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박도현은 구현기와 계약을 맺고 그의 커리어 내내 곁에서 지켜보면서도,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이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말하지 못한 것과 말할 수 없었던 것들이 섞여 있었다.
우선 자신이 앞서 보고 온 미래의 일을 발설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였다.
계약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 다시 자신과 만나기 전으로 돌아온다는 페널티를 계약자에게 설명할 때면, 떡상할 주식이나 코인 종목, 파워볼 번호 등을 요구하는 깜찍한 친구들이 이따금 나왔다.
알려줘서도 안 되지만, 애초에 알려줄 수도 없었다.
무엇을 위한 장치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약 파기 후 과거로 돌아올 때마다 세상은 조금씩 바뀌어 있었다.
어쩔 땐 포스트시즌의 자리가 12팀으로 늘어나기도 하고, 내셔널리그에 지명타자제가 일찌감치 도입되기도 하고, 심지어 2020년대 초반 전세계를 뒤흔든 팬더믹이 일찌감치 종식되었던 세상도 있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계약을 맺은 구현기가 아직 투표 대상이 되지 않았을 뿐, 사실상 명예의 전당 입성을 확정지은 지금의 세계에서는.
그의 주변을 둘러싼 사람들 역시, 지금의 삶을 계속 이어나가게 될 것이다.
잘되길 바랐던 사람이 충분히 잘되고, 거슬렸던 사람이 몰락한 이번 회차였기에.
박도현은 그 사실이 조금 기뻤다.
* * *
단적으로 예를 한 가지 들자면.
자신이 구현기와 계약을 맺기 전 모든 회차에서, 훌리안 로페즈는 제때 암을 발견하지 못했다.
구현기와 훌리안이 동행하면서, 정녕 스승의 임종을 지켜봐야만 하는가 싶어 항상 마음이 무거웠는데.
“그 나이대에 그렇게 급격하게 살이 빠지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부자연스럽더라니까.”
눈썰미가 좋은 구현기 덕분에, 훌리안이 암으로 세상을 떠나는 미래는 사라졌고.
덕분에 다저스에 코치로 부임해, 타선이 한층 살벌해지는 새로운 미래가 생겨났다.
“저기, 코치님. 지금 그 말씀은 조금 강압적인 것 같은데요? 저도 자존심이 있는 놈이거든요.”
물론 조금은 낡은 지도 방식 때문에, 이따금 반항기를 드러내는 선수가 없지는 않았지만.
“자존심? 그거 좋지. 재능도 같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연장 계약을 거듭하며 5년간 일한 끝에 완전히 은퇴하는 그 순간까지.
훌리안이 선수들한테 입으로 밀리는 일은 단 한 번도 없었다.
* * *
현역 생활 연장을 위해 트레이드를 요청했던 클레망 파로는, 원하던 대로 컵스와 2년 계약을 맺었고.
계약이 끝난 직후 미련 없이 은퇴를 택했다.
이듬해 5월, 볕 좋은 어느 날.
시카고 컵스를 홈으로 불러들인 다저스는, 클레망 파로의 은퇴식을 열어주기 위해 1일 계약을 맺었다.
“음, 정말 만감이 교차합니다. 제 욕심으로 떠나온 팀에서 이토록 반갑게 맞아 주실 줄은 감히 기대도 하지 못했거든요. 제가 받은 것만큼 팬 여러분들께 돌려드리는 선수였던가 싶기도 하고…….”
컵스 이적 이후, 로버트 못지않게 불같은 성격의 에이스 A.D. 존슨과 툭하면 정신이 빠지는 젊은 내야수들 사이에서 시달리던 클레망.
볼살이 훅 빠진 얼굴로 눈물을 글썽이는 그 모습에, 고작 2년 더 뛰려고 원클럽맨을 포기했느냐고 투덜대던 팬들도 입을 다물었다.
“저기, Koo. 내가 은퇴하고 나서 시력이 안 좋아진 건가? 너 지금 울어?”
“그럴 리가요. 잘못 본 거겠죠.”
“아니, 지금 눈이 완전 빨간데…….”
“꽃가루 알레르기인가 보네요. 미국이 언제부터 이렇게 소나무를 많이 심었지?”
신인 시절부터 물심양면으로 자신을 챙겨준 선배의 은퇴식.
박도현의 영구결번식 이후, 구현기가 경기장에서 처음으로 눈물을 보인 순간이었다.
물론 그게 경기에 딱히 영향을 준 것은 아니었다.
따아아아아아아아악―!
“에이 X발, 못 해 먹겠네.”
구현기에게 멀티 홈런을 허용하자마자, 이날 선발 A.D. 존슨이 마운드에 글러브를 패대기치는 해프닝이 벌어진 것 말고는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끝난 은퇴식.
그로부터 몇 년 후.
쿠퍼스 타운에 LA 다저스 모자를 쓴 클레망 파로의 동판이 추가되었다.
* * *
구현기와 제리 헤이즈택을 거액의 계약으로 묶어두며 샐러리 캡에 여유가 사라진 다저스였지만.
차라리 사치세를 내면 냈지, 미래를 이끌어갈 자원을 붙잡는 데 돈을 아끼지는 않았다.
그리고, 다저스가 장기계약으로 붙잡은 핵심 유망주 4명은 구단의 기대에 제대로 부임하면서.
일부 팬들에게 ‘F4’로 불리는 최강의 라인업이 탄생했다.
“오, 오늘도 고생했어, 브레이든. 좀 전엔 미안해. 갑자기 커브가 말을 안 들어서…….”
마운드에서 꾸준히 두들겨 맞은 끝에, 조금씩 새가슴이 치료되면서 끝내 불펜 서열 1위인 마무리 자리까지 올라간 조쉬 먼로.
“괜찮아. 언제 어떤 상황에 올라가도 편하게 공 던지는 투수는 이 세상에 Koo밖에 없잖아. 너한테 그 정도 기대는 애초에 하지도 않았어.”
주전 포수 자리를 차지하고부터 타격 포텐셜이 만개했지만, 억눌려 있던 독설가 기질까지 눈뜨고 만 브레이든 돌턴.
“그렇지. 사실 나도 만약 Koo가 사고만 당하지 않았다면 투수로서 올타임 레전드가 됐을 거라고 생각해. 그 근거를 설명하려면 내가 플로리다에서 Koo한테 처음 커브를 배웠을 때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는데…….”
아드리안 빌라가 이적한 뒤 남은 2선발 자리를 완벽하게 채워줬지만, 구현기를 향한 집착마저 물려받은 에드윈 니콜슨.
“Koo?! 그러고 보니까 너네 Koo 아들들 리틀야구 팀에서 뛰는 영상 봤어?! 우리가 건강 관리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Koo 주니어랑 같이 뛸 수 있을지도 몰라!!!”
툭하면 이야기를 탈선시키는 주제에, 목소리가 엄청 커서 대화의 주도권을 차지해버리는 주전 3루수 조나단 라틀리프.
참고로, 이들을 부르는 F4의 F는 ‘Fool’의 약자였다.
구현기가 이들 중 한 명에게 캡틴 자리를 넘겨주지 않고 은퇴하는 그날까지 버텼던 이유였다.
* * *
다저스의 F4는 팀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선수들이었고, 현대야구에서는 그토록 보기 드물다던 원클럽맨으로 커리어를 보냈지만.
아무리 빅마켓 팀이라도, 2037시즌부터 2038시즌까지의 우승 주역들을 전부 붙잡을 순 없었다.
[랜디 콘트레라스, 6년 1억 3500만 달러에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로 FA 이적!]
연봉조정 기간을 커버하던 다저스와의 4년 계약이 끝난 후, 랜디가 향한 팀은 다름 아닌 브레이브스였고.
이적 첫해부터 42홈런을 때려내는 괴력을 선보이며, 브레이브스의 공격력을 책임지는 개노답 삼형제 2기의 출범을 알렸다.
물론 성적과는 별개로, 팀의 분위기가 항상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대체 다저스만 만나면 왜 이러는 거지……?”
포스트시즌 등 중요한 경기에서 번번이 구현기에게 물을 먹었던 경험이 독이 되었던 건지.
다저스전에서 번번이 삽질하던 넬슨 데스파이네가 한탄하듯 중얼거렸고.
“괜찮아, 넬슨. 다저스 상대로 퍼펙트게임만 2년 연속으로 당했던 팀도 있는데. 우리 정도면 양반이지.”
마음씨는 착하지만 눈치는 부족한 편인 앤드류 매닝이 그렇게 말하며 넬슨의 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이 말이 넬슨 데스파이네에게 위로가 되는 일은 없었다.
다음날 브레이브스 타자들은 에드윈 니콜슨에게 거짓말처럼 퍼펙트게임을 헌납했다.
[‘2년 연속 퍼펙트 당했던 컵스보다는 낫다?’ 익명을 요구한 브레이브스 선수가 제보한 캡틴의 한마디,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다!]
그리고, 전날 두 사람의 대화는 곧바로 기사회되고 말았다.
다저스 팬들은 제목을 읽자마자 ‘이 새끼 아직도 버릇 못 고쳤구나’ 싶어 조금은 반가워했다나.
‘그냥 때려치울까?’
그렇게 팀 분위기가 혼돈과 파괴를 오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브레이브스의 타격 코치이자, 최근 감독 선임설까지 나오던 뤼카 스킬라치는 탈주를 진지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 * *
카일 캠프는 파드리스에서 지명할당된 이후 그 어떤 팀도 자신을 찾지 않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X발 협상을 어떤 식으로 하길래 아무 계약도 못 물어 와?! 그냥 꺼져! 위약금 낼 테니까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네, 감사합니다. 계약 해지서는 팩스로 보내면 될까요?]
“뭐, 뭐?!”
[저희도 더는 못 해 먹겠네요. 위약금 그거 얼마 되지도 않는 돈, 위로금으로 생각할 테니 계약이나 해지해주시죠.]
그나마 자신을 챙겨주던 에이전시와도 결별한 이후. 어찌어찌 개인 에이전트를 고용해 독립리그에서 커리어를 이어가던 도중.
바다 건너 한 팀에서 그를 대체 용병으로 영입하겠다는 의사를 타진했다.
“저희 대전 호크스에서는 캠프 씨의 안정적인 수비 능력에 많은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용병 타자가 시즌 초반부터 드러눕고,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개판이 된 내야진을 정리하기 위한 영입이었지만.
대전의 야구팬들은 물론,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야구팬들이 반기를 들었다.
과거 인종차별 발언을 한 주제에 이제 와서 동양인 돈이 아쉽냐는 조롱은 기본에, 구현기와의 대립이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기도 했다.
입단 기자회견장에서부터 싸늘하기 짝이 없는 분위기.
당황한 프런트 관계자는, 절대 해서는 안 될 한마디를 하고 말았다.
“팬 여려분, 최고의 유격수를 영입했습니다.”
카일 캠프가 오래전 같은 말을 들으며 텍사스로 향한 한 선수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는 것은,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 *
사실, 박도현은 구현기와 크리스토퍼 엘리엇이 엮이는 걸 껄끄럽게 생각했었다.
회차마다 차이는 있었지만, 거의 모든 경우 크리스토퍼는 선수로서 그리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음주운전이나 데이트 폭력, 사이비 종교 연루 등등.
박도현을 향한 열등감과 자격지심을 해소하지 못했던 게 화근이었는지, 본인의 재능을 썩히고 말았으니까.
[(속보) 크리스토퍼 엘리엇, 3년 2,500만 달러에 LA 다저스 합류! 연봉 2배 이상 보장한 연장계약 거절당했던 필리스는 ‘패닉’]
그 감정을 조금 다른 방향으로 발산하게 된 이번 삶에서는, 인터뷰장 외에 다른 곳에서는 사고를 치지 않았고.
결국 장기계약을 끝까지 마친 후 다저스로 이적하기까지 했다.
“내가 졌다, Koo. 너를 필리스로 끌어들이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결국 실패했으니. 내가 여기로 오는 수밖에.”
“노력? 무슨 노력?”
“후후후. 괜히 부끄러워할 필요 없어. 우리 사이에 그런 감정은 필요없으니.”
“아니 뭔 개소리야. 알아듣게 말을 해야지.”
이 시점에서 구현기는 이미 1루수로 전향했고, 크리스토퍼 역시 내야 유틸리티로 활용될 수밖에 없었지만.
꿈에도 그리던 선수와 함께 뛴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뻤던 건지, 이적 후 3년 동안 매년 커리어 하이를 새로 쓰는 바람에 필리스 팬들은 뒷목을 붙잡았다.
* * *
제리와 이나현 부부는 슬하에 딸 하나와 아들 하나를 뒀다.
제리의 아들 한스는 구현기의 큰아들 구준오와 동갑으로, 같은 학교 야구팀에서 활약했다.
다저스의 에이스였던 아버지의 뒤를 따라 멋진 투수가 되기를 바라는 팬들이 많았지만, 정작 한스가 선택한 포지션은 포수였다.
“포수를 선택한 이유요? 이건 비공개로 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주노만큼 좋은 공을 던지긴 어려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공을 잘 받아내기라도 해보자는 생각에 포수를 시작한 건데. 이게 또 재미있어서요.”
마찬가지로 전설적인 내야수였던 구현기의 아들 구준오가 투수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의아해하는 팬들 역시 많았다.
“이거 진짜 밝히시면 안 되는데, 사실 제가 투수랑 타자 둘 다 해봤잖아요. 근데 한스가 공을 받아주면 던지는 게 너무 편안해지더라고요. 볼 배합도 다 짜 주고, 아무리 튀는 공이라도 다 막아주고. 그래서 이쪽으로 나가야겠다 싶었죠.”
물론 주니어 야구를 담당하는 기자에게 소년들의 비밀을 지켜줄 의리 따위는 없었고.
서로를 향한 속마음이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두 사람은 한동안 어색한 시간을 보내야 했다.
* * *
“아버지, 야구 에이전트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 구태오의 질문에 구현기는 조금 당황했다.
사실 형과 비슷한 시기에 야구를 시작한 둘째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두고 공부에만 매진했으니까.
신체 조건도 좋았고 제법 재능도 보였던지라, 갑자기 그만두겠다길래 야구에 흥미를 잃어버린 줄로만 알았는데.
“야구를 하는 것보다는 보는 게 더 재밌다는 걸 깨달았거든요.”
구현기는 이 당돌한 아들을 자신의 에이전트 데릭에게 데려갔고.
업계의 쓰디쓴 현실을 알려줄 거란 기대와는 달리, 데릭은 크게 기뻐하며 환영해줬다.
“이제 와서 하는 말이지만, 만약 Koo가 타자 전향 대신 은퇴를 선택했더라면 저희 쪽에서 스카우트할 생각이었습니다.”
언변, 사교술, 감정 조절 능력, 그리고 얼굴에 철판을 깐 듯한 뻔뻔함까지.
특급 에이전트로서의 자질을 갖춘 구현기였기에, 아들 역시 그 유전자를 물려받았을 거라나.
“학부 전공은 통계학이나 경제학을 추천합니다. 재학 중 인턴십은 저희 쪽에서 도와드릴 거고요. 졸업 후에는 곧바로 로스쿨에 진학해 변호사 자격증을…….”
그렇게 신이 나서 떠들어 대는 데릭에게는 조금 미안하게도.
구현기는 둘째 구태오가 감정을 숨기는 데 그리 재능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건 제리와 구현기의 가족들끼리 모여 바비큐 파티를 가진 어느 날의 풍경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안녕, 테오. 오랜만이네.”
“그러네, 에이미 누나.”
“마침 내 옆자리 말고는 다 찬 것 같은데, 여기 앉을래?”
“그래, 그럼 앉아야지 뭐.”
나이 차이가 제법 있음에도, 구태오의 신체적 성장이 빨라 최소 동갑으로 보이는 에이미.
이나현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훌륭한 야구팬으로 자라난 그녀가, 테이블 밑에서 구태오의 손을 아주 잠깐 잡았다가 놓았다.
‘이거 진짜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쟤네는 정말로 안 들켰다고 생각하는 걸까?’
‘왜, 그냥 놔둬라. 보기 좋은데 뭐.’
본인들만 빼고 세상 사람들 다 아는 비밀 연애를 이어가는 두 사람.
구현기와 제리는 이 두 사람을 두고 자주 쑥덕거렸지만, 아이들의 사춘기가 끝나거나 둘이 헤어질 때까지는 결론이 나지 않을 듯했다.
* * *
이처럼, 구현기를 둘러싼 사람들은 각자의 행복을 찾아 훌륭한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이 모습이 사라지지 않고 계속 이어질 것이란 사실만으로도 박도현은 계약을 완수하게 된 것 이상으로 커다란 기쁨을 느꼈다.
그러나, 오히려 그렇기에 더욱 말하기 어려웠던 사실도 있었다.
[야, 구현기.]
‘왜 또.’
구현기가 현역 은퇴를 선택한 후, 명예의 전당 후보 자격이 생기는 5년이 거의 다 되어갈 즈음.
박도현은 슬쩍 떠보듯 물었다.
[너는 내가 사라져도 잘 살 수 있을 것 같냐?]
말을 꺼내고 나니 조금은 아차 싶었다.
자신이 떠난 이후, 더는 자신의 눈으로 지켜보지 못할 수도 있는 지금의 세계에서.
앞으로도 이들이 행복할 수 있을지 물어보고 싶었던 것뿐인데.
뭔가 말투가 저주하는 것처럼 나와버렸다.
‘글쎄다…….’
자신이 머지않아 떠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미 예감한 듯, 장난기를 쏙 뺀 힘없는 대답.
두 사람은, 아니 사람 한 명과 귀신 하나는, 서로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한 채 한동안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발표된 명예의 전당 투표에서는, 마리아노 리베라 이후 처음으로 만장일치 헌액자가 등장했다.
[Hyun―Ki Koo, LA Dodgers No.45]
프로 통산 20시즌
커리어 통산 타격 지표 0.368/0.479/0.601
커리어 통산 ERA 2.94
102승 134홀드 104세이브
골드 글러브 14회, 실버 슬러거 16회, MVP 13회 수상
월드시리즈 우승 9회, 월드시리즈 MVP 9회 선정
그 누구도 범접하지 못할 커리어로, 사실상 미리 맡겨둔 거나 다름없었던 명예의 전당 헌액 소식이 미디어에 공표된 바로 그 순간.
“박도현.”
가족들, 옛 동료들, 축하 인파 및 취재진에 둘러싸여 온갖 꽃다발을 건네받는 와중에.
구현기는 친구의 이름을 불러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도현아.”
이번에는 조금 더 크게, 한국어를 알아듣는 사람이라면 뜬금없이 왜 이러나 의아해할 정도로 불러봤지만.
역시나 대답은 없었다.
지금까지 계속 옆에 있었던 게 기나긴 꿈속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마웠다.”
듣고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구구절절 떠들 필요조차 없이, 두 사람 사이에서는 이 한마디면 충분할 거라고.
구현기는 멋대로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 * *
구현기의 명예의 전당 입성이 확정되고 나서 얼마 후.
LA 언론은 일제히 속보 하나를 발표했다.
[(속보) LA 다저스 폴 리오스 단장, 전격 경질! 구단 운영진은 다음 시즌 단장으로 스카우트 팀장 Koo와 단년 계약으로 선임!]
은퇴 후, 현장으로 돌아갈 거라는 예측과는 달리 동아시아 스카우터로 프런트에 입문한 구현기.
그 후 대략 5년 만에 단장 자리까지 올라간 셈이었다.
명예의 전당 헌액이 확정되면서, 전임 단장의 삽질로 등을 돌리려는 기색이 보이는 팬들을 다시 불러모으기 위한 내정이기도 했지만.
스카우터로서 좋은 활약을 보였던 마이크 올리버가 단장으로서도 활약했기에, 그 덕을 좀 보기도 했다.
[쓸 만한 사람은 좀 보이냐?]
마이너 투수 코치부터 시작해, 다저스의 감독직까지 올라간 로버트 켈리로부터 걸려 온 전화.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건성으로 대답하면서, 구현기는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단장으로서의 첫 업무는, 윈터리그 현장을 돌아다니면서 다저스의 유망주들을 확인하고 다른 괜찮은 선수들이 있는지 체크하는 것.
[가능하면 투수 좀 데려와. 쌈빡한 놈으로다가.]
“싸움박질 잘하는 놈이 아니고요?”
[그것도 괜찮지. 3대 헤드기어 컬렉터가 아직 안 나타났으니까.]
그렇게 경기장에 도착해, 관계자 외 출입금지 공간에 관계자로서 들어가 이래저래 선수들을 체크하던 도중.
구현기는 눈에 띄는 선수 한 명을 발견했다.
체격 조건 자체는 별로 좋지 않았고, 포지션도 지금으로선 무엇인지 감도 잘 안 왔지만.
‘나는 어디 여기는 누구’ 뭐 이런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동공에 지진이 일어난 듯한 모습.
슬쩍 체크해보니, 전임 단장이 언드래프티로 영입했다던 선수.
그러나 그 사실은 구현기에게 별로 중요치 않았다.
“이봐, 친구.”
설마 자신을 부를 것이라고는 생각 못 했는지, 멍 때리다가 마침내 구현기를 발견하고는 입을 틀어막는 선수.
구현기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마치 귀신이라도 보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