깜빵에서 재벌까지! 306화
“화이트 타이거 펀드의 자본이 그대로 있는 이상 대한민국은 예전처럼 위태로운 외환 위기가 닥치지 않을 겁니다.”
내 말에 스미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 애국심이 없다고 내게 말했지만, 미스터 최의 마음속에는 애국심이 있군요. 그럼 우리의 관계는 여기서 단절입니다. 굿 럭.
“굿 럭!”
뚝!
나는 조지 소로스가 내게 말한 것처럼 ‘굿럭’이라고 말한 후에 전화를 끊었다.
“모든 설계를 다시 해야겠군요.”
“빅 보스, 정말 철수하지 않을 겁니까?”
스미스가 간절한 눈빛으로 내게 물었다.
“위험이 클수록 이익도 증가합니다.”
“애국심입니까?”
나는 스미스의 물음에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최대한의 수익을 고려한 결정입니다.”
대한민국의 경제 상황이 몇 개월 전으로 다시 원위치가 됐다.
물론 그 몇 개월 전인 올해 상반기처럼 극심한 외환 위기는 닥치지 않을 것이다.
왜?
화이트 타이거 펀드에는 달러가 있으니까.
어마어마한 액수의 달러가 아직 대한민국에 유입되어 있으니 방어선은 유지되고 있다.
“으음…….”
스미스가 길게 신음을 토해냈다.
“스미스.”
“예, 빅보스.”
“전에 제게 말한 스위스 은행들은 여전히 내게 투자할 의향이 있을까요?”
내 말에 스미스가 나를 뚫어지게 봤다.
“물론입니다.”
나는 스미스의 말에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다면 모두에게 굿 럭.”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힘든 하루였으니 쉽시다. 내일 다시 봅시다.”
일어났던 일은, 그리고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는 꼭 일어나는 모양이다.
‘기회라면 기회잖아.’
위기에서 기회를 찾는 것이 진정한 투자자이리라.
* * *
새벽이 되어서야 지친 상태로 명희 씨가 있는 아파트로 돌아왔다.
그리고 내 모습을 보고 나를 기다리고 있던 명희 씨가 나를 포근히 안아줬다.
“괜찮아요?”
나는 항상 지친 모습으로 현관문으로 들어올 때가 많았다.
대기업의 총수였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거지만.
그때마다 명희 씨는 내게 웃어 보이며 나를 맞이했다.
“괜찮아야죠.”
“이번 대선으로 정권이 교체된 것이 태원 씨에게 안 좋은 거죠?”
이런 명희 씨의 물음에 나는 애써 싱긋 웃으며 답했다.
“좋은 쪽으로 생각해야죠. 장인어른께는 좋은 결과일 겁니다.”
지금은 그렇게 보이겠지만 10년 후에는 또 달라질 거다.
‘장인어른이 걱정되네.’
10년 후에 다시 정권이 교체된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여당 후보가 단일화를 했는데도 야당 후보가 당선된 것을 보면 미래에도 정해진 역사는 바뀌지 않으리라.
‘야당에는 최악의 상황이었는데 반전이 만들어졌어.’
그러니 내가 알고 있는 그대로 대한민국은 흘러가게 될 것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것은 내게 큰 이점이라고 할 수 있었다.
내가 알고 있는 미래가 결코 바뀌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올해 12월 31일이 되면 화이트 타이거 펀드를 따라서 대한민국에 투자한 모든 외환이 화이트 타이거 펀드의 외환만 남겨두고 철수하게 될 거다.
‘금 모으기 운동도 다시 시작되겠지.’
나는 내가 알고 있는 미래의 기억을 더듬어봤고.
그와 함께 다음 대통령과 대호 그룹 김대호 회장의 관계성도 떠올릴 수밖에 없다.
‘그래, 그때가 또 한 번의 기회야.’
이미 모든 현실은 결정된 상태다.
그러니 나는 이제 설계를 다시 하면 된다.
“태원 씨, 늦은 시간이라 피곤하시겠지만 보여 드릴 것이 있어요.”
돌연 명희 씨가 미소를 지으며 내게 말했다.
“예?”
나는 명희 씨에게 되물었고.
명희 씨는 내 손을 잡고 소파로 나를 이끌었다.
소파 테이블 위에 노란 서류 봉투가 한 장 놓여 있었다.
‘뭐지?’
살짝 긴장되는 순간이다.
무언가 법적인 효력이 있을 것처럼 보이는 서류였기 때문이다.
그동안 기업 일을 하며 비슷한 것을 많이 봐왔기에 알 수 있었다.
“여기 앉아봐요.”
명희 씨가 내게 앉으라고 말했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바로 명희 씨가 테이블에 놓여 있는 서류 봉투에서 한 장의 서류를 꺼내서 내게 내밀었다.
“명희 씨…….”
“우선, 제 마음대로 한 것은 사과할게요.”
맞다.
이건 내가 사과를 받아야 할 일이다.
“미안해요. 내 마음대로 결정해서.”
나는 명희 씨가 건넨 서류를 보며 말했다.
“혼인신고를 하셨네요.”
“예, 했어요. 해야 할 것 같아서요.”
명희 씨가 나를 빤히 보며 말했다.
“무슨 일 있었나요?”
이런 내 물음에 명희 씨가 천천히 입술을 뗐다.
“어제 아버지가 찾아왔어요.”
“그래요?”
명희 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말했다.
“예, 태원 씨도 아시겠지만, 할아버지도 그렇고 아버지도 태원 씨의 뛰어난 능력을 보고 마음에 드신 거고요. 우리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신 거였어요.”
맞다.
일종의 정략결혼이라면 정략결혼이 될 것이다.
“장인어른께서 저를 갑자기 반대하셨군요.”
내 말에 명희 씨가 나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많은 정보를 접할 수가 없어서 재계나 정계에 도는 찌라시들을 유료로 구독하고 있어요.”
“그래요?”
명희 씨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대선에서 야당이 승리하면 태성 그룹에 악영향이 미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더라고요.”
“그래서 장인어른이 되실 분이 명희 씨의 결정을 번복하도록 설득했다는 거군요.”
이런 내 말에 명희 씨가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맞아요. 그래서 저는 이렇게 할 수밖에 없어요.”
“명희 씨.”
나는 명희 씨를 뚫어지게 봤다.
“예, 태원 씨.”
“그 찌라시는 사실일 겁니다.”
내 말에 명희 씨가 고개를 끄덕였다.
고장 난 시계도 하루에 두 번은 맞는다고 하지 않는가.
찌라시에는 근거 없는 루머가 대부분일지언정 사실이 일부 있기는 했다.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제 마음대로 결정한 일이지만 저는 이제 유부녀네요.”
하여튼 결단력 하나는 확실하다.
“하하하, 이거 무효 아닙니까?”
내 동의 없이 작성된 서류이니 내가 무효라 주장할 수 있다.
“무효로 하실래요?”
나를 보며 새침하게 눈을 흘기는 명희 씨다.
“졸지에 제가 유부남이 됐네요.”
“싫으세요?”
이런 명희 씨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은 후 싱긋 웃으며 말했다.
“좋네요. 피곤이 확 풀리는 것 같습니다. 죽었다가 깨어나도 변하지 않는 내 편이 생겼는데 안 좋을 수가 있습니까.”
나는 소파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바로 내 옆 소파에 앉아 있던 명희 씨를 벌떡 들어 안고 침실로 향했다.
오늘 밤은 뜨거울 것 같다.
* * *
1997년 12월 23일,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
청와대의 주인인 대통령은 다음 청와대의 주인이 될 대통령 당선인을 초청했다. 그리고 많은 것을 제안했지만 대통령 당선인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대통령님, 이제는 마무리하실 때입니다. 제게 제안하실 때가 아니고요.”
대통령 당선인은 바로 이런 자리가 불편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
대통령이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공기업을 갑자기 민영화를 하게 되면 서민 물가가 폭등하게 됩니다. 한국전력을 부분 민영화를 하면 전기세가 상승하게 되고 또 수자원공사를 민영화를 추진하면 프랑스나 영국처럼 수도요금이 폭등합니다. 그러니 저는 대통령님께서 제게 하신 제안에 관해서 반대입니다.”
“그렇게 생각합니까?”
이런 대통령의 물음에 대통령 당선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다행스럽게 대통령님께서 닥칠 수도 있는 외환 위기를 어느 정도 극복하셨기에 제가 경제 전문가들과 함께 대한민국 경제를 다시 반석 위에 올릴 방안들을 모색하겠습니다.”
대통령 당선인의 단호함에 대통령은 더는 할 말이 없어질 수밖에 없었다.
* * *
1998년 1월 2일 오전, 태성 금융지주회사 회장실.
대선이 끝난 후 1997년 12월 26일에 전격적으로 태성 그룹은 그룹 계열 분리를 선언했고.
계열 분리가 된 태성해상보험과 태성 증권을 다시 계열 분리와 동시에 미국 현지 투자 법인인 화이트 타이거 펀드와 합병을 당일에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자본금 50조짜리 금융 그룹이지.’
물론 내가 금융 그룹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은행처럼 예금과 적금을 받을 수 없는 보험회사의 성격이 강하기에 진정한 금융회사는 아닐 것이다.
하여튼 내 자산 75조 중 태성 그룹에 25조를 계획한 그대로 투자했고.
태성 그룹은 25조의 그룹 유보금을 보유한 대한민국 초유의 거대 공룡 그룹으로 발전한 상태다. 물론 공룡 그룹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GK 그룹이 태성 그룹에 흡수 합병이 됐기 때문이다.
그 전의 태성 그룹은 뭐라고 할까.
법인 계좌에 돈만 잔뜩 쌓아놓은 사무실 회사?
그 비슷한 무언가였으리라.
“외환 시장의 혼란이 상상을 초월합니다.”
태성 증권 사장인 권지용 사장이 내게 말했다.
“한순간에 다 빠져나간 거죠?”
“예, 그렇습니다. 조지 소로스가 운영하는 펀드 자금을 시작으로 골드만삭스가 철수를 선언했습니다. 정말 몇 개월 전에 일어났던 일이 데자뷔처럼 다시 일어나고 있습니다.”
나는 태성 증권 사장인 권지용 사장을 보며 물었다.
“원달러 환율은 얼마입니까?”
“975원까지 상승했습니다.”
작년 12월 26일 기준으로 원·달러 환율은 765원이었다.
“1,000원이면 딱 좋겠네요.”
“예?”
권지용 태성 증권 사장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를 봤다.
“환율이 1000원이면 수출도 잘될 거고 원자재 수입에도 큰 문제가 없죠.”
내 말이 옳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권지용 태성 증권 사장이다.
“외환 위기가 닥칠 거라는 것은 우리가 모두 다 아는 일이고 그에 따라서 대비도 된 상태인데 권지용 사장님께서 저를 찾아오신 이유가 뭘까요?”
외환 위기가 다시 닥칠 때 가장 어려움을 당할 기업이나 그룹은 사내 유보금이나 달러가 부족한 기업이나 그룹일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서 태성 그룹은 25조나 되는 총알(?)이 장전된 상태다.
‘IMF 외환 위기가 다시 닥치면!’
내가 기억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미래 기억대로 정부 주도 기업 간의 거래가 시작될 것이고 그것은 태성 그룹에 절대적인 기회일 수밖에 없다.
“회장님.”
“예, 말해보세요. 기회가 또 온 거죠?”
이런 내 물음에 권지용 태성 증권 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대호 그룹이 심각한 유동성 자금난에 빠질 것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대호 그룹이 제가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할 때 환차익을 꽤 누렸죠?”
권지용 태성 증권 사장이 재차 고개를 끄덕이며 내게 보고했다.
“예, 그렇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국외 자본들이 모두 철수를 선언한 상태에서 대호 그룹은 외국 은행에 높은 이자를 주고 단기 차관을 끌어온 모양입니다.”
“부도군요.”
나도 모르게 미소가 머금어지는 순간이다.
“대호 조선이 위태로울 것 같습니다.”
권지용 태성 증권 사장이 내게 대호 조선을 거론하는 것은 내가 강일성 태성 실업 사장을 통해서 러시아로부터 두 척의 항공모함을 샀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대호 조선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