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5화 〉4화 작은 변수 (4) (5/130)



〈 5화 〉4화 작은 변수 (4)

 *  *




아세드가 검지와 중지로 고급스러운 양피지를 팔락였다.
칼리오라는 참 그다운 행동이라 생각했다. 그는 퉁명스럽게 양피지를 건넸다.

“자, 네가 바라던 추천장이다.”


“감사히 받겠소,대공.”

칼리오라는 예의를 차리며 양피지를 받았다.
이걸로 5년이란 시간을 벌었다.


그녀는 지쳐서 곤히 잠든 친구에게 속으로 감사를 표했다.
아세드를 살피니 나름 복잡한 표정이었다.

“뭘 보냐.”

그의 퉁명스러운 대답에도 칼리오라는 내색하지 않았다.

“대공은 예전이나지금이나 참 한결같아 보기가 좋소.”

아세드는 눈썹을 들며 사납게 뇌까렸다.


“칼리오라, 아버지가 멋대로 죽어서 남긴 자리가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칼리오라가 고개를 저으며 되물었다.



“대공이 자리 때문에 성격을 바꾸는 사람은 아니지 않소. 그보다 내가 오라버니가 아닌 건 언제 알고 계셨소?”

“너희 남매를 젖내 난다고 놀렸던 게 누구였지? 보면 척이야. 꼬마. 그리고 머리채 뜯기기 싫으면 둘이 있을 때 그런 가식 떨지 마라. 화나니까.”

칼리오라는 잔망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이제  머리채를 잡으면 잡혀갈 걸요. 파프니르 오라버니.”

“날 잡아갈 놈은 왕국에 없어. 잡아간다면 널 잡아가겠지.”

“사실이라 웃지도 못하겠네요.”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와 많은 게 달라졌다.
상황도, 위치도, 사람도 무성하게 변해버렸다.
말괄량이처럼 방긋거리며 웃던 칼리오라는 그의 오라비와는 다른 의미로 죽었다.

그럼에도 그는 말했다.
아세드 대공이 아닌 파프니르 공자로서 말했다.

“다행이야. 꼬마라도 살아 있어서.”



칼리오라는 피부가 새하얗게 질릴 정도로 주먹을 쥐었다.

파프니르는  본 척 눈을 감았다.


“녀석은 어쩌다 죽었냐.”

“비겁한 함정에 당하셨죠.”



“고작?”


“그 함정을 준비한  ‘새벽’의 수장이었어요.”

“돈 좀 썼네. 그래도 녀석이 당할 상대는 아닌  같은데?”


“제가 인질이었어요.”


“그럼 이기지.”

파프니르의 견해로칼리오스란 인간은 상당히 물러터진 놈이다.
그런 놈이 인질까지 잡혔다? 그냥 죽은 거지.
칼리오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둘  하나만,   있었어요. ……선택권은 오라버니가 갖고 있었고.”

쓸모없는 제가 살았죠, 꼬마라면 그렇게 말하리라고 파프니르는 생각했다.
실제로 그런 낯짝이다. 하지만 왕녀는 말하지 않았다. 분을 삭이고 있을 뿐.

파프니르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려다 멈췄다.
스스로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칼리오라를 위로할 자격이 없다.


“얼간이 자식. 더 강하게 몰아쳤어야 했는데.”


“그러셔도 문제는없었을 거예요. 오라버니는 항상 파프니르 오라버니를 존경하셨으니까요.”



“맨날 도망치는 놈이?”


“한순간도 도망치지 않았다는 거, 아시잖아요.”


파프니르가 못마땅한 듯 궁시렁거렸고, 칼리오라는 그의 모습에서 짙은 향수를 느꼈다.

“흥. 계집애처럼 제 실력을 숨겨서 어디다 쓴다는 거야, 결국 알아주는 놈 없이 떠났잖아. 무의미해.”

“그렇지 않아요. 가장 존경하는 오라버니가 알아주시잖아요.”

칼리오스나, 칼리오라나 말이라도 못하면 밉지나 않지.
이래서 나약한 것들이 싫다.

제멋대로 살다가 제멋대로 떠나지.
아버지, 오늘따라 호탕한 당신의 불빠따가 그립소.


“그 개눈깔이 벌인 짓이지?”

칼리오라가 강하게 다그쳤다.

“파프니르 오라버니.”

“안다, 알아. 네가 말하지 않아도 원로 자식들이 귀에 딱지가 박힐 정도로 지껄이고 있어. 중립을 지켜라, 중립을 지키십시오, 선대 대공께서 지켜온 평화요. 아주 애국열사 납셨어.난 그게 참 궁금해. 아버지는 이 병신들을 데리고 어떻게 살았을까. 사실 아버지의 사망 원인은 피살이 아니라 혈압 과다로 인한 급성사가 아닐까?”

젊은 대공은 만사가 불만스러웠다.
왕녀는 헛웃음을 내보였다.

“오라버니가 자유분방하시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으셨나요?”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내 좆대로 산다는데, 누가 말려. 꼬우면 나를 이 자리에 앉히지 말던가. 그리고 넌 너무 형식에 얽매여 있어. 어떤놈이 적을 없애는데 이거 저거 다 재단하면서 죽이냐. 그냥 족치는 거지.”


“파프니르 오라버니는속 편해서 좋겠네요.”


“적은 죽이고 아군은 살린다. 목표가 명확할수록 행동은 빨라지는 법이야. 기본적인 거다.”


“칼리오스 오라버니라면 그러지 않아요.”

“그 자식은사람이 너무 좋거든. 하지만 넌 칼리오스가 아니지.”


너도 알고 있지 않냐, 그리 말하는 파프니르는 왠지지친 기색이었다.
저렇게 정력적인 사람도 지칠 때가있구나.
칼리오라는 의외에 사실을 엿본 기분이었다.


“썩어 문드러지는 꼴, 보이지 마라. 벨 거다.”

파프니르가 차갑게 읊조렸다.
 나름의 배려가 섞인 말이라는  이미 안다.


“저를 지탱해줄 사람이 있어서 그럴 일 없어요.”

“그럼 다행이지. 엔펠 정도면 쓸만한 녀석이야, 숫기가 없는 게 아쉽지만.”

“여성에게 숫기를 바라세요?”


“안될 게 뭔데?”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이 세상에 불가능한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녀 말고도 있어요.”

“루시아? 장하다, 장해. 겁쟁이 꼬마가 친구도 다 만들고. 이 오라버니는 그 대목에서  놀랐다.”


잔잔한 호수 같던 칼리오라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허? 야, 그런 반응 닭살 돋아.”


“파프니르 오라버니가 먼저 꺼내셨잖아요.”


“너네, 그거냐? 그거?”

눈썹을 팔자로 만들며 새끼손가락을 돌리는 파프니르 판 아세드, 이 경박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누가 대공이라고 생각할까.
칼리오라가 살벌한 눈 웃음을 지었다.

“오라버니.”

“에휴. 예전이라면 빼액 소리부터 질렀는데, 지금은 영 재미가 없어. 재미가.”

다시 정적이 흘렀다.


“제 친구를 정식 제자로 받아들인 건…….”


“응, 헛물 켜지 마.  도와줄 맘 있어서 그런  아냐. 최근에 원로놈들이 빨리 정식 제자를 뽑으라고 하도 지랄해서 말이야.  좀 먹어보라고 벌인 일이다. 개인적으로 흥미도 좀 가고.”

파프니르는 그을린 손바닥을 응시했다.
승부는 화염구 때 이미 났었다.

자신은 그 사실을 숨기고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파프니르 판 아세드답지 않다.

왜 그랬지.
그는 턱을 매만졌다.

 녀석이 어디까지 갈 있나에 대한 호기심?
  단순하다. 파프니르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비겁하게  무르시는  아니죠?’

비겁하다? 이 내가?
감히 내게 그딴 망말을 지껄일 수 있는 이가 몇이나 있었지?
눈앞에 칼리오라와 죽은 칼리오스, 유리 아이나르, 론도 아르덴을 빼면 없다.

당돌함이  가소롭다.
강자 이외의 상대를 부수고 싶은 마음이 들은 건 오랜만이다.


“칼리오라.”


“예.”


“추천서, 하나  써준다.”

“예?”

“네 친구, 곁에 끼고 살라고.”


파프니르가 사악하게 웃었다.



* *   *




고풍스러운 천장 장식에 심신 안정이라는 순기능이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마음  편하다.

추천장도 받고, 피투성이 대공의 정식 제자도 되고.
생각해보니 그건  별로다. 스승이랍시고 가르침을 빙자한 구타나 하는  아니야?


나는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창가를 보니벌써 어둑어둑해졌다.

얼마나 퍼질러서  걸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평범한 두통보다 질이 나빴다.


마나를 단기간에 너무 많이 써서 그런가.
곰곰이 생각해보면 마나를 이 만큼이나 써본 건 처음이다.

내 몸에서 흐르는 청색 마나와 백색 마나의줄기가 평상시보다 얇다.
일시적인 현상이겠지만, 앞으로는 자제해야 하나?

“하아.”

파프니르 판 아세드 대공.
그가 적이었다면 진검을 든 순간 나는 이미 죽었다.
마법을   있게 된 뒤로 사라진 위기감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나는 약했다.

눈만 감으면 대공과의 전투가 생생하게 재생됐다.
그때, 발을 묶었다면?
중력을 역전 시켜 그의 무력화를 도모했다면?
쓸 있는 모든 가정을 하며 시뮬레이션이 돌아간다.


“그래도 필패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그 작자는 인간이 아니다.


“역시 괴물이야.”

“누가 말이냐.”

“흐익!”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하더니, 그는 창가에 기대고 있었다.

“아! 씨, 노크할 줄 몰라요?”

“창문이라도 두드리랴?”

“예?”


설마 창문으로 들어온 겁니까? 당신이란 인간은도대체…….


“멍청한 낯짝 보이지 마라.”


“제 얼굴이 뭐 어때서요.”

그가 주먹을 들었다.


“맞을래?”

나는 슬며시 눈을 내리깔았다.

“…아뇨.”


녀석의 목도로 맞은 배가 시큰거렸다.

“뭐, 뭐 때문에 온 거예요?”


그는 뚱한얼굴로 나를 노려봤다.

“칼리오라를 지켜줘서 고맙다.”


나는 두 눈을 크게 떴다.
아세드에게서 감사 인사를 들을 줄 몰랐기 때문이다.


그의 눈에는 장난기가 없었다.
잠시만, 칼리오라는 왕녀의 본명이잖아.

나는 미심쩍은눈길을 사내에게 보냈다.
알고 있었단 말인가?


“당신에게 고마움 받을 필요 없어요. 제가 지키고 싶어서 지킨 거니까.”

“건방지게 구는군.”


그가 내게 손을 뻗는다. 에이, 병자를 때리겠어? …이 작자라면 때릴지도 모른다.
내가 몸을 움츠리며 양팔로 얼굴을 가리자 그의 커다란 손이 머리 위에 얹어졌다.
아세드는 노골적으로 나를 비웃었다.


“지금은 봐준다.”

쫄아서 가드 올린 건 아니다.
절대 아니다.
아니라고.

“좀 더 자라. 멀쩡한  상태는 아니니까.”

“그걸 어떻게 아는데요?”

“내가 널 줘팼으니까 알지.”

저렇게 말하는데 달리  말이 없었다. 때린 놈이  알기는 하겠지.
슬슬 졸음이 오긴 했다. 눈꺼풀은 점점 무거워졌다.


“받고 싶은  없나? 칼리오라가 너에게 상을 내려달라 청하더군.”


“바로 생각나는 게 없네요.”

“그래, 자면서 생각해봐라.”

그는 창문으로 몸을 날렸다.
아니, 성주가 멀쩡한 문 놔두고 왜 그런 곳으로 다니세요.
그전에 창문은 닫고 가시지.


창가에서 부는 차가운 밤바람과 따뜻한 실내는 묘하게 기분이 좋았다.
몽롱해진 정신은 금세 잠에 빠졌다.



* * *


다음 날, 대공의 성 복도를 거닐 때마다 기사나 시종, 시녀들이 선망 어린 눈빛을 보내며 고개를 숙였다.

무슨 아이돌을 보는 극성팬 같다. 과한 감정을 일일이 받아내고 있으니 위장이 다 아팠다.

위장 이야기를 해서 말인데, 아침에 일어나 목도로 맞은 부위를 보니 커다란 피 멍이 들었다.



악독한 새끼.
내가 꼭 강해지고 만다.

“어제는 대단하셨습니다. 루시아 님.”


복도에서 마주친 붉은 머리의 미녀, 엔펠이 인사했다.


“대단하기는요. 그냥 일방적으로 맞은 건데.”

“대공을 상대로 그만한 무위를 피력했다는  대단합니다.”

나는 대충 맞장구쳤다.

“그렇다고 하죠.엔펠 경은 뭐하고 계셨어요?”

“왕녀 저하와 떠날 채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왕녀님이랑요?”

말하다가 위화감을 느꼈다.
엔펠의 붉은 홍채가 차갑게 타올랐다.

“역시 알고 계셨군요.”


“아하하…….”

언변이 부족한 나는 멋쩍게 웃기만 했다.


“루시아 님이 기절해 있는 동안, 왕녀님이 설명해주셨습니다. 두 분이 벗이 되셨다는 사실도 알게 됐죠.”

엔펠도 언젠가는 알아야 할 일이긴 했지만, 속이 쓰렸다.
나한테 상의도 없이…, 아니 상의를 할 수가 없었구나. 내가 잠만 잤으니.


“루시아 님. 당신은 수상쩍은 사람입니다.”


“알아요.”


나는 신분이나 과거를 밝힐 수 없었다.
신분이나 과거 자체가 없으니까 말이지.
엔펠이 한숨을 내쉬었다.

“왕녀 저하가 당신을 필요로 하는 이상, 저는 가만히 있을 겁니다.”


“그래요? 전 뭐라도 하실 줄 알았는데.”


“하지만 왕녀 저하께 해가 된다는 생각이 들면 제 검은 망설임 없이 당신을 벨 겁니다. 제 실력이 당신에 미치고, 미치지 않고를 떠나서.”

그 왕녀에 그 기사다.
하나같이 정직을 모토로 달고 있는 바보들.


대놓고 나 너 의심할 거야,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

바보 곁에는 바보가 붙는다는 말이 사실로 증명되는순간이었다.

“그렇게 해요.”


나는 무심코 웃음을 흘렸고, 엔펠은 고운 미간에 주름을 잡았다.

“하찮게 여기시는 겁니까?”

“오해 말아요. 당신 같은 사람이 제 친구의 기사라는 게 든든해서 웃은 거예요.”


엔펠의 날카로운 눈매가동그랗게 떠졌다.
올빼미 같은 표정이시네.


“지켜보겠습니다.”


“예,지켜봐주세요.”


우리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칼리오라에게 향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