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시대의 다저스(3)
제리 헤이즈택의 약혼 소식이 알려지고 나서, 세상 모든 유부남들이 그를 찾아와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중에는 도움이 되는 것도, 무슨 헛소리인가 싶은 것도 있었기에 적절히 걸러 들어야 했지만.
팀 동료든, 코칭스태프든, 다른 팀 선수든, 하나같이 입을 모아 강조하는 것이 하나 있었는데.
바로 야구와 가정 사이에서 중심을 잘 잡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러지 못했던 사람을 알고 있던 제리는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했다.
작년을 마지막으로 은퇴한 로버트 켈리.
투수조의 군기반장이자, 제리가 에이스로 성장하기까지 많은 도움을 준 그는, 야구에만 집중했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가정에 전념하고 있다.
‘월드시리즈? TV로 보면 되잖아. 애들 훈련 도와주기도 바빠 죽겠는데. 어, 야. 잠깐만. 당신 지금 뭐라고? 숙제? 둘 다 끝내는 거 확인했는데. 아니라고? 그럼 뭔데. 나? 내가 무슨…… 아니, 잠깐…….’
월드시리즈 초청장을 거절했다는 소식에 놀라서 연락해보니, 녹록지 않은 근황을 알 수 있었다.
딱히 불행해 보이는 건 아니었지만, 어쨌든 한쪽으로 치우친 저울의 균형을 맞추느라 고생하는 듯했다.
그런 면에서, 제리 헤이즈택은 자신이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자신과 곧 부부가 될 이나현은 아름답고, 지혜로우며, 사랑스러운데다, 운전도 잘하는 등 수많은 장점을 가진 여자였지만.
무엇보다 다저스라는 팀을 진심으로 사랑했으니까.
“제리, 꼭 다저 스타디움에서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려야 한다고 부담 가질 필요 없어요.”
“그런가요? 그래도 당신이랑 가까운 데서 우승해야 기쁨이 두 배가 될 것 같은데…….”
“어디서 하든 우승은 우승이잖아요.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자면, 어차피 저는 경기장 가지도 못하는데 다저스 팬들도 다들 TV로 봤으면 좋겠어요.”
가끔 애정이 묘한 방향으로 변질될 때도 있지만, 제리에게는 그것마저도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결혼 후에도 이렇게 팀과 가정을 위해 노력을 쏟으면 될 줄 알았는데.
월드시리즈 1차전에서 패배하고 돌아온 날, 꼭 그렇지만도 않다는 걸 깨달았다.
“괜찮아요. 저는 괜찮은데, 우리 아기가 야구를 좀 아는 것 같아. 평소보다 살짝 얌전해진 것 있죠?”
만삭이 가까워진 약혼자가 자기 배를 쓰다듬으며 이렇게 말하는데, 평정을 유지할 남자가 과연 있기나 할까.
“걱정 말아요. 내일은 타자 놈들 엉덩이를 걷어차서라도 무조건 이길 거니까.”
월드시리즈 2차전을 앞둔 밤.
이나현이 쭈굴쭈굴 제리를 보고 싶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던진 한마디가, 에이스의 자존심을 건드리고 말았다.
* * *
팀의 캡틴으로서 맞이하는 첫 월드시리즈.
안타 치고 수비하는 데만 집중하면 그만이었던 지금까지와는 달리, 이래저래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늘었다.
예를 들어 패배 이후 팀 분위기를 수습하는 거라던가.
전날 경기가 끝나자마자, 득점 기회를 놓치거나 실책성 플레이를 벌이는 등 멘탈이 나갈 만한 짓을 한 선수들은 따로 찾아가서 풀어주긴 했는데.
[저 양반들 지금 저기서 뭐 하냐?]
그냥 경력이고 뭐고 얼굴에 철판 깔고 선수단 소집해서 한마디 할 걸 그랬나.
한창 경기 준비로 바쁠 시간에 여럿이서 한 명을 둘러싸고 다구리나 치고 있네.
“너 혼자 마운드에서 공 던지고 수비까지 다 해볼래? 외야에 7명 가 있는 수비 시프트 맛 좀 보고 싶어?”
“허구한 날 황족이니 뭐니 해주니까 진짜 투수가 갑인 줄 아나.”
“그렇게 인내심이 없으니 보나마나 거사도 3분 안에 끝나겠지!”
뭔 일인가 싶어 가까이 다가갔다가 현기증이 날 뻔했다.
막다른 곳에 몰려 입도 제대로 못 열고 있는 선수는, 오늘 양키스 타자들을 도륙해야 할 에이스였으니까.
“지금 이게 뭔 짓거리예요? 오늘 등판할 투수를 말로 두들겨 패는 사람들이 세상에 어딨어요?”
“아, Koo……!”
쭈굴쭈굴 모드일 땐 불쌍했는데, 갑자기 저렇게 밝아지니까 또 짜증나네.
“역시 너라면 이해해줄 줄 알았어. 난 그저 오늘 꼭 이겨야 한다는 마음으로 ‘이 미천한 타자 놈들아, 오늘은 무조건 선취점을 내야 할 것이야’라고 했을 뿐인데…….”
“지나가겠습니다. 마저들 패세요.”
“Koo?!”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할 놈이 어디 뚫린 입이라고 함부로 뱉어대.
보나마나 이나현한테 오늘은 무조건 이긴답시고 호언장담해놓고, 그 기세 그대로 타자들한테 들이받았겠지.
[저렇게 놔둬도 괜찮을까?]
‘괜찮아. CCTV에 음성 녹음은 안 들어갈 테니까.’
[아니 그 얘기가 아니잖아…….]
전날 경기에서 이래저래 좋은 소리를 못 들으며 가뜩이나 예민해져 있을 타자들인데. 먼저 벌집을 건드린 건 제리다.
물론 상대 에이스한테 타선이 묶이는 것도, 선발이 잘 던져주고도 패전을 떠안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긴 한데.
어제는 대체 선발이 기대를 뛰어넘는 활약을 보여주면서 타자들한테 원망의 화살이 죄다 쏠렸지.
‘이미 끝난 경기 잘 추스르고 다시 잘해보려고 하는데, 에이스란 놈이 저런 맥 빠지는 소리나 하니 안 빡치고 배겨?’
그러나 잠시 후.
1회 초, 홈팬들의 기대를 한몸에 받으며 마운드에 오른 제리가 첫 타자를 상대하고 나자.
생각이 아주 조금은 바뀌었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등판 앞둔 에이스를 그렇게 가혹하게 몰아붙이다니. 너무한 거 아니냐?’
[타짜도 니 손바닥 뒤집는 속도는 못 따라가겠다.]
선두 타자 스트레이트 볼넷.
물론 호들갑을 떨 만한 타이밍은 아니다.
27개의 아웃카운트 중 하나도 올라가지 않았으니, 경기는 아직 시작되지조차 않은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원래 반복 학습이 더 효과가 큰 법.
제리가 에이스로 탈바꿈하기 전, 중요한 경기에서는 어김없이 초반에 영점을 잡기 어려워했고. 이게 실점으로 이어질 때면 자연스레 경기를 말아먹는 흐름으로 넘어갔다.
[대체 뭐가 결정타였던 거지? 3분 컷?]
남자로서 타격이 없진 않겠지만. 솔직히 그거야 본인이 자신 있다면 아무렇지도 않게 넘길 수 있는 거고.
그보다는 이 말이 더 철렁하지 않았을까 싶다.
‘지 혼자 공 던지고 수비하고 다 해보라는 말.’
당연히 농담이었겠지만, 평소보다 예민한 상태였다면 진지하게 수비에 대한 걱정으로 연결될 수도 있고.
여기에 에이스로서의 책임감이 안 좋은 시너지를 일으켜서, 몸에 힘이 잔뜩 들어간 건 아닌가 싶었는데.
혹시라도 내 추측이 맞았다면.
‘이거 진짜 등신새끼 아니야.’
평소부터 삼진을 무더기로 잡는 유형의 투수라면 모를까.
결정구를 커터로 쓰면서 아웃카운트 중 땅볼 비중이 제일 높은 놈이 갑자기 삼진을 잡으려고 하니 역효과나 나지.
어떻게든 이닝이 끝나고 나면, 뻘생각 말고 땅볼 유도나 제대로 하라고 직접 말해주는 것도 괜찮겠지만.
사실 더 효과가 좋은 방법은 따로 있다.
따아아악―!
양키스 2번 타자가 초구를 후려치자, 1루와 슬금슬금 거리를 벌리던 주자가 2루를 향해 질주한다.
타격음과 타구의 속도나 방향을 토대로 하는 주루 플레이.
아무나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경우에 따라 한 베이스를 더 갈 수도 있는 커다란 메리트가 있지만.
“아웃!”
지금처럼 안타라고 확신한 타구가 그대로 야수 글러브에 들어가 버린다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고 만다.
“아웃!”
외야로 빠져나가려던 타구가 유격수 직선타로 둔갑했고.
그대로 1루를 향해 토스하며 더블 플레이의 완성.
이미 2루 베이스를 지나친 주자는 허망한 표정으로 바닥에 주저앉는다.
“Koo!!! Koo!!! Koo!!! Koo!!!”
“느그 팀 내야수들은 이런 거 못 하지?!”
“너네 유격수 10년 3억 달러 요구한다면서!!! 양심 좀 챙기라고 전해라!!! Koo가 4억짜리니까 최소 절반은 해야지!!!”
눈으로 보고도 믿기지 않는지 입을 떡 벌린 제리를 향해, 말없이 손가락 두 개를 들어 보였다.
투 아웃.
상남자 특징. 주절주절 떠들지 않는다. 행동으로 보여줄 뿐.
“스트라이크 아웃!!!”
삼진을 노려야만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하면, 그때부터는 절대 삼진을 잡을 수 없다는 건 야구계의 오래된 법칙.
그걸 내려놓고 나서야 제리의 공이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기 시작했다.
“Koo!!! 방금 수비 미쳤…… 컥!”
이닝을 끝내자마자 나한테 달려오는 제리의 등을 토닥여주는 척하며, 재빨리 옆구리에 좋아요를 먹여줬다.
상남자는 행동으로 보여준다니까.
* * *
한 명의 투수가 상대 타선을 철저하게 틀어막은 경기.
이 경우, 다음 경기에서는 다른 유형의 투수를 올리는 것이 도움이 된다.
타자들에게 전날의 잔상이 남아 타이밍을 맞추는 데 오래 걸릴 테니까.
그러나, 아무리 양키스가 전력이 탄탄한 팀이라지만 그것까지 고려하며 선발 로테이션을 짤 만한 여유는 없었다.
[뉴욕 양키스, 월드시리즈 2차전 선발로 데이브 타일러 선정!]
1차전에서의 아이작 란드리와 마찬가지로 패스트볼에 강점이 있는 투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피칭 스타일마저 비슷하지는 않다.
구속이 조금 느린 대신 밸런스가 잘 잡혀 있는 아이작에 비해, 100마일짜리 공을 심심찮게 던지는 대신 제구는 조금 떨어지는 편.
대신 일단 존 안쪽으로 들어오기만 한다면 살벌한 위력을 자랑한다.
설령 가운데로 몰리더라도 섣불리 건드리기 힘들 정도로.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다저스의 리드오프 조지 라모스는, 바로 그 공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배트 컨트롤과 선구안으로 정평이 난 타자인데도 타이밍을 제대로 맞추지 못할 정도의 패스트볼.
[자꾸 조지를 전투력 분석기쯤으로 써먹는 것 같은데.]
‘원래 이게 리드오프의 숙명이야.’
이번 포스트시즌에서 출전할 때마다 나름 긴 이닝을 소화한 데이브 타일러인데, 적어도 힘이 빠지지는 않은 모양.
일단 대기 타석에서도 좀 보긴 했지만, 패스트볼 타이밍을 가늠해보고 싶어서 초구는 기다리기로 했고.
“스트라이크!”
살짝 깊지 않았나 싶었는데, 주심의 손이 올라갔다.
그러나 지금 중요한 건 카운트가 아니라 타이밍.
이번에는 좀 전에 확인한 패스트볼 타이밍에 맞춰 배트를 휘둘러보기로 했고.
“파울!”
바깥쪽 멀찍한 코스의 공에 배트가 스치는 데 그쳤지만.
공 두 개를 지켜보고 나서 확신이 생겼다.
‘아이작보단 못하다.’
전날 아이작에게서 1타점 적시 2루타를 뽑아내자마자 들었던 생각은, 게스 히팅에 실패했으면 무조건 파울이라는 거였다.
볼 끝이 지저분한데다 까다로운 코스로 들어오는데, 그렇다고 해서 딱히 힘이 떨어지지도 않는, 소위 지랄맞은 공.
“볼!”
“파울!”
데이브 타일러의 공에 그 정도의 위력은 없었다.
골라내는 것도, 커트하는 것도. 전날보다는 훨씬 수월했다.
카운트는 1―2지만, 슬슬 레퍼토리가 떨어져 가는지 초조해 보이는 포수.
결국 믿을 건 패스트볼이라는 걸까.
포스트시즌 들어 더욱 날카롭게 벼려진 직감이, 몸쪽 패스트볼이라는 확신에 가까운 예상을 전해줬고.
따아아아아아아아악―!
“어?! 뭐야?!”
“넘어가라!!! 제발 넘어가!!!”
심상치 않은 속도로 날아가는 타구에 홈팬들이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배트를 휘두른 장본인인 나는 곧바로 전력질주에 들어갔다.
아무리 타이밍을 잘 맞췄다고 해도, 몸쪽으로 제법 깊숙이 찌른 100마일짜리 공으로 담장을 넘기기는 어려웠으니까.
2루에 거의 다가갔을 무렵, 이제야 중계 플레이에 들어가는 외야 상황을 확인하고는.
더 볼 필요도 없이 3루까지 내달렸고.
“세이프!”
아무리 전날 꽁꽁 묶였다 한들, 1사 3루라는 절호의 기회까지 날려먹을 정도로 타선이 맛이 가 있진 않았다.
따아아아악―!
3번 타자 R.H.의 큼직한 희생플라이에 홈을 밟으면서, 스코어 1대 0.
제리가 타자들에게 모진 핍박을 받으면서까지 요구하던 선취점을 만들어냈다.
“Koo……! 너 정말……!”
감격에 찬 눈으로 다가오는 제리.
물론 여기서 가만히 냅둬 봐야 오글거리는 말이나 할 테니. 대뜸 선빵부터 날려버렸다.
“니 말대로 선취점 냈다. 오늘 경기 졌다간 각오해라.”
그러자 우뚝 멈춰 서더니 유턴해 사라지는 제리.
좀만 더 건드리면 쭈굴쭈굴 제리가 될 테니, 일단은 여기까지만.
[상남자는 말로 안 하고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말한 지 10분도 안 지났…….]
‘경기 끝나고 내가 니 동생 얼마나 사랑하는지 행동으로 보여줄까?’
[넣어 둬. 사람 사이에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데.]
하여간 본전도 못 건질 거면서 까불기는.
* * *
원하는 코스에 제대로 집어넣은 공이 장타로 연결됐을 때 타격을 입지 않는 투수는 없다.
데이브 타일러도 그 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듯했다.
2회 말, 선두 타자에게 10구 승부 끝에 볼넷을 내주며 흔들림의 징조가 엿보였다.
다음 타자가 병살타를 때리지만 않았더라면 분위기를 확 가져올 수도 있었던 상황.
‘이제 어떡할 거냐?’
3회 말 다저스의 공격.
홈팀 덕아웃에서, 오브라이언 감독은 당당히 어깨를 펴고 데이브를 응시했다.
하위 타선에서 시작된 공격이지만, 2사 2루의 득점권 찬스.
타석에는 1회 말 3루타를 때려낸 구현기.
카운트는 3―1로 몰려 있는 상황.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때 구현기를 내보냈던 팀이 적지 않았다.
그리고 양키스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선택의 결과가 대부분 좋지 않았다는 것을.
“파울!”
관중석으로 타구를 날려보내면서, 이제는 풀카운트.
기분 탓일까. 새하얘졌던 데이브의 안색이 조금은 돌아오는 듯했다.
안타 하나면 추가점으로 이어질 수 있는 상황.
사인 교환이 길어지는 가운데, 구현기의 타격 준비 동작을 지켜보던 오브라이언 감독의 눈동자가 커졌다.
‘Koo, 설마…….’
지난 2년간 구현기와 함께해오면서 알아낸 버릇 아닌 버릇.
어떤 노림수를 가졌을 때, 그리고 그 노림수에 강한 확신이 있을 때, 타격 준비 동작이 묘하게 경쾌해진다고 해야 하나.
구체적으로 어떻다고 설명하기는 어려웠지만, 오브라이언 감독은 분명한 차이를 읽어낼 수 있었다.
쐐애애액!
풀카운트에서 승부를 위해 던지는 공.
공의 궤적을 확인하고, 구현기의 스윙이 눈에 들어온 순간.
오브라이언 감독은 결과를 확신했다.
‘커브를 결정구로 써먹던 투수한테, 잘 써먹지도 않던 커브를 던져?’
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악―!
타이밍을 빼앗기 위해 던지는 공은, 타이밍을 읽힌 순간 단순한 배팅볼이 되는 법.
경기 초반부터 단숨에 거리를 벌리게 된 기쁨도 잠시.
오브라이언 감독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첫 타석에서 3루타, 이번에는 홈런…….’
월드시리즈에서 지금껏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대기록의 가능성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