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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7화 〉외전 (127/130)



〈 127화 〉외전 [서연과 루시아의 이야기] [1]


나는 실수가 잦은 편이다.
때문에 실수를 만회하려고 종종 노력한다.
그 노력이 좋은 성과를 이루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하지만 말이야.
내가 만든 캐릭터가  앞에 있는 상황은내 실수로 빚어진 일이라고 볼 수 있을까?

게임하려고 캐릭터 만든  실수는 아니잖아.
상당히 억울했다.

“……당신은 누구야?”

꼬질꼬질한 로브에 나무 스태프를  소녀가 나를 경계하고 있다.
독이 바짝 오른 뱀처럼 그녀 주변에서 푸르스름한 무언가가 일렁인다.
저게 뭐지?

“누구냐니까?”

“나 말하는 거야?”

“그래, 당신.”

보통 자기소개를 할 때는직업을 덧붙여서 말하곤 하는데, 나는 직업을 말하기가 좀 그랬다.
백수거든.

내 취향에 딱 부합하는 은발 벽안을 가진 소녀를 보며 깊은 고민에 빠졌다.
나는 잠깐의 고민 끝에 그녀의 질문에 답했다.

“게임하는 사람이었지.”

지금은 게임 속에 들어온 사람이고.

“게임? ‘놀이’를 말하는 거야?”

어떻게 말은 통한다.
게임 속이니 한국어를 쓰는 거려나?

“어, 맞아.”

은색 머리카락의 소녀, 루시아가 눈매를 좁혔다.
열네  아이치고 매서운 눈이다 싶다.

“왜 그렇게 봐?”

“수상해서.  시간대에 숲을 헤매는 사람이라니, 어린아이도 하지 않을 괴이한 행동이야.”

논리정연한 말이다.
근데 내가 처한 상황이 논리와 거리가 멀어서 어쩌냐?

나라고 숲에 뚝 떨어질 줄은 몰랐다.
그것도 오밤중에.

“억울한데, 정신을 차려 보니까 여기더라고.”

루시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몽유병 환자야?”

“차라리 그랬음 좋겠다.”

 당당한 태도에 루시아는 긴가민가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이윽고 그녀는 나무 그루터기에 무릎을 모아 쪼그려 앉았다.

“이상한 사람이네.”

부정하지 못하는 상황이 슬프군.
바람이 분다.

아주  바람이다.
기침이 절로 나왔다.

 옷차림은 집에서 게임하던 꼬라지 그대로라 추위를 견디기 힘들었다.
그게무슨 차림이냐고?

셔츠에 사각팬티 차림이라고.
여하간 장난 아니게 춥다.

“에취.”

불현듯 루시아의 지팡이에서 반짝거리는 불이 생겼다.
그 불은  몸을 향했다.
나는 기겁하며 물러났고, 한동안 도깨비불을 피해서 열심히 뛰어다녔다.

“야! 야! 야! 사람 태워 죽이려고 작정했냐!”

루시아는 기가 찬다는 듯이 응수했다.

“보온 마법이야.”

“그 말을 어떻게 믿어!”

성냥팔이 소녀식 보온 마법이냐, 몸 태워서 따뜻해지게?
나를 쫓던 불이 타겟을 바꿔서 루시아를 향했다.
그녀는 피할 의도가 없어 보였다.

“야!”

나는 뛰는 방향을 바꿔 분신자살하려는 멍청이를 향해 뛰어들었다.
하지만 불이 조금  빨랐다.

루시아의 몸에 불이 붙었다.
그녀는 통각이 마비된 듯 안면에 주름 하나 잡지 않았다.
나는 망연히 그 광경을 봤다.

“봤지.”

“…너, 너 몸에 불이.”

루시아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는 성큼성큼 다가온 다음  손을 쥐고 자신에 어깨에 손을 가져다 댔다. 나는 언성을 높였다.

“뭐 하는 거야!”

“뜨거워?”

그러고 보니  뜨겁네? 그녀의 몸 주변에 손을 휘적거렸다. 불이 붙은 것치곤 열기가 미약하다. 뭔데 안 뜨겁냐.

“……음, 멀쩡하네.”

“멍청이.”

춥다. 날씨가 추워서 그런 건 아니고 내 원맨쇼에 마음이 몹시 추웠다.나는 부끄러움을 감추며 답했다.

“아니, 진짜 위험한 걸 수도 있잖아, 그러니까 피했지.”

“그건 합당한 의심이네. 난 당신이 이지적인 사고와 거리가 먼 사람인 줄 알았지 뭐야. 이야, 놀라워라.”

“너 비꼬는 거지.”

루시아는 시선을 피했다.
어쨌든, 그녀에게 보온 마법을 받으니 전보다 따뜻하긴 했다.
어느 정도냐면 난로 곁에 있는 기분이라고할까?

“이거 진짜 마법이냐?”

“그럼 뭐로 보이는데? 혹시 마나가 안 보여? 당신 눈은 옹이구멍이야?”

상당한 매도가 날아왔다.
어린  어지간히 밉살스럽게 구는군.
나는 신경질적인 루시아를 보며 물었다.

“됐고, 이거 유지하는데 안 힘드냐?”

그녀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래 유지하면 힘들어.”

“그럼 꺼도 되는데.”

“싫어.”

“왜?”

루시아가 단호히 말했다.

“추위에 떠는 남자를 보며 즐거워하는 취미는 없어.”

그건 무슨 악취미람.
나는 감사를 표했다.

“하여튼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과장하지마. 사람은 조금 춥다고 죽지 않아.”

“아닌데, 죽는데?”

저체온증은 무섭다니까?
루시아는 건조한 표정이었다.

“그건 그렇고 당신 차림이나 어떻게 좀 하지, 그래?”

민망한 차림이긴 했다.

“나도 어떻게 좀 하고 싶다. 마땅한 옷이 없는 걸 어쩌냐.”

루시아는 팔짱을 끼고 자신의 뺨에 손바닥을 대며 상념에 잠긴 모습을 보였다.
잠시 후 그녀는 꾸물거리며 자신의 로브를 벗기 시작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뭐하는 거야?”

퍼억.
루시아가 로브를 내 안면에 던졌다.

“이거라도 걸쳐.”

“너는 뭘 입고.”

“겨울날에 그런 차림을 한 바보보단 따뜻하게 입고 있어.”

 말에 루시아를 보니 두툼한 털옷을 입고 있었다.
그러네, 나보다 백만배는 따뜻해 보인다.

“이거 정말 내가 입어도 돼?”

“입어. 보기 민망하니까.”

방금까지 루시아가 입고 있어서 그런지 로브에는 온기가 남아 있다.
나는 꼬물거리며 옷을 입었다.
전신을 감싸는 로브 덕분에 내 민망한 꼬락서니는 그럭저럭 감춰졌다.

“좀 작네.”

내 말에 그녀가 눈썹을 올렸다.

“불만이야?”

“설마요.”

남이 준 옷을 헐뜯을 만큼 양심 없는 사람은 아니다.
루시아는 지나가는 투로 물었다.

“당신, 이름이 뭐야?”

나는 적당한 나무 그루터기에 앉으며 말했다.

“이서연.”

그녀는 의외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동대륙 출신이야?”

출신지에동서를 나누면 동쪽이긴 하지.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동대륙이라니, 난 거기가 어딘지도 몰라.”

“흐음.”

루시아가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나 때문에 생각할 게 많은가 보다.

나도 생각할 건 많다.
게임 좀 하나 싶었더니 게임 속으로 들여보낸 건 또 뭐냔 말이야.

“나는 루시아야.”

이미 알고 있는 이름이다.
내가 지은 거니까.

“좋은 이름이네.”

그녀가 질색했다.

“아부하지 마.”

“아부가 아닌데.”

나는 나름대로 좋다고 생각해서 지은 이름이다.
그걸 내 캐릭터에게 부정당하니, 마음이 아프군.

타닥.
장작이 타는 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멍하니 타오르는 모닥불을 본다.
실감 나게 타오르네.

“루시아, 넌 뭐 때문에 숲속에 있는 거야?”

“당신한테 말할 이유가 있어?”

가시 돋친 반응이다.
요즘 애들은 무섭네.

“이대로 있긴 심심하잖아. 대화라도 하자.”

“그래서 당신이 얻는 게 뭔데?”

“너는 사람의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면서 피곤하게 사는 타입이냐? 그냥 심심풀이 해소용으로 묻는 거야.”

“심심풀이 해소?”

“그래. 별  없어.”

루시아는 내 표정을 뜯어보다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모님을 뵈러 가.”

이모님이라니, 그렇게 상세한 설정은 짠 적 없는데.
나는 되물었다.

“이모님? 너 혼자서?”

혼자란 말에 루시아가 뾰족하게 반응했다.

“문제  거 있어?”

게임이라면 혼자서 여행하는 거야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현실이라면 이야기가 180도 달라지는 법이다.

“위험하지 않냐?”

“하,  걱정을 해주시는 거예요? 당신 앞가림이나 잘하시지요?”

“…음.”

뼈아픈 말이다.
……그러게, 내 앞가림이 문제였지. 참.

게임 속이니까 상태창도 열리려나?
나름 상념에 빠져 있으니 루시아가 말을 이었다.

“그러는 당신은 목적이 뭔데 이 숲에 있어?”

목적?
그런 게 있을 리가 있나.
굳이 따지자면 집에 돌아가는  목적이 될 수 있겠지.

“아까도 말했지만 눈을 떠 보니까 여기던데?”

“그런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해?”

진심으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반응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사실이 그런데 어쩌라고.

“뭘 해야 믿을 건데?”

“납득이 갈만한 이유를 대.”

납득이 갈만한 이유라.
나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딱하고 떠오르는 게 없군.

“아이 씨, 그냥 믿지 마라. 내가 결백을 아무리 주장해도 네가 안 믿으면 제자리걸음밖에 더 되겠냐.”

내가 역정을 내자 루시아는 아리송한 얼굴로 뺨을 긁었다.

“으음, 진짜로 눈을 뜨니까 여기라는 말이야?”

“어. 말하는 나도 믿기지 않지만 진짜야. 네가 그토록 궁금하게 여기는 내 목적? 굳이 목적이랄  있다면 집에 돌아가는 거지.”

“집에 돌아가는 거…….”

집이라는 말에 루시아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너무 어이가 없어서 화난 건가.

“거창한 거라도 기대했어?”

루시아는 침울한 분위기를 띠며 말했다.

“……그런 건 아니야.”

뭐야.
왜 갑자기 우울해졌대?

나는 입을 다물었고, 그녀도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았다.
에휴, 전보다 더 어색해졌네.

그보다 집에 돌아가려면 어떻게 하지?
여기는 게임 속이다.

게임 클리어를 하면 집으로 보내주나?
그러면 클리어 조건은 뭔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음, 생각해봐도 도통 모르겠네.

머리만 아프다.
나는 결단을 내렸다.

“야, 루시아.”

“왜?”

“졸리지 않냐?”

예상외 질문이었는지 루시아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어, 음. 조금?”

“나는 엄청 졸려. 그러니까 좀 잘게.”

나는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사실 아까부터 한계였다.
이상하게 몸이 너무 피곤하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루시아의 새된 비명을 들었다.
왜, 사람자는 거 처음 보냐?

* * *

“으하암.”

자고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야외취침이라, 군대에 있을 때 말고는 해본 적이 없던 건데 이렇게 다시 하니 반갑기는커녕 역겹기만 했다.

상체를 일으키자 서늘한 아침 공기가 살갗을 찔렀다.
추워서 얼어죽겠네.

“응?”

몸에 모포가 덮어져 있다.
뭐지, 루시아가 준 건가?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잠에 들었는지 가느다란 숨소리가 들렸다.
퉁명스러워 보여도 은근한 배려가 엿보이네.
묘하게 감동이다.

가까이 다가가도 그녀는 눈을 뜨지 않았다.
너무 무방비한 거 아닌가.

갑자기 장난기가 발동해서 확 깨우려다가 멈췄다.
모포도 덮어준 애한테 너무한 게 아닌가 싶어서였다.
그렇게 가만히 있으니 루시아의 벚꽃색을 머금은 입술이 달싹였다.

“……엄마. 싫어, 가지 마.”

애절한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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