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화 〉78화- 흑룡의 사도 (1)
좌중은 영안실처럼 고요해졌다.
그럴 만도 하다.
늑대가 말한 ‘백룡’은 그만한 파급력을 가진 존재니까.
무려 그 흑룡의 대척점이라 칭할 수 있지 않은가.
한낱 들짐승이 자신의 의사를 타자에게 전달하는 기행도 놀랍긴하지만, 일행들에게는 해묵은 역사서에서나 언급될 백룡이 근처에 있다는 사실이 더 놀랍겠지.
저 늑돌이의 주둥이에 입마개를 채워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한데, 어쩐 일로 어린 인간의 모…….
나는 늑대의 사념을 끊으며 물었다.
“늑돌이, 어떻게 의사소통이 되는 거냐? 저번에는 안됐잖아.”
늑대의 시선이 알니타크에서 내 쪽으로 향했다.
푸른 안구에서 미약한 적의가 느껴졌다.
-나는 늑돌이가 아니다. 열쇠.
“나도 열쇠인지 뭔지가 아니거든. 이렇게 말랑한 열쇠가 어디에 있냐?”
내 말에 에드리스 교수가 눈썹을 들며 이마를 쓸었다.
“루시아. 자네는 지금 누구와 대화하고 있지?”
“누구냐니. 그야 늑돌이랑 하고 있죠.”
“늑돌이?”
그의 푸른 눈이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나는 검지로 흰 늑대를 가리켰다.
“저 늑대를 지칭하는 말이에요.”
그는 진심으로 궁금하다는 듯이 물었다.
“늑대는 어떤 말도 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대화가 가능하지?”
네…?
뭐라고요?
쟤 방금까지 말하지 않았어?
그거때문에 조용한 거 아니었냐고.
나는 늑돌이를 응시했다.
“늑돌아.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전에 자리를 옮기지. 백룡께서 허락해주신다면 가능한 일이겠지만.
늑대의 말에 알니타크를 봤다.
알니타크는 내 시선을 알아차리곤, 입술을 시옷자로 만들며 고개를 돌렸다.
또 왜 그러실까.
나는 가장 유력한가능성을 떠올렸다.
“알니타크, 혹시 삐졌어?”
“응.”
그녀는 볼에바람을 집어넣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삐져도 대답은 해주는구나.
내가 한 잘못이 있어 윽박지르기보단 타이르는 어투로 말했다.
“그만 화 풀고 자리 옮기는 거 허락해줄래?”
“싫어.”
삐딱한 대답이군.
“허락해주지 않을 거야?”
“응.”
화가 단단히 났구나.
알니타크가 내 말을 거부하는 날이 오다니, 역사적인 순간이다.
이게 반항기라는 건가.
“그래, 아쉽네.”
내가 너무 시원하게 수긍해서 그런지, 알니타크가 나를 흘기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더 안 매달릴 거야?”
“싫어하는데 억지로 허락을 구하고 싶지는 않네.”
내가 애처로운 표정을 지으며 유감스러운 어조로 말하자, 알니타크가 양손을 휘적거렸다.
“으읏, 아냐. 알니타크는 아빠의 말 잘 듣는 아이야. 허락할 거야!”
여자의 마음은 갈대에 빗대어 표현하곤 하지.
그러면 여자아이의 마음은 무엇인가.
지푸라기인가?
“그래? 억지로 들어주지 않아도 좋은데.”
“아니야아! 알니타크는 아빠를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아!”
알니타크의 얼굴이 봉숭아가 물들 듯 붉게 달아올랐다.
항상 마이페이스를 유지하는 아이여서, 이런 뜻밖에 모습도 앙증맞게 느껴졌다.
참 착한 아이라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이며 일행들을 돌아보았다.
“그럼 늑대랑 대화 좀 하고 올게요.”
내 허무맹랑한 말에 그들은 미치광이를 보는 듯한 시선을내게 보냈다.
너무들 하시네.
그들의 허락을 구하는 건 아니었다.
단순한 통보지.
* * *
에드리스 교수의 마차와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나와 알니타크, 그리고 흰 늑대가 대면했다.
오묘한 삼자대면이다.
비록 원고, 피고, 증인의 관계는 아니지만 세명이 서로를 보고 있으니 삼자대면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뭐, 네 말대로 자리를 옮겼다.”
-고맙군.
“감사 인사나 받자고 한 건 아니야. 나도 궁금한 게 많으니까.”
-감사의 표시로 아까 한 질문에 답을 주지. 이 사념파는 내가 지정한 자만 들을 수 있다. 원래라면 백룡만 들어야 했겠지만…….
녀석이 말꼬리를 흐렸다.
뒷말은 대강 짐작이 갔다.
“내가 엿들었다?”
-바로 맞췄다.
“네가 실수한 건 아니고?”
-그럴 리가 없다.
“이미 다 들었는데 뭐가 그럴 리가 없다냐?”
내가 잔뜩 이기죽거리자 늑대는 무안한지 화제를 돌렸다.
-……그보다 백룡께서는 어째서 어린 인간의 형태를 취하고 계신 겁니까?
“그게 문제 있어요?”
질문을 받은 알니타크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나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모양이다.
-그렇지는 않지만…….
“무엇보다 전 당신이 아는 백룡이 아니에요.”
-그 말씀은?
“당신이기다리던 백룡은 죽었어요. 저는 그 백룡의 자식입니다.”
늑대는 침묵했다.
선대 백룡, 민타카가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그가 말문을 연 건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고 나서였다.
-정녕 사실입니까.
“거짓을 고할 이유가 없네요.”
알니타크는 늑대에게 지극히 사무적인 존댓말을 사용했다.
항상, 혀짧은 소리를 내던 아이가 격식을 차려서 답하니 괴리감이 상당하군.
알니타크야, 아빠는 낯설다.
-…그렇다 한들 저희가 행해야 할 일은 변치 않을 겁니다.
늑대는 사념파는 어딘가 허탈했다.
나는 그 말에 의아함이 피어올랐다.
“저희가 할 일이라니?”
-뻔하지 않은가, 흑룡의 절멸이다.
늑대의 사념에서 시꺼멓게 타오르는 증오가 느껴졌다.
그 원색적인 감정에 잠깐 할 말을 잃었다.
“흑룡이 싸워야 할 상대라는 거는 이의가 없는데. 네게 강요받을 사항은 아닌 거 같은데?”
늑대가 단정적인 어조로 사념을 전했다.
-어린 백룡은 흑룡을 멸해야 한다.
“그걸 왜 네가 정하는데?”
-선대 백룡이라면 응당 그랬을 테니까.
선대 백룡이 흑룡을 멸한다고, 후대 백룡까지 그 행동을 담습해야 한다고?
그건 아니지.
괴멸적인 논리다.
무엇보다백룡은 진심으로 흑룡을 멸하려던 적이 없다.
그녀는 단지 필사적으로 흑룡을 살리려고 했을 뿐이다.
그 방향이 잘못됐을 뿐이지.
“너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 같은데?”
-뭐를 말이지?
“선대 백룡은 흑룡을 진심으로 죽이려 한 적이 없어.
-유언비어를 퍼트리지 마라. 그분은 내게 약조해주셨다. 흑룡을 죽여주시기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민타카는 그럴 용이 아니야.”
-……그분의 이름을 알고 있군.
“그야 만났으니까 알지. 그것보다 정말로 민타카가 흑룡을 죽인다고 약조했다고?”
-그렇다.
이상하다.
민타카가이 늑대를 속인 건가?
무슨 이유로?
의문은 잠시 접어두고 늑대를 응시했다.
“죽일 계획은 있고?”
-다 방도가있지.
“방도?”
-그러기 위해서는 열쇠의 존재가 필수 불가결이지만, 열쇠는 충분하군.
자물쇠도 아니고 열쇠가 있다면 흑룡을 죽일 수가 있나?
서연의 말로 열쇠는 정순한 마나를 함유한 인간을 총칭하는 말이라던데.
뭔가 비밀이 따로 있는 건가.
“무슨 소리야, 그게?”
-깊이 알 것 없다.
한껏 달아오른 대화가 잠시 멈췄다.
알니타크는 차분한 목소리로 늑대에게 물었다.
“당신은 지금부터 뭘 하실 겁니까?”
-금발의 아이가 가는 곳에 흑룡의 사도가 있습니다. 우선 그 녀석을 처분할 예정입니다.
금발의 아이는 칼리오라를 지칭하는 말이겠지.
그보다 그녀가 가는 곳에 흑룡의 사도가 있다고?
“……흑룡의 사도가 여기에 있다고?”
-그래.
괴상한 수녀 발렌시아한테 듣기는 했지만, 진짜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나는 턱을 매만졌다.
“야 늑돌아.”
-나는 라스칼이라는 이름이 있다.
라스칼?
그거 너구리 아니냐.
“늑돌이가 더 입에 착 감기는데.”
-시답잖은 소리 마라. 열쇠.
“야, 나도 열쇠가 아니라 루시아라는이름이 있어.”
-논점을 흐리지 마라. 대화가 진행되지를 않는다.
“아니, 누가 먼저 흐렸는데.”
-그래서 할 말이 뭐지?
“너, 설원제 때 오른을 쫓은 이유가 뭐냐?”
되게 예전 일처럼 느껴지지만, 라스칼과 만나게 된 경위를 따지고 보면 이 자식이 오른을 쫓아다녀서였다.
-오른?
“그, 너랑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쫓던 파란 머리 여자애 있잖아.”
-아, 그 아이 말인가.
늑대는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이 당시 정황을 설명했다.
-피냄새를 쫓았더니 그 아이가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었는데 덤벼들더군.
“정말로? 그냥 지켜보기만 했어?”
-그래. 보고만 있었는데 그 아이가 부하의 머리통을 박살을 내더군.
뭐지, 문답무용 살인마인가.
말로만 들어보면 전적으로 오른의 잘못이었다.
내 고개는 보리처럼 자연히 숙여졌다.
“……저희 애는 아니지만,민폐를 끼쳐 죄송합니다.”
-됐다. 네가 한 일도 아닌데 사과하지 마라.
의외로 관대한 늑대님이었다.
라스칼은 흑룡과 적대를 할 것이라면함께 다니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했다.
적의 적은 아군이라던가.
뭐, 전력으로서는 부족함이 없는 녀석이다.
“라스칼이랑 함께 다닐까, 알니타크?”
뾰루퉁한 알니타크가 물었다.
“알니타크가 싫다고 하면 안 할 거야?”
“그럼.”
“……아빠는 거짓말쟁이.”
음, 사람은 누구나 다 후천적인 거짓말쟁이란다.
알니타크는 더 따지지 않고 승낙했다.
대화를 마치고 마차로 향하니, 모르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다.
늘어난 사람들은 전부 흉흉한 병장기를 꼬나쥐고, 철제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였다.
라스칼을 발견한 그들이 병장기를 들려고 하자, 대장 격으로 보이는 사내가 이를 제지했다.
분위기가 좀 그러네?
나는 칼리오라에게 다가가 귓속말을 했다.
“저 사람들은 뭐야?”
“라펠드 공작의 기사들이야.”
나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칼리오라를 보았다.
“라펠드 공작의 기사들?”
“응.”
“그들이 왜 여깄어?”
“마물이 출현했다는 나딘 마을로 향하던 도중에 내가 저 늑대에게 납치당했거든.”
“납치?”
“응, 그래서 그들이 찾아온 거야.”
아…….
나는 라스칼을 원망 어린 눈으로 흘긴 다음 물었다.
“저 기사들 마물을 토벌하려 가는 도중이었어?”
“맞아.”
“그런 사람들이랑 왜 칼리오라가 함께 있는 거야?”
“나도 마물을 사냥하고 있으니까.”
“칼리오라도 마물을 사냥해?”
“어쩌다 보니?”
아니, 그게 어쩌다 보니라는 말로 넘어갈 일인가?
우리들이 속닥거리는 것을 본 기사는 주저 없이 다가왔다.
키가 엄청 크다.
190cm는 될 거 같은데.
나와 칼리오라의 몸에 그림자가 드리웠다.
“늑대와 담소를 나눈다는 정신 나간 인간이 자네로군?”
그는 유쾌함과 호탕함을 반반 섞은 목소리를 보유한 사내였다.
외모도 적당히 훤칠하다.
“……그 말은 어디서 들으셨어요?”
“루드비히 에드리스 교수에게 들었네.”
입이 가벼운 양반 같으니.
기사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대화는 잘 풀렸는가?”
“아, 뭐 적당히요?”
그는 은근한 어조로 물었다.
“그러면 그 늑대를 살처분해도 되겠는가?”
“예?”
“삼 왕자 저하를 해하려고 한 미물이 아닌가.”
으음,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돌발적인 행동을 하는 늑대는 무섭긴 하지.
나는 칼리오라를 돌아봤다.
“이 늑돌이를 죽이실 겁니까, 저하?”
내 울적한 눈길을 확인한 칼리오라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그런 말은 하지 않았네.”
그 다음에는 라스칼을 노려보았다.
“늑돌아, 저하를 해할 거니?”
늑대는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라스칼이다. 그리고 금발의 아이를 해할 마음은 없다.
그 답변에 밝게 웃엇다.
“그렇다네요. 당사자끼리 원만하게 합의가 된 거 같은데요?”
기사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가득했다.
그 표정은 실로 미친년을 보는 듯한 얼굴이었다.
“자네, 미쳤나?”
아이 씨발.
나 안 미쳤어, 새끼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