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9화 〉108화- 파프니르 판 아세드 (13)
* * *
유리는 원피스 자락을 붙잡으며 파프니르의 눈치를 살폈다.
“……정말 소녀가 내키는 장소만 가도 괜찮느냐?”
그는 수더분한 얼굴로 끄덕였다.
“몇 번이나 말했잖아, 그래도 된다고.”
몇 번이나 확답을 받아도 믿기지 않았다.
파프니르는 남에게 맞춰주는 유형의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자기가 하기 싫으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하지 않는다.
그게 파프니르란 인간이다.
그런 그가 자신의 의견을 굽히고 내 말을 듣는다고?
둘 중 하나다.
질이 나쁜 농담이거나, 꿈이거나.
물론 파프니르는 그 나름대로 생각이 있었다.
유리가 가고 싶은 곳들을 전부 들린다면, 우연히 진짜 유리와 만나게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희박한 가능성이긴 하지만 없다고 딱 잘라 말할 수는 없다.
둘은 같은 사람이니까.
그런 연유로 유리는 파프니르와 오고 싶었던 장소를 잔뜩 돌아다녔다.
텔레포트를 이용한 이동 덕택에 둘이 거친 장소만 수십이 넘었다.
파프니르는 휘파람을 불었다.
말을 타고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보다 훨씬 가성비가 좋았으니까.
중간 즈음에는 거추장스러운 말을 성에다 반납하고 움직였다.
“진짜 유용하네, 텔레포트.”
“소녀도 그리 생각하노라.”
파프니르의 감탄에 유리는 우쭐하며 가슴을 내밀었다.
퍽 귀여운 모습인지라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유리가 불만스럽게 노려보자 그는 손을 멈췄다.
“어, 미안.”
“……사과를 바란 적은 없느니라.”
의외네.
싫어할 줄 알았는데.
파프니르는 속내를 삼켰다.
“그나저나 우리 많이도 돌아다녔다. 그치?”
유리가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그렇느니라. 결코 적게 돌지는 않았느니라.”
“유리는 그렇게 돌고 지치지도않아?”
“겨우 이런 걸로 소녀가 지쳤으리라 생각한 게냐. 소녀는 그리 유약하지 않노라.”
장딴지를 보여주는 유리 아이나르였다.
파프니르가 보기에는 참 가냘픈 다리었지만 그러려니했다.
쌩쌩한 유리는 보고만 있어도 좋으니까.
“대단하네. 난 조금 지친다.”
유리가 질색했다.
“거짓말하지 말거라.”
“육체적으로 지치지는 않는데 정신적으로 좀 그래. 생각해봐, 내가 살면서 여성 의류점에 갈 일이 있겠냐? 보석 세공점도 그렇고. 뭐랄까, 아기자기한 곳은 나랑 안 맞잖아.”
유리가 생각해 봐도 파프니르가 여성 의류점에 가는 일은 상상이 안 됐다.
괜히 민망해진 그녀는 땅을 보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대가 있어서 너무 신난 게야.”
“뭐라고?”
그가 듣지 못했는지 되물었다.
유리는 다행이라 생각하며 코웃음을 쳤다.
“두 번은 말하지 않느니라.”
“궁금한데 말해주면 덧나냐?”
“소녀는 말을 번복하지 않는 게다.”
“완강한 유리도 좋긴 하다만.”
유리의 얼굴이 흐려졌다.
그는 이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호의를 들이댔다.
“괜한 소리 마는 게야.”
이 호의를 순순히 받아들이면 좋으련만.
왜 나는 거부하고 있는 걸까.
바보 같다.
“그래?”
파프니르가 씁쓸하게 웃자 가슴이 꾸욱꾸욱 조여왔다.
어째서 당신이 그런 표정을 짓는 거야?
애간장이 탔다.
루그펠리아 언니도 사랑을 할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유리.”
별안간 파프니르가 이름을 불렀다.
유리는 늦게 반응했다.
“으, 으응? 왜 그러느냐.”
“왜 멍하니 있어?”
너를 생각하느라 그랬다.
그녀는 무심코 그렇게 말하려다가 내용을 깨닫곤 얼굴을 붉혔다.
“……생각할 게 있어서 그랬느니라.”
“좀 쉴까?”
“…그게 좋겠구나.”
둘은 근처 벤치에 앉았다.
거리는 약간 떨어져 있다.
유리에게는 이 미묘한 거리가 마음이 편했다.
하늘을 보니 벌써 날이 저물어가고 있다.
파프니르의 붉은 눈동자를 쏙 빼닮은 노을이다.
유리는 멀거니 노을을 응시했다.
오늘 하루는 아주 인상적인 하루였다.
유별나게 다른 하루를 보낸 건 아니다.
식사를 하고, 옷을 고르고, 실험에 필요한 시약을 사고, 근사한 풍경을 감상했다.
평상시와 다른 건 아무것도 없다.
곁에 네가 있는 것 말고는.
“유리.”
“으응?”
“즐거웠어.”
그의 말이 가슴을 울렸다.
이유 모를 충만감이 차올랐다.
이렇게 쉬운 사람이었나, 내가?
“소, 소녀도 즐거웠던 게야.”
“그래서 미안하다.”
그가 돌연히 사과했다.
한없이 몽실몽실하던 기분이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졌다.
뜬금없이 사과를 하는 건 무슨 심보야?
“뭐가 미안하다는 게냐.”
유리는 말투가 뾰족해짐을 깨달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너무도 기분 좋은 상황에 갑자기 받은 사과.
어찌 기분이 구겨지지 않겠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침묵이 너무도 불쾌했다.
“이유를 말하거라, 파프…….”
유리는 추궁하려 했지만, 건너편에서 큰 굉음이 울렸다.
파프니르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무슨 일이 생긴 거 같네.”
“……그렇구나.”
“가볼게.”
그가 떠난다.
잡아.
잡는 거야, 유리.
유리는 손을 들었다가 힘없이 내렸다.
“파프니르.”
“응?”
“소녀의 텔레포트로 가는 편이 훨씬 빠르니라.”
그가 걸음을 멈췄다.
“그렇네.”
파프니르.
당신이 어떤 사정을 떠안고 있는지 모른다.
왜 사과를 하는지도 알지 못한다.
하지만 나로서는 당신을 포기할 수 없다.
이 마음이 순수한 연모인지, 집착인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좋은 걸.
* * *
어그러지고 훼손된 녀석의 몸이 복구된다.
이 정도로 죽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심장에 뭔가를 달아놓은 거 같더라니.
전신에 검은 비늘이 돋아난 서연은 심장에 꽂힌 검을 맨손으로 잡고 뽑았다.
나는 놀랐다.
순전히 힘에서 밀려난 것이다.
서연이 일어서며, 팔꿈치로 관자놀이를 노렸다.
파프니르는 검으로 팔꿈치 째 베어내려고 했다.
카가가강!
서연의 피부를 덮고 있는 검은 비늘과 내가 든 검이 맞닿자 불똥을 튀겼다.
비늘은 마치 갑주처럼 서연의 몸을 보호했다.
나는 그대로 서연의 팔꿈치 공격을 허용했고, 나가떨어졌다.
서연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달라붙으며 주먹을 휘둘렀다.
이에 나는 몸을 회전시켜 피했다.
단순히 회피를 위한 회전은 아니다.
유려한 돌려차기가 서연의 턱에 꽂혔다.
의식을 잃을 만한 깔끔한 일격이었으나 되살아난 서연은 생각보다 튼튼했다.
녀석은 뒤로 물러섰고, 나는 그런 녀석을 향해 검을 겨눈다.
“좋다, 서연.”
검 주위에 검붉은 마나가 불길처럼 휘몰아쳤다.
가공할만한 위력을 내포한 검격이 서연에게 향했다.
콰앙!
서연은 팔뚝으로 검을 막아냈다.
다만 가해진 충격이 상당했는지 팔뚝이 기이한 방향으로 꺾였으나, 금방 재생됐다.
-K’ac Ra’TiKa
그것은 분명 용언이었다.
서연의 몸에서 새파란 냉기가 일더니 나를 향해 부채꼴의 얼음 세례가 날아왔다.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받았다.
잔 상처가 났지만, 치명상을 주지는 못했다.
재생력이 뛰어난 건 서연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여름이라고 시원하게도 해주는군.”
한껏 이죽거리자, 서연의 주변에 얼음으로 조형된 검들이 생성됐다.
수는 서른 가까이 됐다.
검들은 마치 의지라도 지닌 양 제멋대로 날아왔다.
나는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세 자루의 검을 어렵지 않게 양단했다.
그 찰나, 은밀한 기습이 행해졌다.
챙!
자신의 사각을 노린 백색의 검격.
10점 만점에 6점 정도는 줄 수 있었다.
“속도가 느리다. 칼리오스, 아니 칼리오라냐?”
습격자는 칼리오라였다.
그녀는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용서하지 못합니다, 오라버니.”
용서라.
구차한 소리다.
“바란 적도 없다.”
나는 칼리오라를 밀쳐내고 베어내려 했다.
또 방해가 들어왔다.
백색의 섬광이 복부를 꿰뚫었다.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벌인 소행이었다.
원래라면 통하지 않아야 할 공격일 텐데 유효한 것은 저 둘이 흑룡의 마나와 상반되는 마나를 갖고 있기 때문이겠지.
나는 꿰뚫린 복부를 왼손으로 틀어막으며 뒤로 물러났다.
이를 용납지 않겠다는 듯 원을 그리며 날아오는 얼음 검 다섯이었다.
“흐읍.”
기합을 담아 검 다섯을 전부 베어내자,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가 다시 빛줄기로 공격했다.
“감히, 감히 아버지에게 더러운 손을 대!”
가라앉은 눈으로 적의를 불태우는 소녀를 본다.
“거슬리는군.”
풍경이 뒤바뀔 정도로 민첩하게 이동했다.
갑작스럽게 사라진 내 신형을 뒤쫓듯 흰 머리카락 소녀의 눈동자가 이리저리 구른다.
확실히 명줄을 끊을 수 있겠군.
검을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소녀는 몸을 굴렀다.
직감에 가까운 행동이었으나, 그 행동이 소녀에게는 이점으로 작용했다.
검을 피해낸 것이다.
칼리오라가 흰 머리카락의 소녀를 지키듯 앞으로 나섰다.
조잡하고 엉성한 자세다.
나는 칼리오라의 검을 쳐냈다.
웅혼한 검격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머리 위로 두 팔이 올라갔다.
몸이 빈다.
빈 몸뚱이를 베어냈다.
피보라가 일었어야 했다.
칼리오라는 쓰러지지 않았다.
내가 베어내지 못한 것이다.
어째서인지는 금방 알았다.
서연이 몸을 부딪쳤다.
시야가 흔들렸다.
그는 그대로 나를 밀쳤다.
균형을 잃고 나동그라진 나는 금세 자세를 잡았다.
“연계가 나쁘지 않군.”
“파프니르. 또 당신을 죽이긴 싫군.”
아까전에 어벙한 녀석과 동일 인물이라고는 보기 힘들 정도로 날카로운 목소리다.
“마치 죽일 수 있다는 듯이 말하는구나, 서연.”
서연은 생성한 얼음 검을 잡고 한바퀴 빙글 돌렸다.
“못할 것도 없지.”
잔뜩 비틀린 서연의 어조에 그의 곁에 있던 두 소녀가 몸을 떨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나는 웃음이 터져나왔다.
너도 나와 같아져서인가?
“난 알고 있다, 서연. 나도, 이 세계도 가짜라는 걸.”
“그래서?”
“네가 핵심을 없애려는 걸 안다.”
서연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나를 봤다.
건방진 제자 녀석이다.
“그래서?”
“그걸 없애면 이 세계는 분명 무너지겠지.”
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아마 그렇게 될 테지.”
“이 세계가 망가지게 두지는 않는다.”
“나를 붙잡아 놓으시겠다?”
나는 검을 치켜 들며 서연을 노려봤다.
“못할건 없지 않겠냐.”
서연이 웃었다.
비웃음이었다.
“스승님, 애석하게도 당신의 상대는 내가 아니야.”
“무슨 말이지?”
마나가 요동치고 공간이 어그러진다.
친숙한 두 개의 기운이 느껴졌다.
“당신도 알잖아.”
공간이 어그러지며 두 사람이 나타났다.
유리 아이나르와 나였다.
내가 나를 보는 상황에 처하게 될 줄 몰랐군.
역시 세상일은 모른다니까.
“하하, 이런 밉살맞은 제자 같으니.”
웃었다.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상황이지 않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