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0화 〉109화- 파프니르 판 아세드 (14)
* * *
노을 진 하늘에먹구름이 드리운다.
붉은 하늘이 검게 물들어가는 풍경은 마치 피가 변색 되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늘은 이윽고 먹구름으로 가득 찼다.
자연히 지상도 어두컴컴해졌다.
“유리, 주변 좀 밝혀줘.”
“알았느니라.”
유리가 빛 계열의 마법으로 광원을 생성시키니, 어두웠던 배경이 한결 밝아졌다.
선혈이 낭자하고, 발목이 굴러다니며, 사람들이 고함과 비명을 지르는 현장이 보였다.
지긋지긋하다, 이런 풍경은.
나는 염증을 느꼈다.
“파프니르, 왔습니까?”
전신에 검은 비늘이 돋아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서연의 몸을 차지한 루시아다.
나는 머리를 까딱거리며 제자를 칭찬했다.
“어. 잘 버텼다.”
“맡겨도 되겠습니까?”
루시아가 맞나 싶을 정도로 칙칙하고 우울한 낯빛이다.
지금만큼은 루시아보단 서연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음, 주변이 어두워서 그렇게 보이는 건가?
나는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래. 맡겨놔라.”
“저는 유리를 구하겠습니다.”
녀석이 말하는 유리는 본래 세계의 유리를 말하는 것이리라.
나는 눈매를 좁혔다.
“녀석이 어디있는 줄 알고?”
“짐작 가는 곳이 있습니다.”
“갑자기? 왜 전에는 이야기하지 않았냐?”
“당신을 상대하다가 깨달은 겁니다. 확실하지는 않지만.”
“나를 상대하다가 깨달아?”
서연은 답하는 대신 턱짓으로 전방을 가리켰다.
실로 건방진 작태였으나 그가 가리킨 방향에 있는 사내를 보니, 추궁할 마음이 싹 가셨다.
나와 루시아의 이야기를 심각하게 듣던 유리도 맞은편에 있는 사내를 본 것인지 손으로 입을 가렸다.
“파프니르, 저건……….”
키가 같다.
검은 머리카락에 붉은 눈동자라는 특징도 같다.
심지어는 얼굴 구조도 같다.
부정하려고 해도 정황이 너무 뚜렷하군.
“그래. ‘나’인 거 같은데.”
사내는 ‘나’다.
그나마 다른 점을 꼽자면 차림새가 있다.
그는 밝은 복장의 나와 달리 검은 망토와 검은색옷을 입었다.
그 칙칙한 행색 덕분일까.
녀석은 보호색으로 위장한 동물처럼 어둠에 잘 녹아들었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배경이랑 분간이가지 않을 정도다.
죽음을 몰고 오는 전멸의 기사가 실존한다면 저런 분위기일까 싶다.
나는 서연의 몸을 가진 루시아에게 말했다.
“가 봐라, 유리는 꼭 구하고.”
“저번처럼 만들 생각 없습니다.”
저번처럼?
그 말이 의아하긴 했지만 구태여 캐묻지는 않았다.
내 허락이 떨어지니 루시아는 곧바로자리를 떠났다.
알니타크와 칼리오라도 그런 루시아를 따라갔다.
남은건 나와 유리, 그리고 또 다른 나뿐이다.
나는 목과 어깨를 풀며 또 다른 나를 노려봤다.
“네가 벌인 일이지?”
녀석은 담담하게 답했다.
“그래.”
“너보다 약한 녀석을 괴롭히면 재밌냐?”
“글쎄, 재밌지는 않더군.”
내가 생각해도 재미없을 거 같다.
“재미도 없으면서 이딴 짓을 벌이는 이유가 뭐지?”
“내가 순순히 진실을 말하면 너는 나를 놔줄 거냐?”
나는 머리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니지, 너는 내 제자를 공격한 놈이니까.”
검은 옷을 입은 파프니르는 그 대답이 기꺼웠는지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검이나 들어라.”
그래, 우리같은 인간이 수틀리면 하는 짓이야 뻔하지.
나는 나에게 검을 겨눴다.
살다살다 자기 자신과 싸우는 날이 올 줄이야.
“유리, 물러나 있어. 혼자 상대할게.”
“……알았느니라.”
대치 상태는금방 깨졌다.
녀석이 먼저 움직인 것이다.
녀석은 뛰어오르듯 달려오다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속도를 한계까지 끌어올렸군.
초조하지는 않다.
침착하게 대처하면 될 뿐이다.
내가 나를 상대할 때, 어느 쪽으로 공격해올까.
뻔하지.
정면이다.
나와 녀석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사선으로 검을 움직였다.
마치 거울을 보는 듯하다.
카앙!
검이 부딪치며 쇠의 마찰음이 울렸다.
관성까지 포함한 일격으로 몸이 밀려났다.
그래도 버틸만 하군.
우리는 검을 맞대며 서로를 응시하는 상태가 됐다.
물론, 이 상태를 교착 상태라 볼 수는 없다.
새로운 교전의 시작이지.
나는 팔과 손목을 움직여 녀석의 머리를 노리는 검격을 선보였다.
이를 순식간에 파악한 놈은 그 궤적을 중간에 끊은 다음 내 손목을 노렸다.
뻔히 보이는 공격에 당해줄 만큼 우둔하지 않다.
검의 가드 부분으로 손목을 노린 공격을 막으며 녀석의 검을 붙잡았다.
그대로 검과 함께 메다꽂으려 했으나, 녀석은 빠르게 검을 포기하고 무릎으로 니킥을 갈겼다.
니킥을 정통으로 맞은 나는 녀석에게서 빼앗은 검을 놓치며 두어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내가 놓친 검은 허공에서 원을 그리다가 흙바닥에 박혔다.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말했다.
““재밌군.””
서로가 구상하는 검술도, 힘도, 임기응변도 같다.
더 없는 호적수의 만남인 것이다.
녀석이 바닥에 꽂힌 검을 뽑고 스탭을 밟는다.
내가 검을 휘두르면 닿을락 말락한 위치다.
사정거리가 애매하다면 거리를 좁히면 될 일이지.
나는 기습적으로 다가가 검을 횡으로 움직였다.
녀석은 허리를 향하는 검을 막을 생각이 없는지 내려베기를 실행했다.
허리를 주고 내 머리를 벨 생각인가?
나는 검로를 꺾어 내 정수리에 꽂히려는 검을 쳐냈다.
그러자 놈은 내 힘을 이용해 몸을 회전하며 검을 휘둘렀다.
깔끔한 회전베기다.
팔과 손목을 틀어 검을 세우고 허리를 낮췄다.
안정된 자세로 검격을 막아내려 했으나, 허릿심과 회전력이 섞인 공격이 지닌 저력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몸이 세 발자국 밀려났다.
녀석은 곧바로 무게중심을낮춘 자세를 취하고, 아래에서 위로 검을 쳐올렸다.
나는 반대로 위에서 아래로 검을 내리쳤다.
검과 검이 마찰하여 불똥을 만든다.
나는 잇달아 검을 움직였다.
간혹 손과 발을 이용해 페인트도 걸었다.
그러나 놈은 능숙하게 대응했다.
서로의 틈을 노리고 있기이 이렇다 싶을 유효타는 미비했다.
어느덧 삽십 여분째 공방이 지속됐다.
녀석이 측면에서 검을 찌르면 나 역시 측면에서 찔렀고, 하단을 노리면 같이 하단으로 화답했으며, 상단을 노리면 동일하게 상단으로 대응했다.
쇳소리와 숨소리가 늘어갔다.
별안간 놈이 말했다.
“이래서는 끝이 없겠군.”
검붉은 마나가 소용돌이치며 녀석의 검 주변을 휘감는다.
폭풍과도 같은 현상, 검의 파괴력을 증가시킨 모습이다.
나 또한 붉은 마나를 뽑아내 검 주변을 휘감았다.
마나의 폭풍을 휘감은 두 검이 적을 멸하기 위해 움직였다.
콰앙!
서로의 검이 부딪히자마자 강렬한 폭발이 일었다.
우리 둘은 폭발을 이기지 못하고 날아갔다.
낙법을 취할 새도 없이 바닥에 처박혔다.
전신에 얼얼한 통증이 느껴졌고, 누적된 피로가 만만치 않은 수준에 이르렀다.
녀석도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거리가 적당히 벌어진 상태에서 놈이 말한다.
“시간을 끄는 건 내키지 않아.”
역시나다.
생각이 일치하는군.
“그건 그렇지.”
“전력으로 와라, 파프니르.”
“알았다.”
나는 전신의 모든 마나를 검에 집중했다.
녀석 또한 나와 동일하리라.
우리가 있는 광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마나가 검에 집속됐다.
불로 가열된 쇠처럼 붉은 빛을 발하는 검.
그 검에 거미줄처럼 자그마한 실금이 가기 시작했다.
빨리 마나를 방출하지 않으면 자멸하겠군.
우리 둘은 누구랄 것 없이 서로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위에서 아래로 검을 그었다.
아버지에게서 배운 절기.
‘파천’이 쇄도한다.
검붉은색 기운을 가진 파천과 붉은색 기운을 가진 파천이 맞닥뜨렸다.
두 개의 파천이 마주한 지점에서 세찬 빛의 격류가 뿜어졌고, 천지를 요동치게 만드는 굉음이 울렸다.
자연재해와도 같은 두 기술이 충돌한 여파로 강한 폭풍과 거대한 진동이 만들어졌다.
생성된 폭풍과 진동은 주변으로 퍼져 건물이나 구조물을 무너뜨렸다.
이를 지켜보던 유리는 신속히 보호막을 펼쳐 시민과자신을 보호했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니 빛의 세기가 수그러들었다.
빛으로 가려졌던 녀석의 모습이 드러났다.
빈말로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다.
나 또한 녀석과 마찬가지겠지.
이 격돌로 인한 승자는 없었다.
쓰러진 자가 없었으니까.
고개를 올려 위를 보니 파천 때문에 먹구름이 양단되어 검푸른 하늘이 보였다.
하늘을 부순다는 이름일진데 구름이나베고 있다니.
더 수련에 매진해야겠구나 싶다.
나는 녀석에게 물었다.
“멀쩡하냐?”
“못 쓰겠군.”
“나도 그래.”
몸 상태가 아니라 검에 관한 이야기다.
내 검이나 그의 검이나 기능을 못할 정도로 처참하게 망가진 것이다.
우리는 너나 할 거 없이 검을 바닥에 던졌다.
바닥에 떨어진 검은 유리처럼 깨져버렸다.
검이 없다고 싸우지 못하는 건아니다.
서로를 향해 달렸다.
녀석의 주먹이 내 안면을 노렸다.
피하거나 막는 대신, 나 역시 놈의 안면을 향해 주먹을 갈겼다.
크로스 카운터.
서로의 턱에 주먹이 꽂혔다.
우리는 비틀거렸다.
잠깐이지만 의식이 끊긴 것 같기도 했다.
나보다 먼저 정신을 차린 놈은 발차기로 내 옆구리를 가격했다.
나는 옆구리에 틀어박히는 발차기를 감내하며 녀석의 콧잔등을 팔꿈치로 가격했다.
그럼에도 녀석은 물러서는 일 없이 머리를 움직여 내게 박치기를 날렸다.
“큭.”
방금의 박치기로 코뼈가 부러졌는지 코에서 무언가 흐르는 게 느껴졌다.
이 액체가 콧물은 아니리라.
열이 뻗쳤다.
나 또한 녀석의 머리에 박치기를 날렸다.
콰앙, 놈의 코도 부러졌다.
“하하하!”
녀석은 정신이 나갔는지 박장대소하며 내게 태클을 걸었다.
나는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놈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몸 위에 올라탔다.
그리곤 주먹으로 내 면상을 주저 없이 때렸다.
맞고, 맞고, 또 맞았다.
혼미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며 허리를 튕겼다.
갑작스런 반동에 녀석이 나동그라진다.
나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며 녀석의 얼굴을 발로 걷어찼다.
차고, 또 차고, 또 찼다.
얼마나 걷어찼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발에 감각이 없어질 때쯤에서야 녀석이 웅크린몸을 풀고 달려들었다.
짐승과도 같은 몸놀림이었다.
“하하!”
나 또한 웃었다.
미친 새끼.
이놈은 미친 새끼다.
그 뒤로는 개싸움이나 다를 바 없었다.
기술 따위는 일절 존재하지 않는 난타전이 계속됐다.
때리고, 맞고, 때리고, 맞고.
근성의 싸움이었고, 오기의 싸움이었다.
얼마나 반복했을까.
투두둑.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점점 거세졌다.
솨아아아아아아.
소나기인가.
여름에는 흔히 있는 일이다.
빗방울은 서늘했다.
덕분에 한껏 달아오른 몸의 열기가 조금 식혀졌다.
“퉤.”
흙과 피가 섞인 침을 내뱉었다.
이렇게 후련하게 싸운 게 언제였던가.
우리는 비틀거리며 서로를 봤다.
둘 다 엉망인 상태지만 쓰러진 이는 한 명도 없다.
그렇다면 끝난 게 아니지.
다시 싸움을 재개하려고 할 때, 목소리가 들렸다.
“이제 그만하거라.”
감색 원피스를 입은 소녀, 유리가 중간에 끼어들었다.
나와 녀석은 그녀의 난입에 멈췄다.
“소녀가 못 버티겠노라. 너희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이 미어터지고 심장이 다 아픈 게야.”
그만하라고?
여기서?
그럴 수는 없다.
아직 끝내지 못했다.
나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말했다.
“유리, 비켜.”
그녀는 팔을 펼치며 나를 가로막았다.
“비키지 못하는 게야.”
짜증이 났다.
“왜 그 녀석을 감싸는 건데?”
조금만 더 하면 끝장낼 수 있다.
그도 그럴 게 녀석은 나보다 훨씬 약해지고 있었으니까.
내 추궁에 유리는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눈동자가 붉게 충혈되어 있다.
“감싸는 이유를 물은 게냐?”
“그래.”
유리는 한 글자, 한 글자 힘주어 말했다.
“이 녀석 또한 파프니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