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98화 (198/200)

새로운 시대의 다저스(5)

[Hyun―Ki Koo, 월드시리즈 사상 첫 힛 포 더 사이클 달성!]

구현기가 사실상 마지막 타석이 될 8회 말 2루타를 때려내며 힛 포 더 사이클을 완성한 순간.

괴성과 오열이 오가는 관중석과는 달리, 덕아웃은 박수와 짧은 감탄 말고는 조용했다.

평소엔 틈만 보였다 하면 놀려먹는 주제에 이럴 땐 또 배려해주는 동료들을 보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Koo!!! Koo!!! Koo!!! Koo!!!

그래봤자, 방음이 되는 것도 아니니 바깥에서의 소리는 전부 들려온다.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대기록이 코앞까지 다가왔을 때 그 상황에 최대한 몰입하려는 선수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제리처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애쓰는 선수도 있었다.

적어도 공격이 진행되는 동안은, 노히트노런까지 아웃카운트 세 개가 남았다는 현실에서 눈을 피하고 싶었던 제리.

그의 눈에 2루 베이스에 선 채, 시크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팬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주는 구현기가 눈에 들어왔다.

‘정말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건지.’

노히트노런과 힛 포 더 사이클의 동시 달성.

오늘 경기가 이 기적 같은 결말을 맞이할 수 있을지, 입소문을 듣고 찾아온 전 세계 메이저리그 팬들이 주목하는 가운데.

정작 제리의 눈은 풋내나던 시절의 하이싱글 A 홈구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이번에 단장이 한국 유망주들한테 돈 좀 풀었다던데?”

다저스 입단 첫해, 싱글 A에서 프로에 적응하던 시절.

제리 헤이즈택은 선수들이 올리버 단장의 전임자를 뒤에서 씹어대는 걸 멍하니 듣다가, 구현기라는 사람을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 새끼도 감 다 잃었다니까. 아시아 유망주한테 상위 라운더급 계약금 안겨줬다가 망하면 어떻게 감당하려고.”

“뭐 타자 쪽은 좀 친다던데. 좌완 90마일?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놈들 널려 있는데.”

“데려와야 한다고 징징댔던 건 스카우트 팀장이라던데?”

물론 뒤에서 주절대던 선수들은, 박도현이 입단 첫해 마이너리그를 폭격하고 확장 로스터로 빅리그까지 밟고 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입을 다물었지만.

제리는 이때 구현기라는 선수에게 처음으로 흥미가 생겼다.

‘고졸 투수 유망주한테 150만 달러를 배팅했다고?’

‘야구의 신이 재림했다’라는 극찬을 받은 박도현의 소꿉친구라는 점도 있어서.

구현기가 입단 2년 차에 하이싱글 A로 승격했을 때, 제리를 비롯해 많은 투수들이 관심과 견제를 동시에 보냈다.

‘어디 얼마나 잘하는지 한번 보자고.’

이 무렵의 제리는 조금 까칠했다.

더블 A까지 밟아봤지만, 아직 보완할 점이 있다는 평가를 받고 다시 하이싱글 A로 돌아왔으니까.

고졸 2년 차 선수를 여기까지 올려보낸 팜 디렉터의 판단이 옳았는지 지켜보겠다는 듯.

덕아웃에서 팔짱 끼고 눈을 부릅뜨는 선발 유망주들 사이에 끼어들었고.

따아아아아아아악―!

구현기는 하이싱글 A 선발 데뷔전에서 초구 리드오프 홈런을 허용했다.

“내 이럴 줄 알았지.”

“Park이 빅리그에서 잘나가니까 Koo 저놈도 빨리 긁어보고 싶었나 보네. 금방 내려가겠어.”

“초구 커브는 대체 누가 짜준 볼 배합이야? 포수한테 찍혔나?”

다른 선수들이 흥미를 잃고 자기들끼리 떠드는 가운데.

제리는 막 홈런을 허용한 구현기를 못 박힌 듯 쳐다보고 있었다.

관중석 상단에 떨어지는 대형 홈런을 얻어맞았는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포수가 던져준 공을 잡아채는 구현기.

그 모습을 보며, 제리는 더블 A에서의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초반에 빠른 템포로 아웃카운트를 수확하다가도, 장타 한 방에 위축되어 페이스를 완전히 빼앗긴다는 지적을 수도 없이 받았었지.

“스윙! 스트라이크!”

구현기는 자신과 정반대로, 조금 전의 바로 그 구종으로 초구 헛스윙을 유도해냈다.

타자를 압도하는 안정적인 피칭이랑은 거리가 멀었지만.

아무리 얻어맞고 실점을 하더라도, 스트라이크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스트라이크를 던질 줄 아는 투수.

5이닝 3K 7피안타 무사사구 3실점.

패전을 면하진 못했지만, 한편으로는 가능성을 보여준 구현기의 하이싱글 A 데뷔전이 끝난 직후.

“저, 저기, Koo라고 했던가……?”

그 무렵의 치명치명 제리는 아직 말투건 태도건 죄다 어설펐다.

자신을 수상한 놈 대하듯 쳐다보는 구현기에게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제리는 꼭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그, 오늘 커브가 계속 맞아 나가는 것 같던데. 혹시 왜 계속 고집했는지 물어봐도 될까?”

1회의 피홈런을 포함해, 안타의 절반 이상을 커브를 공략당하며 내준 구현기.

만약 커브 구사 비율을 줄였더라면, 그래서 실점을 하나라도 줄일 수 있었다면 패전투수가 될 일도 없었고.

코칭스태프한테도 제대로 눈도장을 찍었을 텐데.

구현기는 뭐 그런 걸 물어보느냐는 듯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왜 통역을 데리고 다니는지 의아할 수준의 영어로, 아주 정확하고 간결하게.

“언젠간 이 커브가 내 밥줄이 되어줄 테니까.”

* * *

[팬 여러분께 안내 말씀 드립니다. 경기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정숙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번 안내 말씀…….]

장내 아나운스가 귀에 들려오면서, 제리는 다시 현실로 돌아왔다.

잠깐 옛 생각을 했을 뿐인데, 긴 꿈을 헤매고 온 기분이었다.

그건 아마도 구현기가 예전과 너무 많이 달라져서겠지.

홈런을 맞든 말든 우직하게 커브를 던지던 초짜배기 투수가, 힛 포 더 사이클을 완성하며 2루에 나가 있는 타자가 될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아니, 그건 또 아닌가.’

그때나 지금이나, 구현기는 당장의 현실을 넘어 미래를 바라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심지어 블래스 신드롬에 걸려 선수 생활이 불투명해졌을 때조차도.

구현기처럼 재능 있는 투수가 커리어를 접는 건 너무 불합리하다는 생각에, 무작정 찾아갔다가 얼떨결에 라이브 배팅까지 진행했던 날.

그때부터 제리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거라는 걸 예감했었다.

그 시점이 예상보다 훨씬 빨랐고, 활약상 역시 예상보다 훨씬 강렬했던 것은, 전부 구현기의 재능 때문이겠지만.

구현기가 아예 아마추어 시절부터 타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야구팬들이라면 한번쯤 해봤을 상상을 제리 역시 해본 적 있었지만.

한 댓글을 읽고 나서 그런 생각은 머릿속에서 깔끔히 지웠다.

‘만약 그랬으면 다저스가 못 붙잡았을 거라고 했던가?’

처음부터 본인 적성을 찾아 타자로 활약했다면, 박도현과 구현기 중 하나는 잡기 어려웠을 테니.

만약 구현기가 다른 팀으로 갔다면, 자신과 만날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럼 마이너 시절 함께 어울려 다니며 멘탈 관리법을 배우지도 못했겠지.

구현기가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까지 올라오지 못했을 선수들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아드리안은 제구 난조를 극복하기 어려웠을 거고, 채드윅은 조용히 커리어를 마쳤을지도 모른다.

올해 불펜과 선발을 오가며 쏠쏠하게 활약해준 김희영은 피츠버그에 잔류했을 테고.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여전히 카일 캠프가 차지하면서, 팀 분위기를 망치는 것은 물론 벤과 조쉬가 넘어와서 활약해주는 일도 없었겠지.

전부 구현기의 타자 전향 이후 나비효과처럼 벌어진 일들.

그러니 제리에게 있어 구현기는, 남들이 상상만 해왔던 것들을 넘어, 상상조차 못 한 것들을 해내는 선수였다.

“세이프!”

바로 지금처럼.

힛 포 더 사이클 직후, 아무렇지도 않게 3루 도루를 해내는 또라이가 이 세상에 한 명 더 있다고 생각하면, 진짜 야구 할 맛 안 났을 거다.

따아아아악―!

R.H.의 희생플라이로 한 점이 더 올라가며 2사가 되자, 제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신을 배려해주느라 온전히 축제의 시간을 즐기지 못한 동료들.

그들에게 최고의 피날레를 선물해줄 시간이었다.

* * *

[LA 다저스, ‘노히트노런 & 힛 포 더 사이클’ 동시 달성! 투타 에이스가 만들어낸 기적!]

경기가 진행되는 동안, LA 경찰은 다급히 인력을 끌어모았지만, 흥분한 다저스 팬들을 통제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결과는 작년 월드시리즈 우승 때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개판의 향연이었다.

누군가는 신에게 감사를 빌고, 누군가는 선수와 감독을 찬양하고, 또 누군가는 그 모습을 직접 경기장에서 관람하지 못한 것에 분노하면서, 바다 건너의 누군가는 고농축 국뽕을 빨아대는 가운데.

뉴욕에서는 정반대의 의미로 거리가 뒤집히는 중이었다.

[볼넷 지시하면서도 2루타 허용, 명분과 실리를 동시에 잃은 양키스!]

양키스 감독이나, 나한테 2루타를 내준 투수는 진지하게 신변이 걱정될 정도로 격한 반응.

해체해라, 매각해라, 감독 짤라버려라, 뭐 이런 살벌한 말이 오가지 않았더라도, 양키스는 알아서 자멸하지 않았을까.

[(WS 3차전) LAD 9 : 0 NYY]

노히터는 타자들이 개망신당하는 기록이고, 힛 포 더 사이클은 선발투수가 욕을 먹는 기록이다.

포스트시즌에서는 둘 중 하나만 허용하더라도 치명상인데, 심지어 그 두 가지가 동시에 나왔으니.

야구가 지구상에서 사라지는 날까지 여기저기서 자신들이 당하는 모습을 틀어댈 걸 생각하면.

양키스의 분위기가 가라앉다 못해 처참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WS 4차전) LAD 6 : 1 NYY]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을 게 분명한 팬들의 민심은 양키스의 홈 어드밴티지를 지워버렸고.

시리즈 스코어 3대 1로 우승 트로피가 넘어가기 직전까지 몰린 양키스.

[(WS 5차전) LAD 2 : 3 NYY]

그나마 1차전에서 승리를 가져왔던 아이작 란드리가 다시금 8이닝 무실점이라는 인생 경기급 활약을 펼쳤고.

덕분에 양키스는 코인 하나를 더 얻었지만, 기대감을 드러내는 팬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마무리 투수가 1사 만루를 만들어놓고 내려오면서 결국 정규시즌 5선발까지 투입할 정도로 헐거운 뒷문도 문제였고.

6차전과 7차전이 열릴 무대는, 선수들의 귀환을 애타게 기다리는 팬들로 가득한 다저 스타디움이라는 것도 부담스러웠지만.

6차전의 양 팀 선발투수가 발표되자, 양키스를 묵묵히 응원하던 소수의 팬들마저 조용히 눈을 돌렸다.

제리 헤이즈택 대 데이브 타일러.

전설을 만들었던 2차전이 그대로 재현되었으니까.

* * *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면서도 달려들어야만 하는 상황이 있다.

월드시리즈 6차전 선발로 다시 한번 다저 스타디움에 돌아온 데이브 타일러는, 아마 지옥불에 몸을 던지는 기분이었을 거다.

그러나 양키스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3차전과 4차전에서 선발이 너무 일찍 강판당하면서, 대체 선발로 활용할 수 있는 롱릴리프 자원을 죄다 소모했다. 게다가 데이브 타일러의 그날 개인 기록 자체는 5이닝 3실점으로, 올해 월드시리즈에서 아이작을 제외하면 가장 훌륭했다.

제리가 직전 등판에서 100구를 훌쩍 넘긴 만큼, 최대한 투구 수를 늘려가며 일찍 내려보내는 전략을 가져온 모양이었지만.

따아아아아아아악―!

본인들이 내세운 투수가 버텨내지를 못하면, 상대 투수를 어떻게 공략한들 무용지물인 법.

데이브 타일러가 8대 0의 스코어를 만들고 강판당한 그 순간, 월드시리즈의 승자는 정해진 거나 마찬가지였고.

그때부터 감독님은 좌우 따위 신경도 안 쓰겠다는 듯, 포스트시즌 내내 기회를 많이 받지 못했던 투수들을 차례차례 마운드에 올렸다.

[(Live) NYY 3 : 9 LAD]

그럼에도 좁혀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벌어진 점수 차.

투수 대신 야수를 올려도 홀드는 얻어내겠다는 확신이 들 만한 점수답게, 8회 말 공격이 끝나자마자 팬들이 자리에서 껑충껑충 뛰어대며 외쳤다.

“Koo!!! Koo!!! Koo!!! Koo!!!”

우승이 확정되기 직전 이닝에, 팀의 에이스나 마무리를 올려 기념하는 ‘헹가래 투수’.

메이저리그에서는 은퇴 혹은 FA를 앞두거나 해서 결별이 확실시되는 특수한 상황이 아니고서야 잘 볼 수 없는 문화였지만.

감독님은 당연하다는 듯 내게 스위치 피처용 글러브를 건넸다.

“만약 이걸 가지고 서운해하는 선수가 있다면, 나는 그 사실을 단장님께 일러바칠 거야.”

“제가 서운하다면요?”

“그, 그건…….”

그럴 리가 있나.

아무리 지금 타자로서 최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는 해도, 내가 투수를 꿈꿨던 계기가 바로 이거였는데.

KBO에서 응원하던 팀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두던 해.

시즌 내내 선발과 불펜을 오가며 개고생하던 투수가 헹가래 투수로 나와,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던 바로 그 순간.

어린 시절 빛바랜 꿈 하나가, 이역만리 타지에서 이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웃!” “아웃!”

이미 죄다 교체되어 다른 이름으로 채워진 클린업 트리오 중 두 명을 빠르게 잡아내고 나니.

올해 메이저리그의 마지막 아웃카운트의 희생양이 될 타자가, 기가 잔뜩 죽은 채 타석으로 들어온다.

[기분은 좀 어떠냐?]

언젠가부터 경기 중 잔소리를 하는 대신, 한 명의 관객으로서 경기를 즐기기만 하던 박도현이 잠깐의 틈을 타 말을 걸었다.

‘나쁘진 않아.’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금보다 더 세차게 가슴이 뛰는 경험은 앞으로의 인생에서 몇 번 해보지 못할 것 같았다.

수없이 많은 이들이 인생을 야구로 비유했고, 나도 종종 그랬다.

끝날 때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점이라던가, 잠깐의 욕심이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만들어버린다던가, 하나하나 쌓인 것들이 나라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설명한다던가. 뭐 그런 것들.

사고를 당한 이후로는 그런 비유를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죽으면 내 인생은 그대로 끝이지만, 야구는 내가 사라지더라도 계속 이어진다는 점을 절실히 깨달았으니까.

그러나.

죽은 박도현과 다시 만난다거나, 내가 내야수로서 빅리그에 돌아온다거나, 뭐 이런 기적 같은 일들을 연달아 겪고 나니.

내년에는 내년의 야구가 돌아온다는 것이, 그리 서글프게 다가오지는 않게 되었다.

올해의 야구가 끝나는 걸 슬퍼하던 사람들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년의 야구를 기대하리란 것을 아니까.

박도현을 그리워하기는 해도, 그 빈자리를 슬퍼하는 사람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파울!” “파울!”

그 와중에 0―2의 카운트로 몰린 타자.

올해의 야구가 끝나기까지 남은 스트라이크는 하나뿐.

결정구가 무엇인지는 알지만, 어떤 코스로 날아올지는 절대로 읽어내지 못할 타자를 바라보며 와인드업에 들어갔고.

부우웅!

“스윙!!!! 스트라이크 아웃!!!”

내 손으로 올해의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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