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75화- 칼리오라 (1)
이따금 생각한다.
왜 소중한 사람들은 제멋대로 떠날까.
남겨진 사람의 마음을 헤아려줬으면 좋겠다.
아니, 헤아렸다면 그렇게 떠나지는 않았겠지.
내 곁에 있는 사람들은 죄다 죽고 만다.
소중한 사람을 만들지 말아야 하는 걸까 싶어.
그랬다면 이렇게 아프진 않았을 테니까 말이야.
이 아픔은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잃는 건 도무지 익숙해질 수가 없다.
아아.
당신들이 내 곁을 떠나는 건, 분명 당신들이 좋은사람들이어서다.
자신의 생명보다 타인의 생명을 중시하는 바보들이어서다.
나는 지킬가치가 없는 사람인데.
대단한 사람이 아닌데.
진짜 바보들이야.
“하아, 하아.”
숨을 고르며 전방을 주시한다.
두족류를 닮은 마물의 촉수가 여러갈래로 뻗어온다.
침착하게 검을 사선으로 그으며 근접한 촉수를 제거하고, 뒷걸음질 치며 거리를 벌렸다.
우웅.
검명이 일었다.
은은한 백색의빛이 검에 서렸다.
그 끔찍한 날, 그러니까 설원제 이후로 얻은 힘이다.
어떤 이유에서 얻은지는 몰라도 나는 이 힘이 지극히 불쾌했다.
묻고 싶고 따지고 싶다.
왜 이리 늦게 발현이 됐어?
조금만 더 일찍 얻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다면 나도 내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노력을 할 수 있었을 거야.
그들의 곁에서 싸울 수 있었을 거야.
분명 칼리오스 오라버니는 죽지 않았겠지.
루시아, 너를 잃지도 않았을 거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가정이다.
이미 지나간 뒤에 이랬다면, 저랬다면 따지는 것만큼 한심한 것도 없다.
그들은 제멋대로 나를 지켰다.
그리고 나를 떠나갔다.
나는 언제까지고 보호받는 입장이야.
누군가의 보살핌으로 삶을 연명하는 멍청한 공주.
제 손으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무능력한 공주.
스스로에게 환멸이 나.
나도 당신들을 지키고 싶은데.
그렇게 못하니까.
땅을 내딛는다.
군더더기 없는 몸놀림으로 두족류와 유사한 마물에게 접근하여 놈의 목을 단숨에 베어냈다.
목뼈까지 끊어낸 위력.
순수한 내 완력으로는 아무리 노력해도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미증유의 힘으로 하여금 그 불가능한 일을 가능케 했다.
하지만 고작 이 정도의 힘에 취해 현재에 안주할 생각은 없다.
더 강해져야 해.
강해지고 강해져서, 더 이상 잃지 않을 거야.
잃지 않을 것이다.
별안간 내 안의 내가 비웃는다.
칼리오라.
멍청한 칼리오라.
강해진다고?
의지는 좋아.
하지만 말이야.
더 잃을 게 있어?
이제 지킬 게 없는데?
‘엔펠이 있어.’
그럴까?
그치만 그녀도 곧 죽고 말 거야.
‘그렇게 두지 않아.’
네주위를 봐.
아무 것도 남지 않았어.
황량한 풍경 뿐이야.
‘아니야.’
부정하지 마.
사실 알고 있잖아.
너는 살고 싶지?
그들을 희생양 삼아서라도 살고 싶어해.
머리가 지끈거렸다.
‘닥쳐.’
루시아.
미칠 것 같아.
차라리 소중해지지 말지 그랬어.
왜 소중해져서 이렇게 내 마음을 도려내는 거야.
멍하니 있으니 좌우에 있는 마물이 팔을 휘적이며 나를 노렸다.
여긴 전장이다.
다른 건 생각하지 마.
죽이는 것만 생각해.
들끓던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래,나는 한없이 냉정해야 해.
복수를 할 거잖아?
허릿심을 이용한 회전 베기로 쇄도하는 팔을 절단했다.
핏방울이 얼굴에 튀었다.
눈에 피가 들어갔는지 따가웠다.
하지만 지금 눈을 감으면 위험하다.
그러니까 참았다.
참는 건 자신있다.
나는 견딜 수 있어.
당신들이 없는 세상도 견디고 있는 걸.
마물을 벤다.
베고, 또 벤다.
비릿한 피 냄새는 나지 않는다.
코가 마비됐기 때문이리라.
나는 상대적으로 가까운 마물의 가슴팍을 걷어차며, 호흡을 길게 이어나갔다.
호흡은 멈추지 않았다. 멈춘 순간 누적된 피로가 닥쳐올 게 자명하다.
움직여야 해.
멈추지 말아야 해.
나는 시야가 좁아진 걸 느꼈다.
고개를 털며 주변을 둘러보니 고립된 형국이었다.
너무 깊이 들어왔구나.
그래도 문제 될 건 없다.
위기는 나를 더욱 갈고 닦는다.
꺾이지만 않는다면 더욱 단단해진다.
자신을 다독이며 전방으로 돌진한다.
랜스차징을 하듯 찌르기를 감행한다.
몸을 던지다시피 한 일격은 양팔을 X자로 교차시켜서 막으려는 마물의 팔뚝을 관통했다.
그 뿐만이 아니다. 관통된 검은 마물의 심장까지 닿았다.
뼈를 우그러뜨리고 살점을 헤집는 소음과 단말마의 비명이 귀를 울린다.
“아핫.”
유쾌하다.
어떠냐.
나도 할 수 있어.
검은 깊게 박혔는지 수월하게 뽑히지 않았다.
별 수 없이 검을 포기하고 바닥에 굴러다니는 검을 들었다.
무게중심은 별로지만 없는 것보단 낫다.
검에 백색의 기운을 실었다.
마물들이 주춤거렸다.
왜 그래?
더 덤벼.
더 많이 덤벼들란 말이야.
“핫.”
탄식이었을까, 한숨이었을까.
아니면 둘 다 였을까.
칼을 높이 든다.
“덤비지 않고 뭐해?”
이런 노골적인 도발에도 그들은 섣불리 나서지 않았다.
내가 썰어버린 마물의 숫자만 서른이 넘으니 당연한가 싶기도 하다.
아니.
마물들은 ‘녀석’을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쿵, 쿵.
지면을 울리며 나타난 마물을 올려다봤다.
녀석은 이족보행을 했으며, 키는 3m에 다다랐다.
“크네.”
녀석의 육체는 극한까지 단련한 남성의 육체를 닮았다.
벌레가 꿈틀거리듯 잔뜩 부풀려진 근육들이 움직인다.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실핏줄이 전신에 돋아나 있는 게 사뭇 징그럽다.
그 모습만 보면 그냥 근육질을 가진 거인이라 느낄 수도 있겠으나, 결정적으로 머리 부분이 괴상했다.
마물의 머리는 소의 머리와 유사했다.
구전으로 전해지는 명칭이 있다.
반인반마.
미노타우르스.
우울한 시선으로 괴물을 본다.
너를 쓰러뜨린다면 나는 강해졌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녀석은 자신의 상체만 한 도끼를 내려찍었다.
나를 향한 도끼는 무섭도록 빠르다.
피할 수 없다.
맞받아쳐야 한다.
전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캉!
쇠와 쇠가 부딪히자 불똥이 튀었다.
힘의 차이는 확연하다.
내가 밀린다.
그래도 버티는 건 검에 백색의 기운이 서려있기 때문이다.
“으극.”
그런 힘을 빌렸음에도 팔근육이 파열될 것만 같다.
미노타우르스는 연이어 아래에서 위로 도끼를 올려쳤다.
이번 일격에 나는 몸이 붕 뜨는 감각을 느꼈다.
충격을 버티지 못하고 몸이 허공을 날고 있다.
“윽.”
낙법을 취해 충격을 최소화했으나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통증을 호소할 틈은 없다.
나는 재빠르게 일어났다.
방금의 맹공을 막아낸 여파로 오른쪽 팔근육이 파열됐는지 오른팔이 추욱 늘어졌다.
끔찍한 격통이 뇌를 좀먹었다.
견뎌내.
잘하는 거잖아.
놈이 비웃음을 머금는다.
울화가 치민다.
웃지 마.
나를 비웃지 마.
숨을 가다듬었다.
피하지 않는다.
사력을 다해 쓰러뜨릴 거야.
전신의 기운을 검에 쏟아부었다.
환한 광체가 검에서 뿜어져 나온다.
미노타우르스는 결미를 내겠다는 듯 도끼를 양손으로 꾹 쥐며, 머리 위로 치켜들었다.
나도 왼팔로 검을 들며 되받아칠 자세를 취했다.
누가 질 줄 알고.
이길 거다.
녀석의 도끼가 내게 당도한다.
나 역시 검을 움직인다.
그 감각은 갑작스레 느껴졌다.
온 세상이 멈췄다.
아니, 한없이 느려졌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미노타우르스가 내려치는 도끼는 무척이나 느렸다.
반면 나는 평상시의 속도로 멈춘 세상을 활보할 수 있었다.
서걱.
내 검이 도끼를 베어내며 미노타우르스의 상반신을 갈랐다.
3m에 달하는 거체가 반토막이 났다.
쿵, 거인이 쓰러진다.
고양감을 느꼈다.
성취감을 느꼈다.
그리고 우울함을 느꼈다.
“저하!”
엔펠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물의 무리를 뚫고 온 나의 기사에게 말을 걸었다.
“어서 오게 엔펠 경. 우두머리로 보이는 마물은 처리했네.”
“……저하, 그 몰골은.”
나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멋대로 달려나가서 미안하네. 몸이 근질근질했단 말이지.”
엔펠은 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적절하게 와줘서 살았다.
남은 마물을 처리할 힘이 남아 있지 않으니까.
나는 의식을 잃었다.
* * *
의식이 들었다.
또 며칠이나 흘러간 걸까.
최근에는 이렇게 마물을 사냥하고 기절하는 일에 반복이었다.
위험한 행동이라는 건 자각하고 있으나, 어차피 죽기밖에 더 하겠냐는 마음도 없지는 않다.
라펠드 공작은 내 행동에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흑룡의 수하인 마물을 처리하는 일은 흑룡과 무관함을 증명하는 일이니, 쌍수를 들고 환영했으면 환영했지 거부하지는 않는 것이다.
대화를 나눠본 라펠드 공작은 영민한 사람이고, 야심이 있는 사람이다.
그는 내 상징성을 원했고 나는 복수를 원했다.
서로가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
사실 복수만 하게 해준다면 왕위야 아무래도 좋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라버니의 역을 자처한 것도 되짚어 보면 복수를 위해서였으니까.
라자러스 반 바히프 오라버니.
저만큼 당신의 죽음을 간절히 바라는 사람은 없을 거예요.
가만히 누워있으니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하, 깨셨습니까.”
엔펠의 목소리였다.
나는 목이 건조함을 느끼며 답했다.
“막 깼어.”
그녀가 방문을 여는 소리가 났다.
방에 들어온 걸까.
천장만 보고 있어 확실치는 않다.
“미음을 가져왔습니다.”
나는 침대에서 간신히 상반신을 일으켰다.
온 몸에 쥐가 나면 이럴까 싶네.
고개를 문 쪽으로 돌렸다.
거기에는 엔펠이 자리했다.
그녀는 그릇을 올려둔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저 그릇에 미음이 담겨있나 보다.
솔직히 뱃속에 뭔가를 넣고 싶지 않았다.
“괜찮아.”
“드신 게없지 않으십니까.”
“배가 고프지 않은 걸.”
내 말이 무색하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나는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걱정입니다.”
“뭐가?”
엔펠은 화가 난 기색이 역력했다.
“공녀도 말하지 않았습니까. 무리하지 마시라고.”
“무리하고 있지 않아.”
“위태위태하셔서 보는 제가 다 괴롭습니다.”
“걱정을 끼쳐서미안해. 근데 괜찮은 걸.”
“……저하.”
나는 힘없이 입꼬리를 올렸다.
“그나마 마물을 죽이고 있으면 덜 괴로워. 다른 마물 소식은 없는 거야?”
엔펠이 입술을 짓씹었다.
“있습니다만, 한동안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엔펠은 주치의가 아니잖아.”
“제 심정을 조금이라도 헤아려줬으면 좋겠습니다.”
“내 심정도 헤아려줘.”
그녀는 참혹하게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나딘이란 마을에 마물의 군락이 형성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더군요.”
결국에는 말해 줄 거면서 버틴다니까.
나는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공작은 언제 나딘에 토벌대를 보내겠대?”
“이틀 뒤입니다.”
“그래? 내가 빠질 수는 없겠네.”
기대가 돼.
이번에는 어떤 마물이 기다리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