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화 〉63화- 돌아온 사람 (6)
* * *
가도를 맹렬히 달리던 라이오라의 마차가 근처의 야영지에서 멈췄다.
창을 통해 바깥을 살피니 검은 장막이 천천히 깔리고 있다.
그렇다. 밤이 찾아온 것이다.
라이오라가 말했다.
“여기서 휴식을 취할 거예요. 다들 불만은 없으시겠죠?”
불만이 있을 리가 있나, 우리 모두 동의했다.
말들은 체력적인 면에서 지쳤고, 우리는 정신적인 면으로 지쳤다.
아니, 나만 지친 건가?
악독한 녀석들.
계속 이야기를 토해내게 만들다니.
라이오라의 수행원들이 뚝딱뚝딱 천막을 세우기 시작했다.
재주도 좋다.
우리는 할 일 없이 그 모습을 구경하며, 마을 주민들에게서 받은 먹거리를 씹었다.
마법으로 도와줄까도 싶었는데 그러면 저들의 일거리를 빼앗는 꼴이 아닌가?
강제로 실직시키는 건 좀 그렇지.
“아?”
불현듯 알니타크가 맥이 빠지는 목소리를 냈다.
왜 그러지? 뭐라도 본 건가?
나는 이상함을 느끼며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왜 그래?”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훑은 알니타크는 발꿈치를 들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언니야. 잠깐만 따라와.”
알니타크답지 않게 강압적인 말이었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용변은 아닐텐데.
용은 생리현상을 하지 않으니까.
“지금?”
“지금.”
그녀의 목소리는 지독한 한기가 서려 있었다.
용납하지 못할 것이라도 본 눈빛이군.
라이오라와 파르판에게 주변을 좀 둘러보고 오겠다는 언질을 줬다.
“시간이 늦었으니 조금만 둘러보다 오세요. 루시아 씨.”
“네네.”
나는 라이오라의 말에 건성으로 답하며 알니타크를 따라갔다.
찬바람이 쌩쌩 몰아쳤다.
보온 마법이 아니었다면 감기라도 걸렸겠네.
머잖아 울창한 침엽수림이 나타났다.
알니타크는 말이 없다.
나는 이 어색함을 참다 못해 물었다.
“어디 가는 거야?”
알니타크가 뒤에 보이는 희미한 불빛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파르판이랑 라이오라를 말하는 거야?”
그녀는 고개를 주억였다.
5분 정도를 더 걸었을까.
숲에 깊이 들어온 건지 주변은 상당히 컴컴했다.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겠는데.
라이오라, 파르판 일행과의 거리는 적당히 떨어지지 않나 싶다.
희미하던 불빛도 이젠 자취를 감췄다.
나는 알니타크에게 물었다.
“알니타크, 대체 뭐 때문에 그래?”
앞장서던 그녀가 걸음을 멈추며 나를돌아본다.
메마른 눈빛이다.
나는 그녀에게서 생소함을 느꼈다.
“아빠.”
“왜?”
“뒤.”
갑자기 공포물로 노선 변경하지 말아줄래?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검은 인영이 서 있었다.
폐부가 경직됐다.
“윽.”
놀래라.
가슴에 손을 얹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는구만.
“잘도 칼리오라 없이 백룡을 구했군.”
실로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다.
이렇게 반가운 사람이 또 있을까.
“서연이냐?”
그는 차분하게 답했다.
“그래. 갑자기 사라져서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아, 그건…….”
나는 말을 하려다가 알니타크를 흘겼다.
그녀가 본 사람이 서연이나 보다.
“당신은 누구야?”
알니타크의 질문에 서연은 능청스럽게 답했다.
“네가 따르는 인간의 친구지.”
그의 발언에 아이는 눈매를 좁혔다.
아이의 은색 눈동자가 새하얗게 타올랐다.
“당신이 아빠의 친구건, 뭐건 상관하지 않아. 하지만.”
“하지만?”
“서연은 아빠의 이름이야.”
“그래서?”
“너의 이름이 아니라는 거야.”
알니타크의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냉랭하다.
아니, 재도 따지고 보면 난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지?
서연이 ‘얘 좀 어떻게 해봐.’ 라는 눈빛을 내게 보냈다.
나는 미어터지는 한숨을 참았다.
“알니타크, 진정해줄래?”
“하지만.”
“알니타크.”
“……알았어. 아빠.”
알니타크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으며 서연을 향해 송곳니를 보였다.
이렇게 격정적인 반감을 보일 줄은 몰랐는데 말이지.
나는 딸을 달래며 서연에게 재질문을 했다.
“그, 질문이 뭐였지?”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물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하얀 입김이 나왔다.
“설명하자면 긴데.”
“요약해라.”
“…알았어. 네가 나를 프라시오스 영지에 던져두고 떠난 거 기억하지?”
“기억한다.”
“심심해서 주변을 돌아다녔어.”
그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칼리오라를 기다리라고 했을 텐데.”
“……별 탈이 없을 줄 알았지.”
“덕분에 계획이 크게 꼬였다.”
명명백백한 질책이었다.
내가 일을 비튼 거라 뭐라 할 말이 없긴 하다마는.
“그건 미안하게 됐수다. 아무튼, 돌아다니다 보니 선대 백룡을 만났어.”
서연의 눈에 이채가 띄었다.
“선대 백룡을?”
“어.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더라.”
“운이 좋군.”
“그러게 말이야. 거기서 흑룡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지.”
“흑룡에 관한 이야기라니?”
“흑룡이 왜 세상을 멸망시키려고 하는지 알아?”
그는 냉소적으로 말했다.
“죽일 상대의 사정을 듣을 필요가 있나?”
너도 모르나 보구나.
나는 민타카에게서 들었던 내용을 간추려서 말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죽어서래.”
너무 간추렸나?
서연은 조소를 머금었다.
“너절한 이유로군. 용이나 되는 작자가 말이야.”
와, 냉혈한인가?
동정이라도 갈 법한 이야기일 텐데.
“너진짜 흑룡을 싫어하네.”
“그러는 너는 그 말에 연민이라도 들었나 보지?”
“……뭐 약간은.”
“내가 너의 물렁한 사고를 지적하지 않은 건, 물렁한 너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 놔둔 거다. 하지만 흑룡만큼은 예외야. 과거가 어떻든간에녀석이 저지른 행동은 돌이킬 수 없다. 악당은 사연을 팔아도 악당이지.”
“…너 좀 신경질적인 것 같다?”
서연이 이마를 짚었다.
“네가 한심한 소리를 하니까 열이 올라서 그래.”
알니타크가 내 소매를 잡은 채 반박했다.
“아빠는 한심하지 않아.”
“가족 놀이는 재밌나, 백룡.”
서연의 말에 알니타크가 입을 다물었다.
용마저 조용히 만드는 입담을 가진 ‘나’라니.
정말 ‘나’ 맞냐?
“알니타크에게 심한 말 하지마.”
“알니타크는 저 백룡의 이름인 건가?”
“어. 맞아.”
“너에게 조언을 하지. 용이란 족속은 하나같이 음흉해.”
미래의 나는 용을 진짜 싫어하나 보다.
단순히 싫어하는 걸 넘어서 증오에 가까운 거려나.
“그렇게 싸잡아서 말할 건 없잖아. 알니타크는 착하다고.”
“과연 그럴까?”
은근한 눈빛으로 알니타크를 보는 서연이다.
알니타크는 서연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파직, 번개가 튀는 것 같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해져가는 건 내 착각이 아니지?
나는 둘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하여튼, 나는 한동안 선대 백룡과 같이 지냈어.”
“흑룡은 오지 않았나?”
“알니타크를 출산할 때 맞춰서 왔어.”
나는 알니타크를 보았다.
그녀의 맑은 눈동자에는 어색한 미소를 짓는 내가 비췄다.
이렇게 밝히고 싶은 진실이 아니었는데.
“아빠.”
“숨겨서 미안해. 나는 너의 어머니에게서 의부 역할을 받은 인간이야.”
“……짐작하고 있었어.”
짐작하기는, 손이 떨리고 있잖아.
“미안해.”
그녀가 도리질했다.
“사과하지 마.”
“…알니타크.”
“서연은, 서연은 알니타크의 아빠야, 그렇지?”
“맞아.”
“그걸로 된 거야.”
이렇게 착한 애가 어디 있을까.
감동을 받은 나는 알니타크를 끌어안으려고 했다.
훼방만 없었다면 그랬겠지.
“신파는 나중에 찍고, 설명이나계속해라.”
밉살맞은 놈 같으니.
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서연을 보았다.
“알니타크의 출산으로 약해진 백룡은 흑룡을 상대할 여력이 없었어.”
“그랬겠지.”
“그 때문에 백룡은 우리를 동대륙으로 날렸고.”
서연은 납득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소재를파악하기 어려웠던 거로군.”
소재를 파악하기 어렵다니?
나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보았다.
“너 내 몸에 추적기라도 붙여놨냐?”
“비슷한 처리는 해뒀지.”
어쩐지 절묘한 순간에 오더라.
“음흉한 새끼.”
“어차피 나인데, 뭐가 문제지?”
그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좀 짜증나네.
나는 머리를 긁었다.
“야, 하다못해 너한테 연락하는 방법이라도 가르쳐줘라.”
“연락 말인가?”
“그래, 답답해 죽겠다.”
그는 그제야 반지를 던졌다.
금색 반지였다. 나는 내 손에 껴진 다른 금반지를 보았다.
둘이 외형이 유사했다.
“어? 유리가 준 거랑 비슷한 반지네?”
“그 모양새를 따왔으니 비슷하겠지.”
“아무튼, 여기다 마나를 흘려 넣으면 연락을 할 수 있다는 거지?”
“그래.”
“참 늦게도 준다.”
“원래 줄 생각 없었다.”
“근데 왜 주는데?”
“저번처럼 멋대로 사라지면 곤란하니까.”
아하, 일종의 보험이시다?
나는 혀를 내밀며 중지를 올렸다.
서연이 주먹을 치켜들었다.
“맞고 싶냐.”
움찔.
아세드와 유사한 폼에 몸이 반사적으로 반응했다.
뭐지, 왜 쫄았지?
“아, 왜 아세드 같은 말을 하냐.”
“스승과 제자는 닮는다고 하지.”
“뭐야. 너도 아세드가 스승이었냐?”
“스승이었지.”
휘이잉, 바람이 불었다.
왜 동질감이 들지?
절레절레 머리를 저었다.
“서연.”
“말해라.”
이제부터 꺼낼 주제가 상당히 민감한 주제인데,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냐.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그가 팔짱을 풀었다.
“뭘 그렇게 뜸을 들이지?”
“동대륙에서 흑룡의 사도에 관한 내용을 들었어.”
“그런가.”
그의 말문이 잠시 막혔는지 답이 늦었다.
평상시의 태연자약한 반응이 아니었다.
동요하고 있다.
“알고 있었어?”
“뭘 말이지.”
“연류가 사도라는 거.”
침묵이 감돌았다.
그리 길게 유지되지는 않았다.
“그래.”
“왜 놔뒀어?”
“녀석은 변수가 없으니까.”
“변수가 없다니?”
“추후에 미치는 영향이 전무하다는 소리다.”
“확실해?”
“그래.”
“네 말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매번 구라핑만 존나게 치는데.”
그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 믿을 거 안다.”
“아, 새끼가 진짜.”
“무엇보다 지금 시점에서 그 녀석이 제일 강하니처리할 수도 없거든.”
나는 눈썹을 모으며 입을 벌렸다.
“아세드나 흑룡보다 강하다고?”
“설마 흑룡의 첫 번째 사도가 아무나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그, 그건 아니지만.”
“만만하게 여기지 마라. 미숙한 흑룡보다 훨씬 강하니까.”
“……파워 인플레가 너무하잖아요.”
“녀석도 오래 살았으니 별 수 없다.”
오래 살았다고?
“얼마나 오래 살았는데?”
서연은 턱을 어루만졌다.
“들은 바로는 흑룡과 비슷하게 살았다던가.”
용도 기나긴 세월에 풍화되어 삶을 거부하고 마는데, 감히 인간이 그만한 세월을 버틸 정신력을 가질 수 있나 싶기도 하다.
그쯤되면 인간 나무네.
“정말 위험한 녀석 아니지?”
“단언할 수 있다.”
“어째서?”
“연류의 목적은 흑룡의 죽음이니까.”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