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97화 (197/200)

새로운 시대의 다저스(4)

월드시리즈는 모든 야구인이 동경하는 꿈의 무대다.

선수든, 코칭스태프든, 심지어 구단 직원이든.

자신이 그 팀의 일원이라는 것만으로도 다시 없을 영광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물론 팬들에게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메이저리그의 28개 팀은 이미 내년을 준비하는 중이고, 이제 남은 팀은 2개뿐.

올해의 마지막 야구를 보기 위해, 전 세계의 메이저리그 팬들은 이 시기가 되면 아쉬움을 한껏 품은 채 중계를 튼다.

즉, 월드시리즈에서 누군가가 대기록을 달성한다는 것은.

그 기록의 상대로서 모든 야구인과 야구팬들의 기억 속에 길이길이 남는다는 것을 뜻한다.

“하…….”

“아니, 무슨…….”

열기로 가득한 다저 스타디움에서 유일하게 침묵이 흐르는 원정 덕아웃.

보통 이럴 땐 베테랑이 나서서 분위기를 풀어줘야 할 타이밍이지만.

다들 입 여는 순간 독박이라도 쓸까 싶어 서로 눈치만 보기 바빴다.

“아웃!”

지금 막 내야 플라이볼을 처리하며 양키스의 14번째 아웃카운트를 올린 구현기.

그의 오늘 경기 성적은 2타수 2안타.

힛 포 더 사이클에서 가장 나오기 어려운 3루타와 그다음으로 어려운 홈런을 이미 때려낸 상태.

“저기, 아이작. 너는 그래도 같이 뛰어봤잖아. Koo 저놈 약점 뭔지 조금이라도 알려주면 안 될까?”

팀에서 공들여 키운 만큼 착실하게 자라 정규시즌 1선발 자리까지 차지했던 데이브 타일러.

그는 지금 내야에 자리잡고 있는 구현기의 얼굴만 봐도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포스트시즌 1선발 자리를 빼앗아 간 굴러온 돌에게 간절히 애원할 정도로.

“미안해, 데이브. 사실 내가 아메리칸리그로 온 것도 다 저 친구 때문이었거든.”

안타깝게도 아이작 란드리는 이런 상황에서는 딱히 도움이 되는 선수는 아니었다.

친절하지만 눈치는 부족한, 브레이브스의 앤드류 매닝과 비슷한 타입의 팩트폭력배.

결국 힘없이 자리로 돌아간 데이브 타일러의 머리에, 순간 불온한 생각이 스쳤다.

‘차라리 맞춰버릴까?’

오늘 구현기를 상대로 두 타석 연속 제구가 흔들렸으니, 몸에 맞는 공이 그리 어색해 보이진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따위 생각은 0.1초 만에 접어버렸다.

‘사람이 살고는 봐야지.’

다저스와 파드리스 사이의 벤치 클리어링은 선수들 사이에서 이미 유명하다.

주먹 한 방으로 사람을 기절시키는 미친놈이 있다고.

공 하나로 넉다운시키지 못하면 자기 목숨이 날아가는 정신 나간 도박은 하고 싶지 않았다.

* * *

진퇴양난에 놓인 양키스 선수들이 속을 끓이던 바로 그때.

다저 스타디움의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단장 집무실에서는, 다른 의미로 속을 끓이는 사람이 있었다.

“5년 보장 3,500만 달러. 옵션 포함 최대 4,000만 달러.”

마이크 올리버 단장의 반쯤 통보하는 투의 제안에 인상을 찌푸리는 한 남자.

그는 다저스의 유틸리티 야수이자, 주로 백업 유격수로 출장하는 채드윅 마틴의 에이전트였다.

성에 차지 않는다는 티를 팍팍 내는 그에게, 올리버 단장은 자신의 제안을 쭉쭉 밀고 나갔다.

“이 정도면 저희 쪽에서는 충분히 성의를 제시했다고 봅니다만.”

“아무리 그래도, 저희 고객은 1루수를 제외한 내야 전 포지션에 중견수까지 볼 수 있는 유틸리티 플레이어입니다. 실제로 시즌 중반 잠시 공백이 생겼을 때마다 잘 메워줬고요.”

“저희가 트레이드 거부권을 잘 안 주는 건 유명하지 않습니까? 그 조건을 포기하신다면 저희는 언제든 새 계약서를 준비할 의향이 있습니다.”

“그건…….”

올리버 단장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몸값을 올려보겠다고 나름 합리적인 자료를 준비해오긴 했는데, 이런 데서 초짜 티를 내다니.

한창 포스트시즌이 벌어지는 와중에도 내년을 준비해야 하는 것이 프런트의 숙명.

미래를 바라보고 키워야 할 자원들을 다년 계약으로 묶어두는 것도 그중 하나였다.

“계약 기간을 줄이거나, 아니면 연봉조정 때 다시 뵈어도 괜찮으니. 편하신 대로 생각해보시죠.”

선수가 팀에 대한 충성도가 높을 때, 에이전트는 협상에 난항을 겪는다.

물론 수십 명의 고객을 거느리는 대형 에이전시한테는 이런 배짱질이 먹히지 않지만.

돈보다 다른 걸 중요시하는 선수들은 대체로 대형 에이전시를 두지도 않는다.

와아아아아!!!

때마침 전면 유리창 너머, 팬들의 환호성이 강렬한 진동과 함께 전달된다.

에이전트를 굳이 월드시리즈 경기가 진행되는 이 타이밍에 부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극적인 상황은 사람의 판단력을 흐트러트린다.

지금의 이 환호가 오롯이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것만 같은 강렬한 착각.

선수는 이미 그 마력에 매료되어 있다.

남은 건 에이전트 역시 선수의 감정에 공감하도록 만드는 것뿐.

‘금방 끝나겠네.’

지금까지 어리숙한 에이전트를 상대로 몇 번이고 써먹었으며.

올해도 이미 챔피언십시리즈 때 ‘구단 입장에서’ 합리적인 계약에 합의하는 데 성공한 전략.

그러나, 습관적으로 설정해둔 경기 진행 상황 알림이 스마트워치에 떠오른 순간.

올리버 단장은 오늘이 지난번 협상 때와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5회 초 종료, 선발 제리 헤이즈택 현재까지 5이닝 2볼넷 1사구 무실점]

구현기의 힛 포 더 사이클 도전에 가려져 있었지만.

제리 역시 오늘 경기에서 허용한 3개의 출루 중 안타는 단 하나도 없었다.

그 사실이 뜻하는 바를 깨달은 순간, 올리버 단장의 심장이 흥분으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협상이고 뭐고, 경기나 보고 와서 하자고 했다가는 모가지가 날아가겠지?’

머릿속으로는 이런 발칙한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고민이 길어질 것 같다면 선수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눠봐도 괜찮습니다. 당분간은 테이블을 열어둘 생각이니까요.”

“그, 그러시다면…….”

겉으로는 여유를 가장하며 여전히 주도권이 자신한테 있는 양 행동할 수 있는 이 뻔뻔함이야말로.

초짜 에이전트가 감히 넘볼 수 없는 베테랑의 품격이라고, 올리버 단장은 스스로를 칭찬했다.

* * *

대기록을 써나가는 타자와 투수.

둘 다 칭찬받아 마땅한 일이지만, 이 둘이 기록을 써나가는 과정에서의 경기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아무래도 타자 쪽이 좀 더 여유롭다.

해당 타자가 타석에 들어가는 건 경기 중 많아야 5~6번 정도니까.

반대로 투수는, 중간계투라도 이닝 도중 올라오지 않는 이상 최소 연달아 3명의 타자를 상대하고.

선발투수의, 그중에서도 퍼펙트나 노히터 등 완봉을 전제로 까는 대기록이라면, 기록을 의식하기 시작하는 시점부터 쭉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

그렇다면 만약 그 두 가지가 동시에 진행 중이라면?

나도 태어나서 처음이라 몰랐는데, 최소한 소란스러운 분위기는 아니다.

“…….”

일단 노히트노런을 이어가고 있는 제리는 조용하다.

이미 작년과 올해 각각 퍼펙트게임을 한 번씩 달성했던 경험이 있는 제리.

작년이야 이미 머릿속에서 가물가물하고. 올해 리글리 필드에서 해냈을 때는 오히려 타자들을 쫓아다니며 괴롭힐 정도로 여유를 부리던데.

[그때랑 지금이랑 차이가 뭐지?]

‘그때는 미친놈이었고, 지금은 덜 미친놈이라는 거?’

[X나 가차없이 말하는 거 보소…….]

선두 타자 스트레이트 볼넷을 내줄 때까지만 해도, 제리가 여기까지 올 줄 아무도 몰랐겠지.

야구가 원래 그렇다.

‘오늘 좀 긁히는데’ 싶다가도 곧바로 안타를 허용하거나, ‘오늘은 좀 날리는데’ 싶어 영점 잡으려고 대놓고 집어넣은 공으로 삼진도 잡고, 뭐 그런 거.

그렇게 되는 대로 던져오다가, 뜬금없이 인생이 바뀔 수도 있는 기회 앞에 놓이는 셈이니. 얼마나 당황스럽겠어.

8회나 9회에 허무하게 깨지는 대기록이 괜히 많은 게 아니다.

“아웃!!!”

전에 완성한 두 번의 퍼펙트게임에서 노하우라도 생긴 걸까.

슬슬 힘이 빠질 거라 생각했는지 적극적으로 배트를 내는 양키스 타자들의 심리를 이용해 투구 수를 절약하며 8회 초를 막아낸 제리.

상위 타선부터 시작하는 8회 말 공격으로 이어졌다.

“Kooooooooooooo!!!”

“할 수 있어!!! 원래 니가 밥 먹듯이 하는 거잖아!!!”

“대체 선발한테서 4점 뽑아내고도 좋다고 빠개는 양키놈들한테 본때를 보여줘!!!”

이닝 교대와 함께 대기 타석으로 나가니, 반응이 아주 격렬하다.

‘그 기록’을 대놓고 입에 올리지 않는 게 기특할 정도로.

3루타, 홈런, 그리고 세 번째 타석에서의 단타까지.

사이클링 히트까지 남은 조각은 2루타뿐.

만약 9회 말에 내 타석이 돌아온다면, 제리가 역전을 허용하며 기록이고 뭐고 끝장났다는 소리니.

사실상 마지막 타석이라고 보는 게 타당하겠지.

“스트라이크 아웃!!!”

조지가 살짝 멀어 보이는 바깥쪽 공에 잠시 고개를 갸웃했지만, 순순히 물러난다.

6회 말 1사에서 안타를 때려내며 선발 투수를 덕아웃으로 돌려보낸 이후.

2승을 선점하겠다는 듯 3점 차에도 연달아 필승조를 올려 추가점을 막아낸 양키스였지만.

제리를 상대로 9회에 경기를 뒤집을 자신은 없었는지, 비교적 경험이 부족한 투수를 올렸는데. 일단 첫 대결은 투수가 웃었다.

‘오늘 선발이랑 비슷한 타입이었지.’

시속 100마일짜리 공을 던질 줄은 알지만, 커맨드와 내구도가 다소 떨어지는.

선발감이냐는 질문에는 살짝 물음표가 따라오는 투수.

잘 긁히는 날에는 지옥에서도 데려와야 할 좌완 파이어볼러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양키스 팬들을 지옥으로 보내버리는 투수가 와인드업에 들어갔고.

“볼!”

Booooooooooooo!!!

타자에게 유리한 출발을 하게 됐음에도, 홈팬들이 격한 야유를 쏟아낸다.

포수가 몸을 반쯤 내던져야 했을 정도로 멀찍이 던졌으니까.

‘필승조 아끼려는 게 아니라 핑계 대려고 올렸구만?’

양키스 중간계투진에서 탈삼진 1위와 스트레이트 볼넷 1위를 동시에 차지하는 선수이다 보니.

스트라이크존에 지지라도 묻은 것처럼 군다고 해도 할 말이 궁하진 않을 테니.

“볼!” “볼!”

기분 탓인지 심판마저도 조금은 힘이 빠진 채 쓰리 볼을 알린다.

중계 카메라가 양키스 덕아웃을 비춘 순간 팬들의 야유가 더욱 거세졌지만, 감독은 선글라스로 표정을 숨긴 채 묵묵히 팔짱만 끼고 있다.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이해는 간다.

설령 비겁하다고 욕을 먹을지언정, 한 경기에서 대기록 두 개를 동시에 내주는 다시 없을 장면은 만들지 않겠다 이거지.

그렇다고 그대로 따라줄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럼 어떡하게? 헛스윙이라도 하려고?]

다음 공이 아예 승부의 의지를 꺾어버릴 만큼 터무니없는 곳으로 들어온다면, 그것 말고는 방법이 없겠지만.

지금까지 던지는 걸 돌이켜보면 굳이 그럴 것까지는 없을 듯하다.

‘대놓고 바깥쪽으로 빼는 게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야.’

조그마한 사각형 존 안에 공을 집어넣는 것보다야 쉬울 수는 있다지만.

투수라는 족속은 애초에 스트라이크를 던지는 것이 지상과제인지라, 본인이 의식하지 못한 사이 존 가운데 쪽으로 조금씩 영점이 이동하기 마련이다.

원래부터 제구가 안 좋아서 ‘제발 가운데만 보고 던져라’라는 말을 수없이 들어온 투수라면 더더욱.

쐐애애액!

아무리 존 안에 넣을 생각이 없었다지만, 초구부터 지금까지 구종이며 코스며 전부 똑같이 가져가면 싫어도 눈에 익는다.

게다가 포수마저 식겁했던 초구 때와는 달리, 조금씩 보더라인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었으니.

올 시즌 들어 더는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게 된, 바깥쪽 흘러나가는 코스를 염두에 둔 스윙에 걸려드는 건 시간문제였고.

따아아아아아아악―!

못해도 100마일은 넘을 듯한 공을 밀어쳐서 만들어낸 벼락같은 타구.

3루수 키를 훌쩍 넘겨 좌측 담장 근처까지 굴러가는 동안, 속도를 평소보다 좀 천천히 끌어올리며 2루에 서서 들어갔다.

[Hyun―Ki Koo, 월드시리즈 사상 첫 힛 포 더 사이클 달성!]

경기를 중계하는 전광판부터, 객석 여기저기에 달린 소형 전광판까지.

온갖 곳에서 반짝거리며, 오늘 경기 첫 대기록의 완성을 자축하는 가운데.

“Koo!!! Koo!!! Koo!!! Koo!!!”

비명이나 괴성쯤으로 들리는 관중들의 목소리 가운데서, 유일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Koo 콜을 만끽했다.

흥분의 도가니가 가라앉기까지 한참 기다리는 동안 양 팀의 덕아웃을 눈으로 살폈다.

노히트노런이 진행중인 제리를 배려해 입은 다물고 있었지만, 격한 몸짓으로 축하를 보내오는 동료들.

그리고 거의 초상집이나 다름없는 분위기 속에서 코칭스태프들 틈바구니로 몸을 숨기는 양키스 감독.

‘그래, 차라리 안 보고 있는 게 낫지.’

[그건 또 뭔 소리냐?]

내가 누누이 말했지만, 상남자는 말로 안 하고 행동으로 보여주는 법.

대답하는 대신 주심이 경기를 재개하길 기다렸다가.

투수가 3번 타자 R.H.를 향해 초구를 던지는 순간 냅다 뛰어버렸다.

“세이프!”

아예 3루로 던질 생각조차 못 한 채 얼이 빠져 있는 포수.

지나간 일에서 아무것도 배우지 못하는 사람에게 미래는 없는 법.

내가 남의 팀 퍼펙트 깨트리고 나서도 도루했던 인간이라는 걸 간과한 대가는, 1사 3루의 추가 실점 위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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