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102화 〉101화- 파프니르 판 아세드 (6) (102/130)



〈 102화 〉101화- 파프니르 판 아세드 (6)

* * *

갑자기 냉동창고에서나 느껴질 법한 한기가 느껴졌다.
밤이라서 그런가?
음, 아무리 그래도 실내인데 오한이 느껴지다니 기괴한 일이네.

“춥냐?”

파프니르가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일정 수준 이상에 오른 전사는 체온을 조절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 그의 입장에서 내가 추위를 타는 건 의아한 일이리라.

아니, 사람이 아무리 정온동물이라도 그렇지.
그게 말이 되냐 싶었는데……, 이게 실제로 됐다.
나는 체온을 조금 올리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괜찮다.”

“그래? 그보다 어떠냐, 넓지?”

내가 말없이 엄지를 들자 그가 웃었다.
나와 파프니르는 대욕탕에 와 있다.

저번에 루시아로 파프니르의 성에 갔을 때는 굳이 대욕탕을 갈 필요가 있나 싶어서 방에 있는 욕실로 때웠는데, 이제 와 생각해보면 정말 손해 보는 짓이었다.

대욕탕은 감탄이 절로 나오는 곳이다.
매끄러운 대리석 바닥과 엔틱한 느낌을 주는 목재 조형물, 깎아서 만든 듯한 암석벽과 천장에서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샹들리에, 등등 전반적으로 현대의 찜질방에 뒤지지 않는 조형이다.

음, 오히려 능가하고 있나?
게다가 겉만 번드르르한 건 아니었다.

세정제나 향료도 종류마다 구비돼 있고, 탕도 다양했다.
냉탕, 온탕, 열탕, 한증탕, 허브탕, 탕들을 한 번씩 순회하기만 해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겠다.

외견과 내실을 전부 잡은 대욕탕.
현대면 몰라도, 중세에 이런 시설이 갖춰져 있다는 것은 그야말로 경이로운 일이었다.

이게 돈지랄이라는 거겠지.
근처에 있는 사자 조각상의 아가리에서 맑은 물이 흘렀다.

“품격이 느껴지는군.”

 칭찬에 파프니르가 팔짱을 끼며 머리를 끄덕였다.
녀석과 함께 대욕탕에 온 일의 발단은 이렇다.
그의 아버지, 철혈대공과 대면하기에 앞서몸을 청결하게 만들생각으로 목욕을 하려고 했다.

‘씻을 거냐?’

‘불결한 상태로 사람을 만나는  예의가 아니니까.’

더러운 것보단 깔끔한 사람을 좋아할 테니까.
상식이란 건 어느 세계에서나 크게 차이가 없는 법이다.
파프니르는 거듭하여 물었다.

‘혼자?’

그럼 같이 씻기라도 하랴?
나는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그런데?’

‘뭘 계집애처럼 혼자 씻냐. 같이 씻자.’

잠깐 생각해봤다.
남자랑 같이 목욕을 한다고?

크게 유난 떨 일은 아니었다.
군필자라면 안다.

체력단련 조지고 적당히 마음 맞는 놈끼리 샤워하러 가는 건 의외로 흔한 풍경이니까.
나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러지.’

그래서 지금 상황에 이르렀다.
수건으로 하복부를 가린 남정네 둘은적당히 씻고 탕에 들어갔다.
파프니르가 탄식을 내뱉었다.

“뜨끈하구만.”

그의 말대로 몸이 노곤노곤한 게 피로가 풀렸다.
파프니르는 탕 난간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새끼, 자세 좀 나오네.
제대로 즐길 줄 아는 놈이군.
나도 그와 유사한 자세를 취했다.

와, 너무 좋은데?
이러다가 진짜 잠들겠다.
몽롱해진 정신을 일깨우듯, 파프니르가 말했다.

“서연.”

“말해라.”

“너 결혼했냐?”

뭐 마시고 있었으면 뿜어내기 딱 좋은 질문이었다.

“아니.”

파프니르가 낄낄거렸다.

“그럼 홀아비란 말이군?”

누군 좋아서 홀아비인 줄 아냐.
짝이 없는 걸 어떡해?
그리고 여기서야 남자지, 원래 세상으로 돌아가면 여자라고.

“실없는 소리 마라.”

“마음에 드는 여자는 없냐?”

마음에 드는 여자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칼리오라도, 알니타크도 아닌 루시아였다.

어째서 루시아가 생각이 난 걸까?
나는 파프니르에게 ‘마음에 드는 여자는 루시아다.’라고 말할  없는 관계로말을 흐렸다.

“잘 모르겠군, 그보다 이런 질문의 저의가 뭐지?”

그는 목 근육을 이완시키며 답했다.

“저의랄 게 있나, 그냥 심심풀이지.”

흐음, 심심풀이다 이거지?

“그러면 나도 묻지.”

“오, 뭔데?”

파프니르는 내 질문이 달가운 눈치였다.

“유리라는 여자의 어디가 좋지? 그런 취향인가?”

“뭐야, 너도 남의 연애사에 관심이 있냐?”

지대하지.
무려 내 이모님의 연애사인데.
나는 동요를 감췄다.

“별난 조합이라고 생각해서.”

그는 턱을 매만지며 상념에 잠겼다.

“정말 궁금하냐?”

“애초에 궁금하지 않았다면 묻지도 않았다.”

“……음, 어느 점이라. 솔직히 몸매는 별로긴 해. 나는 가슴이나 골반이 큰 게 좋거든.”

유리가 들었다면 억장이 무너졌을 소리다.

“그러면?”

“그냥 사람이 좋은 거지. 지켜주고 싶고, 함께하고 싶고.”

“정말로 좋아하고 있구나.”

“이상하냐?”

“잘됐으면 좋겠군.”

파프니르는 의표를 찔린 표정을 지었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나 보다.

한동안 말이 오가는 일은 없었다.
꽤 어색한 상황이군.
먼저 침묵을  건 파프니르 쪽이었다.

“의중을 뜨는 건 그만하겠다. 딱 까놓고 말하지.”

뭘 까놓고 말하는데?
이미 다른 의미로 깠잖아?

나는 파프니르를 멀거니 응시했다.
그는 드물게도 망설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길래 이리 뜸을 들이지?

“네 검술, 누가 사사했냐?”

주먹만 한 레몬을 아무런 준비 없이 씹은 것처럼 시큼한 질문이었다.
원래 서연이라면 뭐라고 대답했을까.

‘네가 알 필요 없다.’ 이런 식으로 말했으려나?
내가 답하지 않자, 그가 재차 물었다.

“말하기 곤란한 사람이냐?”

그의 눈은 매서운 빛을 냈다.
곤란하지, 엄청.

회귀한 서연이나, 지금의 나나 검술은 전부 너한테서 배웠다.
이실직고하면 믿어줄까.

믿겠냐.
나라도 안 믿겠다.

“내가 말하면 나나, 너나 난처하겠지.”

“내가 난처하다고?”

“그래.”

파프니르는 욕탕에 머리를 들이밀었다.
물이 출렁였다.

잠시 후 그가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알았다. 그러면 이 질문은 불문에 부치지.”

착 가라앉은 목소리다.
나는 평정을 유지하며 물었다.

“……싱겁군? 더 캐물을  알았더니.”

“물어도 알려줄 의향이 없잖아?”

정곡이군.
파프니르는 얼굴을 문질렀다.

“그러면 그거라도 가르쳐줘.”

“그거라니?”

“네 나이. 나도 가르쳐줬잖아.”

그건 어려울 거 없지.

“스물여덟.”

“나보다 형이네.”

나는놀랐다.
 녀석의 입에서 ‘형’이라는 단어가 나올 줄 몰랐으니까.
그래서일까, 무심코 진심 어린 말을 내뱉었다.

“형은 무슨.”

불손한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걸까.
파프니르는 은은하게 웃었다.

쿠콰아아앙!
목욕탕에서 들리면  되는 폭발음과 폭연이 뭉게뭉게 피어났다.

천장에서 말이다.
건물의 파편이 욕조에 떨어졌고, 물보라가 일었다.

뭐야 이게.
지금은 평온한 상황 아니었어?

힐링 시간 아니었냐고.
갑자기 재난물로 노선을 변경하는 건 상도에 어긋나지!

나중에는 잠자다가도 쳐들어 오겠다?
……진짜 실현될 거 같아 무섭네.
나와 파프니르는 욕탕에서 일어났다.

저벅저벅.
구멍이 뻥 뚫린 천장에서 걸음 소리가 났다.
극도로 예민해진 내 기감은 상대가  명인지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두 명이군.”

파프니르가 어깨를 이완시키면서 맞장구쳤다.

“누군지는 몰라도 간땡이가 단단히 부었네.”

그러게 말이다.
감히 파프니르가 있는 욕탕을 노리다니.
신종 자살지망자인가?

두 사람이 천장에서 떨어졌다.
가벼운 몸놀림으로 보건대 제법 실력이 준수한 상대였다.

애석하게도 옷을 갈아입을 여유 따위는 없는 듯했다.
우리는 다가오는 적을 응시했다.

“응?”

파프니르가 맥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기울였다.
거기에는 검은색 정장을 입은 금발의 소녀와 검은색 드레스를 입은 백발의 소녀가 있다.

“넌 칼리오라냐?”

“예. 강녕하신 것 같아 마음이 놓이네요. 파프니르 오라버니.”

그렇다.
상대는 칼리오라와 알니타크였던 것이다!
쟤네가 왜 여기에 있지?

둘을 부르려고 하다가 깨달았다.
나는 지금 루시아가 아니라 서연이라는 것을.

그보다 둘의 반응이 이상하다.
칼리오라와 알니타크의 눈에는 선연한 증오가 담겨 있었다.
왜?

“그나저나 파프니르 오라버니에게는 실망이에요.”

거센 눈보라가 몰아치듯 냉랭한 음성이다.

“……? 갑자기 쳐들어와서 무슨 개소리냐?”

심드렁한 파프니르의 말에 칼리오라가 몸을 떨었다.

“발뺌하실 속셈인가요!”

“발뺌하고 자시고,  때문에 그러는데?”

“루시와 함께 목욕탕에 들어오셨잖아요! 저, 저도 하지 못한  남성이신 오라버니께서!”

처절하다 못해 원통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파프니르가 뒤로 물러섰다.

“……루시? 루시아를 말하는 거냐?”

칼리오라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달리 누가 있겠어요!”

어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네?
파프니르는 전의를 상실했는지 주변에 떨어진 큰 돌조각 위에 걸터앉으며 관자놀이를 눌렀다.

“잠깐만, 걔를 왜 여기서 찾아?”

칼리오라가 양손으로 주먹을 꾹 쥐었다.

“알니타크가 그랬다고요! 여기에서 루시아의 마나가 느껴진다고!”

파프니르는 왼쪽 무릎과 왼쪽 팔꿈치를 맞닿게 한 상태로 턱을 괴었다.

“알니타크는 또 누구야?”

“잔말 말고 루시아를 내놔요!”

나는 멍하니 입을 벌렸다.
파프니르에게 이렇게까지 바락바락 대드는 칼리오라라니, 새로운 면모를 보게 되는군.

심지어 원인이 나다.
괜히 가슴이 쿡쿡 찔리는데.

 잘못인가, 이거?
파프니르는 퉁명스럽게 말했다.

“없다니까?”

“거짓말 마세요! 이 짐승아!”

“이야, 우리 왈가닥 꼬마 성격 안 죽었네.”

파프니르와 칼리오라가 한창 티격태격하고 있을 때, 다른 한 사람의 시선은 오직 내게만 꽂혀 있다.
내 딸이자 백룡인 알니타크.
그녀가 무슨 말을 꺼낼지 벌써부터 불안했다.

“…뭘 보지?”

“자꾸자꾸 도망치는 아빠, 알니타크 손에서 빠져나가려는 아빠를 보고 있어.”

높낮이가 사라진 목소리가 공허하게 울린다.
투명한 음색으로 울려퍼지는 아빠라는 단어.

시끄럽던 두 사람의 대화가 잠시 중단됐다.
파프니르와 칼리오라의 경악스러운 시선이 나를 향했다.

“아빠라고? 너 결혼  했다며.”

“알니타크의 아빠……?”

나는 눈을 감았다.
그래, 인정해야겠다.
좆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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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마왕 인큐베이터님께서 원하신 호른 디 프라시오스(단발)의 전신 짤입니닷. 왼쪽이 채색이고 오른쪽이 러프인데 만족하셨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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