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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2화 〉71화- 여정길에서 (1) (72/130)



〈 72화 〉71화- 여정길에서 (1)


* * *

“그래서 어떻게 됐는데?  자식이 네 원수였어?”

파르판은 답하는 대신 정면을 가리켰다.

“마을이 보이는군.”

그의 말대로 목책이 둘러진 아담한 규모의 마을이 나타났다.
설마 이야기를 그만하자고 에둘러 말하는 건 아니겠지.

그런 감질나는 짓은 용서할 수 없다.
내가 불만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니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왜 그러지 루시아?”

“왜 그러긴, 여기서 말을 끊는 건 무슨 심보야.”

“불만인가?”

“그거 아냐? 사람이화나는 두 가지 행동 중 하나가 말을 하다가 끊는 거고, 나머지 하나는…….”

“하나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오랫동안.
그러자 녀석은 깨달았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법 얄미운 말이군.”

역지사지다, 이 자식아.

“내가 당한  그대로 돌려준 건데 뭘. 아무튼, 그 녀석이 네 원수 맞아?”

파르판은 시선을 자신의 발치에 잠깐 두었다가 마을 쪽을 바라보았다.

“이후에 개인적으로 조사를 했어.”

“조사?”

“공교롭게도 부모님이 살해당한 날과 그 자가 평민을 죽인 날이 부합하더군.”

우연의 일치라 우기기에는 힘든 감이 있다.
이쯤되면 확정이 났다고 봐도 무방하군.

“빼박이네.”

“빼박이 뭐야?”

“빼박이 뭐지?”

알니타크와 파르판이 동시에 물었다.
나는 옆머리를 매만졌다.

“사촌이란 놈이 범인인  같다고.”

“나도 그렇게 생각해 루시아.”

고저없는 목소리지만, 감정마저 결여된 건 아니다.
그의 눈은 차갑게 타올랐다.

부모님의 원수를 찾은 소년은 어떤 심정이었을까.
당장이라도 죽이고 싶지 않았을까.
그의 마음에 어떤 상흔이 났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근데 그게 레니가 너를 괴롭히는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그 일이 있은 뒤로 레니를 대하기가 껄끄러워서 피해 다녔어.”

“그녀가 너를 괴롭히는 이유가 그거라고? 고작 그거 뿐이면 너무한  아니냐?”

파르판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너무한 건 나야.”

성인군자 납셨군.
실례인 건 알지만, 그의 감정을 더 캐물었다.

“네가 레니를 피한 건 원수의 혈연이어서 껄끄러웠던 거야?”

“그런 이유는 아니야.”

“그러면?”

“내 친구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신경을 쓸 테니까. 그게 싫었어.”

절친한 친구의 부모를 죽인 놈이 자신의 사촌이라면 난처한 입장이긴  것 같다.
그래도 마냥 피해서  일은 아니라 생각한다.
피해서 얻을 수 있는  잠깐의 유예 뿐이니까.

“레니도 알아야지 않겠어?”

“나는 그녀의 앞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확고한 어조다.
외곬이군.

“어쨌든, 레니는 자기 사촌이  부모를 죽였다는 걸 모른다는 거지?”

“그래, 몰라.”

“걔가 알게 되면 어쩔 거야?”

만일의 가정이지만, 확률이 완전한 0이 아닌 이상 충분히 발생할  있는 상황이다.
삶은 의외에 변수가 늘 도사리고있으니까.

“내가 말하지 않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 결코.”

나는  가슴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말할 수도 있잖아?”

“너는 그럴 사람이 아니지.”

“나 입 싼 편이야.”

“네가 그런 안하무인의 인간이었다면 몇 번이나 우리를 도와줬을 리가 없어.”

 말에 뭐라 항변할 수 없다는 게 아쉽군.
우리는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파르판은 품에서 은색의 패를 꺼내서문지기로 추정되는 사내 둘에게 보여주었다.
그 둘은 은색의 패를보더니 놀란 어조로 물었다.

“은의 모험가라니, 본인이 맞소? 어려 보이는데.”

파르판은 검을 툭툭 건드렸다.

“증명하길 원하시오?”

“……괜한 힘을 빼고 싶진 않군. 마을에서 소란만 피우지 말게.”

“긁어 부스럼을 만들 생각은 없소.”

“들어가시게.”

입장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나는 그들의 대화에 의문점이 생겨 파르판에게 물었다.

“은의 모험가가 뭐야?”

“모험가의 등급이야. 나무, 동, 철, 은, 금, 백금 순으로 나뉘어.”

게임으로 따지면 티어 같은 건가?
문득 궁금증이 생겼다.

“저기, 다이아는 없어?”

“……다이아?”

무슨 소린지 모르겠다는 표정 짓지 마쇼.
나도 말하고 쪽팔리니까.

마을로 들어온 우리는 하룻밤 묶을 곳을 물색했다.
마을 주민의 도움으로 적당한 여관을 찾아, 방  개를 구했다.
나와 알니타크가 같은 방을 쓰고 파르판이 독방을 썼다.

여관에서 내온 식사를 마치고 알니타크와 함께 몸을 씻은 다음 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침대는 삐걱거리고, 쿠션도 좋지 않았지만, 정신이 노곤해서 그대로 엎어졌다.

피곤한 정신과 별개로 바로 잠에 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침대에서 몸을 뒤척이고 있자니 알니타크가 엉겨 붙어왔다.
가슴팍에서 따뜻한 입김이 느껴졌다.

“아빠 갑갑해?”

“아니, 따뜻한 게 딱 좋네.”

그녀를 굳이 밀어내지는 않았다.
타인의 온기는 편안함을 주는 법이다.
나는 잠들기 전 파르판이 한 이야기를 떠올렸다.

부모를 잃고 자살하려던 소년이 모험가에게 구해져 복수를 결심했고, 실력을 증진하기 위해 학원에 들어왔다.
그런데 하필이면 학원에서 사귄 친구의 사촌이 원수라는 상황이라니.

잔혹동화 같은 이야기다.
둘은 어떤 결말을 맞이 할까.

가능하면 행복한 결말이 좋겠는데.
불행한 건 몸서리치도록 싫다.

눈꺼풀이 무거워지고, 의식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렇게 하루가 갔다.

* * *

날이 밝고 다시여정길에 올랐다.
식사는 여관에서 가볍게 때웠다.
때문에 발걸음은 산뜻하다.

다만,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을 보니 신물이 올라올 뻔했다.
저길 다 지나가야 한다는 거 아니야.
이 가냘픈 다리로.

현기증이 날 거 같다.
체력적인 면은 분명 늘긴 했지만, 장기간의 도보는 그 누구든 힘든 법이다.
나는 기운이 빠진 목소리로 파르판에게 물었다.

“얼마나 가야 할까?”

“도보로는 시간이 상당히 소요될 것 같네.”

절망적인 답변이다.
괴성이라도 지르고 싶어라.

“이럴  알았으면 말이라도 살 걸 그랬나.”

파르판은  잘라 말했다.

“과소비야. 차라리 승합마차를 타는 편이 돈이 굳겠지.”

“그런가?”

“말은 유지비가 많이드니까.”

으음, 따지면 자가용 같은 건가?
그보다 금전감각이 현실적인 녀석과 함께 하는  얼마 만인지 모르겠군.
소시민적 감성이 되살아나는 기분이든다.

“그래도 걷는 건 지겹단 말이지.”

행군은 군대에서 하는 것만으로 족하다.
별안간 알니타크가 소매를 잡아당겼다.

“언니야 걷는 거 귀찮아?”

또랑또랑한 목소리에는 활기가넘쳤다.
용이라서 그런가, 조금도 피곤한 기색이 없다.

하기사, 아이들의 체력은 백만돌이나 다름이 없지.
하루 온종일 뛰어다녀도 지치지 않는 조카가 생각나는군.

“조금?”

“변신할…우붑.”

나는 경이로운 속도로 알니타크의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늦었지만.

“변신?”

쏟아낸 말을 담을 수 있는 마법이 있다면당장 배우고 싶군.
나는 작위적인 미소를 지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알니타크를 째려보니 그녀는 킥킥거리며 웃고 있었다.
일부로 그런 건가?
나중에 혼내줘야겠다.

파르판이 지도를 보며 나를 위로했다.

“다음 마을에는 라펠드 공작령으로 향하는 승합 마차가 있다니까 그때까지만 참으면 될 거야.”

“거기까지는 언제 가냐고오.”

진짜  딱 감고 그냥 날아가?
예전보다 마법의 대한 조예도, 육체적인 면도 강화됐다.
충분히 해볼 만한 짓이지 않나?

머리를 흔들었다.
알니타크는 견딜 수 있어도, 파르판은 힘드리라.
또, 라펠드 영지에 마법적 장벽이 쳐 있다면 한줌의 고깃덩이가 될 수도 있겠지.

“텔레포트를 배웠어야 했는데.”

별의 마법을 완벽하게 배우지 못한 것보다도 그게  아쉬웠다.
유리를 먼저 찾아서 그 마법부터 배운 다음 칼리오라를 찾을 걸 그랬나.

생각이 짧았다.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네.

걷고 쉬고를 몇 시간 반복하고 있으니,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한둘이 아니었다. 여섯은 족히 넘었다.

그들은 능숙하게 우리를 에워쌌다.
뭐지, 깜짝 이벤트인가?

“멈춰라.”

댁들이 멈춰놓고  멈추라는 거야?
머리가 딱한 놈이 지껄인  분명했다.
나는 기가 찬 나머지 반문했다.

“이미 멈췄잖아?”

두목으로 추정되는 험상궂게 생긴 사내의 시선이 나를 훑었다.

“퉁명스러운  굴복시키는 맛이 있겠군.”

그 말에 동조하듯 옆에 있던 부하가 말했다.

“남자는 그렇다 쳐도 계집들은 상등품이네요, 대장.”

저렇게 틀에 박힌 말을 지껄이는 녀석이 있긴 하구나.
어디 교본같은 거라도 주나?
두목은 헛기침을 하며 파르판에게 말을 걸었다.

“크흠. 이봐, 어린 친구. 좋은 말 할 때 돈이 될만한 물건이랑 여자는 놔두고 가. 그러면 신사답게 행동해주지.”

“신사답게 행동한다는 건?”

“상해없이 보내주겠다 이거야.”

파르판은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그들을 본 다음, 나를 살폈다.
내 눈치는 왜 살피냐?
나는 파르판에게 부드럽게 웃어주었다.

“어허, 웃는 것 봐라. 대장, 저년 저거 요물입니다, 요물!”

“대장,  꼴리는데요!”

“이 새끼들이!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이다!”

저들끼리 북치고 장구치고 지랄났다.
사물놀이 일당인가?
파르판은 양손을 들었다.

“이거 일진이 사납군.”

두목이 비아냥거렸다.

“살다 보면 그런 날도 있는 거야, 새끼야. 행복한 날만 있는 건 아니지.”

파르판은 한심하다는 듯이 답했다.

“내 이야기가 아니라 당신들에게 하는 이야기야.”

“뭔 개소리야?”

나는 딱 3초간 고민했다.
무슨 마법을 쓰지?

빙결계나 화염계, 전격계는 말에게 피해를  수 있다.
그렇다고 물 관련 마법은 말이 젖어서 축축하게 될 거고, 흙도 말 갈기에 먼지를 풀풀 날릴 거 같다.

역시 그거 밖에 없구만.
손뼉을 치며 말했다.

“날아가라.”

 말이 끝나자마자 말 위에 탄 여섯 명의 사내가 발리우드 액션을 취하듯 과장스럽게 허공을 날았다.
지면에 머리가 닿을 때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는 상판이  봐줄 만했다.
이게 슬랩스틱 코미디지.

콰득, 쿠득, 같이 불길한 파육음이 여럿 들렸지만 자업자득이지.
낙마한 마적들 중에 뚜렷하게 의식을 가진 사람은  한 명도 없다.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다.
나는 양손을 털었다.

“상대를 잘 보고 골랐어야지. 하긴,그런 선구안이 있었으면 노략질을 했겠냐만.”

파르판은 마술을 본 관객처럼 탄성을 내뱉었다.

“뭘 어떻게 한 거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바람 마법에다 언령 좀 섞었지, 뭐.”

“언령 마법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어. 고매한 마법사들만 사용할 수 있는 난도 높은 마법이라던가.”

“그렇게 대단한 건 아닌데.”

“겸양이 지나치군.”

대단한 건가?

“으음, 난 맨날 써서 잘 모르겠다.”

“우와! 언니야! 이거 봐! 말이야, 말!”

알니타크는 처음  말이 신기한지 눈을 반짝이며 말 주위를 기웃거렸다.
그녀의 천진한 모습에 불쾌했던 마음이 확 풀렸다.

마침 다리도 아팠는데 잘 됐다.
나는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살다 살다 말도 기부를받아 보는구나. 고마워라.”

탈 것이 제발로 찾아오다니, 이런 행운이 있나.
파르판은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뭐 어때서?
타인의 물건을 빼앗으려는 염치없는 사고방식을 가진 놈들은 제 물건을 빼앗겨도  말이 없는 거야.

“그런데 루시아. 말은 탈 줄 아나?”

“아.”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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