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귀신 들린 천재 타자-199화 (199/200)

새로운 시대의 다저스(6)

[2038 월드시리즈 우승팀, LA 다저스!]

[GG, SS, MVP, 행크 애런 어워드… 사무국 직원, “차라리 Koo가 못 받은 상을 세는 게 더 빠를 것”]

[‘트리플 크라운 + 통산 2번째 퍼펙트’ 제리 헤이즈택, 만장일치로 사이 영 상 수상!]

[‘드래프트 15라운더의 기적’ 에드윈 니콜슨, 2038 NL 신인왕 선정!]

[‘사이 영 & MVP & ROY’ 3개 부문 동시에 석권한 최초의 메이저리그 구단 탄생!]

월드시리즈 우승과 해일처럼 몰려오는 수상 소식.

강렬한 기쁨도 잠시, 길지 않은 휴식 이후 바로 다음 시즌 준비에 들어갔다.

시스템 포인트 보상도 이미 작년에 몰아서 받았던지라 새로운 재능을 얻진 못했지만.

어차피 이젠 분석으로 어떻게 해볼 만한 수준을 넘어서기도 했으니 그건 상관없었다.

[LA 다저스, ‘야수 유망주 1위’ 조나단 라틀리프와 8년 9,000만 달러 대형 계약 성사!]

[연봉조정 피해 연장계약에 합의하는 다저스 선수들! 랜디 콘트레라스 4년 최대 37.5M & 채드윅 마틴 5년 최대 40M & 아드리안 빌라 7년 최대 105M에 사인 완료!]

다음 시즌을 준비하는 건 구단도 마찬가지였다.

훌리안이 소개해 준 개인 트레이너와 함께 몸을 만들어가는 와중에 들려오는 계약 소식.

팀의 차세대 동력이 되어줄 몇몇 선수들을 묶어두며 리빌딩에 시동을 거는 듯한 행보.

물론 스토브리그를 달아오르게 만드는 대형 영입이 없는 건 아니었다.

[(속보) LA 다저스, 개인 인스트럭터 훌리안 로페즈와 코치 계약 성사!]

코칭스태프와의 계약 내용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어차피 이 동네가 좁다 보니 알음알음 다 들린다.

듣기로는 역대 다저스 코칭스태프 사상 최고 대우로 데려왔다나.

[이제는 새로 호구 잡을 놈 찾아보겠다더니…….]

‘그 호구가 우리 단장님이었을 줄이야.’

스프링캠프에서 다저스 유니폼을 입은 훌리안을 직접 만나고 나서도 실감이 잘 안 났다.

“왜 여기 계십니까?”

“뭐가. 나는 코치 하면 안 된다 이거냐?”

안 되는 거야 당연히 아닌데. 어울리지가 않으니까 그렇지.

한 철 일하고 나머지는 쉬던 양반이, 시즌 내내 선수단과 동행하는 코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빅리그 선수들한테 나한테 하던 것처럼 대하면 난리 날 텐데.

마이너 유망주라면 모를까, 자기 방식이 정립된 빅리거들한테는 강압적인 방식이 안 통하니까.

“쓸데없는 걱정 하고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 이제는 나도 스타일을 좀 바꿔볼 생각이었으니까.”

이어지는 스프링캠프에서 훌리안은 정말로 자기가 한 말을 지켰다.

스프링캠프 초반, 초청선수와 빅리거를 가릴 것 없이 무서운 기세로 배움의 요청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단 한 번도 호통을 치거나 험한 소리를 내뱉지 않았으니까.

“순서가 그게 맞아? 대체 그런 폼으로 지금까지 타격은 어떻게 한 거냐? 밸런스? 밸런스는 허리 작살난 뒤에 재활병원에서 밸런스볼 가지고 놀 때나 찾고. 다른 거 다 치워두고 상체부터 교정해야겠네.”

차라리 쌍욕을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사소한 문제는 있었지만.

원래 모든 선수를 만족시키는 코치는 존재하지 않는 법이다.

* * *

훌리안의 영입은 예상한 것 이상의 효과를 발휘했다.

우선 리빌딩의 코어가 되어줘야 할 젊은 타자들의 성장세가 폭발했다.

인터뷰에서의 모습만 보고 훌리안을 넉살 좋은 노인네쯤으로 생각했던 몇몇 선수들이 생각보다 더러운 성질머리에 놀라기는 했지만.

이 사람의 말만 들으면, 나와 박도현만큼은 아니라도 한 타자로서 한 단계 성장할 수 있을 거란 믿음의 힘은 강력했다.

[(속보) 랜디 오늘 연타석 홈런 날리면서 시즌 40호!!!]

└ 작년에 그리도 선풍기질을 하더니 올해 드디어 터지네;

└ 얘 유망주 때부터 잘될 거란 말 많았는데 왜 이제야 터졌지?

└ 선구안은 나쁘지 않은데 야구 지능이 너무 부족해서 개고생했다고 훌리안이 다 까발리더라…….

└ 아무튼 요새 장기계약 박아둔 놈들 펄펄 날아다니는 거 보니 안 먹어도 배가 부르다!

└ 너 그거 병이야

└ 야구 자체가 질병인데 굳이 신경 쓸 필요 있을까?

새로이 주전 자리를 차지한 선수들의 약진도 눈여겨볼 만했지만.

빅리그와 트리플 A를 오가던 AAAA리거들 역시 타격이 상당히 개선되면서, 타자 뎁스가 어마어마하게 두꺼워졌고.

이들 중 일부를 정리해 선발투수를 보강한 결과.

[스트라이크 아웃!!! 마지막 이닝을 확실하게 정리하기 위해 에이스 제리 헤이즈택을 올린 다저스의 승부수가 통했습니다!!! 리빌딩을 선언한 지 고작 3년 만에 다시 정상에 오르는 다저스입니다!!!]

훌리안의 세심하면서도 살벌한 코칭을 받으며, 마지막 우승이었던 2038시즌 이상의 무게감을 자랑하게 된 타선과.

다니엘 슈미트와 호세 리카르도의 공백을, 부상에서 복귀한 모리츠 슈타인마이어와 꾸준한 노력 끝에 선발 전환에 성공한 션 언더우드로 채운 선발진을 자랑하며.

마침내 다시 한번 월드시리즈 트로피를 LA로 가져올 수 있었다.

“저기, 도아야.”

우승 직후, 선수 가족들이 그라운드로 나와 함께 기쁨을 나누는 시간.

주변에서는 다들 행복한 웃음이 넘쳐나는 가운데, 나 혼자 긴장으로 얼굴이 딱딱하게 굳은 채 도아 앞에 섰다.

“전에도 말했지만, 다시 한번 졸업 축하해. 음, 그러니까. 지금 우리 타이밍이 상당히 괜찮은 것 같아. 너는 졸업을 했고. 나는 우승을 했고. 우리가 같이 산 지 꽤 지나기도 했고. 그동안 큰 문제도 없었고, 음. 그러니까 내 말은…….”

내 앞에 선 채 수줍게 웃고 있던 도아의 얼굴이 실시간으로 굳어진다.

박도현의 표정도 썩어 있었는데, 이 새끼는 원래부터 내가 도아랑 함께 있을 때마다 그랬고.

“오빠 종종 말이 빨라진다 했더니 그게 다 긴장해서 그런 거였구나?”

[잘하는 짓이다 아주.]

예전에 처음 고백했을 때도 이런 식으로 혼났던 것 같은데.

심지어 차 안에서 단둘이 있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대놓고 이쪽을 쳐다보는 선수들과 방송국 카메라로 가득하고.

“자. 여기.”

다행히도, 도아는 선뜻 왼손을 내어주었고.

네 번째 손가락에 미리 준비해 온 반지를 끼워주는 순간, 사방팔방에서 박수와 휘파람이 쏟아졌다.

“yeahhhhhhhhh!!!!!”

“Koo도 드디어 유부남이 되는구나!!!”

“그냥 하지 말라고 했을 때 말을 들었어야지!!!”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그 와중에 끝까지 헛소리하는 동료들의 얼굴을 체크해 두면서.

팬들이 Koo 콜과 똑같은 리듬으로 보내주는 키스 콜에 맞춰, 앞으로는 아내가 될 여자를 향해 얼굴을 가져갔다.

* * *

처음엔 결혼이라는 게 잘 실감이 나지 않았다.

애초에 같이 살고 있기도 했고. 서류를 내고 결혼식을 여는 등 이래저래 오프 시즌을 바쁘게 보내다 보니, 프로포즈 때의 두근거림도 어느샌가 사라져버렸지.

선수로서 하는 일이 매년 크게 달라지지도 않았으니 더더욱.

그러나, 살아가면서 변하지 않는 일은 없는 법이다.

사람 사이의 관계든, 선수로서의 역할이든.

“하부이. 하부이.”

“어이구, 우리 준오 왜?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 응? 응?”

유럽 돌아다니며 축구나 보시겠다던 아버지는 도아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태도를 싹 바꿨다.

LA에 집까지 구하더니 허구한 날 찾아오시더라.

“나도 태오 돌보느라 정신없는데, 아버님이 많이 도와주셔서 감사하지.”

아무리 평소 잘해주신다고는 해도 시댁 식구인데, 불편하지는 않을까 걱정했지만.

칭얼대는 둘째를 안고 토닥이던 도아는 다행히도 그렇게 말해줬다.

거의 방치하다시피 자랐던 기억이 생생한 나로서는 조금 복잡한 기분이긴 하지만.

한국 이름으로는 구준오와 구태오. 미국식 이름은 주노와 테오.

연년생으로 태어난 두 아들을 도아에게 맡겨둔 채 미국 전역을 떠돌아다녀야 하는 것은 메이저리거의 숙명이다.

매일 함께 지내는 다정한 아빠는 못 되더라도, 아이들에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겠다는 각오로 보내온 하루하루.

그렇게 타자 전향 이후 8년이 지나, 장기계약의 반환점을 돈 시점.

다저스는 나에게 새로운 역할을 주문했다.

“앞으로는 1루 위주로 출전하는 건 어떻게 생각하나?”

몇 년 전 1라운더로 뽑았던 고졸 유격수가 공수 양면으로 미친 듯이 성장하며 빅리그의 문을 노크하기 시작했는데.

신체 사이즈의 한계상 유격수 말고는 다른 포지션을 맡기는 게 부담스럽다나.

‘클레망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박도현이 등장하면서 다저스의 주전 유격수 자리를 넘겨줬던 클레망 파로를 오랜만에 떠올렸다.

물론 클레망은 부상 후유증으로 수비력이 하락한 상태였기에, 여전히 수비적으로 경쟁력이 있는 나하고는 사정이 다르긴 하지만.

어쨌든 당장은 몸이 편해져서 좋은데, 뭔가 좀 센치해지는 기분.

“괜찮겠어, 친구? 사람들이 널 두고 Koo의 후계자가 되느니 마느니 떠들고 있던데.”

그래서였을까.

막 콜업되어 정신없이 다저 스타디움을 누비다, 겨우 한숨 돌리던 유격수 유망주를 향해 장난스럽게 말을 걸었다.

“괜찮습니다. 제 몸은 LA에 있지만 심장은 애너하임에 있으니, Koo의 후계자를 자청할 생각은 없으니까요.”

돌아오는 대답에 정신이 아득해질 뻔했다.

이게 그 슈퍼 울트라 MZ 세대인지 뭔지 하는 그건가.

“그럼 그건 됐고. 지금 에인절스 유격수는 밀어낼 만한 수준인지 좀 이따 지켜봐도 되겠지?”

에인절스 홈구장 근처 오렌지 카운티에서 태어나고 자랐다는 유망주.

이 솔직한 친구를 곁에 끼고 다니며 사랑의 가르침을 듬뿍 주입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 * *

제리 헤이즈택의 8년짜리 계약에는 3년 차 옵트아웃 조항이 있었지만.

틈만 나면 다저스의 에이스를 자청하는 제리에게 그게 아무 의미 없다는 건 모두가 짐작하고 있었을 거다.

장기계약 마지막 해, 제리의 나이는 만 35세.

아무리 슬슬 에이징 커브가 우려되는 나이라고 할지라도, 지금껏 팀에 헌신해온 걸 생각하면 3~4년짜리 연장계약을 충분히 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 역시 모두가 짐작했을 거다.

“올해가 저의 선수로서의 마지막 시즌이 될 겁니다.”

정작 제리 본인이 시즌 개막 전 이렇게 선언하기 전까지는.

가긴 어딜 가느냐고, 너무 이르다고 절규하는 다저스 팬들은 물론.

심지어 제리한테 지독하게 당해온 다른 팀 팬들마저도 입맛을 다실 정도로 뜻밖이었던 은퇴 선언.

각계각층의 다저스 관계자들이 설득에 나섰고, 그해 월드시리즈가 끝난 직후 타 구단에서 백지수표를 든 채로 몰려왔지만.

제리는 이 한마디로 그들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선수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영광은 다 누렸습니다. 이제는 좋은 남편과 좋은 아버지로서 살아가고 싶어요.”

가족과 함께하기 위해 그만두겠다는데, 여기다 대고 무슨 말을 더 하겠어.

예전이었다면 제리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아버지가 되고 나니 알겠다.

자신이 돈을 많이 벌고, 훌륭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핑계삼아 가족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건 아닌지, 그런 불안에 사로잡히는 마음을.

게다가 은퇴한다고 해서 야구 인생이 끝나는 것도 아니지.

당장 제리처럼 가족 문제로 은퇴를 택한 로버트도, 아들 둘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다저스의 더블 A 투수 코치로서 프로 무대에 돌아갔으니까.

팬들 입장에서야 서운할 수 있어도, 결국은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자신들이 사랑하는 선수가 영원히 그라운드를 떠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이 환상에 불과하다는 걸, 그들 스스로가 가장 잘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그건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 * *

[타석에 이 선수가 들어선 순간, 다저 스타디움의 관중 전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보냅니다.]

[뭐 하세요? 얼른 일어서십쇼. 중계고 뭐고 일단 박수부터 쳐야 할 것 아닙니까. 전설의 마지막 가는 길을 배웅해야죠.]

[그래도 할 일은 해야 하니까 가만히 좀 계시죠. 타석에는 Hyun―Ki Koo. 은퇴 경기인 오늘, 전성기 타순이었던 2번 타순에 배치되었습니다.]

[포지션은 지명타자. 내셔널리그에 좀 더 일찍 지명타자제도가 도입되었다면 Koo의 은퇴가 조금은 미뤄졌을까 싶어 아쉬울 따름이네요.]

[아마 그러진 않았을 겁니다. Koo 역시 본인의 절친한 친구이자 다저스의 에이스로 군림했던 제리 헤이즈택과 같은 이유로 은퇴를 선택했으니까요.]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죠. 클로저 조쉬 먼로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마무리 투수로 전향하겠다고 했을 때, 다들 농담이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그런데 올해 성적이 어땠죠? ERA 0.73에 37세이브, 블론과 패전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게 41살짜리 선수의 성적이라고 하면 누가 믿겠습니까?]

[제발 진정 좀 해요. 아무튼, Koo는 마무리 전향 이후 영원히 유일무이로 남을 거라 여겼던 기록 하나를 보란 듯이 또 해냈죠. 커리어 통산 102승 134홀드 104세이브. 톰 고든 이후로 처음으로 등장한 100―100―100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타자로서의 Koo를 뛰어넘기는 힘들 겁니다. Park이 남긴 어지간한 단일시즌 기록은 물론, 거의 모든 누적 기록의 순위표에 자기 이름을 올렸으니까요.]

[만약 타자로 커리어를 시작했다면 메이저리그의 역사가 바뀔 수도 있었던, 그러면서도 은퇴 직전 해까지 투타 양면으로 성적을 내온 선수. 투수가 모자를 벗어 그를 향해 경의를 표하는군요.]

[그러나 예의는 여기까지입니다. 아무리 정규시즌 순위가 확정되었다고는 해도, 전설의 은퇴 경기에서 영영 박제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요.]

[만약 거의 1년 만에 올라온 타석에서 볼넷으로 출루한다면 그건 그 나름대로 볼거리…… 였겠지만 쳤어요!!! Koo가 배트를 던졌습니다!!! 타구의 종착지는 더 볼 것도 없습니다!!! Koo가 겁도 없이 몸쪽 승부를 들어오려던 젊은 투수에게 메이저리그의 전설은 아무나 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몸소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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