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44화- 백룡 타락 저지 (8)
오랜만에 제국에서 전령이 왔다.
그 앙칼진 황녀가 여제에 올랐으니, 연회에 얼굴이라도 비추라는 말이었다.
내 언급은 쏙 빠졌다.
앙금이 남아 있나 보다, 짠순이 같기는.
“어쩔까, 민타카.”
“나는 걱정하지 말고 다녀 와.”
그는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다.
“정말 괜찮겠어?”
나이를 먹더니 잔걱정이 많아졌다.
“용사님의 소유지를누가 건드리겠어.”
“같이 가는 게 안전하지 않을까?”
“그러면 애들은 누가 돌보는데?”
“잠시 보모를 고용하자.”
“용사네 고아원에 용사도 없고, 마귀할멈도 없으면 애들이 참도 좋아하겠다. 그리고 이 산골짜기에서 보모는 어디서 구하게?”
“내가 불안해서 그래.”
“용으로만 변하지 못할 뿐이지, 마법은 건재하거든?”
에드윈은 골똘히 생각했다.
그의 붉은 눈에 결심이 서렸다.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함께 가야겠어.”
아이같은 면도 있구나 싶었다.
“웬일로 고집을 부리는 거야?”
“거부하지 마.”
“……내가 언제 널 거부한 적이 있었다고 그래.”
강압적인 에드윈도 좋은 것 같다.
우리는 골방에서 썩고 있는 예복을 갖춰 입고 황궁으로 향했다.
아이들은 아쉬움을 표했다. 금방 오겠다고 말을 해도 어찌나 서럽게 울던지.
누가보면 버린 줄 알겠다.
여정이야 늘 그렇듯 지루하고 고단했으나, 에드윈과 함께 했기에 그럭저럭 만족했다.
우리는 황궁에 입성하고 여제를 알현했다.
“같이 오셨군.”
황녀, 아니 여제는 실망을 감추지 않았다.
함께 여행을 다니던 시절, 그녀는 에드윈을 연모했다.
그는 이상적인 사내니 반할 만도 하다.
딱히 불안하지는 않았다.
지금의 그는 나에게 예속됐으니까.
나 또한 마찬가지지만. 에드윈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했다.
“그녀를 홀로 두는 게 불안해서 말입니다. 폐하.”
“변명은 됐네. 자리에서 일어서게.”
그가 일어났다. 나는 애당초 무릎을 꿇지도 않았다.
용이잖아.
에드윈은 내게 다가와 허리에 손을 둘렀다.
그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마치 과시하는 모양새지 않은가.
나, 남이 보잖아.
그의 손길이좋았기에 밀어내지는 않았다.
여제는 탐탁지 않은 어조로 말했다.
“그녀는 용이지 않은가. 불안할 게 뭐가 있지?”
“떨어져 있으면 늘 걱정이 되는 사람이라서요.”
여제는 입술을 깨물었다.
“머잖아 연회를 열걸세. 적당히 즐기다 가시게, 용사.”
여제는 축객령을 내렸다.
나는 아예 없는 용 취급을 하네.
우리는 황궁의 복도를 걸었다.
“그녀의 태도에 기분 상하지 않았니. 나의 용?”
사실 아무렇지도 않다.
내 감정의 대부분은 당신을 향하고 있다.
다른 곳에 소모할 만큼, 당신에 대한 사랑이 작진 않았다.
“음, 내게 입을 맞춰준다면 기분이 풀릴 것 같아.”
그래도 이건 좋은 기회다.
그에게 어여쁨을 마구마구 받을 수 있는 훌륭한 상황이 아닌가!
이용하지 못하면 멍청한 거지.
그는 쑥스러운 듯이 내게 입을 맞췄다.
조금 아쉬웠다. 나는 프렌치 키스를 원했는데!
그래도 공공적인 장소에서 한 게 중요했다.
그도 나처럼 부끄럼을 많이 타는 성격이었으니.
알현실에서 봤던 여제의 시선을 생각했다.
우울하고 비틀린 감정이 담겨 있었지.
용이 인간을 사랑하는 게 말이 되냐고, 황녀일 때 그녀가 말했었지.
안 될 건 뭔데?
우리는 지정해준 방에 향했다.
어느 황궁이 그러듯 호화스럽고 사치스럽다.
수수하게만 살다보니 적응에 시간이 걸렸다.
그가 예복을 풀어 헤치며 침대에 드러누웠다.
“지치네. 높은 사람을 상대하는 건.”
“그런가?”
우리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다가 노크 소리가들렸다.
여제가 사람을 시켜 에드윈을 부른 것이었다.
“이 야밤에?”
그는 시간이 너무 늦었다는 이유로 거절하려 했다.
꽤 몸이 달아올랐구나, 여제.
나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도리어 가라고 보챘다.
어디 유혹해 보시지.
네가 아무리 날고 기어도 에드윈은 나의 것이야.
그런 나를 보며 에드윈이 투정을 부렸다.
“나의 용은 참 잔인해.”
“그래서 내가 싫어?”
“몇 번이고 말할 수 있어, 너를 좋아한다고.”
나도, 나도 정말 좋아해.
그가 떠나고 침대를 걷어찼다.
삐걱삐걱 소리가 났다.
생각보다 튼튼하군.
황실 가구의 내구성에 감탄을 품었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걸음 소리로 보아 에드윈은 아니었다.
그는 사소한 몸짓에도 타인에 대한 배려가 넘친다.
하다못해 문을 열기 전 노크라도 했을 거다.
나는 언령을 내뱉었다.
“멈춰라.”
에드윈을 통해 성격이 유순해지긴 했어도 나는 용이었고, 인간을 좋아하지 않는 어머니의 슬하에서 자랐다.
또한 그와의 여행을 통해 혐오스러운 인간은 충분히 보았다.
어떤 이유로 무례하게 문을 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곤욕을 치르게 해주마.
문에서 나타난 건 인간으로 변한 용들이었다.
숫자는 여섯 정도?
내 예상을 깬 광경에 나는 얼이 빠졌다.
언령은 당연히 통하지 않았다.
용언도 통할까 말까 한 놈들인데.
“당신들이 모이다니, 무슨 행사라도 있어?”
내 질문에 어느 용이 말했다.
“너를 가둘 거다.”
가둔다니, 황당했다.
“누구 마음대로?”
다른 용이 말했다.
“너는 불안하다.”
“우리는 고심 끝에 너의 처우를 결정했다.”
나는 재잘재잘 떠드는파충류들을 주시했다.
“너희들의 독단으로 나를 가둔다? 말은 잘 들었는데 왜?”
“칼렉 메레디온이 네게 저주를 걸었다는 걸 안다.”
“그 저주가 왜?”
“너는 또 다른 마왕이 될 여지가 있다.”
지나친 비약이었다.
“웃기시네.”
“용사가 너를 관리한다고 말했지만, 만일의 사태란 언제나 있는 법이지. 일어난 뒤에 처리하는 건 늦다. 용사의 상태로 보아 널 죽일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마왕을 쓰러뜨리고, 내가 기절한 뒤 여러 이야기가 오간 모양이다.
참 우습다. 그게 겁이 났나 보구나, 겁쟁이들아.
“아하. 그래서 나를 가두시겠다?”
“그렇다.”
“얼마간?”
“적어도 몇백 년은 지켜봐야겠지.”
에드윈이 죽고도 남는 시간이다.
“이야, 기네.”
나는 이해하는 척을 했다.
내 상태가 정상이기만 했어도 저들과 싸우는 일에 주저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정상이 아니잖아, 나는 에드윈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허튼수작은 부리지 않는 게 좋아, 용사는 오지 않는다.”
“그거 찌질한 인간들이나 쓸 대사인 거 알아?”
구겨진 양피지처럼 찌그러드는 용들의 안면을 보며 물었다.
“어머니도 아시는 건가?”
그들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동족도 충분히 혐오스러울수 있구나.
나는 염증을 느꼈다.
싸움은 지당한 절차였다.
고군분투했지만, 상대는 여섯 마리의 용이다.
원 상태의 몸이라도 힘들다.
제약까지 걸린 상태에서 이길리 없지.
“하, 썩을 새끼들.”
큰 소란이 일었음에도 움직이는 이가 없다.
예견된 일이라는 건가, 인간과 짰구나.
속상했다.
에드윈은 괜찮을까?
내가 없으면 슬퍼하겠지?
슬퍼했으면 좋겠다.
그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찢어질 만큼 아팠다.
그 때,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렸다.
“떨어져라.”
그 목소리에는 기이한 힘이 존재했다.
동족조차 거스를 수 없는 미증유의 힘이.
그 목소리가 한 명의 인간에게서 나온 것임을, 여섯 용은 경악했다.
나는 반가움보다도 낯선 기분을 느꼈다.
마왕을 상대할 때도 저렇게 처절하지 않았다.
“어떻게 네놈이? 분명 그곳에 갇혀 있어야 했을 텐데.”
“내가 할 말은 똑같아. 그녀에게서 떨어져라.”
그 말에 한 용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오며 비아냥거렸다.
“감히 명령을 내리는 거냐, 인간?”
에드윈이 검을 들었다.
들었을 뿐인데, 용의 목이 잘렸다.
지난세월에도 그는 약해지지 않았다.
한층 더 벼려진 칼날이 됐다.
목이 잘린 용은 재생하지 못했다.
남은 다섯 용은 전율했다.
“재생하지 않는다. 디렉이 완전히 소멸했다.”
그들은 용에게 온전한 죽음을 줄 수 있는 존재는 같은 용밖에 없으리라 사고했다.
마왕을 잡을 때도 동족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테니까.
적어도 오늘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다섯이 된 용들은 그에게 동일한 감정을 품었을 것이다.
공포.
“두 번은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용들은 모조리 죽었다.
그는 지친얼굴이었다. 팔등으로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았다.
“난장판이네.”
“에드윈…….”
“괜찮아?”
“……너는, 너는 괜찮은 거야?”
에드윈은 올 때부터 상태가 좋지 않았다.
무언가를 억지로 뜯어내고 온 사람처럼 창백한 안색이었다.
“괜찮지 않은 거 같아.”
“왜?”
“여제가 저주를 걸었어.”
그의 마나가 모래처럼 흩어지고 있었다.
“기다려 봐, 그깟 저주는 내가 풀 수 있어.”
그는 고개를 저었다.
“쌍방의 영혼을 건 저주라 풀 수 없을거야.”
“……무슨 저주인데?”
“어느 자리를 벗어나면 죽는 저주, 준비한 기간만 6년이라더라. 단단히 준비했었나 봐. 용들도 도왔다고 하던 걸.”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전부 작정했구나.
“그래도! 그래도 난 풀 수 있어!”
“시간이 없어 민타카. 내가 하는 말 잘 들어.”
그가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말한다.
“싫어.”
“나는 여제를 죽였어. 아마 온 왕국에서 너를 쫓게 될 거야. 아이들을 데리고 숨길 바라.”
“싫어.”
갑작스러운 상황이다.
이런 걸 어떻게 받아들여.
그가 내 턱을 잡고 입을 맞춘다.
이런 상황인데도 나는순순히 그를 받아들였다.
“에드윈 제발 죽지 마.”
“미안해, 내가 경솔했어. 역시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는 이런 일이 일어날 걸 알고 있는 듯했다.
나는 이 모든 게 지독한 악몽처럼 느껴졌다.
속이 더부룩하고, 토기가 쏠렸다.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줘.”
“미안해.”
언젠가, 당신이 죽을 거란 건 알고 있다.
“죽지않는다고 말해줘.”
“미안해.”
하지만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없이 가버리는 건 너무하다.
“내 곁에 있는다고 말해줘.”
“정말, 미안해.”
사과하지 마.
“나를 사랑한다고 해줘.”
“사랑해.”
“나를 좋아한다고 해줘.”
“좋아해.”
“그러니 떠나지 말아줘.”
“민타카.”
이제는 희미해진 그의 목소리가 내 귀에 울린다.
“미안.”
그는 숨을 거뒀다.
그리고나는그자리에서가만히있었고그를쓰다듬었다그는차가워
졌다괜찮아내가따뜻하게해줄게그의옆에있으니까나는언제든지
네곁에있을거야그러니까나를좋아한다말해줄래나를사랑한다말
해줄래눈이라도떠준다면좋겠어네손길을느끼고싶어네가있어주
면좋겠어너와함께있고싶어나는이제뭘해야할지모르겠단말이야
[이 세상이 밉지? 너도 부수지않을래?]
나는 용이 될 수 있었다.
* * *
감정의 파도가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백룡은 눈을 찡그리며 이마를 눌렀다.
민타카의 의식은 이 사건을 기점으로 끊어졌다.
칼렉 메레디온, 그 정신병자와 멍청한 용들과 멍청한 인간들, 그리고 에드윈이란 인간이 만들어낸 합작이란 말이군.
백룡은 두통을 느꼈다.
이미 망가졌구나.
“엄마, 나 죽을 거야.”
용은 자의로 생명을 멈출 수 있다.
민타카의 마나가 흩어지고 있었다.
놔두면 며칠 후에 죽겠지.
그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죽는 게 그녀를 위한 길일지라도, 백룡은 고룡에게 부탁을 받았다.
『이 아이의 삶에 이유가 돼 줘.』
당신은 정말 내게 어려운 부탁만 해.
죽어가는 용을 무슨 수로살릴까?
고룡의 경우에는 불가능했다.
하지만 민타카의 경우는 다르다.
그녀는 단순히 절망하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그보다 더 강한 감정을 덧씌우고 살아갈 동기를 부여하면 된다.
백룡은 민타카의 애정을 배신하는 행위를 한다는 것이 마음이 아팠다.
“나약하구나, 민타카. 일이 발생한 원인은 찾아 보았느냐?”
“원인?”
“이 모든 일을 꾸민 게 이 어머니라는 생각은 안 해봤니?”
그녀의 동공에 미약한 빛이 들어왔다.
“예?”
“그러게 내 말을 들었다면 얼마나 좋았니. 이렇게 일을 번거롭게 만들지 않아도 됐을 텐데.”
“……하, 하지만 엄마는 허락했잖아요.”
“순진하구나, 딸아.”
민타카의 눈에 탁한 감정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런 것이라도 널 살아가게 할 원동력이 된다면, 나는 기꺼워할 것이란다.
“왜! 왜! 왜!”
딸의 처절한 외침.
“너를 사랑하니까.”
나는 너를 잃고싶지 않단다.
민타카가 일어섰다.
그녀가 일어나 자신의 두 눈에 손을 댄다.
끔찍한 소리가 났다.
백룡은 그 모습을 관조할 뿐이었다.
“히히히. 이런 세상 더는 보고 싶지 않아.”
민타카는 망가졌다.
하지만 살아갈 것이다.
나를 죽이기 위해서라도, 살아갈 것이다.
희망을 잃었으나 절망을 지팡이 삼아서.
살아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