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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빵에서 재벌까지-162화 (162/452)

깜빵에서 재벌까지! 162화

“선입견이 생기는 것은 원하지 않아요.”

이 자리에 와서 처음으로 말하는 왕명희 씨다.

얼굴도 미인인데 목소리에서도 꿀이 떨어지는 것 같다.

“그러신가요?”

“예.”

확인하듯 재차 묻자, 왕명희 씨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살짝 웃어 보였다.

‘재벌가에 태어난 딸들의 운명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네.’

거부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래도!’

내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는 눈빛인 것 같다.

왜?

나는 잘생겼으니까.

“허허허, 그렇지, 이렇게 두 사람이 시간을 두고 교제를 해 봐, 내가 보기에는 선남선녀라서 딱 어울리는 것 같네.”

왕태성 회장이 나와 왕명희 씨를 번갈아 보며 말했고.

나는 다시 시선을 왕태성 회장에게로 옮기곤 입을 열었다.

“회장님.”

“왜?”

나는 기대에 가득 찬 눈빛을 보이는 왕태성 회장을 보며 조심스럽게 입술을 뗐다.

“아무래도 죄송한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말을 듣는 순간, 왕태성 회장의 눈빛 속에 실망감이 일렁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왕태성 회장이 힐끗 왕명희 씨를 봤다가 나를 바라보며 일말의 희망을 남긴 듯한 눈빛으로 물었다.

“왜, 우리 명희가 마음에 들지 않나?”

이런 왕태성 회장의 물음에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마음에 들고 안 들고 할 것도 없습니다. 오늘 명희 씨도 저를 처음 만났고 저도 처음이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 그런데 왜?”

나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진실을 털어놓았다.

“실은 제가 내일 군대에 입대합니다.”

정말 지랄 같은 것은 병역 비리 사건이 터졌는데 나는 군대에 빨리 가겠다고 병무청에 로비했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신이 나를 버렸는지 나는 102보충대로 입소예정이다.

‘102보충대면!’

젠장!

강원도 전방 부대에 배치될 확률이 100%다.

‘잠깐!’

그런데 이 순간 나도 모르게 떠오르는 것이 하나 있다.

‘왜지?’

일어나야 할 사건이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을 나도 모르게 떠올리고 말았다.

“군대? 군대에 가?”

“예, 입대하게 됐습니다. 그것도 자원입대입니다.”

이런 내 말에 왕태성 회장이 잠시 아무 말 없이 눈꺼풀만 연신 껌뻑이더니, 갑자기 마구 소리 내 웃기 시작했다.

“허, 허허허! 어허허허허!”

지금 대한민국은 병역 비리로 떠들썩한 상태다. 그런데 내가 자원입대를 해서 내일 보충대에 입소한다고 하니 왕태성 회장은 놀라서 저렇게 웃는 거다.

“하하하, 태원 군은 확실히 달라, 군대를 면제받을 생각이라면 어찌어찌 해서 방법이 있었을 건데?”

나는 이런 왕태성 회장의 말에 가볍게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도 대한민국 남자라면 병역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참고로 마음에도 없는 개뻥이다.

나도 군대에 가기 싫어서 종합 검진까지 받아봤지만 이럴 때는 또 이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서 명희 씨와 사귈 시간이 없습니다. 정말 인연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안타깝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3가지의 선택 사항 중에서 마지막 제철도 자동차도 포기하는 선택을 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그 순간.

“제가 싫으세요?”

아무 말도 없던 왕명희 씨가 내게 물었고.

나는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건 아닙니다. 첫인상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런데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병역의 의무가 저를 부르네요.”

내 말에 왕명희 씨가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명희야.”

왕태성 회장께서 왕명희 씨를 불렀다.

“예, 할아버지.”

“너 유학 가라.”

순간 이런 왕태성 회장의 말에 나는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없던 현태제철 사장도 실수인지 놀라서 그런지 그만 젓가락을 떨어트렸다.

“아, 아버지…….”

현태제철 사장이 말을 이어가지 못하고 당황하며 왕태성 회장을 바라봤으나, 그런 아들의 시선은 의식조차 하지 않은 채 왕태성 회장이 왕명희 씨를 보며 확신에 찬 눈빛으로 말했다.

“됐고, 명희야, 네 앞에 네 꿈을 이뤄줄 남자가 앉아 있어, 나는 그렇게 생각해.”

정말 당황스러운 순간이다.

동시에 나는 왕명희 씨가 어떤 말을 할지 나도 모르게 궁금해졌다.

그리고 이윽고 왕명희 씨의 윗입술과 아랫입술이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런 그녀의 입에서 나온 말은 짧지만 강렬했다.

“예, 할아버지.”

이렇게 대답한 왕명희 씨는 나를 보며 수줍게 웃어 보였다.

나는 이런 상황을 멍하니 바라보며 연신 눈꺼풀만 껌뻑일 뿐이었다.

‘이게 정말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확실한 것은 왕명희 씨의 눈빛을 보면 정말 나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것이다.

“하하하, 제철!”

왕태성 회장께서 자기 아들을 불렀다.

“예, 아버지.”

“눈치 없이 앉아 있지 말고 일어나자고.”

“아, 예, 알겠습니다.”

왕태성 회장과 현태제철 사장이 자리에서 일어났기에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났고.

힐끗 시계를 확인한 왕태성 회장이 의미심장한 한 마디를 남겼다.

“내일 아침까지 12시간 남았네?”

그러더니 나와 왕명희 씨를 번갈아가며 보곤 호탕한 웃음을 섞어가며 말을 이어나갔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짧은 12시간이지만 두 사람이 정말 인연이라면 평생 잊지 못하는 12시간이 되기를 바라네. 하하하!”

왕태성 회장은 그렇게 말씀하시고 특실을 나갔고.

“나오지 마.”

현태제철 사장이 나와 자기 딸에게 이 말을 남기곤 왕태성 회장을 따라 뒤이어 특실을 나갔다.

“휴우……!”

두 사람이 나가자 나는 나도 모르게 긴장감이 풀려서 숨을 크게 내쉬었다.

“정말 군대 가세요?”

조금 전과는 또 다른 표정으로, 아니, 더 밝아진 표정으로 내게 묻는 왕명희 씨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당황스러우셨죠,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왕명희 씨가 고개를 살짝 숙였고.

나는 곧바로 손을 휘휘 저었다.

“아닙니다. 저보다 명희 씨가 당황스러우셨을 것 같습니다.”

“예, 맞아요. 할아버지께서 이렇게 강요하시는 것은 또 처음이거든요.”

재벌 3세라서 그런지 꽤 당당하고 솔직한 것 같다.

“명희 씨, 솔직하게 제가 마음에 드세요?”

두 명의 어른이 있기에 왕명희 씨는 진심을 말할 수 없었을 것 같다.

“솔직한 거 좋아하시죠? 남자들은 그렇더라고요.”

왕명희 씨는 남자들을 정말 모르는 것 같다.

‘남자들은 솔직한 거 싫어한다.’

그래서 솔직한 여자를 좋아하는 척을 하는 거다.

“예.”

“저는 연하는 별로였어요.”

였어요?

이건 과거형이다.

‘누나였나?’

사실 나는 왕명희 씨에 관해서 아무런 정보가 없다.

하지만 왕명희 씨는 나에 대한 정보가 많은 것 같다.

“연상이셨어요?”

내 눈에 보기에는 나보다 2~3살 적어 보였다. 그래서 대학도 졸업하지 않은 꼬맹이를 왜 이 자리에 데리고 왔을까 하는 생각도 살짝 했었다.

그런데 연상이란다.

“제가 태원 씨보다 2살 많아요. 제가 거기다가 빠른이라서 3살 많은 거나 다름이 없죠. 그런데 연하와의 연애도 좋을 것 같네요.”

“아, 그렇군요.”

왕명희 씨가 나를 보며 물었다.

“정략결혼 싫으세요? 저는 싫어도 어쩔 수 없지만, 자수성가하신 거니까 싫으시면 싫다고 하실 수 있으시겠네요.”

“싫으세요?”

내 물음에 왕명희가 나를 빤히 봤다.

그러더니 천천히 입술을 뗐다.

“최소한 달라서 좋을 것 같네요.”

달라서 좋을 것 같다?

이 말의 뜻은 다른 재벌 2세나 3세와 내가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안다는 거다.

뭐, 무엇이 다르다는 건지는 그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지 못해서 모르겠지만.

나는 회귀자이니 재벌뿐만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과도 좀 다르긴 할 거다.

그 누구도 내 투자 패턴이나 사업 계획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하니까.

하여튼 인연이 하나 생긴 것 같다.

“그럼 이제 나갈까요?”

이런 내 물음에 왕명희 씨가 싱긋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그리고 우리는 왕태성 회장님이 말한 그대로 꽤 기억에 남을 12시간을 보냈다.

물론 영화 보고 커피 마시고 또 맥주 한잔하고 한강에 가서 한강을 즐기고 한 것이 다였지만 내 인생에서 가장 여유로운 12시간인 것은 확실했다.

영화를 본 적도 없고 한가하게 커피를 마신 적도 없고 미녀와 함께 맥주를 마신 적도 없으니까.

‘공부만 하느라 그리고 교도소에 갇혀 있느라 해본 것이 없네.’

바쁘게 사느라 여유 없던 내가 하지 못했던 몇 가지를 명희 씨와 한 셈이다.

군입대 전 마지막 휴가로는 최고의 하루를 보낸 것 같았다.

* * *

2사단 신병훈련소.

“125번!”

조교가 나를 불렀다.

“125번 훈련병 최태원!”

목소리가 갈라질 정도로 악을 써서 대답했다.

“너는 군대 2회차냐? 왜 모르는 것이 없어?”

현재는 신병 교육 4주차다.

‘제가요, 억울하게 군대만 두 번째입니다.’

내가 환생자이니까. 당연히 군대도 두 번째일 수밖에 없다.

생각해보니 더 서러워졌다.

설마 생애 군대를 두 번 가다니!

“조교님께서 잘 가르쳐 주셔서 잘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한 번 악을 썼고.

내 말을 들은 조교가 대뜸 나를 보며 피식 웃었다.

“너, 수색대란다.”

이런 조교의 말에 나는 속으로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하, 젠장.’

그야말로 군 생활 제대로 꼬였다.

이래서 군대에서는 중간만 하라는 소리가 있나 보다.

* * *

2사단 신병 교육대 수료식.

뭐든 열심히 하자는 내 주관 때문에 나는 신병 교육 기간 중대장 훈련병이 됐고, 사격왕으로 포상휴가를 따놓은 상태다. 그리고 1등으로 수료했기에 포상휴가도 받았다.

이 말이 무슨 뜻이냐면 다른 동기들은 바로 수료식이 끝난 후 자대에 배치를 받고 특별 외박 1일이 전부지만 나는 6박 7일의 휴가를 나간다는 소리다.

‘군대에선 뭐든 중간만 하면 된다고?’

맞는 말이다.

물론, 1등에겐 예외다.

1등을 할 자신이 있다면 뭐든 열심히 하면 된다.

그러면 일이 알아서 다 잘 풀린다.

하여튼 수료식이 끝났고.

신병들의 가족들이 모두 수료식을 참관을 끝내고 자기 아들을 찾고 있다.

그리고 저 멀리서 우리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매형인 한철 매형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다.

‘왔네.’

저 멀리서 이제는 윤석형이 된 내 동생 태원이도 나를 보며 손을 흔든 후에 먹먹한 표정으로 쓸쓸히 퇴장했다.

‘정말 미안해……!’

이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를 보는 사람이 또 있다.

촉새 형?

아니다.

왕명희 씨가 왔다.

그리고 우리 가족들이 내게 다가오는 것처럼 왕명희 씨도 내게 걸어오고 있는데 모든 신병과 간부들까지 왕명희 씨를 바라보고 있다.

왜?

세상에 둘도 없는 미녀니까.

아마 그들은 왕명희가 재벌가의 자제일 줄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아니, 그 미모 덕분에 재벌가의 딸이라고 하면 오히려 더 설득력이 있을지도.

『참 소박하시네요.』

내가 커피를 마시자고 했을 때 왕명희 씨는 소박하다고 말했다.

『데이트해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

공부만 했었고.

사법시험에 합격한 후에 그 사건 때문에 바로 교도소에 갇혔다.

나는 다른 일반인들과 다르게 어쩔 수 없이 평범한 것을 거의 해보지 못했다.

『커피 좋아하시나 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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