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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화 〉58화- 돌아온 사람 (1) (59/130)



〈 59화 〉58화- 돌아온 사람 (1)

라이오라 백작가의 장녀, 레니 드 라이오라.
나의 이름이다.

나는 선천적으로 정령 친화력이뛰어났다.
어떤 까닭으로 뛰어나게 된 건지 자세히는 몰랐지만,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무능력한 것보단 낫지 않은가.

정령.


정령이라 말하면 사람들 대부분은 4대 원소의 정령을, 그러니까 불, 물, 바람, 흙의 정령을 떠올린다.
보편적으로 알려진 정령들이니 그럴 만도 하다.


그러나정령의 종류가 그 뿐이라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정령은 의외로 다양한 편이다.

내가 본 정령만 해도 수백 종류가 넘었다.
의자의 정령, 식기의 정령, 책의 정령, 집의 정령, 무기의 정령 등등 자질구레하게 많다.


각설하고 명망 높은 귀족 가문의 여식이 으레 그렇듯,  역시 신물이 나는 교육에 시달려야 했다.
어떻게 전부 배우긴 했지만 그 짓을 두 번 하라면 혀를 깨물고 말리라.


나는 반골 성향이 강한 편이다.
누군가 깔아준 레일 위를 달리는 삶이 싫었다.
설령 그 레일을 깔아준 사람이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아버지라 한들 마찬가지다.


이렇게 살면 뭐가 될까?
앞날이야 뻔하다.

적당한 가문의 장남과 약혼하고, 그렇게 결혼까지 이어지겠지. 이후로는 아이를 낳고 남편을 위해, 가문을 위해 살아가리라.


나는 그 수동적인 삶에 거부감을 느꼈다.
가문의 화합 도구로 전락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정략결혼은 상상만으로도 닭살이 돋는다.


생판 모를 타인, 그것도 좋아하지도 않는 상대에게 교태를 부려야 한다니.
얼마나 변변찮은 꼬락서니란 말인가.


이런 심정과는 관계없이, 나의 나이가 차면 혼사에 관한 말이 반드시 나올 터다.
하다못해 약혼이라도 시키자고 어머니 쪽에서 난리를 피우겠지.

아버지, 라이오라 백작에게 기댈 수도 없는 노릇이다.
자상한 아버지긴 하다마는 공과 사가 확실한 사람이니까.

새장에 갇힌 카나리아의 심정을 절절히 느꼈다.
정말 회피할 방법은 없는 걸까?
나는 진지하게 방안을 모색해봤다.
그러다가자신의 재능을 떠올렸다.


“정령사나 될까요.”


 의미 없이 내뱉은말이었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방안처럼 들렸다.
정령사. 보기 드물지만, 대성한 정령사의 저력은 대마법사와 비견할 수 있다고 한다.
힘이 생기면 자연스레 발언권이 따라오는 법이다.


“으음.”

그러려면 우선 정령의 사용법부터 제대로 배워야 했다.
마침 F&Y 학원이 신입생을 모집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교수진의 강의를 살피니 정령학도 가르치는 모양이다.


무엇보다 실력제라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자신의 특출함을 증명하기 위한 발판으로 충분한 여건이 아닌가.
재능을 뽐낼 곳을 찾아냈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끓었다.
나는 아버지에게 부탁해 F&Y 학원에 입학했다.


본론만말하자면 레니 드 라이오라는 우물 안 개구리였다.
F&Y 학원에 입학한 나는 그 사실을 뼈저리게 통감했다.


이 학원에 모인 사람 중 빼어나지 않은 사람은 없다.
세상에 이렇게나 다양한 인재들이 존재했다니 놀랄 일이었다.


개중에는 나보다 뛰어난 사람도 더러 보였다.
내가 제일 특별해! 란 사고방식으로 살아온 나로서는 견디기 힘든 일이었다.


“저와 겨뤄요. 선배님.”


자격지심으로 당시에 가장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은 타나 반 라펠드 공녀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다.
격차를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공녀는 건방지고 무례한 후배의 도전을 흔쾌히 받았다.
나는 완패했다. 변명의 여지도 없다.
깨끗한  패배는 레니 드 라이오라의 자신감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도전은 언제든지 환영이에요, 라이오라 후배님.”


여유로운 어조였다.
분을 억누르고 다른 종목으로 공녀에게 도전했다.
또 패배했다.

승부욕이 불타올랐다.
절차탁마하며 다시 도전했다.

이번에도 패배했다.
그렇게 패배 횟수만 늘어갔다.

“젠장.”

한 번을 이길 수가 없다.
지속된 패배로 나의 자존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나는 학원 연무장 구석에 쭈그려 앉고, 무릎에 고개를 파묻었다.


한심해서 눈물이 나오겠다.
흐느낌을 참으며 고개를 들자 자신과 같은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년이 보였다.
이름이 파르판 드락이라고 했던가.

나는 실력 있는 사람들의 이름은 웬만하면 기억하고 있다.
언젠가 꺾어야  대상이라 여겼으니까.


파르판 드락은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면 저 사람이 연무장에서 떠난  본 적이 없네.
항상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사람이다.

언제까지 하려나 싶어 구경했다.
그는 남들이 지쳐 연무장을 떠날 때도 자리를 지켰다.
우직하게, 미련하게 훈련하는 드락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간질거렸다.

동질감이 들었기 때문일까.
입을 열었다.


“거기 당신.”


파르판의 이름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와 공식적으로 일면식을 가진 적이 없다.
괜히 아는 척해서 경계를 살 필요는 없으리란 계산을 깔고 건넨 부름이었다.

파르판은 그런 내 속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물음에 답하지 않은 것이다. 무시라니, 수치심을 느꼈다.
사람이 말을 걸면 무슨 반응이라도 해야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저를 무시하는 건가요?”


그의 손이 멈췄다.
땀에 젖은 얼굴이 나를향했다.
우울한 분위기를 머금은 눈동자가 보였다.


나는 무심코 숨을 삼켰다.

“미안. 있는 줄 몰랐어.”

그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와 이야기를 나눴다.
외곬적인 면이 있는 소년이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대화 상대다.

이때의 나는 그와 사이가 틀어지리라고 생각이나 했을까.


* * *

잠깐 졸았나 보다.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예전 일을 꿈으로 꾸는  자못 불쾌한 일이다.

“깼어?”

냉담한 목소리다.
그에게 온기를 바라는 게 바보 같은 일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아픈 건 어쩔 수가 없다.
나는 태연한 척을 했다.


“파르판, 안 잤어요?”


“네가 끙끙거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주변은 컴컴했다.
나는 몸을 움직여 굳은 관절을 풀며 말했다.


“시끄럽게 굴어서 미안해요.”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무슨 꿍꿍이야? 사과를 다 하고.”

“……그냥요.”

한숨이 나왔다.
어쩌자고 그를 모욕했을까.
후회한들 늦었다.


틀어진 사이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그는 모닥불에 장작을 넣었다.

“고의로 그런 건 아니니 사과할 필요 없어. 큰 도움도 받았고,덕분에 살았다.”


나는 본가로 돌아가던 중, 마물에 습격을 받는 마을을 도와주고 있는 파르판을 보게 됐다. 그는 최근 기승을 부리는 마물들을 사냥하고 있었다.

어떻게 만난 것도 인연이라 그를 도와줬다.
그대로 지나쳤다면 파르판은 난처한 상황에 당면했겠지.
그는 꺼림칙한 걸 보는 눈빛으로 나를 훑었다.
당연한 반응이다.

“왜 도와준 거야?”


“…같은 학원생이니까요.”

“네가 잘도 그런 말을 하는구나.”


그러게나 말이다.
그의 기가 찬다는 반응에 고개를 들지 못하겠다.
나는 화제를 바꿨다.


“크, 크흠. 그나저나 마물이 출몰하다니, 믿기지 않네요.”

그는 내 말에 동의했다.

“믿기 힘들긴 해. 설원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걸까.”

설원제가 진행되던 날, 흑룡의 봉인이 풀렸다고 한다.
그로 인해 마물과 마기가 세상에 풀려난 모양이다.
말도 안 되는 상황이었지만, 명백한 현실이기도 했다.

“하나 확실한 건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었다는 거죠.”

나나, 그나 설원제의 일은 잊지 못할 것이다.
땅이 울리지 않나, 괴물의 포효가 이어지질 않나, 종국에는 유성까지 떨어졌다.
솔직한 감상으로 종말의 날이 당도한  알았다.

파르판이 물었다.


“넌 이제 어쩔 거야?”

“본가에 돌아가야죠. 당신은요?”


“글쎄, 딱히 목적은 없네.”


“그렇다면…….”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무슨 염치로 동행하자고 권유를 하겠는가.
그렇게 우호적인 사이도 아니지 않나.


그의 눈이 나를 향했다.
나는 눈을 굴려 그의 시선을 피했다.


“그렇다면?”

“……아녜요, 잊어요.”

그는 담백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침묵이 흘렀다.


“당신은 제가 밉죠.”


불쑥 나온 말에 그도, 나도 당황했다.

“아,  말은 그, 그 아…….”

파르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더는 들을 가치도 없다는 걸까.
마음이 울적해진다.

“일어나.”

“예?”

“마물이야.”

주변을 둘러보니 기괴한 형체를 가진 녀석들이 어느샌가 포위망을 펼치고 있었다.
그에게 정신이 팔려 알아차리지 못했나 보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기분이 들었다.

“……수가 너무 많아요.”


족히 백은 넘어간다.
파르판이 검을 들며 말했다.

“길을 뚫을 테니 도망가.”

“뭐라고요?”


“너를 휘말리게 할 생각 없어.”

너는 관계가 없다고 말하는  목소리다.

“당신은 어쩌고요?”


“어떻게든 되겠지.”

그는 그때처럼 담담한 표정이었다.
 낯짝이 싫었다.
모든 상황을 수용하고, 종용하는 그 태도가 울화통을 터트리게 만든다.


“싫어요.”

“농담 아니야.”

“죽든 살든 함께인 거예요.”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고백해?”


나는 얼굴이 뜨거워졌다.

“멋대로 떠들어요. 제가 언제 당신 말을 들어준 적 있나요?”

그가 웃었다.

“없긴 하지.”

녀석들이 덤벼들었다.
곤충처럼 생긴 마물도 있고, 짐승처럼 생긴 마물도 있다.


파르판은 절도 있는 자세로 마물의 숨통을 끊었다.
나는 불의 정령에게 부탁해 청색 화염을 피워내 마물의 접근을 저지했다.


마물을 쓰러뜨려도, 새로운 마물이 튀어나왔다.
어디서 이렇게 바글바글 나오는 걸까.
바퀴벌레 같다.

숫자가 숫자다 보니 싸움은 오랫동안 지속되지 않았다.
십 분? 십오 분?
우리는 등을 맞대고 있다.

파르판의 거친 숨소리가 들린다.
나는 마물에게 옆구리를 물려서 피가 줄줄 샜다.
유실된 피 때문인지  있기도 버겁다.


그가 묻는다.


“후회 안 해?”

“자꾸 묻지 마요, 짜증이 나려고 하니까.”

“멍청하긴.”

“그게 도와준 사람에게 할 소리예요?”


여기서 죽다니, 희극이 따로 없다.
기왕 이렇게 된 거 고백이나 할까.

나는 망연히 하늘을 봤다.
하늘에는 검은 점이 보였다.
별안간 그 점이 반짝였다.

별인가?
빛이 내리쬔다.
착각이 아니라 진짜로.

쿠콰아아아앙!

낙뢰가 내리쳤고, 주변의 마물 상당수가 익어버렸다.
나와 파르판은 갑작스런 상황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했다.

작은 점의 모습이 점점 커졌다.
점이 아니었다.
그것은 검푸른 동산이었다.
그 동산에서 무언가가 떨어졌다.

떨어지는 것은  명의 소녀다.
둘은 자매처럼 보인다.
언니로 보이는 소녀가 무어라 속삭이자, 주변에 있던 모든 마물들이 자석에 이끌리는 철가루처럼 한곳으로 뭉친 다음 얼어붙기 시작했다.

그 비현실적인 광경에 입이 다물어지지않았다.
은거 중인 대마법사인가?

어느새 지면에 안착한 두 소녀였다.
상당한 높이에서 뛰어내렸을 텐데 상처 하나 없다.
비범한 등장이다.


“괜찮냐?”

정말 듣기 싫은 목소리다.
설원제 이후 행방불명인 사람이 아닌가. 피투성이 대공의 제자이자, 유리 아이나르의 제자이기도 하며, 처음으로 내 뺨을 친 여자.


“루시아?”


파르판이 말했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야. 파르판, 라이오라.”

나는 몸을 움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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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지만 파프니르 판 아세드 러프 스케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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