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5화 〉94화- 내막 (4)
유리가 눈을 떴을 때 펼쳐진 풍경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아수라장’이라 표현할 수 있으리라.
두 기술의 충돌로 인해 일대가 황폐한 불모지로 변모해버렸다.
가공할만한 파괴력을 보여준 두 초인의 상태는 상이했다.
파프니르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사람처럼 비틀거렸고, 민타카는 그런 그를 고고히 내려다봤다.
어느 쪽이 우세한지는 불보듯 뻔했다.
유리와 파프니르는 흑룡의 무결한 저력에 현기증이 났다.
“용을 상대하는 거 벅차네.”
유리는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파프니르가 이런 나약한 소리를 하다니, 하늘이 갈라지는 날인가?
“……너니까 이 정도나 버텨낸 게야.”
둘은 이게 마지막 대화임을 직감했다.
그들의 머리 위에는 강대하고 세찬 마나의 격류가 마구 소용돌이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격류의 중심에는 당연히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민타카가 자리했다.
그녀는 매우 안타깝다는 듯이 머리를 저었다.
『유감, 이제 한계.』
민타카의 주위를 파도처럼 휘몰던 마나의 격류는 신기루처럼 소실되었다.
또한, 그녀의 육체는 잿가루가 서풍에 흩어지듯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작의적으로 의도한 상황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게 뭐야?”
파프니르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유리를 보았다.
그녀는 자신이 추측을 여과 없이 말했다.
“본래 흑룡은 봉인된 녀석이지 않느냐. 이렇게 오랫동안 활동할 수는 없었던 게 아닌가 싶노라.”
이 추론 말고 작금의 사태를 납득할 수 있는 추론은 달리 없었다.
민타카였던 육체가 허물어진 만큼, 흰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 카펠루스의 육체가 재구성됐다.
이윽고 민타카의 형체는 완전히 사라지고, 남은 것은 벌거벗은 카펠루스 뿐이었다.
그는 민타카와 달리 공중에서 머무를 능력이 없는지 중력에 이끌려 아래로 떨어졌고, 곧 지면과 추돌했다.
파프니르는 혀를 찼다.
“이게 끝이야?”
다소 허무한 결말이다.
파프니르는 숨을 고르며, 자신의 왼손 검지로 저만치 떨어진 카펠루스를 가리켰다.
“저 녀석을 처리할 건데, 이견 없지?”
“후환을 제거하려면 그러는 편이 맞다 생각하느니라.”
유리는 가능하다면 자신의 손으로 카펠루스를 죽이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내가 죽이게 해줘.’라는 억지나 고집을 부리지는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의 몸 상태를 알았다.
녀석을 죽이기는커녕 도리어 인질이나 되지 않으면 다행일 테지.
파프니르에게 맡기는 게 도리에 맞다.
“그럼 간다.”
“그렇게 하거라.”
파프니르는 금이 간 자신의 애병을 쥐고 카펠루스를 향해 걸었다.
짧은 거리여서 시간은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
검으로 숨통을 끊기 전, 그가 막 의식을 되찾았는지 피를 한 움큼 토하고 눈을 떴다.
그 눈은 핏빛처럼 짙은 붉은색이었다.
“하, 너는 누구냐?”
카펠루스의 붉은 눈동자는 호기심을 미약하게 자극했지만, 딱 그 정도의 감흥뿐이었다.
파프니르는 해야 할 일을 뒤로 미루는 우둔한 사람이 아니었고, 그의 질문에 답해주는 일 없이 목을 베어냈다.
“커흑.”
카펠루스의 머리가 데굴데굴 굴렀다.
그의 눈에는 빛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생선이 아가리를 개폐하듯 그가 입을 벙긋거렸지만, 베어낸 목은 소리를 낼 수 없는 법이다.
파프니르는 굴러다니는 머리에서 시선을 떼고, 검을 다잡은 뒤 카펠루스의 가슴을 찔렀다.
그의 검이 살을 헤집고, 갈비뼈를 부러뜨리며, 심장을 관통한다.
“이 정도면 죽겠지.”
사아아아.
파프니르의 검은 제 역할을 마쳤다는 듯 먼지처럼 바스라졌다.
“아버지의 유품을 이렇게 잃게 되는군.”
아쉽지는 않다.
무기란 근본적으로 용도가 정해진 소모품이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생명을 앗아가는 것밖에 할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도구.
그런 도구로 유리를 구하지 않았는가.
유리는 아버지의 유품과 비교하는 게 실례일 만큼 귀중한 사람이다.
값어치 있는 교환이었다.
파프니르는 카펠루스가 죽어가는 과정을 전부 눈에 담았다.
한순간의 방심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이.
이윽고 카펠루스의 심장이 멈췄다.
그래, ‘카펠루스의 심장’은 멈춘 것이다.
두근!
끝나지 않음을 전하듯 카펠루스의 시체 주변에 검은 그림자가 거미줄처럼 퍼져나간다.
그 혼탁한 그림자는 파프니르에게도 향했다.
유리가 소리쳤다.
“파프니르! 도망쳐!”
늦었다.
몸의 반응이 더디다.
파프니르는 고개를 돌려 유리를 눈에 담았다.
너만은 잊지 않겠다는 듯이.
“진짜, 질기……….”
그의 말이 끊겼다.
파프니르는 없어졌다.
그림자에 먹혀버린 것이다.
유리의 이성이 끊어졌다.
견고히 쌓아 올린 억장이 무너져내렸다.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아냐!”
이런 결말은 바라지 않았어.
유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절규했다.
파프니르를 먹어치우고도 식탐이 남는지, 탐욕스러운 그림자는 유리를 노렸다.
피해야 해.
근데 피할 필요가 있을까?
살아서 뭘 하는데?
네가 죽었는데.
차라리 저 그림자에 먹히면 너를 볼 수 있을까.
유리가 삶의 의지를 포기하려 할 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카펠루스 녀석, 죽기 직전 흑룡의 봉인을 풀었군. 덕분에 상황이 좋아.”
유리를 향하던 그림자가 모두 조각났다.
전부 한 사내의 검에 의해서다.
그 사내가 펼치는 검술은, 검술에 문외한인 유리에게도 익숙했다.
그야 줄곧 보아왔던 검의 행적이니까.
갑자기 난입한 사내는 파프니르의 검술을 쓰고 있었다.
유리가 입을 열었다.
“……네놈은.”
루시아를 습격한 줄 알았던 남자다.
머리끝까지 화난 자신의 마법을 능수능란하게 피해낸 남자이기도 했다.
검은 머리카락에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내.
그의 정체는 서연이었다.
서연은 빠른 어조로 말했다.
“정신차려라, 유리. 파프니르는 구할 수 있으니까.”
이미 죽은 그를 어떻게?
유리의 의문을 풀어줄 생각도 없이 그는 검은 망토를 나부끼며 그림자의 중심지로 움직였다.
그 민첩한 모습은 구전동화에서나 나오는 ‘전멸의 기사’를 닮아 있었다.
그녀는 그의 행동을 망연히 지켜보았다.
그림자는 사나운 짐승처럼 맹렬하게 다가오는 서연을 노렸다.
서연은 그림자의 동선 따위는 이미 예측했다는 듯 절제되고 유려한 검술로 그림자를 베었다.
스걱, 서걱!
유리는 그가 휘두르는 검을 눈으로 뒤쫓았다.
검붉은 도신의 검.
색깔이 좀 탁해진 것 말고는 파프니르와 들었던 검과 똑같았다.
그래서 놀랐다.
파프니르는 그 검이 아버지의 유품이라고 말했으니까.
파프니르의 아버지, 철혈대공의 검이 형제검이라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유리의 경악과는 별개로 서연의 전진은 막힘이 없었다.
두근, 두근.
어느 지점에서 심장 소리가 났다.
“여기군.”
심장이 맥동하는 위치를 찾아낸 서연은 바로 검을 찔렀다.
유리가 보기에 그는 맨땅에 검을 꽂아 넣는 멍청한 짓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변은 돌연히 일어났다.
분명 맨바닥이라 생각했거늘, 먹물처럼 새까만 액체가 터지며 그 안에서 파프니르가 나왔다.
유리는 아연실색하며 달려갔다.
“파프니르!”
이 순간만큼은 그림자건, 서연이건 중요치 않았다.
그저 그가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했다.
여남은 그림자들은 무방비하게 달려오는 유리를 노리려고 했다.
하지만 서연이 찌른 곳이 역린이었는지, 그림자들은 마치 물에 나온 생선처럼 금세 힘을 잃고 축 늘어졌다.
서연은 유리의 접근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그래서 제지했다.
“오지 마라, 유리.”
서연의 말에 유리가 발걸음을 멈출 위인은 아니었다.
다만, 뒤에 이어진 경고성 발언은 그녀의 발길을 재고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너까지 잠식된다.”
“잠식……?”
잠식이라니.
불길하기 짝이 없는 단어가 아닌가.
“숙주라는 편이 맞는 건가.”
서연의 시니컬한 웃음에 유리는 가슴이 찌르듯 아팠다.
“그, 그게 대체 무슨 말인 게냐.”
“쉽게 말하면 카펠루스 꼴이 난다.”
카펠루스 꼴.
유리는 그 상태가 어떤 상태인지 잘 알았다.
“흑룡의 심장을 가지게 된다고?”
“그래, 아니면 심장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고.”
파프니르가 위중한 상태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그녀의 사고가 일순 마비됐다.
“무, 무슨 이런 경우가 다 있느냐!”
“나도 이 경우는 처음 봐서 모르겠군.”
“방, 방법은 없는 게야?”
유리는 절박했다.
서연은 그런 그녀를 매정히 쳐낼 위인이 되지 못했다.
“있으니까 진정해라.”
“정말인 게냐!”
“그래.”
서연은 파프니르의 신체를 면밀히 살폈다.
그의 전신에는 검은 핏줄이 종양처럼 자라고 있었다.
“놀라지 마라.”
“뭐에 놀라지 말라는…… 네, 네놈!”
서연이 검으로 파프니르를 찔렀다.
위치는 왼쪽 가슴 아래.
정확히 심장이 있는 위치였다.
파프니르는 괴로운 듯이 신음을 냈고, 유리는 놀라 까무러치기 직전이었다.
“죽이려는 게냐!”
“수술 집도 중이다.”
서연은 그의 심장을 한 차례 헤집고서야 검을 뽑았다.
그리고는 검날 부분으로 자신의 팔뚝을 벴다.
완전히 벤 건아니고 피가 어느 정도 흐를 정도로만 말이다.
자연스레 핏줄기는 아래에 있는 파프니르에게 떨어졌다.
유리는 동대륙 부족에서 전해지는 해괴한 전통을 보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다.
“이런 게 정말 효과가 있는 것이냐.”
“그래. 모처럼 구한 숙주가 빈사 상태니, 몸을 바꾸고 싶겠지.”
과연, 서연의 말이 사실일까?
잠시 후 사실로 밝혀졌다.
파프니르의 가슴에서 울컥울컥 검은 피가 잔뜩 샘솟더니, 서연의 팔뚝으로 향한 것이다.
기괴한 현상에 유리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팔뚝에 난 상처로 검은 피를 모조리 빨아들인 서연은 최대한 담담하게 말했다.
“이제 파프니르를 치료해라. 놔두면 죽어.”
“소녀도 알, 알고 있는 게다.”
유리는 마나를 짜내어 꿰뚫린 심장을 복원했다.
시간이 경과 할수록 파프니르의 얼굴은 혈기를 되찾았으나, 반대급부적으로 서연의 안색은 점차 하얗기 질려갔다.
파프니르의 안전이 보장되자 이성을 되찾은 유리는 멍청할 정도로 헌신적인 사내를 응시했다.
“……어째서 우리를 도와주는 게냐.”
서연은 잠깐의 침묵 끝에 답했다.
“나와 그가 바란 일이니까.”
“‘그’라니?”
“당신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지.”
더는 알려줄 수 없다는 태도에 유리는 입을 다물었다.
감히 추궁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은인이었으니까.
“그래, 소녀에게 중요한 일은 아니노라. 소녀에게는 이 멍청이만 중요한 게야.”
그 말에 서연은 부드럽게 웃었다.
비록 유리는 파프니르에 신경이 팔려 그 모습을 보지 못했지만.
머잖아 파프니르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천천히 떠졌다.
“……유리?”
그 목소리에 유리가 눈가를 쓸었다.
그럼에도 투명한 눈물이 계속해서 나왔다.
“울어?”
유리는 파프니르의 목을 끌어안으며 흐느꼈다.
“이, 바, 바보야.”
“울지 마. 마음 아프니까.”
“히윽, 누구는 울고 싶어서, 우는 줄, 히끅, 아느냐.”
크고 탄탄한 손이 유리의 머리를 덮었다.
“진정해.”
파프니르는 유리를 진정시킨 다음 서연을 보았다.
“내 말을 듣길 잘하지 않았나, 파프니르?”
“……그래, 너는 내 은인이다.”
파프니르의 눈은 서연을 올곧게 응시했다.
서연은 그 눈에 담긴 감사의 뜻을 알아차리고 피식 웃었다.
“뭘 은인까지야, 당신도 피곤할 테지? 더 자도록 해.”
“……그러면 조금 쉬도록 하지.”
파프니르는 천천히 눈을 감았고, 서연은 발걸음을 돌렸다.
여기서 할 일은 전부 마쳤다.
더 있을 필요는 없다.
그렇게 떠나기 직전, 유리가 말했다.
“자네는 이름이 무어냐.”
“……나는.”
검은 머리의 청년은 어딘가 안타까운 미소를 지었다.
“서연.”
“서연, 자네는 소녀의 은인이기도 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언질을 주는 게야. 부리나케 달려가 주겠노라.”
서연은 돌아보지 않은 채 손을 휘적거렸다.
“그 도움은 조만간 유용히 쓰도록 하지.”
그가 떠나고 고요한 바람이 불었다.
험난했지만 어떻게 이겨냈구나 싶다.
유리는 파프니르의 몸을 꼬옥 끌어안았다.
“유리.”
“……아직 잠들지 않은 게냐?”
“지금 자면 일어나는데 시간이 좀 걸릴 거 같아서.”
“그렇겠지. 그만한 고생을 했으니까.”
“그래서 말인데 미리 할 말이 있어.”
“할 말?”
“우리 결혼식 언제 열까?”
난데없는 폭탄 발언에 유리의 얼굴이 토마토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결, 결, 결, 결혼식!?”
“그래. 이거 이거 프러포즈야.”
“무, 무슨 이런 무드없는 프러포즈가 다 있느냐!”
“그래서 싫어?”
“…………싫지 않노라.”
“주례는 제자 놈에게 맡기자. 분명 좋아 죽을 걸.”
파프니르는 건방진 제자를 떠올렸다.
분명 씨근덕거리면서도 맡은 소임은 다하겠지.
그런 녀석이다.
“소, 소녀가 먼저 죽을 거 같은 게야!”
유리가 양손으로 뺨을 가렸다.
이 누나가 곧 있으면 30대라니, 안 믿긴다.
“귀여운 누나라니까.”
그의 짓궂은 웃음소리가 평야를 울렸다.
* * *
흑룡의 심장은 기체, 액체, 고체 어느 상태든 변할 수 있으며, 멸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무한의 심장이라 칭할 수 있으리라.
“크아윽.”
서연은 고통을 참아야 했다.
달군 바늘로 몸을 푹푹 찔러대는 고통을 느끼는가 하면, 망치를 맞은 것처럼 둔탁한 고통이 찾아오고, 이에 익숙해질 즈음에는 온몸에 아릿한 작열감이 들었다.
두어 번 정신을 잃었다가 눈을 뜨니, 자신과 같은 검은 머리카락의 갈색 눈동자를 가진 청년이 보였다.
“흐음, 누가 카펠루스를 처리했나 싶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네?”
평탄한 어조였으나 그 목소리에는 예리한 살기가 넘실거렸다.
“……연류.”
“너, 나를 아는구나?”
그가 의외라는 듯이 손뼉을 쳤다.
어찌 모를까.
흑룡의 사도이면서, 흑룡이 죽길 원하는 네놈을.
침묵하고 있으니 연류가 뒷목을 긁었다.
“너는 그 힘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없어. 알지?”
“…그래서 어쨌다는 거냐.”
연류가 엄지와 검지를 비볐다.
“조금 풀자는 거지. 하다못해 그녀의 의식만이라도.”
그럴 수는 없다.
그녀의 의식을 놓아준다는 건 곧 마기를 해방한다는 것과 다르지 않으니까.
반드시 잡아두어야 한다.
“거절한……크하윽.”
“네 의사는 상관없어. 내가 바라고 있거든.”
연류의 검지와 중지가 서연의 가슴팍을 꿰뚫었다.
서연의 가슴팍에서 검은 피 일부가 흘러나와 땅을 적셨다.
검은 피가 땅에 떨어졌을 때 서연은 커다란 허전함을 느꼈다.
단단히 잡아두고 있던 민타카의 의식이 풀려난 것이다.
풀려난 민타카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 피를 매개로 하여 자신의 몸을 형상화했다.
흘러나온 검은 피가 적어서일까, 크기는 전보다 훨씬 작았다.
연류의 입술은 호선을 그렸다.
“안녕, 흑룡님.”
『연류.』
“봉인은 풀렸구나?”
『응, 하얀 아이 분발했어.』
“그래도 불완전하게 풀려서인지 많이 약하네. 제대로 된 열쇠로 푼 게 아니구나? 하긴 그러니까 당했지.”
연류의 목소리에 담긴 비아냥을 알아챘는지, 민타카가 낮게 으르릉거렸다.
『그래서 반항이라도 할 셈?』
“무슨 그런 섭섭한 말씀을, 나야 늘 당신이 바라는 대로 행동하지.”
『건방져.』
“아이고, 흑룡님 화나셨네. 그러실 줄 알고 육체는 적당히 준비해뒀어. 백룡과의 대면도 바로 가능하고.”
『내 심장, 이 아이가 빼앗았어.』
“어쩌겠어. 흑룡님이 졌으니 전리품으로 주자구.”
『빼앗아.』
“싫네요. 그러면 흑룡님과 대화할 수 없잖아. 증오에 지배당하지 않은 흑룡님과의 대화는 내게 아주 귀중하다고?”
『……고작 그딴 것을 위해.』
“아무튼 잠깐 잠들어 있어요. 육체도 적당히 모아놨으니까. 정 심장을 되찾고 싶으면 나중에 찾으면 되는 거잖아?”
연류가 손가락을 튕기자 민타카의 형체가 연기처럼 사라졌다.
저번과는 다른 전개였지만 서연은 놀라지 않았다.
“이상한 일이군. 너는 흑룡의 죽음을 바라지 않았던가? 제법 친한 것처럼 보인다만.”
“……? 그걸 어떻게 알지? 난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는데.”
연류의 질문에 서연은 반문했다.
“나를 어쩔 거지?”
“질문은 내가 한 거 같은데. 자기 할 말만 하는 사람은 매력이 없다?”
“어쩔 거냐고 물었다.”
그는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렸다.
“이거 고집 있네. 사실 잡아두는 게 편하긴 한데, 너도 나랑 의견이 비슷한 거 같아서 말이야. 놔줄게. 심장은 네가 가지고 있어도 돼. 그러는 편이 내 뜻에 부합하기도 하고. 대신 나중에 도움은 되어야 한다?”
역시 이 녀석은 변하지 않았다.
정말 한결같은 놈이다 싶다.
연류는 가볍게 왔던 것처럼 가볍게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