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9장
휙 던진 뾰족한 나뭇가지가 갯벌에 날아가 콕 박혔다. 돌계단에 쪼그려 앉아 턱을 괴고 있던 수철은 뾰로통한 얼굴로 삐쭉거렸다.
“쳇. 관심 없다더니….”
이번엔 작은 돌멩이를 주워 던지며 심통을 부리던 때였다.
뜨끈한 호빵 하나를 쥐고 나온 용순이 수철의 곁에 앉으며 물었다.
“혼자 뭐라고 꿍시렁대구 있냐?”
호빵을 반으로 쪼개어 건네자, 수철은 꾸벅 인사하며 받아 들곤 불만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태건이 형이요. 저한텐 분명 누나한테 관심 없다고 했거든요.”
“그란디?”
호빵을 호호 불어 한 입 베어 문 수철은 멀찍이 정면 어디쯤을 눈짓했다.
“저 얼굴이 어딜 봐서 관심 없는 사람 얼굴이냐고요.”
용순의 시선이 덩달아 광활한 갯벌 가운데로 길게 뻗어갔다. 1시간 전부터 조개 갈퀴와 양동이를 챙겨 나온 해인이 부지런히 조개를 캐고 있었다.
용순은 해인의 앞에 삐딱하게 서 있는 커다란 형체를 가는 눈을 뜨고 바라보았다.
“니는 여서 쟈 얼굴이 봬냐? 뭘 어찌고 쳐다보는지 내사 봬도 않는디?”
침침한 눈을 아무리 비벼봐도 용순의 눈엔 휘날리는 머리칼만 겨우 보일 뿐이었다. 커다란 놈이 석양을 등지고 삐딱하게 서서 갈퀴까지 들고 있으니, 누구 하나 죽일 듯 벼르고 있는 걸로 보일 지경이건만.
“안 보여도 뻔하죠. 요즘 티를 얼마나 냈는데.”
그러니까 그날부터였다. 둘 사이에 ‘이순정’이라는 이름이 사라진 며칠 전부터.
이전에도 이따금 해인을 빤히 쳐다보았던 그였지만, 그땐 해인이 얼굴을 다 가리고 있었으니 그 눈빛에 담긴 건 8할이 호기심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해인의 정체를 알고부터 눈길이 가는 횟수가 더더욱 잦아지더니 엊저녁엔 홀로 피식거리고는 “아… 귀엽네, 진짜.” 하며 혼잣말하는 소리까지 똑똑히 듣고 말았다는 거다.
해서 재차 물었으나 태건의 대답은 전과 같았다.
“형, 누나한테 관심 있는 거 맞죠?”
“없다니까.”
쳇. 어디서 새빨간 거짓말을.
곁에서 만화책을 보던 멸치 아저씨도 인정하지 않았던가.
“에이, 행님. 땅이 알고 하늘이 아는데 그거를 가따가 시치미를 떼십니까.”
어쩐지 돈도 많은 양반이 해인에게 줄 귤 좀 까먹었다고 두고두고 구박할 때부터 낌새가 이상하다 싶더라니.
“그리고 저 형이 조개 캐러 나와 있는 거 자체가 수상하잖아요. 전 저번에 조개 캐러 가자고 했다가 맞아 죽을 뻔했는데, 누나가 얘기하니까 0.1초 만에 벌떡 일어나더라니까요?”
수철이 투덜거리는 사이 호빵 반쪽을 말끔히 먹어 치운 용순은 손을 털며 껄껄 웃었다.
이미 예전부터 해인을 향한 태건의 지대한 관심을 눈치채고 있었던 그녀로서는 썩 놀라울 일도 아니었다.
“아, 저라고 곱상-한 아가씨가 눈앞에 있는디 관심이 안 생기는 것이 이상한 일이제. 그거이 뭐시라고 니가 조동이를 댓 발 내민디야?”
“혹시 고백이라도 하면 어떡하냐 이거죠. 저 얼굴에 저 피지컬로 좋다고 들이대는데 누나라고 안 넘어갈 리도 없고.”
“그람 좋제! 일로 보나 절로 보나 딱 어울린디.”
“아, 그럼 안 된다니까요. 해인이 누나는 만인의 연인인데….”
“지랄 쌈 싸묵고 앉었다. 그라믄 저이는 늙어 죽을 때꺼정 연애도 못 허냐?”
“물론 그런 건 아닌데요….”
“태건이 쟈도 그라고 저 아가씨도 글고. 다 죽어가던 사람들이 저러구 만나선 의지하고 웃고 있응게 얼매나 보기 좋냐.”
용순은 뿌듯하게 웃으며 그림 같은 두 사람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막 캐낸 조개를 들어 보이며 태건을 향해 웃고 있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몰랐다.
대부분 배우 이해인을 잘 알지도 못하는 노인들뿐인 이곳에서 2년을 지내고도 선글라스 하나 벗는 게 힘들었던 그녀였다.
그저 알고도 모른 척해줄 뿐인 이들의 배려와 태건의 위로는 뭔가 달랐던 거겠지. 단 며칠 만에 그를 믿고 의지할 수 있었을 만큼.
7년 전에는 하루하루 죽고 싶어 안달 난 놈처럼 생기가 없었던 태건 역시 해인의 곁에서 값비싼 미소를 실컷 보여주고 있으니 서로에게 구원이 아니고 무엇일까.
“저 아가씨 여 와서 저라고 환허게 웃는 얼굴을 인제사 첨 봤당게. 태건이야 말할 것도 없고.”
“그건 뭐….”
수철은 입소리를 쩝, 내며 힘없이 턱을 괬다.
석양을 뒤엔 둔 실루엣만으로도 해인의 진한 웃음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용순의 말마따나 너무 잘 어울려 질투조차 나지 않는 그림이었다.
사실, 한편으론 해인을 가둔 벽을 허물어준 그가 고마웠으나, 그로 인해 상처가 아문 해인이 곧 마을을 떠나면 어쩌나 덜컥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이었다.
용순의 목소리가 삐쭉 솟구친 건 그때였다.
“어쩔시구?”
일어서려던 해인이 휘청거리자 기민하게 손을 뻗은 태건이 해인의 팔을 잡아당겨 허리를 단단히 끌어안았다. 그의 가슴에 이마를 콕 처박고 당황해 고개를 드는 모습이 어쩜, 로맨스 영화 속 한 장면 같다.
용순은 괜스레 수철의 팔뚝을 철썩철썩 때리며 주책없이 웃었다.
“오메, 오메! 저라다 쟈들 곧 조동이도 닿겄네. 하하하!”
수철은 못 볼 꼴이라도 본 양 혀를 내두르며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어휴. 난리 났네, 난리 났어.”
* * *
툭, 던지듯 놓아버린 갈퀴 날이 질펀한 갯벌에 철퍽 꽂혔다. “어…!” 하는 순간 빛보다 빠르게 뻗어간 그의 손이 해인의 팔을 덥석 쥐어 당겼다.
구태여 품 안까지 당겨 허리를 끌어안은 것은 쓸데없이 힘이 넘쳐서라기엔 양심에 조금 찔리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잖아도 조개 캐기에 여념 없는 해인을 내려다보며 애먼 생각을 하던 차였다.
쪼그려 앉아있으니 어찌나 더 작아 보이는지, 품에 안으면 얼마나 쏙 들어올까 궁금해지던 것이었다.
캐라는 조개는 안 캐고 농땡이를 부리는 내내 그런 생각만 하고 있었으니, 엄청난 반사 신경이 이 절호의 기회를 놓칠 리가 있나.
하지만 그 엉큼한 속내를 뻔뻔하게 감춘 태건은 품에 쏙 안긴 해인을 내려다보며 짓궂게 입꼬리를 올렸다.
“수법이 좀 올드한 거 같은데.”
알고 보면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이었으나, 그 검은 속내를 알 길 없는 해인은 벌게진 얼굴로 얼른 그의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 그런 거 아니에요. 갑자기 일어났더니 현기증이 나서….”
낚인 줄도 모르고 당황한 해인은 부산스럽게 손부채를 펄럭였다. 내심 아쉬워 허공에 떠 있던 그의 팔이 그제야 거두어졌다.
조용히 웃음을 삼킨 태건은 갈퀴와 양동이를 주워 들었다.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 땅을 어디까지 팔 작정이야, 대체.”
“아….”
해인은 제 양동이를 들여다보며 아쉽게 입맛을 다셨다. 더 욕심을 부리기엔 낙양이 어느새 수평선을 짙게 물들였다. 태건의 지시로 갖은 집안일을 하고 있을 춘섭도 지금쯤이면 마무리를 지었을 터였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널브러진 삽과 갈퀴를 챙겨 든 해인은 그의 양동이를 힐끔 들여다보며 물었다.
“얼마나 캤어요?”
물음과 동시에 양동이 속을 확인한 해인은 대번 실망스러운 얼굴이 됐다.
“애걔, 이게 뭐야….”
한 시간이 넘도록 캐낸 것이 고작 동죽 5개라니. 휙 올려다보는 눈초리에 황당함이 가득 뱄다.
“여태 뭐 한 거예요?”
태건은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 올리곤 앞서 걸었다.
“이해인 씨 얼마나 잘 캐나 구경했지.”
“아, 뭐예요, 정말.”
발에 차이는 게 동죽인데 어떻게 꼴랑 다섯 개….
종알종알 잔소리하며 재게 걷는 발소리가 찰박찰박 그를 뒤따랐다. 그의 넓은 보폭을 용케도 따라붙은 해인은 새침하게 말했다.
“각자 캔 만큼만 먹기로 해요.”
“그렇게 안 봤는데 좀 치사하네.”
“노동의 대가는 정당해야죠. 일한 만큼 드세요.”
조곤조곤 못 박으며 그를 앞질러 간 그녀는 약 올리듯 발걸음을 빨리했다. 기가 차 멈춰 선 태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행여 말이라도 걸세라 도망가기 바빴던 이전의 그 이순정이 정녕 저 여자와 동일인이었던가. ‘이순정’과 ‘이해인’의 괴리를 경험한 지 며칠이 흘렀건만 여전히 놀랍고도 새롭다.
복면을 벗어 던진 그녀는 조금씩 다른 사람이 돼가고 있었다.
스스럼없이 먼저 말을 걸기도 하고 무방비하게 미소도 짓더니, 이젠 저렇듯 환하게 웃으며 장난을 치기도 했다.
하물며 희한하게 처음부터 제법 편하게 대하던 춘섭과는 어느 순간 이 구역의 톰과 제리가 됐다.
그뿐인가. 오늘은 함께 조개 캐러 가잔 소리를 다 했을 정도이니,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이었다.
선글라스 하나 벗어 던졌을 뿐인데 사람이 이렇게까지 달라질 수가 있나.
아니, 저 밝고 쾌활한 모습을 여태 그 작은 선글라스 안에 구겨 넣고 어떻게 숨을 쉬고 살았을까.
“빨리 와요!”
어느새 저만치 멀어진 해인이 그를 돌아보며 소리를 높였다. 정색하고 새치름하게 앞서가더니 그새 또 웃으며 손목을 까딱거리고 있다. 붉은 노을이 환하게 비춘 얼굴이 참 맑기도 하다.
“…….”
태건은 저를 향해 웃으며 뒷걸음을 걷는 그녀의 얼굴을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이내 뒤돌아 총총 걸어가는 뒷모습마저 어여뻐서 도통 눈을 떼지 못했다.
알고 보니 웃음이 많은 여자. 또 알고 보니 재잘재잘 말도 제법 잘하는 여자.
맑고 촉촉한 눈망울은 말할 것도 없이 예뻐서, 한번 보고 있자면 도통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여자.
알면 알수록 예쁜 것투성이라, 속절없이 빠져드는 마음이 하루가 다르게 당황스럽다.
감정이라는 게 원래 이렇게나 갑작스러운 건지. 이런 간지러운 호르몬의 반응엔 도통 무지한 그는 조금 버거울 지경이었다.
그러게 좀 적당히 예쁠 것이지.
미련과 욕심이 끝모르고 쌓여갔다. 마음이 자꾸만 사치를 부리려 해 곤란하기 이를 데 없다.
대체 저 여자와 뭘 어쩌고 싶은 줄도 모르고.
“어이! 김수철이!”
잠시 멈춰 선 채 한숨짓던 때였다.
광활한 갯벌에 웬 거친 탁성이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몇 걸음 앞서갔던 해인이 돌연 사색이 된 얼굴로 태건을 돌아보았다.
가늘어진 태건의 시선이 해인의 어깨 너머로 비껴갔다. 돌계단에 앉아있던 수철의 뒤편으로 낯선 차 한 대가 서 있었다.
이내 사방의 문이 벌컥 열리고 네 명의 덩치가 우르르 차에서 내렸다.
수철은 바짝 쪼그라든 채 금세 놈들에게 둘러싸였다. 함께 있던 용순은 몇 걸음 비켜서서 태건을 향해 다급히 손을 펄럭거리고 있었다.
“이 새끼가 수금 날에 겁도 없이 알바를 째야? 우리 김수철이가 간땡이를 어따 팔아잡쉈으까잉, 응?”
“아. 저, 저 이제 가려고 했는데요. 앞 타임 형이 오늘만 바꿔 달라고….”
“쉿, 쉿. 아가리 싸물어, 새끼야. 니가 그라고 변명을 해블면 여까지 친히 납신 이 형님의 존심이 뭣이 되냐. 엉?”
색색의 용무늬 셔츠와 검은 슈트를 유니폼처럼 걸친 세 명의 덩치들 틈에 어딘지 익숙한 노랑머리 하나가 끼어있었다. 지난번 읍내에서 수철의 돈을 빼앗았던 무리 중 한 놈이 아닌가 싶었다.
“너, 접때 그 뭐냐. 야들한테 가드쳤다던 그 새끼는 뭐시여. 멸치 대가리같이 생긴 잡놈 새끼 하나 있다 허지 않았냐?”
그러니까 저 덩치들이 노랑머리의 윗대가리쯤 되는 모양인데….
대강 봐도 짐작이 가능한 상황이라, 태건은 깊은 탄식을 뱉었다.
“하… 저 새끼는 콩알만 한 게 왜 저렇게 우여곡절이 많아….”
읏씨, 읏씨.
그저 숨인지 욕인지 모를 소리가 마루 위로 거칠게 쏟아졌다.
네모나게 각 잡은 걸레를 쥐고 바닥을 닦던 춘섭은 깊은숨을 토하며 상체를 세웠다.
“후우…. 자아. 양춘섭아. 생각을 쫌 해보자. 내가 지금 여서 뭐를 하고 있지?”
마른빨래를 걷어서 개고, 가득 쌓인 그릇을 설거지하고, 방방마다 환기를 시킨 다음 바닥을 쓸고 닦고.
그러니까 이게 대체 무슨 뻘짓인가 말이다.
청운금융 강북지부의 지부장이자, 대한민국 5성급 호텔 카지노 CW클럽의 준책임자라 불리는 이 양춘섭이가, 어?
‘디스코파리’ 추리닝을 깔 맞춰 입고 개처럼 엎드려서 걸레질을, 어?
“이기 말이 되나, 이기. 와… 현타 씨게 오네.”
우리 행님 사랑의 짝대기 감시하러 왔다가 졸지에 시바, 이게 무슨 짓거린지.
“에이 씨, 때리치아! 안 해!”
구겨진 걸레가 구석에 처박혔다. 실컷 다 해놓고 이제 와 손 털려니 억울하긴 하지만 그래도 자존심이 있으니 마루까지는 안 닦으련다.
마당으로 내려선 춘섭이 담배를 막 꺼내려던 차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광대의 문자였다.
[ 형님. 강북지부 순필이한테 넘어갔습니다. ]
“이런, 씨바.”
조석현이 결국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부회장 라인의 동태를 살피느라 숨죽이고 있던 놈이 결국엔 본격적으로 땅따먹기를 시작한 것이었다.
마 라인의 죽음을 확신한 건지, 동굴 앞에 일부러 불을 피우는지는 알 수 없으나 어쨌거나 놈이 움직이기 시작한 이상 청운은 머지않아 개판이 될 것이다.
부스러기부터 아랫놈들에게 인심 쓰듯 던져주고 야금야금 지분을 모으려 하겠지. 종내에는 회장실 책상 위에 제 놈의 족발을 걸쳐 올리기 위해 온갖 더러운 수를 쓸 테다.
그 시작으로, 춘섭의 관할인 강북지부를 강 이사 라인의 최순필에게 넘긴 모양이었다.
“근데 진짜로 최순필이네. 행님은 우예 아셨지.”
춘섭은 조석현의 오른팔인 경두에게 넘길 거라 예상했으나 태건은 확신에 차 말했었다. 강덕구 이사의 오른팔 최순필에게 강북을 넘길 것이라고.
해서 며칠 전 암암리에 강 이사와 연락해 일찌감치 커넥션을 마쳐놓은 그였다.
“여윽시 우리 행님은 선견지명이 있으시다니까. 이러이 내가 우리 행님을 안 사랑할 수가 있나.”
관할이 졸지에 애먼 놈에게 넘어간 것은 뼈가 시리게 아프나 어차피 잠시 맡겨둔 것일 뿐, 상관은 없는 일이었다.
“순필아, 밥 잘 차려놔레이. 숟가락 들고 가구로.”
[ 윤 마담하고 자리 함 만들어라. 조만간 행님 모시고| ]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광대에게 보낼 메시지를 두드리던 때였다.
“춘섭 씨!”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지나 싶더니 담장 너머에서 해인의 목소리가 뻗쳐왔다.
“뭐고.”
무슨 일인지 숨을 헐떡이며 달려온 해인이 언덕 쪽을 마구 손짓했다.
“저기, 저, 저기 좀…!”
“먼 일입니까?”
“깡패들이, 찾아와… 하아, 하… 아, 아무튼 자세하게 얘기할 시간 없어요. 태건 씨가 혼자 갔는데, 빨리 좀…!”
“머라카노. 숨 좀 쉬고 말합시다. 깡패들이 뭐 어쨌다고요?”
“그러니까 그게.”
가쁜 숨을 몰아 뱉은 해인은 최대한 차분히 직전의 상황을 설명했다. 갈퀴라도 쥐여주려 했으나 그가 맨손으로 놈들과 어디로 가버렸다며 다급히 춘섭의 옷소매를 당겨댔다.
춘섭은 얼떨결에 두어 발짝을 끌려가며 물었다.
“뭐 몇 명이나 되덥니까?”
“넷이요. 네 명이었어요.”
“에이. 그라믄 머 금방 오시겠네.”
“네?”
해인의 손을 손쉽게 떨구어낸 춘섭은 쓰다 만 메시지를 태연하게 톡톡 두드렸다.
“금방 오실 겁니다. 물이나 한잔 드십쇼.”
“아니, 아, 안 가보세요?”
“네 명빠이 안 된담서요.”
“밖에라뇨.”
당황한 해인은 언덕 쪽을 돌아보며 걱정스레 말했다.
“그 사람들 다 칼을 가지고 있을 거예요. 태건 씨는 아무것도 없이 혼자….”
“우리 행님은 요게 있다 아입니까. 요게.”
그사이 메시지 전송을 끝낸 춘섭은 제 양손을 딸랑딸랑 흔들며 비죽 웃었다.
“그게 대체….”
해인은 망연한 얼굴로 헛숨을 삼켰다.
아무리 그도 험한 일을 한다지만 그래도 혼자 맨손으로 칼 든 사람 네 명을 상대하러 갔다는데, 어쩜 이렇게….
일전에 들었던 용순의 말론 그저 동네 양아치 수준이 아니라고 했다.
수철의 아버지가 진 빚 때문에 몇 번이고 수철이네 집을 쑥대밭을 만들고 경찰까지 오가곤 했지만, 경찰들도 포기했을 만큼 근방의 시까지 뻗쳐있는 큰 조직이라 들었다.
아마도 춘섭은 그저 시답잖은 동네 건달 수준이라 여긴 모양이다.
장난스러운 춘섭의 태도에 당황을 넘어 은근히 화기가 오른 해인은 정색하며 말했다.
“그 사람들 이쪽 지역에서 무섭기로 소문난 사람들이에요. 지난번엔 패싸움하다가 사람도 막 죽였다고 지역 뉴스에….”
“아이고오오.”
파르르 떨리는 해인의 목소리가 곡소리 같은 한숨에 파묻혔다.
고개를 툭 젖힌 채 얼마쯤 한숨을 쉬던 춘섭은 반질반질하게 닦아놓은 집 안 곳곳을 가리키며 짜증스레 투정했다.
“이제까이 청소하고 설거지하고 걸레 빨아재끼고 힘들어가 죽겠구마는 거참, 진짜로!”
“…….”
졸지에 혼이 난 기분이 된 해인은 할 말을 잃고 커다란 눈만 깜박였다.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이 사람은 어쩜 이렇게 심각성을 못 느낄까, 답답한 심정이었다.
그러잖아도 조금 글썽거렸던 눈망울이 금세 울음을 터트릴 기세로 발개졌다.
“…지끼미.”
강아지처럼 그렁그렁한 해인의 눈을 당황해 바라보던 춘섭은 결국 툴툴거리며 물었다.
“에이 씨. 어데로 갔십니까?”
“…슈퍼 옆 골목이요.”
여전히 내키지 않는 듯 쩝쩝 입소리를 내던 그는 집업 지퍼를 턱 끝까지 올리고 대문을 벌컥 열고 나갔다.
“아… 국대가 자꾸 이래 조기 축구 나가가 낑기고 이카면 안 되는 데에에에. 우야겠노오오.”
노래라도 부르듯 말꼬리를 꺾으며 구시렁거리는 춘섭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물결쳤다. 이 와중에 여유롭게 담뱃불까지 붙이고 슬리퍼를 질질 끌며 느릿느릿 멀어진다.
해인은 도무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됐다.
“하… 뭐야, 정말.”
무지하게 걱정이 됐는데 춘섭의 반응이 저러니 이상하게 또 걱정이 안 되는 것 같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기분.
이게 대체 무슨 기분인지 모르겠다.
* * *
그의 나이 열네 살 때였단다.
“아, 나가 말 안 혔는가? 태건이 갸가 생긴 것만 그라고 이뿌장-허제, 말도 못 허게 험한 아랑께.”
당시 읍내 ‘당구장 양아치’라 불리던 10대 후반의 형들 일곱 명이 동급생 친구를 에워싸고 무자비하게 구타했던 적이 있었더란다.
같은 시각 인근을 지나던 태건이 그 광경을 보고서는 책가방을 냅다 집어 던지고 뛰어들었다는데….
그의 아버지 부탁으로 대신 파출소로 찾아갔던 용순은 기가 막혀 할 말을 잃고 말았단다.
“7대 1로 싸웠단디 파출소로 오라길래 내사 기양 막 승질부터 내부렀제. 아, 일곱이 들러붙었으믄 아가 죽어났을 판인디, 병원엘 델구 가야제 어찌자고 여적 파출소에 묶어놨냐! 그라고 욕을 욕을 허면서 갔두만 얼레? 이게 먼 일이랴?”
이미 반병신이 된 셋은 병원에 실려 간 후였고, 나머지 넷도 완전히 떡이 되어 파출소에 늘어져 있더라는 거다.
“태건이 갸는 말짱혔어. 요 조동이만 좀 터지고 말았두만. 어휴, 그 나이서부터 그만치 날아댕겼는디 지금은 더하지 않겄는감?”
그러니 걱정하지 말라며 도닥이던 용순이 언덕을 내려간 지 30분이 흘러가고 있었다. 춘섭이 뒤따라간 후부터 얼추 따져보자면 1시간이 다 돼가는 셈이었다.
다들 별일 아닌 듯 말하더니. 거봐, 별일 아닌 게 아니었잖아.
해인은 공터 앞을 정신없이 서성거리며 연방 언덕 아래를 살폈다. 해가 완전히 떨어져 어둠이 내린 마을엔 듬성듬성 놓인 희미한 가로등 불빛만 음산하게 번져 있었다.
“어떻게 된 거야, 대체….”
시간이 갈수록 불안함에 가슴이 둥둥 뛰었다. 몸엔 왜 이리 땀이 나는지 머플러와 점퍼까지 벗어두고 나온 참이었다.
불현듯 지난날 피투성이가 된 채 쓰러져있던 그를 떠올린 해인은 질끈 눈을 감았다.
아… 역시 신고를 했어야 하는 건데….
괜스레 애먼 기억이 떠올라 불안감은 배가 됐다. 마를 새 없는 식은땀이 축축이 목을 적셨다.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다 결국 핸드폰을 꺼내 들던 때였다.
“…어?”
무심코 돌아본 슈퍼 골목 쪽에서 사람의 형체가 어른거렸다. 점퍼를 손에 쥔 한 남자가 어둠 속을 빠져나와 가로등 불빛 아래 모습을 드러냈다.
희끄무레한 가로등의 조도는 침침할 만큼 낮았으나 해인은 한눈에 그를 알아볼 수 있었다.
“하아….”
대강 봐도 멀쩡히 걷는 모습에 안도의 한숨이 툭 터져 나왔다. 긴장감에 땀이 송골 맺혔던 목덜미가 삽시에 서늘해졌다.
해인은 지체 없이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막 담배를 물고 불을 붙이려던 그가 뜀박질 소리에 눈을 들었다.
해인을 발견한 태건은 불을 붙이지 않은 담배를 도로 집어넣고 희미하게 미간을 좁히고 있었다.
금세 그의 앞까지 달려간 해인은 가슴팍을 내리누르며 숨을 골랐다.
“하아, 하아….”
태건은 티셔츠 한 장만 달랑 걸치고 나온 해인을 훑으며 놀라 물었다.
“왜 이렇게 뛰어와? 점퍼는 또 어쩌고.”
“아. 땀이, 땀이 나서 잠시, 하아….”
대답은 하는 둥 마는 둥 가쁜 숨을 몰아 뱉은 해인은 성마르게 그의 몸을 살폈다.
“괜찮아요? 안 다쳤어요?”
“…….”
호흡을 정리할 새도 없이 그의 몸만 살피는 눈이 온통 걱정에 차 있다.
그런 그녀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태건은 그만 바람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팔자가 된 해인의 눈썹이 삐쭉 솟구쳤다.
“왜 웃어요?”
누군 땀까지 뻘뻘 흘리며 내내 마음 졸였건만, 이 상황에 지금 웃음이 나냐는 투다.
“그냥.”
태건은 연신 웃는 얼굴로 덧붙였다.
“그쪽 하는 짓이 귀여워서.”
“…….”
생각지도 못한 말이 불쑥 건너오자 하얀 얼굴이 발갛게 물들었다.
“무, 무슨….”
놀리는 건지 뭔지….
민망해 목덜미를 긁적이던 해인은 문득 그의 뒤를 살피며 물었다.
“아. 춘섭 씨는요? 뒤따라갔는데, 못 만난 거예요?”
“만났어.”
“근데 왜 혼자 와요?”
혹시 춘섭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대번 걱정스러운 얼굴이 된 해인은 목을 쭉 빼고 연방 그의 뒤를 살폈다.
어깨 위로 묵직한 온기가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들고 있던 제 점퍼를 해인에게 걸쳐준 태건은 뒤를 살피느라 기울어진 해인의 머리를 검지로 당겨 바로 세웠다.
“뭘 정신 사납게 둘이나 걱정해.”
“네?”
“내 걱정만 하라고.”
“…….”
가볍게 웃으며 툭 내뱉은 남자가 유유히 걸음을 뗐다.
장난인 게 분명한 말투와 표정에 왜 느닷없이 가슴께가 무지근해지는지.
쇄골 아래를 꾹 누르다 포대 자루처럼 어깨를 덮은 점퍼를 내려다본 해인은 뒤늦게 정신을 붙잡고 그의 뒤를 쫓았다.
“난 괜찮아요. 진짜 더워서 벗은 거예요.”
그녀가 점퍼를 벗어 내밀었으나 그는 다시금 해인의 어깨에 척 걸쳐주며 말했다.
“한여름이야? 덥기는 무슨.”
“진짠데….”
목 아래까지 단단히 지퍼를 채워준 그는 텅 빈 소매 부분을 툭 건들곤 피식 웃었다.
“똑바로 입어. 또 감기 걸려서 정신 놓지 말고.”
“…….”
지퍼를 채워 완벽히 포대 자루가 된 점퍼 안으로 금세 훈기가 찼다. 포근히 몸을 감싼 점퍼에서 그의 향기가 물씬 풍겼다.
읍내 화장품 가게표 스킨 향을 품은 겨울 냄새.
갑작스레 목덜미로 열이 훅 끼쳤다. 가뜩이나 무지근하던 가슴께로 뜨끈한 열감이 더해졌다. 오늘따라 왜 이리 사소한 것들이 의식이 되는지.
괜스레 묘해진 기분에 마른 입술을 적신 해인은 커다란 소매에 슬그머니 양팔을 끼워 넣었다. 푹 찔러 넣어도 한참이나 남는 소매를 보니 더더욱 미묘한 기분이 되었으나 모른 척 입술만 꾹 말아 물었다.
그새 그는 저만치 멀어져 있었다. 잰걸음으로 거리를 좁혀간 해인은 연신 뒤를 돌아다보며 물었다.
“근데 춘섭 씨는 정말 어떻게 된 거예요?”
“정리하고 올 거야.”
“혼자 두고 와도 괜찮은 거예요?”
“뭐 알아서 하겠지.”
대꾸가 너무 대수롭지 않으니 더는 할 말이 없어졌다. 도대체 그 덩치들을 어떻게 한 건지, 그의 반응으로 봐선 이젠 외려 그들의 상태가 걱정될 지경이었다.
어쨌든 춘섭도 무사한 것 같기는 한데….
언덕을 오르는 와중에도 시선이 자꾸만 자석처럼 어둑한 골목으로 돌아갔다. 두어 번 돌아가던 시선이 무심코 그의 목을 스친 순간이었다.
“…어?”
해인의 눈이 일순 커다래졌다. 미처 보지 못했던 그의 목덜미에 사선으로 길게 피가 배어나 있었다.
해인은 놀라 물었다.
“여기, 다친 거예요?”
태건은 덤덤한 얼굴로 제 목을 스윽 닦아냈다.
“아아….”
아아, 라니.
세상에. 이 남자는 손에 묻어난 피를 보고도 어쩜 이렇게 무덤덤할까.
“잠깐 좀 봐요.”
해인은 발꿈치를 바짝 세우고 그의 맨투맨 옷깃을 조금 내려보았다.
“어떡해…. 칼에 베인 거 같은데….”
다행히 깊게 베인 것은 아닌 듯싶으나 귀밑에서부터 15센티는 족히 될 듯 상처가 꽤 길었다.
그럼 그렇지, 멀쩡할 리가 있겠냐고.
해인은 제가 더 쓰라린 것 같은 얼굴로 괜히 핀잔했다.
“거봐요, 내가 뭐랬어요. 칼 들고 있다니까, 그 사람들.”
칼에 목을 베이고도 뭐가 그렇게 좋은지, 그의 입가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러게. 갈퀴를 들고 갈 걸 그랬지.”
하물며 속 편하게 농담이나 하고 있으니 기가 막힐 수밖에.
도대체 이 남자는 얼마나 험한 인생을 살아왔으면 목에 칼이 닿고도 별일 아닌 양 웃을 수가 있을까. 사경을 헤매다 겨우 눈을 뜬 지 얼마나 됐다고.
“정말 못 살아….”
흡사 오지게 말 안 듣는 막냇동생을 보듯 그를 바라보던 해인은 혀를 내두르며 태건의 팔을 끌어당겼다.
“어서 가요, 치료하게.”
재게 걷는 작은 털신 뒤로 커다란 운동화가 묵묵히 끌려갔다.
반 발짝 앞서 걷는 해인의 뒤통수에 좋아 죽겠다는 듯 미소가 만개한 그의 시선이 말끄러미 머물러 있었다.
어려서부터 찢어지고 부러지고 베이고 멍드는 게 일이었다.
해서 통증에 무뎌진 건 이미 오래라, 지난번처럼 온몸이 난장이 되지 않는 이상 웬만한 상처엔 통각을 잘 느끼지 못했다.
그러니 이렇게 살짝 긁힌 정도는 사실 그에겐 길 가다 나뭇가지에 스친 수준도 못 되는 것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소독은커녕 연고도 바르지 않았을 테지만, 그는 잠자코 턱을 기울인 채 해인에게 상처를 맡겼다.
세상 조심스럽게 다가온 솜이 목덜미에 슬쩍 닿았다. 따끔한 척 눈살을 찌푸리자 소독솜이 대번 떨어져 나간다.
“아파요?”
“조금.”
제 입에서 나온 말임에도 참 뻔뻔하다 싶다.
남태건이 간지럽게 아픈 척이라니. 춘섭이 곁에 있었더라면 얼마나 똥 씹은 표정을 지었을지 훤히 보였다.
그러니까 이건 조금, 과하다 싶게 이상한 기분이었다. 이 겨울에 땀을 삐질 흘리며 달려와 걱정스레 저를 살피던 모습을 본 순간부터.
제 점퍼에 묻히다시피 쏙 들어가 뒤뚱거리던 모습도 귀엽고, 상처 좀 보겠다고 발꿈치를 치켜들고 어깨에 매달릴 때도 마냥 예쁘더니, 코앞에서 달콤한 향기를 폴폴 풍기며 예쁜 눈을 깜박이고 있으니 도무지 어쩔 줄을 모르겠다.
겪어 본 적 없던 감정이었다. 묘하게 가슴이 몽글거리고 어딘가가 간지럽다. 해서 자꾸만 안 하던 짓을 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이 여자의 반응이 재미있어 자꾸만 더 얄궂은 짓을 하게 된다.
후우, 후. 뜨끈한 입바람이 목덜미에 닿았다. 꾀병을 부렸더니 아이 상처를 다루듯 입김 부는 것 좀 보라지.
이 여자가 오늘따라 왜 이렇게 자꾸 귀여운 짓을 할까.
이러니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있나.
태건은 조금 난감한 심정으로 해인을 향해 눈을 내리떴다.
집중하느라 입술이 마르는지 혀끝을 살짝 내밀어 아랫입술을 적시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적당히 젖은 입술을 이 사이에 비틀어 물고는 또 집중해서 상처를 닦아낸다.
소독을 끝내고 연고를 집어 든 해인은 한결 긴장이 풀린 얼굴로 물었다.
“남태건 씨는 정말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질문의 뜻을 파악하기가 모호한 어조였다. 문자 그대로 ‘하는 일’을 묻는 거 같기도 하고, 왜 이리 몸을 함부로 다루냐며 정신 상태를 은근하게 돌려 까는 것 같기도 했다.
“질문이야, 꾸중이야.”
해인은 면봉 끝에 연고를 덜며 새침하게 답했다.
“둘 다요. 대체 뭐 하는 사람이길래 칼 든 사람들을 맨손으로 상대하나 싶기도 하고.”
그의 진홍빛 입술에 싱거운 미소가 감겼다.
“뭐 하는진 전에 얘기했던 거 같은데.”
방파제 앞까지 도망간 그녀를 달래느라 별의별 소리를 다 했었다. 물론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자세히 말하진 않았으나 평범한 일이 아니리라는 건 충분히 알았을 터였다.
어여쁜 눈이 그날을 상기하듯 가만히 깜박였다. 그 와중에 또 한 차례 날름 삐져나온 혀끝이 아랫입술을 훑고 사라졌다.
가만 보니 이 여자, 좀 위험한 버릇이 있다.
“대충 짐작은 했는데, 뭐 어떤 일을 하는지 자세히는 모르니까….”
태건은 촉촉이 젖은 해인의 입술을 고집스레 바라보며 말했다.
“자세히 몰라도 되는 일.”
삐죽 나온 입술이 금세 제자리로 돌아갔다. 보일 듯 말 듯 찰나 스쳐 간 움직임도 용케 캐치한 태건은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저를 향한 빤한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인은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아까 그 사람들처럼 약한 사람들 괴롭히고 막, 그러는 건 아니죠?”
태건은 대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디서 그런 근본 없는 쌩양아치랑 비교를….”
발끈하는 그의 모습에 해인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거 아니면 됐어요. 나쁜 사람인 줄도 모르고 치료해주고 있는 거면 내가 너무 억울하니까.”
“그렇다고 썩 좋은 놈도 아닌데.”
“나한텐 좋은 사람이니까. 그럼 됐죠, 뭐.”
“…….”
싱긋 웃으며 별스럽지 않게 대꾸한 해인은 드레싱 밴드를 찾아 포장을 뜯었다.
그에겐 기습과도 같았던 한마디와 진한 미소로 제대로 한 방 먹인 줄도 모르고,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목 아래로 밴드를 가져다 댄다.
아… 이거 아무래도 심각한데….
해인을 향한 마음을 자각한 후로 심장이 유별나게 뛰지 않은 적은 없었으나, 오늘은 확실히 상태가 심각했다.
원래도 예뻐 보였던 여자가 갑자기 한계치를 넘어버리니 끓어 넘치는 이 감정이 감당이 안 되는 것이었다.
작고 보들보들한 손끝이 목덜미를 자꾸만 스친다. 예술이라도 하듯 밴드를 집중하여 반듯이 붙이느라 그놈의 혀가 또 날름 삐져나와 있다.
이번엔 들어갈 생각도 않고 이 사이에 살짝 물려있는 혀끝을 가만 바라보던 그는 결국 한숨 쉬듯 말했다.
“그거 좀 안 할 수 없어?”
“네?”
뭘요? 하며 말갛게 깜박이는 눈을 마주 본 태건은 젖은 입술을 눈짓하며 말했다.
“입술 핥는 거.”
“…아.”
도화지처럼 하얀 얼굴이 민망한 듯 붉어졌다. 해인은 멋쩍게 제 입술을 매만지며 주절주절 말했다.
“건조해서 그런지 입이 자꾸 말라서 나도 모르게…. 미안해요. 몰랐어요.”
“미안할 거까진 없는데.”
발개진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던 태건은 심히 곤란한 듯 미간을 좁히며 덧붙였다.
“내가 지금 좀 발정기라, 빨고 싶어서.”
“…….”
“…….”
“…….”
시선만 맞닿은 채 침묵한 시간이 숨 막히게 흘러갔다.
성격상 미처 필터를 장착하지 못한 그도, 예고 없던 돌직구에 당황한 그녀도 각자의 박동에 짓눌린 채 열없이 시선만 얽고 있었다.
밴드 껍질을 쥔 해인의 손이 하릴없이 꾹 말려들어 갔다. 둥둥둥, 인정사정없이 온몸을 흔들어대는 박동이 1초가 멀다 하고 심상찮게 뛴다.
이러다 정말 심장이 터져나가겠다 싶던 순간.
“날도 찬디 마루서 뭣들 허냐?”
구세주처럼 등장한 대길의 목소리에 해인은 오뚝이처럼 벌떡 일어섰다.
“엇! 오, 오셨어요?”
버선발로 후다닥 마루를 내려가는 모습이 마치 꼬랑지에 불이라도 붙은 모양새다.
“시, 시장하시죠? 얼른 저녁 차릴게요.”
흡사 빼앗듯 대길의 가방을 받아 든 그녀가 주방으로 뛰어들어 가기까진 실로 순식간이었다.
뭐가 지나갔나, 싶은 얼굴로 마당에 꾸부정히 서 있던 대길은 주방을 눈짓하며 태건에게 물었다.
“쟈한테 뭔 짓 혔냐?”
그러게요. 까딱했다간 뭔 짓을 할 뻔했지.
흐리게 헛웃음이 맺힌 잇새로 이내 한숨이 흘렀다.
예뻐서. 만져보고 싶어서. 키스하고 싶어서.
온갖 정상적인 말 다 놔두고 발정기라 빨고 싶다니. 뭔 개새끼도 아니고.
절절 고개를 내저은 태건은 담배를 챙겨 들며 싱거운 투로 말했다.
“그냥 뭐, 끼 좀 부렸습니다.”
“잉? 허허. 별….”
담배를 물고 대문을 나서는 태건의 등 뒤로 실웃음 섞인 대길의 시선이 길게 따라붙었다.
둥그렇게 산을 이룬 이불이 연발 구무럭거렸다. 얼마간 잠잠하던 움직임은 몇 초도 채 지나지 않아 또다시 부스럭댔다.
후로도 몇 번을 덧없이 뒤척이던 해인은 결국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던 이불을 거두었다.
“하아….”
미치겠다. 잠이 오지 않는다. 카페인을 때려 부은 것처럼 심장이 벌렁거려 도무지 잠을 잘 수가 없다.
수면 유도 음악은 몇 시간째 잔잔히 울리고 있었으나, 수면을 유도하긴커녕 정신이 어지러워 틀어놓은 것조차 망각했다.
망연히 한숨지은 해인은 결국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자리끼로 가져다 놓은 물 잔을 쥐었지만 이미 바닥을 보인 지 오래였다. 그것을 알면서도 까맣게 잊고 잔을 기울이던 손이 무색해졌다.
“어후, 더워.”
결국 물 대신 쥔 것은 또다시 대본이었다. 펄럭펄럭, 종이 뭉치가 어둠을 가르고 바람을 일으켰다. 몇 시간 전부터 부채로 전락한 대본은 끄트머리가 이미 양껏 우그러져 있었다.
옷깃을 펄럭이며 바람을 쐬던 해인은 열이 오른 볼을 연신 매만졌다.
예고도 없이 또 불쑥. 그의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내가 지금 좀 발정기라, 빨고 싶어서.”
“아아, 진짜….”
여지없이 얼굴이 불타올랐다. 답 모를 의문이 자꾸만 머리 위를 뱅뱅 돌았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뭐 그런 말이 다 있어.
살다 살다 처음 들어보는 종류의 유혹이었다. 아니, 유혹이 맞긴 한가? 이건 도대체가, 설레야 하는지 기분이 나빠야 하는지 모를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내내 유난히도 낯선 기분이 찾아드는 순간이 잦았다.
갑자기 귀엽다고 하질 않나, 무심히 점퍼를 척 걸쳐주곤 제 걱정만 하라 하질 않나, 이젠 뭐 빨고 싶다고….
“뭐야, 정말. 헷갈리게….”
순수한 관심인지, 반짝 스쳐 간 욕정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심장은 속절없이 떨리기만 하니 머리통이 산만해 죽겠다.
“아, 몰라. 모르겠어.”
결국 생각하길 포기한 해인은 웅크린 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와중에도 콩닥콩닥 빠르게 뛰는 심장은 허벅지를 간지럽게 두드리고 있었다.
하다 하다, 알 수 없는 건 그가 아니라 도리어 제 마음이 됐다.
생각해보니 그렇지 않나. 그의 감정이 뭐든, 그게 이렇게나 잠도 못 자고 유난 떨 일인가 말이다.
순수한 관심이라면 어쨌든 고마운 거고, 수작이라면 뭐 이런 엉큼한 놈이 다 있나, 욕하며 무시하면 될 일을.
대체 저는 왜 이렇게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산만하게 흔들리고 있는지.
답을 찾아 헤매듯 칠흑같이 캄캄해진 시야를 더듬더듬 짚어본다. 이내 어둠의 끝자락에서 찾아낸 그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은근했던, 혹은 유별났던 배려들. 저를 향한 의뭉스러웠던 시선이 무해한 미소로 바뀌어 가던 순간들.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모든 순간을 빠짐없이 떠올리다 제 안을 차분히 파고들었다.
그때마다 심장의 저변에서 일렁거렸던 감정은 제각기 다른 크기였을 뿐 모두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돌탑을 쌓듯 조금씩 쌓여가던 그를 향한 관심, 고마움, 미안함, 설렘.
별 이상한 소리를 듣고도 맹목적으로 그저 떨리기만 했던 심장. 하물며 그 순간 무슨 상상을 했는지 은근하게 젖어 들던….
해인은 눈을 가린 손을 천천히 떨구었다. 다소간 짓눌렸던 각막이 흐려진 초점을 되찾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시야가 맑아지고도 여전히 불분명한 초점은 스탠드 불빛이 닿지 않은 방구석 어딘가에 흐릿하게 머물러 있었다.
“…….”
그래. 다른 누구도 아닌 제 마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면 말이 안 되는 소리다. 단지 꾸역꾸역 외면하고 모른 척하고 싶었을 뿐.
검은 눈동자가 정면의 색 바랜 벽으로 망연히 향했다.
단 몇 마디로 사람을 이렇게 흔들어 놓고, 저 벽 너머의 남자는 잘도 자고 있겠지.
“…정말 싫다, 남태건.”
문득문득 흔들릴 때마다 버릇처럼 뇌까렸던 소리를 중얼거려봐도 이젠 저를 속일 수가 없다.
그러게 왜 그렇게 잘해줘선.
“하….”
아무래도 나, 저 남자가 좋은가 보다.
해인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이불 속에 폭 파묻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