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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2화 〉81화- 흑룡의 사도 (4) (82/130)



〈 82화 〉81화- 흑룡의 사도 (4)

칼리오라가 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뒷걸음질 치려는 모습이 포착됐다.
이 자리를 피할 의지가 충만해 보이신다.

나는 도망치려는 칼리오라의 손목을 붙잡았다.
그녀가 반응할 틈을 주지 않고 방에다 우악스럽게 집어넣었다.
그리고 출입구를 닫았다.

달칵.
문소리가 유난히도 크게 울렸다.
칼리오라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나를 올려봤다.

“……루시아, 이게 무슨 짓이야.”

내게 행동이 억압된 그녀의 표정은 대리석으로 만든 조각상처럼 딱딱하게 굳어갔다.
비록 우발적인 행동이었으나 후회는 없다.

이럴 때는 뻔뻔하게 나가야 한다.
저자세로 임했다간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을 공산이 크니까.
그 왜, 목소리 큰 놈이 장땡이란 말도 있지 않던가.

무엇보다 이대로 칼리오라를 놓친다면 누명을해명할 기회가 영영 사라지고 말 터다.
나는 스스로의 행동을 합리화하며 친구를 보았다.

“우선 내 말부터 좀 들어줘.”

“…무슨 말?”

“너는  오해를 하고 있어. 나는 살면서 아이를 낳아  적이 없어.”

앞으로 낳을 일도 없고.
……없겠지?

서연에게 원래 몸으로 돌아갈  있는지 물어볼  그랬나?
그러고 보니 이 게임을 끝내면 집으로 돌아갈 있는지도 물어봤어야 했는데.

아무튼, 내 말에 칼리오라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졌다.
그녀는 이런 말을 해도 되는 건가 싶은 표정으로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그러면 이 아이는……?”

“당연히 내  아이는 아니지.”

알니타크랑 피가 이어져 있으면 내가 용이지, 인간이겠니.

“칼리오라, 너한테는 알니타크가 몇 살처럼 보여?”

칼리오라는 검지로 뺨을 두드리며 알니타크를 훑었다.
연령을 추산하는 모양이다.

“……음, 여덟에서 아홉 살?”

유감이지만 돌잔치도 아직이랍니다.

“나는 올해로 열다섯 살이거든? 자, 보자? 열다섯에서 아홉을 빼면 여섯 살이지? 내가 다섯 살 때 성교를 해서 여섯 살 때 애를 출산해야 알니타크 정도 나이대의 애가 나오겠다, 그치? 이게 상식적으로 말이 된다고 생각해?”

“성, 성교라니.”

노골적인 단어 선정에 칼리오라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입에서 나오리라 예상하기 힘든 단어긴 하지.

나도 여자애 앞에서 이딴 망발을 할  몰랐다.
칼리오라는 머뭇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루시아는 남편이 없다는 거지?”

남편이라니,  무슨 끔찍한 말이란 말인가.
몇 시간 동안 한증막에서 찜질을 즐기다가 외부로 나왔을 때만큼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나는 평정을 유지한 상태로 답했다.

“없어.”

살면서 그런 거 만들 생각 없다.

“없어?”

“어. 없어.”

칼리오라는 대놓고 안도했다.
그 반응은 뭔데요?
하여간 나는 이 사달의 원흉인 알니타크를 노려보았다.

“알니타크, 아빠를 곤란하게 할 거야?”

“이히히.”

알니타크는 베시시 웃었다.
아빠는 이렇게 곤란한데 우리 예쁜 딸은 어쩐지 기뻐 보인다?

나는알니타크의 뺨을 쿡 잡아당겼다.

“으후아아, 아빠아 아파아.”

“못된 딸은 혼  나야해.”

“안 그럴게에!”

큭,  마성 때문에 넘어가준다.
내 행동을 관조하던 칼리오라가 질문을 던졌다.

“그, 그럼 ‘아빠’라는 말은 뭐야?”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내가 의부 역할을 맡고 있어서 그래.”

“의부 역할?”

“내가 얘를 책임지고 있는 건 맞아. 역할을 떠넘겨졌으니까.”

“역할이 떠넘겨지다니?”

쓰게 웃었다.
또 설명하게 생겼군.
유리를 만날 때도 설명하고 있는 거 아니야, 이거?

“설명하자면 좀 길어.”

칼리오라에게는 그간 있었던 일을 전부 설명했다.
서연에게 이끌려 프라시오스 변경백의 영지인 설산에서 깨어난 일, 멋모르고 움직이다가 백룡을 만난 일(칼리오라는 이 대목에서 커다란 탄식을 내뱉으며 나를 원망했다.),  이후 흑룡이 백룡의 둥지를 습격해 알니타크와 동대륙으로 강제로 전이된 일, 동대륙에서 하람과 노야, 등애와 아니마를 만난 일, 등등 설명하다 보니 아침이 훌쩍 지나가고 어느새 점심이 됐다.

“……루시아, 내가 지금부터 들었던 말을 되내일 테니까 틀린 부분이 있으면 지적해줘.”

“그럴게.”

“첫 번째, 내가 만났던 그 이상한 사내는 미래에서 온 루시아의 조력자다.”

“맞아.”

서연이 나라는 건 밝히지 않았다.
그걸 설명하려면 이 세상이 게임이라는 것도 설명해야 했으니까.

“두 번째, 루시아는 백룡에게 자식을 넘겨 받았다.”

“그것도 맞고.”

“세 번째, 흑룡이 세계를 멸망시키려고 하고 있다.”

“훌륭해. 요악 잘하네.”

칼리오라는 눈가에 주름을 잡았다.

“차라리 루시아가 여섯 살 때 아이를 낳았다는 이야기 쪽이 더 신빙성 있겠어.”

뭐라고요?

“…믿어주지 않는 거야?”

“믿어. 루시아가 한 말이니까.”

“………칼리오라.”

그녀의 말에 감회가 새로웠다.
분명 처음에는 나를 믿지 않는다고 면전에서 말한 그녀가 아닌가.

나를 신뢰하지 않던 왕녀는 이제 나를 신뢰하는 칼리오라로 바뀐 것이다.
내심 뿌듯함을 느끼고 있으니, 칼리오라가 물었다.

“그러면 이 아이가 정말로 용이라는 거지?”

“맞아.”

침착해진 금색 홍채가 알니타크를 주시했다.
알니타크는 그녀의 시선이 꺼림칙한지 고개를 틀었다.
어쩌다 보니 알니타크도 내 여정을 같이 듣게됐네.

“근데 알니타크는 왜 루시아를 아버지라 부르는 거야? 굳이 따지면 어머니가아닐까?”

지당한 의문이었다.
그 말에 알니타크가 나를 살폈다.
마치 말해도 되냐는 듯이.

너 설마, 알고 있는 거야?
내가 남자였었다는 걸?
알니타크는 의뭉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아버지는 아버지예요.”

알니타크의 말에 칼리오라가 뭐라고 말하려 할 때, 노크 소리가 들렸다.

“루시아 경. 혹시 칼리오스 저하와 같이 계십니까?”

“예, 저와 함께 계셔요.”

“저하. 마을의 척후병이 마물의 군락지를 식별했다고 합니다.”



엔펠의 보고에 칼리오라는 옷에 묻은 먼지를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군. 어서 가세나.”

“지금 가게?”

금발의 왕녀가 내게 손짓했다.
칼리오라의 손짓에 가까이 걸어가니, 그녀는 내 귀를 잡고 속삭였다.

“루시아도 서둘러서 준비해.”

여부가 있겠나요, 왕녀님.

“응, 그럴게.”

칼리오라가 떠나고 방에는 나와 알니타크  만 남았다.

“알니타크. 우리도 준비해야겠다.”

그렇게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기고 있는데, 딸이 우두커니 나를 응시했다.

“아빠.”

진중한 목소리였다.
그래서 나 역시 진지하게 답했다.

“왜 그러니, 알니타크?”

“내 엄마는 어떤 분이었어?”

“엄마라니?”

“민타카라는 백룡 말이야.”

알니타크는 민타카를 어머니로 지칭하려고 마음먹었나 보다.
그렇게 되면 나는 민타카와 결혼한 게 되는 건가?

이게  헛소리래.
내가 봤던 백룡을 떠올려봤다.

“사려가 깊고, 배려심이 넘치는 용이었지만, 애정이 뒤틀린 용이기도 했지.”

그녀가 흑룡 민타카에게 행한 일은 그만큼 잔인한 짓이었다.
아무리 애정에 기반한 행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알니타크는 상념에 잠긴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아빠.”

바쁜데 왜 자꾸 부르니.
그래도 나는 화내지 않았다.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만큼 중요한 일이지 않겠는가.

“말하렴.”

“아빠는 알니타크가 어떤 용이 됐으면 좋겠어?”

손이 멈췄다.
아무래도  이야기를 듣고 생각할 거리가 많아졌나 보다.
글쎄, 어떤 용이 됐으면 좋겠냐라.

“어떤 사상이나 힘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용이 됐으면 좋겠어.”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그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 *

사실 나는 지난밤에 깨어 있었다.
잠든  했을 뿐이다.

그러면 루시아, 아니 서연이 자신의 이마를 쓸어준다거나, 뺨에 입을 맞춰준다거나 하는 포상을 내려줬으니까.
이번에도 그러겠지, 나는 눈을 감고 있었다.

머잖아 뺨을 매만지는 손가락이 느껴졌다.
당신은 수줍은 듯이, 부끄러운 듯이 말했다.

“내가 뭐가 좋다고 그럴까.”

어딘가 괴로운 듯 하면서도, 안타까운 그 어조에 심장이 저렸다.
당신의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소리치고 싶다.
그는 말을 이었다.

“알니타크야, 나로 괜찮겠어? 나 같은  부모여도 말이야.”

오히려 되묻고 싶어요.
 같은  당신의 자식이어도 괜찮겠어요?

나는 당신의 피를 잇지도 않았다.
그런 나를 자식으로 생각해주는 당신이 너무도 좋고 미안했다.

“뭔가 미안하네. 나는 너한테 해준  없는데.”

그렇지 않다.
그저 내 이름을 부르는 것만으로도,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나는 행복하다.
이 충족감은 그 어디서도 얻을 수 없으리라.

“나는 참 걱정이 돼.”

아버지.

선연히 빛나는 당신이란 존재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당신은 모른다.
본디 보석은 자신이 보석이라는 걸 모르는 법이다.
자기 자신을  수 없으니까.

당신은 자상하고, 잔걱정이 많으며, 짓궂은 구석도 있는 귀여운 사람이다.
혹여라도내가 깨지 않도록 방음 마법을 쓰는 당신의 세심한 배려는 내 가슴을 괴롭게 한다.

어찌 이리 다정할까.
어찌 이리 감미로울까.
당신과 함께 하는 모든 순간이 내게는 찬란한 영광이다.

잠시 후 아버지는 누군가에게 통화를 걸었다.
통화 상대는 분명  녀석이겠지.

녀석은 괘씸하게도 아버지의 통화를 받지 않았다.
무려 세 번이나 말씀했는데!

내가 강해진다면 사지를 세 번 정도 찢어주리라.
그리 속으로 다짐하고 있을 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빠~ 아침이야, 일어나!”

진솔하게 고하겠다.
이 알니타크는 사고가 표백됐다.
실로 충격적인 애교였다!

아버지!
당신이란 인간은 정말 저를 미치게 만들어요!

잔뜩 이죽거려주고 싶다.
그러면 분명 당신은 얼굴을 붉히며 “잊어주지 않을래, 딸아?” 라고 말하지 않을까.

요동치는 심장 고동이 적나라하다.
혹여나 아버지에게 들키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당신은  녀석과의 대화를 즐기고 계셨다.

아득, 이를 악물었다.
나는 당신과 단란한 대화를 나누는 모든 존재가 밉다.

없애버리고 싶다.
나만을 보게 하고 싶다.
하지만 당신이 그걸 바라지 않을 테니 그러지 않을 뿐이다.

녀석과의 대화가 끝나가는지 아버지의 목소리에 피곤함이 묻어나왔다.
이윽고 아버지는 곯아떨어지셨다.

정확히는 내가 재웠다.
나는 녀석을 향해 말했다.

“인간.”

-……이 목소리는 백룡이로군.

떨떠름하다는 반응이지만 나도 그렇다.
상대하고 싶지 않은 놈이다.

하기야, 아버지를 제외하면  세상은 무채색이나 다름없다.
이 건조하고 삭막한 세상에 색을 입혀주는 건 오로지 당신 뿐인 것이다.

“네 목적은 해피엔드라고 했지.”

-그래.

“그 목적의 끝에  아버지의 행복은 보장된 거냐.”

대답의 여하에 따라서는 생사가 갈라질 것이다.
그는 침묵했다.
만약 네놈이 아버님을 이용하려 무슨 수를 쓰더라도 네놈을 도륙을 내주마.

-그래, 이건 그걸 위한 일이기도 하니까.

녀석은 쓸쓸한 어조로 답하며 통화를 끊었다.
나는 누워서 오늘 일을 생각했다.

칼리오라라고 했던가.
아버지가 어여삐 여기는 여자.
불쾌한가,  아닌가를 따져보면 잘 모르겠다.

아버지의 좋은 점을 잘 알고 있기는 하고, 제법 싹싹한 녀석이지만 나는 독점욕이 강하다.
공유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

당신의 미소가 내가 아닌 누군가를 향한다면 시기심으로 배알이 뒤틀릴 테니까.
눈을 감았다.

다시 뜨니 아침이었다.
아버지는 아직 주무신다.

이건 기회였다.
확실한 기회였다.

나는 아버지의 몸 위에 올라탔다.
나와 비슷할 정도로 말랑말랑한 살갗이다.

“아버지.”

다정다감하게 속삭였다.
묘하게 짜릿했다.
아버지의 표정이 미약하게 일그러졌다.

악몽이라도 꾸고 계시는 걸까.
그렇다면 이 딸이 힘이 되어드려야지.
아버지를 계속해서 불렀다.

결국 아버지가 깨셨다.
우리는 대화를 나눴다.
그러다가 그 말을 들었다.

“아빠가 없으면 어쩌려고 그러니.”

어젯밤, 당신이 말했던 ‘나는 참 걱정이 돼.’ 라는 말과 오버랩이 됐다.
아버지가 없으면요?

나는 잠깐 그 세계를 상상해봤다.
무가치하다.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버지가 없는 세상, 그런 세상은 없어도 되는 거예요.”

진심이었다.
당신은 사과했지만 내 속에 붙은 화마는 가라앉지 않았다.
마침 밖에 칼리오라라는 여자의 인기척도 느껴졌다.

아버지.
그런 잔인한 말을 하신 댓가는 톡톡히 치루어 드리게 할 거예요.

나는 목청껏 음성을 드높였다.
바깥의 금발 계집애가 들을  있도록.

이후 일은 뭐, 아버지의 고생스러운 변명으로 끝을 맺었다.
그 변명에는 내가 모르는 이야기가 많았다.

내가 당신과 만나기 전의 이야기.
내가 당신과 만난 이야기.
내가 당신과 만난 후의 이야기.

나는 당신을 알아가고 있다.
그 사실이 몸이 떨릴 정도로 즐거웠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가 바라는 이상적인 용은 어떤 걸까.

“아빠는 알니타크가 어떤 용이 됐으면 좋겠어?”

당신의 푸른 눈동자가 나를 향한다.

“어떤 사상이나 힘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용이 됐으면 좋겠어.”

그는 막힘없이 답했다.
줄곧 품어왔던 생각이었을까?
 막연한 소리다 싶다.

어떤 사상이나 힘에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용이라.
아무리 좋게 본다 한들 그저 망나니가 아닌가?
뭐, 아버지가 바라니 저렇게 되는 것도 나쁘진않으리라.

하지만 안타깝게 됐어요.
저는 이미 당신에게 종속된 용이에요.

제게 자유는 죽음과도 같아요.
당신을 떠나야 한다는 거잖아요.

그러니 저는 그렇게 될 수 없는 거예요.
아버지, 아니.

서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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