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94화 (194/200)

새로운 시대의 다저스(1)

“거기 친구. 한숨 자고 싶은 거면 거기서 뭉개지 말고 나한테 말해. 아예 라커룸 가서 푹 자게 도와줄 테니.”

구현기에게 1회 말 삼구삼진을 당한 이후.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심판의 핀잔을 듣고서야 비척비척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신경 쓰지 마, 크리스.”

“다저스 저 미친놈들이 주전 유격수를 오프너로 써먹을 줄 누가 알았겠어?”

“어차피 저놈 오래는 못 던지니까, 그냥 똥 밟은 셈 치자. 가끔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뭐.”

동료들이 무어라 한마디씩 위로의 말을 건넸지만, 크리스토퍼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삼구삼진.

한 투수가 스트라이크 존을 지나가거나 배트를 끌어들이는 유인구만 3개 연속으로 던지는 동안, 전혀 타이밍을 잡지 못했음을 뜻하는 굴욕적인 기록.

아무리 뛰어난 타자라도 아예 안 당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에는 사정이 달랐다.

‘나를 삼진으로 잡았다고? Koo가?’

물론 마운드에 서는 구현기를 처음 본 것은 아니었다.

올스타전에서 구현기가 구원투수로 등판했을 때 유격수로서 수비에 임하기도 했고.

정규시즌 후반기 맞대결에서 9회 말 구현기가 세이브를 거두는 장면을 대기 타석에서 지켜본 적도 있으니까.

그러나, 크리스토퍼 엘리엇에게 ‘투수 구현기’는 평가 대상조차 아니었다.

사고 이전의 선발투수 구현기는, 자신을 비롯한 최정상 타자들에게는 한계를 드러내던 선수.

믿을 만한 불펜투수가 부족한 팀 사정상 등판을 자처했을 뿐이라고 여겼고, 딱히 대수롭게 생각하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조금은 기특해하기까지 했다.

‘왜? 그런 재능이 있으면서, 도대체 왜?’

구현기의 몸에 박도현의 영혼이 깃들었을 것이다.

크리스토퍼의 이 맹목적인 믿음은, 의외로 상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평범한 투수가 하루아침에 최정상급 유격수로 바뀌는 건, 그의 상식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그래서,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어쩌면 이 모든 게 야구의 신의 인도가 아닐까 생각했다.

박도현의 찬란한 재능을 구현기의 준수한 피지컬에 더했을 때 과연 어떤 괴물이 탄생할지 보고 싶었을 거라고.

그렇지 않고서야, 그토록 완벽한 선수를 허무하게 데려가서는 안 되는 거라고.

타자 전향 이후 지금까지 쌓아 올린 영광도, 총액 4억 달러가 넘는 계약서도.

전부 박도현에게서 옮겨 왔을 재능에서 나왔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주어지지 않은, 그토록 동경했던 그 재능을 완전히 무시하면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투수 구현기’로서 대결에 응한다.

과연 자신이 저놈이었더라면 똑같은 짓을 벌일 수 있었을까.

‘도대체 어떻게…….’

충격과 혼란이 파도처럼 크리스토퍼를 덮쳤다.

누가 등을 떠미는 대로 글러브를 끼고, 수비 위치로 가서 섰지만, 좀처럼 경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따아악―!

“세이프!”

그리고, 포스트시즌은 잠깐의 방심조차 허용되지 않는 무대였다.

2회 초 다저스의 공격, 2사 주자 없는 상황에서 마운드를 맞고 굴절된 타구.

평소라면 최소한 외야로 빠져나가지 않게 몸으로라도 막아뒀을 그 타구가, 크리스토퍼의 글러브를 무심히 스쳐 지나갔다.

안타로 기록됐지만, 평소 크리스토퍼의 수비 범위를 알고 있는 필리스 팬들에게는 반쯤 실책이었고.

그들이 사랑하는 주전 유격수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에 관중석이 잠깐 웅성대던 찰나.

따아아아악―!

끝내 하위 타선에서 1루 주자를 불러들이는 장타를 때려내며 선취점을 빼앗겼다.

“크리스토퍼, 너 괜찮은 거 맞지? 혹시 아까 삼진 때문에 그러냐?”

중견수의 호수비로 이닝을 끝내고 덕아웃으로 돌아오자마자, 수비 코치의 걱정이 쏟아졌다.

당장 작년 디비전시리즈에서도 뜬금없는 타이밍에 급격히 무너지면서 탈락에 일조했으니, 당연한 걱정일지도 모르지만.

안타깝게도 필리스 코치진의 불안은 현실로 다가왔다.

“스트라이크 아웃!!!”

1회에 이어 2회 말에도 마운드에 오른 구현기.

크리스토퍼의 시선은 조금 전 이닝의 두 번째 아웃카운트를 바친 타자가 아니라, 구현기에게 다가가는 다저스 투수 코치에게 못 박혀 있었다.

필리스 팬들의 거친 야유를 받으며 마운드에서 내려간 구현기.

그가 향한 곳은 2루와 3루 사이가 아닌, 1루 베이스 위였다.

[포지션 이동: Hyun―Ki Koo(SP → 1B)]

유격수 자리를 어설픈 백업 선수에게 맡겨두고 1루로 간 구현기를, 크리스토퍼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원래 성격대로, 자기 좋을 대로 생각하는 사고방식이 발휘됐더라면, 구현기가 자신 앞에서 꼬리를 말았다며 좋아해야 마땅했겠지만.

‘설마…… 나랑은 대결할 가치도 없다 이건가?’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박도현의 재능을 향해 느끼던 경외감은 수많은 패배로부터 나온 것.

삼구삼진이라는 강렬한 패배가 부정적인 생각의 스위치를 눌러버린 시점에서, 이미 그의 좋은 페이스는 끝나버렸지만.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필리스 코칭스태프들은 ‘나는 믿을 거야, 크리스토퍼 믿을 거야’를 시전하며 꿋꿋이 지켜봤고.

[(NLCS 4차전) LAD 5 : 1 PHI]

[필라델피아 필리스, 1승 3패로 탈락 위기! 필라델피아 주 정부, 5차전 패배 대비해 일찌감치 경찰 인력 ‘총동원’]

[3차전까지 언터쳐블이었던 크리스토퍼 엘리엇, 4차전에서 4타수 무안타에 2실책으로 패배 견인!]

[‘6.1이닝 1실점 구원승’ 아드리안 빌라, “필리스 타선에서 빡빡하다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 Koo가 맥을 잘 끊어준 덕분이지 싶다.”]

돌아가자마자 샤워부터 하는 평소 루틴도 잊어버린 채, 소파에서 기절하듯 잠들어버린 크리스토퍼 엘리엇.

그래서 그는 핸드폰에서 애타게 울려대는 진동음을 듣지 못했고.

스포츠 뉴스란의 속보 역시 확인할 수 없었다.

[(속보) Koo, 5차전 선발로 낙점되며 이틀 연속 오프너 기용!]

다저스는 가뜩이나 가루가 된 크리스토퍼의 멘탈에 로드롤러를 투입할 준비를 마쳤다.

* * *

[LA 다저스, 챔피언십시리즈 스코어 4대 1로 제압하며 월드시리즈 남은 한 자리 확정!]

1회 초 공격에서 다저스는 3점을 냈다.

전날과 마찬가지로 20구 안쪽에서 교체하겠다던 감독님은, 계획을 살짝 바꿔 24개의 공을 던져 2회 말을 마칠 때까지 기다려주셨고.

1루에 투입하는 대신 아예 교체해버렸다.

“구현기 선수, 지금 한국에서 다저스가 구현기 선수에게 독박야구를 시킨다는 밈이 있는데, 혹시 알고 계십니까?”

남의 집 안방에서 샴페인 파티를 벌이며 한참을 날뛴 후에 열린 인터뷰 자리.

한국에서 온 기자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았다.

기자의 지적 아닌 지적대로, 내가 타선에서 빠지고 나니 득점 기회를 못 살리는 경우가 부쩍 늘었다.

1차전에서 상대했을 때와는 달리 컨디션이 영 별로였던 필리스 2선발을 상대로 끝내 추가점을 뽑아내지 못했으니까.

대신 마운드에서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내 뒤를 이어 등판한 제리는 7이닝 무실점으로 구원승을 거두며.

숨가쁘게 달려온 불펜 필승조에게 월드시리즈 전까지 4일간의 휴식을 선물했다.

불안 요소와 기대되는 점이 교차하는 경기였지만, 그건 모든 팀이 마찬가지다.

월드시리즈에서 만날 팀이라고 약점이 없는 것도 아니고.

우선 복잡한 생각은 잠시 접어두고, LA로 돌아가기 위해 시티즌스 뱅크 파크를 떠나려던 바로 그 순간.

“저기, Koo.”

세상에서 내 머리를 가장 복잡하게 만드는 놈한테 붙잡혔다.

잠깐 혼자 있던 타이밍을 도대체 어떻게 잡아내는 건지 의아할 지경이다.

[얘 여기서 태평하게 이러고 있어도 되나?]

‘그러게. 지금 경기장 밖에서는 필리건들이 거리를 점거하고 지 사진 불태우고 있을 텐데.’

목소리를 듣자마자 한숨부터 나왔지만.

크리스토퍼 엘리엇은 전혀 예상치도 못한 말을 꺼냈다.

“앞으로는 너를 Park이라고 부르는 일은 없을 거야.”

지가 아주 똑똑한 줄 아는 능글능글한 말투를 갖다 버리고 진지한 태도로 말하는 크리스토퍼.

자세히 보니, 뭔가 광신도 같았던 끈적한 눈빛도 사라진 것 같고.

설마 이 새끼가 드디어 정신을 차렸나.

“네가 Park을 계승하는 대신, 너의 길을 만들어가기로 한 결정을 존중해야 한다는 걸 이제 알았어.”

그리고 그 기대는 1초 만에 개같이 박살났다.

정신 차리긴 개뿔. 상태만 좀 멀쩡해졌을 뿐 헛소리는 여전하다.

“Park의 찬란한 재능이 이렇게라도 세상에 남겨졌다는 것에 만족하기로 했어. 다만 그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고 싶은 마음은 여전하다는 것도 알아줬으면 좋겠다.”

그 와중에 100퍼센트 헛다리만 짚지는 않는다는 것도 여전하다.

곁에서 지켜보기는 무슨.

혹시 이 새끼가 다저스로 오면 나를 딴 팀으로 보내달라고 떼를 쓰든가 해야지 아주.

지 할 말 다 마치더니, 미련 없이 뒤돌아서서 저벅저벅 사라지던 크리스토퍼는.

뒤돌아선 모습 그대로 절도 있게 한 손을 들어 인사를 보내더니.

“안녕, Park. 고마웠다.”

마지막까지 치명타를 날리고는 복도 너머로 사라져버렸다.

‘들었냐? 크리스토퍼가 너보고 고마웠댄다.’

[미친새끼. 가는 길에 계란이나 맞아라.]

저 뒤통수를 냅다 후려치는 대신 쌍뻐큐로 넘어간 것만 해도, 내 인내심을 칭찬받아 마땅하지 않을까.

* * *

작년부터 올해까지, 내가 타자로서 겪어온 두 번의 포스트시즌.

그동안은 다저스가 먼저 앞선 라운드에서 진출을 확정짓고, 상대가 누구인지 기다리는 구도가 이어졌지만.

이번 월드시리즈에서는 상대가 먼저 한 자리를 차지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2038시즌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대진표, 뉴욕 양키스 VS LA 다저스로 확정!]

한때 ‘악의 제국’이라는 별명으로 불릴 만큼, 메이저리그의 왕좌를 독점했던 뉴욕 양키스.

더는 한 팀이 장기 집권을 하기 어려워진 현대야구의 현실을 고려하더라도, 최근 몇 년 동안은 이름값을 못 하는 성적이 이어졌지만.

[ALDS―ALCS 연달아 스윕한 뉴욕 양키스! 과연 4년 만에 아메리칸리그가 왕좌를 탈환할 수 있을 것인가?]

작년에 공격적으로 보강한 선수들이 제대로 터져주면서, 뉴욕의 야구팬들은 기세등등해져서 ‘올해는 다르다’를 외쳐댔다.

서부의 강호 다저스와 동부의 강호 양키스.

소위 전국구 팀이라 불리며 거대 팬덤을 거느리는 두 팀의 맞대결이 성사됐으니, 지금쯤 사무국은 기쁨의 비명을 지르고 있겠지.

표를 구하지 못한 팬들조차도 경기장의 분위기만이라도 느끼고자 일찌감치 뉴욕과 LA행 비행기 티켓을 예매할 정도였으니.

야구를 거의 모르는 사람이 일부러 해외에서 찾아온다고 해도, 딱히 어색한 일은 아닐지도 모른다.

“아들! 아빠 왔다!”

챔피언십시리즈가 한창 진행되던 도중, 아버지는 갑자기 월드시리즈를 보러 오겠다며 연락을 했다.

아무리 유리한 스코어를 선점한 상태였다지만, 야구라는 게 끝날 때까지는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건데.

이걸 자식을 향한 굳은 믿음으로 포장해도 괜찮은 걸까.

“너네 집에는 사돈댁 계신다며? 그럴 줄 알고 오기 전에 LA랑 뉴욕이랑 호텔 싹 다 잡아놨지.”

“호텔이요? 요즘 이 동네 숙소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일 텐데.”

“아들아. 아빠가 살다 보니까, 돈이랑 인맥이 있으면 어지간한 일은 다 해결이 되더라고.”

“아, 네.”

하나뿐인 아들한테 참 좋은 거 가르쳐주시는 아버지.

[니 인성이 왜 그 모양인지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하면 실례겠지?]

‘너는 존재 자체가 사회에 실례니까 굳이 그런 거 가지고 신경 안 써도 돼.’

박도현의 헛소리에 대충 대꾸해주면서, 진짜로 궁금했던 걸 물었다.

“어째 이번에는 시간이 많이 나셨네요?”

기껏 미국까지 와 놓고는 하루이틀 만에 황급히 귀국하면서, 절대 회사는 물려받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해준 장본인인데.

그러자 아버지는 다시 연락이 닿기 시작한 이래 가장 상쾌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빠 회사 정리하려고. 이제 마무리 단계야.”

집에 남는 물건들을 연근마켓에 가져다 팔았다는 듯, 평온하기 그지없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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