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화 〉20화- 외톨이 변경백 호른 (1)
그녀를 루시아라 부르기엔 신장이 컸고, 머리카락이 길었으며, 외모가 성숙했다.
하지만 그녀는 루시아다. 판단을 재고할 필요는 없다.
그녀에게서 아지랑이 치는 백색과 청색의 마나는 내게 너무도 익숙했으니까.
나는 그녀에게 재차 질문했다.
“루시아지?”
루시아는 어이가 없는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럼 누구처럼 보이는데?”
“딱히 누구처럼 보이지는 않고, 많이 자랐다 싶어서.”
“나도 이제 스무 살이야. 자랄 시기는 끝났어.”
스무 살? 내가 캐릭터 시트로 본 루시아의 나이는 열네 살이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면 나는 책 좀 보다가 6년이란 세월을 보냈다는 건데.
이게 말이 되냐.
잠깐만? 그럼 이 몸은 누군데?
나는 내 몸을 살폈다.
두툼한 방한복 차림이라 성별을 분간하는 게 어렵다.
음, 가장 확실한 방법이 있긴 하지.
나는 바지를 들쳐 하복부를 살폈다.
거기에는 파트너가 있었다. 너, 이 자식. 돌아왔구나!
내 행동을 주시하던 루시아가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며 고개를 떨궜다.
그녀의 반응 덕분에 내 행동의 무안함을 깨달았다.
“아, 미안 너무 기뻐서.”
“……뭐가 기뻐?”
내 파트너가 다시 돌아와서.
“그런 게 있어.”
그녀가 침착하게 물었다.
“머리 괜찮아?”
나는 그녀의 질문에 진지하게 고민하고, 결론을 내렸다.
“안 괜찮은 거 같은데?”
“…잠시만 기다려.”
루시아가 쥔 자수정 스태프에 푸르스름한 기운이 서렸다가 내게 향했다.
오, 뭐야.
“정신 각성의 마법이잖아.”
그녀의 청색 눈동자에 놀라움이 깃들었다.
“어떻게 알았어?”
“응?”
“서연은 마법에 관심이 없잖아.”
난감했다. 네 몸으로 많이 써봐서 잘 알아요, 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뺨을 긁적이며 시선을 피했다.
“정신이 말짱해지는 느낌이 들었어.”
미심쩍은 눈길이 나를 훑었다.
“……이상한데.”
“난 늘 이상하잖아.”
“그건 맞지만.”
거기서는 부정해주면 안 될까, 마음이 아프다.
“근데 여기는 어디야?”
루시아가 건조하게 답했다.
“북부의 프라시오스.”
북부? 추운 곳 아니야?
“어째서 북부에 왔는데?”
그녀의 표정이 사뭇 심각해졌다.
“잊었어? 네가 얼어붙은 성채를 가야한다면서.”
“얼어붙은 성채?”
“그녀를 없애야 한다고, 서연이 말했잖아.”
그녀?
나는 여기에 오기 전 챕터의 제목을 떠올렸다.
‘외톨이 변경백 호른의 비탄’
안 좋은 상상이 머리를 스친다.
“호른을?”
“맞아.”
몇 초 동안 정적이 이어졌다.
“으음, 그렇구나.”
나는 이해를 포기했다.
루시아는 그런 나를 묘한 눈빛으로 응시했다.
“…서연, 너무 밝은 모습이라 적응이 어려워.”
그 말을 끝으로 그녀는 가파른 설산을 올랐다.
밝은 모습이라니, 난 어두웠던 적이 없는데?
나는 의문을 품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처음처럼 몸이 춥지는 않았다.
루시아가 마법으로 주변을 따뜻하게 만드나 보다.
그런 추측을 한 이유는 그녀의 주변에 붉은빛이 맴돌고 있어서 그렇다.
어쨌든, 우리는 산을 올랐다.
그나마 등산은 하지 않아 다행이야.
이 말을 한지 얼마나 됐다고 바로 등산을 시켜주냐.
누군진 몰라도 참으로 고약 심보다.
얼마나 걸었을까, 성이 보였다.
“루시아, 저게 얼어붙은 성채야?”
루시아가 머리를 주억이며 긍정했다.
저기에 호른이 있다는 말이지.
그녀는 어떻게 자랐으려나 싶다.
“루시아, 궁금한 게 있는…….”
눈 깜짝할 사이였다.
무언가 바람을 찢어발기며 다가왔다.
루시아는 머뭇거리지 않고 타원형의 방어막을 펼쳤다.
그 무언가가 빠르게 회전하며 방어막을 부쉈다.
나는 주저없이 루시아를 내쪽으로 끌어당기며 몸을 굴렸다.
정말 간발의 차로 피했다.
폭발이 일어났다.
바닥의 눈과 흙이 사방팔방으로 튀었다.
마치 구덩이라도 판 듯 지면이 움푹 패였다.
제대로 맞았으면 곤죽이 됐겠다.
지면에 박혀 있는 건 1m에 이르는 거대한 화살이었다.
흑색으로 번들거리는 화살촉을 본 루시아가 혀를 찼다.
“묵철의 화살이야.”
“묵철?”
“항마의 능력이 있는 쇠야.”
그래서 방어막이 깨진 거구나.
“방어를 맡아줘.”
“내가?”
그녀가 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요격을 준비할 테니까.”
내가 저 정신 나간 저격을 어떻게 막는데요?
생각과 달리 몸은 능숙하게 검집에서 검을 뽑았다.
검이 있었구나.
“적은 성벽 위에 있어.”
진짜?
성을 살피니 검은색 점이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저 성에서 여기까지 유효사격을 날릴 수 있다니, 말이 되냐 이게?
루시아는 얼음 창을 생성한 다음, 바람 계열의 마법으로 얼음 창 주변을맴돌게 했다.
저렇게 응용하는 법도 있구나.
그와 동시에 흑색 화살이 정면에서 날아왔다.
나는 양손으로 검을 쥐고 사선으로 휘둘렀다.
내 솜씨라 보기 힘들 정도로 깔끔하게 화살을 쳐냈다.
손아귀가 저릿했으나 그런대로 견뎌냈다.
루시아는 얼음 창 뒤에 작은 불꽃을 피우는 중이다.
이번에는 시간차를 두고 두 발이나 왔다.
아래에서 위로 검을 그어 화살을 막았다.
아까보다 배는 강한 화살의 충격이 손목을 괴롭게 했다.
나는 검을 높이 치켜든 자세 그대로 다음에 오는 화살을 내리쳤다.
다만, 이번 화살은 조금 맹랑했다.
화살촉이 빨갛게 빛나더니 폭발하고 만 것이다.
검붉은 연기와 폭풍에 몸이 두 발자국 뒤로 밀려났다.
그 큰 폭발에도 겨우 두 발자국 밀려났을 뿐이라니.
내 몸이라 믿기 힘든 튼튼함이군.
그래도 폭연 때문에 시야가 가려서 후속 공격에는 대처가 힘들 거 같다.
나는 루시아에게 소리쳤다.
“루시아! 아직도 멀었어?”
별안간 세찬 바람이 불어, 폭연이 날아갔다.
루시아의 주변에서 세차게 몰아치는 마나의 격류가 느껴졌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가속하라, 한없이.”
내가 쓰던 언령과 격이 다른, 강제가 존재하는언령이다.
저쪽 저격수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무려 세 발의 화살이 날아왔다.
나는 검을 들고 자세를 잡았다. 이걸 어쩌지?
화살이 쇄도하기 직전, 루시아가 맑은 목소리로 낭송했다.
“적에게 명중하라.”
콰앙. 포성처럼 큰 굉음이 울렸다.
이게 고작 얼음 창을 발사하는 소리라면 믿을 수 있을까?
대기를 뭉개며날아가는 은색 섬광은 궤도에 있는 묵철의 화살 셋을 모두 무력화시켰다.
섬광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공중에서 두어 번 폭발하며 속도를 더 높였다.
한줄기 빛이 저격수를 꿰뚫었다.
그대로 먹구름을 가르며 하늘로 사라지는 얼음 창이었다.
몇 초 후에 쿠우웅,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천둥처럼 소리가 뒤따라 온 모양이다.
나는식은땀이 났다.
탄도 미사일이냐?
“서연.”
“예.”
존댓말이 절로 나왔다.
“가자.”
루시아는 지친 기색도 없다.
본래의 그녀는 6년 만에 이렇게 강해지는구나.
나는 검을 집어넣으며 걸었다.
어느덧 성채에 다다랐다.
높은 성벽과 그 위로 펄럭이는 파란 깃발, 얼어붙은 해자와녹이 슨 철제 성문은 공허한 인상을 줬다.
성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초대받지 않은 손님의 침입을 불허하는 듯했다.
루시아가 성문을 보더니 불만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성문에다가 마법적 처리를 해놨어.”
“못 부숴?”
“마법에 대한 내성이 높아서 어렵지.”
부수고 들어갈 수 없다니, 어쩐다.
성벽을 오를까?
고개를 저었다.
높이도 높이일 뿐더러, 손으로 벽면을 만져보니 상당히 미끄러웠다.
짐작해 보건대 눈이 엉겨 붙은 상태에서 한번 더 얼어붙었으리라.
성벽보단 빙벽에 가깝다. 장비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가기엔 무리가 있겠다.
“뭐해, 서연?”
둥둥 떠다니는 루시아가 내게 손을 뻗었다.
“어?”
“굳이 부수고 들어갈 필요는 없잖아.”
마법 만세.
그녀의 도움으로 성벽에 올라섰다.
거기에는 우리와 접전을 치룬 저격수의 사체가 있었다.
쓰러뜨린 저격수의 머리에서 나온 선혈과 뇌수는 이미 얼어붙었다…, 같이 정신 건강에해로운 경치는 없다.
“얼음 조각?”
나는 눈을 의심했다.
사람의 모양을 한 얼음 조각이 쓰러져 있다.
사람을 죽인 게 아니라 다행이긴 한데, 이건 이것대로 기괴했다.
“호른 디 프라시오스 변경백의 능력이야.”
“이게?”
호른이 빙결계 마법을 즐겨 사용하긴 했지만, 이 정도로 강한 능력은 아니었다.
루시아고, 호른이고 고작 6년 만에 어떤 성취를 이루어낸 걸까.
나와 루시아는 성벽 위에서 을씨년스러운 성내를 보았다.
전망 좋네, 성 내부는 눈이소복하다. 하루 이틀치로 쌓일 양은 결코 아니다.
무너진 건물도 몇 개 보였는데, 보수하지 않고 방치한 점으로 보아 인적이 끊긴지 오래 돼 보였다.
사람의 손길이 끊어진 인공물만큼 공포를 자극하는 게 또 있을까.
우리는 성벽에서 내려와 거리를 걸었다.
어디를 봐도 황량했다. 아직 낮이어서 망정이지, 밤이 되면 꽤 으스스하겠다.
“내성으로 가야 해.”
루시아가 방향성을 제시했고, 나는 그에 따랐다.
* * *
“여기 맞지?”
“응.”
나는 떨리는 손으로 성문을 밀었다.
끼이익.
문이 열리고 다량의 먼지가 날렸다.
절로 기침이 나왔다.
콜록콜록, 손을 휘저으며 먼지를 걷어냈다.
침입자만 신경 쓰지 말고 청소도 좀 하지 그래, 호른 성주님?
안은 처참했다.
바닥은 여기저기 금이 가 있고, 계단이나 벽도 군데군데 부식된 상태다.
색이 바랜 연갈색 융단 위에는 마모된 대리석상과 줄이 끊어진 샹들리에의 잔해가 굴러다녔다.
성이 아니라 폐허였군.
“살풍경하네.”
루시아는 시니컬하게 받아쳤다.
“어딘들 그러지 않겠어.”
나는 눈썹을 팔자로 만들었다.
무슨 뜻이야? 되물으려고 하니 그녀가 성큼성큼 안으로 걸어갔다.
“야, 같이 가!”
우리는 1층을 쭉 둘러봤지만 큰 특이점은 없었다.
“2층으로 갈까?”
루시아가 제안했다.
타당한 의견이다.
“그러자.”
2층에 올라가니, 대성당에나 있을 법한 스테인드 글라스가 보였다.
형형색색의 색유리는 두 마리의 흰머리 수리를 수려하게 표현했다.
장관이란 이런 걸 보고 말하는 거겠지.
루시아는 멍하니 있는 내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었다.
“넋 놓지 마.”
“……알았어.”
복도를 걸으며 천장도 보고, 벽에 걸린 그림도 봤다.
무언가 나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꼼꼼히 살폈지만 허탕이었다.
하기야, 나오려면 진작 나왔겠지.
나와 루시아의 발걸음 소리만 들리니 기분이 오묘했다.
유명한 괴담 명소를 온 기분이다. 나는 루시아의 어깨를 툭툭 쳤다.
“왜?”
“여기에 호른이 있는 거 맞아?”
“확실해.”
“어떻게 아는데?”
“그녀의 마나가 이 성 곳곳에 남아 있으니까.”
마나 탐지기가 따로 없군.
한참을 돌아다니다 커다란 문을 발견했다.
루시아의 안색이 굳어졌다.
“이 안에 있어.”
“호른이?”
“응.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아.”
누가 건드리지도 않았는데 문은 저절로 열렸다.
커다란 방이다.
문득 한기가 느껴져 정면을 보니, 얼음으로 이루어진 옥좌에 앉아 있는 사람이 보였다.
“안녕? 파수꾼을 쓰러뜨렸구나?”
밝은 인사다.
얼어붙은 성의 옥좌에는 푸른 머리카락의 여인이 다리를 꼬고 턱을 괸 채 앉아 있다.
어깨가 드러나는 청색 드레스와 굽이 높은 구두 차림은 적당히 선정적이다.
잘 자랐구나, 라는 농담은 건네지 못했다.
그녀의 처연한 분위기 때문이다. 나는 호른에게 말을 걸었다.
“호른, 슬퍼 보이네.”
그녀의 눈이 호기심을 품었다.
맞다, 호른은 나를 알지 못하겠구나.
루시아는 말없이 마법을 준비했다.
“서연. 당신이할 말은 아니지 않아?”
놀랍게도 호른은 서연을 알고 있었다.
“내가 할 말이 아니라니?”
“시치미를 떼는구나. 그래도 달라지는 건 없지만. 나를 죽이기 위해 왔지?”
그 노골적인 물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나는 그저 루시아를 따라왔을 뿐이다.
호른을 죽인다고 마음을 다잡은 게 아니었다.
“그런 의도는 없어. 그보다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
나는 전부터 품었던 의구심을 물었다.
“오른은 어디 있어?”
민감한 질문이라 생각했으나 호른의 안색은 평온했다.
“동생? 불러줄까?”
루시아가 내 이름을 불렀다.
“서연!”
화가 난 모습이다.
왜?
호른이 비틀거리며 옥좌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뒤로 무언가가 삐걱거리며 일어났다.
사람이라기엔 움직임이 너무 단조롭고 인위적이다.
“오른, 손님이왔어.”
오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할 수가 없었다.
시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