정이 무엇인지 관찰해보니, 다름아닌 분노였던 모양이다.
신경질적으로 흙을 다지고, 포수한테 뭐라 중얼거리고는.
뜬금없이 매서운 눈으로 나를 쳐다보는 걸 보니.
어디 경기 중에 사사로운 감정을 내비치고 있어.
아직도 우리가 타자 대 타자로 대결하고 있는 줄 아나.
쐐애애액!
평정이 흔들리면서 자기 페이스를 잃어버린 타자.
그리고, 우리 팀에는 이런 놈을 살살 긁어서 스윙을 유도해내는 짓거리를 가장 잘하는 포수가 있다.
부우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투 스트라이크도 잡았으니, 결정구가 나올 것조차 예상 못 했던 걸까.
크리스토퍼의 배트는 바운드볼로 들어오는 커브의 궤적에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다.
역시 파울 홈런 뒤에는 헛스윙 삼진이 국룰이지.
20구 제한 중 절반만 쓰고도 1이닝을 틀어막았다.
마운드에서 내려가면서 슬쩍 보니.
한쪽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멍하니 앉아 있던 크리스토퍼가, 주심한테 뭐라 잔소리를 듣고는 비척비척 물러난다.
그러거나 말거나.
원정팀 덕아웃으로 돌아가자마자, 당장 투수 코치부터 찾았다.
“2회에도 올라가도 되죠?”
벌써부터 저리 멘탈을 수습 못 하면 어떡하나.
아직 선물이 남아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