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장 (15/22)

15장

“오늘 당장? 아니, 그렇게 급하게는 좀 그렇고…. 설은 지나고 생각해보려고. 명절에 혼자 계시면 할아버지 너무 적적하실 것 같아서.”

아침부터 요란했다. 이른 새벽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전화를 걸어온 철용이 당장 데리러 오겠다며 난리가 난 것이었다.

[ 오빠, 나 이제 서울 올라갈까? ]

그 문자 한 통에.

목소리가 하늘을 날았다. 이 순간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며 감격해 눈물까지 훌쩍였다.

- 야아, 진짜 이런 날이 오는구나! 이런 날이 오긴 와. 하하! 가만있어 봐. 윤 감독님이 시놉 하나 주신 게 여기 어디 있었는데….

드륵, 드륵. 다급히 서랍 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렸다. 이내 시놉을 찾았는지 종이 뭉치를 두드리는 소리도 텅텅 건너왔다.

- 캬하, 윤 감독님이 선견지명이 있으셨나 보다. 얼마 전에 사옥까지 직접 오셔서 이걸 주셨는데, 여주 자리에 너만 한 적임자가 없다고 난리신 거야. 언제쯤 복귀하겠냐고 얼마나 닦달을….

“오빠. 진정해, 진정. 당장 복귀한다고 한 건 아니거든?”

- 어어. 그래, 그렇지. 내가 너무 성급했다. 일단 서울 공기 다시 적응도 하고, 몸도 좀 만들고, 관리도 좀 받고. 그러고 천천히 시나리오 골라보자. 알았지? 응?

“알았어. 숨 좀 쉬어, 이제.”

그렇게나 좋을까. 중간중간 코를 훌쩍여가며 흥분해 재잘거리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웃음이 나다가도 괜히 코가 찡했다.

지난 2년을 이렇게나 간절하게 기다려줬구나 싶어 미안하고 고마웠다.

- 그나저나 사진이 풀려서 어쩌냐. 괜찮겠어? 기자들 찾아가고 그러면 귀찮을 텐데.

“아… 여기까진 잘 모를 거야. 전라도에 바다가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닌데, 뭘.”

사건 아닌 사건은 늦은 새벽에 일어났다.

해인의 찐팬이라며 한바탕 눈물 콧물을 쏟았던 김혜진이라는 대학생이 늦은 새벽 SNS에 올린 사진 한 장이 단시간에 이슈가 되고 말았다.

다시 제대로 찾아간 펜션에서의 즐거운 한때를 기록한 그곳에 해인과 함께 찍은 사진이 있었던 것이었다.

버스를 잘못 타 엉뚱한 바다 앞에 내렸는데,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하게 친애하는 그녀를 만났노라고.

카메라를 들며 기념사진을 부탁하는 혜진에게 마지못해 미소 지어줄 땐 정말 생각지도 못했다.

그 사진을 SNS에 올릴 줄은.

하물며 모델 지망생이라던 그녀가 이미 꽤 많은 팔로워를 거느린 인플루언서였을 줄은.

현세와 떨어져 산 2년 동안 일반인의 SNS도 이렇게나 유명세를 타게 됐을 줄이야.

새벽 댓바람부터 기사가 마구 쏟아졌다. 2년이란 시간이 흘러 이제야 좀 잠잠해졌던 해인의 이름이 포털에 도배가 됐다.

본의 아니게 이슈가 되자 아차한 모양인지 사진은 급히 삭제되었으나, 이미 퍼질 대로 퍼진 후라 수습하기엔 늦어버렸다.

본인도 어지간히 당황한 모양인지 이른 아침 소속사로 직접 전화를 걸어 와 사과를 했더란다.

- 아이고, 우리 이해인 씨 이렇게 순진해서 어쩌냐. 사진에 간판만 나와도 다 찾아내는 게 대한민국 기자들이야. 네티즌은 또 어떻고. 벌써 알아낸 사람도 있을지 몰라.

“에이, 설마….”

말은 그리 했으나 마당을 쓸던 움직임이 더뎌졌다.

설마, 그걸 보고 어떻게 알겠어.

사진은 슈퍼 앞 평상에 앉아 찍었었다. 혜진과 단둘이 얼굴을 맞대고 찍었던 그 사진엔 배경이 딱히 드러나지도 않았다. 기껏해야 ‘담배’라 쓰인 파란 간판 끄트머리와 먼지 낀 슈퍼 창이 조금 보이는 게 전부인데.

하물며 혜진은 장소를 유추할 만한 직접적인 단서는 남기지 않았다. 그저 전라도 바다라는 사실 외에는.

그럼에도 철용은 금세 알아내리라 확신한 모양인지 말을 보탰다.

- 아휴. 내가 일만 아니면 내려가서 수습을 좀 해줄 텐데…. 그러지 말고 진짜 오늘 당장 올라올 생각은 없어? 할아버님 걱정돼서 그런 거면 명절에 잠시 다녀오면 되잖아.

해인은 고민스러운 얼굴로 담장 너머를 건너다보았다. 집 옆 공터에 세워져 있는 태건의 세단이 얼핏 보인다.

언제 오리라 확실히 말해주진 않았지만 대략 한두 달 정도 걸릴 거라 했었다. 혹시나 그 열흘 사이 태건이 돌아온다면….

물론 당장 서울로 올라가면 더 빨리 그와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해인은 어쩐지 이곳에서 태건을 기다리고 싶었다.

돌아온다는 약속의 징표로 두고 간 세단이 여기 있으니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서울에선 아무래도 편하게 만나기가 힘들 테니, 이곳에서 조금만 더 그와 추억을 만들고 싶어서.

그리고 결정적으로. 가란다고 오늘 당장 떠나버리면 그건 또 너무 매정해 보이지 않겠는가 말이다.

해인은 멈추었던 비질을 다시 시작하며 부러 씩씩하게 말했다.

“아냐. 그냥 설까지는 있을게. 며칠 안 남았는데 오가기 번거롭기도 하고. 기자들 찾아오면 커피나 한잔 드리지, 뭐. 나 이제 진짜 괜찮아. 잘 감당할 수 있어.”

- 그게 말처럼 쉽지가 않을 텐데….

“괜찮다니까. 그리고 여기 내 편 엄청 많아. 곤란해지면 다들 도와주실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마침맞게 멀찍이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나!” 밝게 저를 부르는 소리에 담장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든든한 내 편 중의 한 명, 그의 세단 뒤에 선 수철이 물수건을 흔들며 해맑게 웃었다.

수철에게 팔을 흔들며 마주 웃어 준 해인은 그만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아무튼 내 걱정은 말고, 명절 지나고 준비하는 걸로 하자. 다시 전화할게.”

- 그래. 일단 상황 좀 보자.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해. 알았지?

“응. 쉬어.”

핸드폰을 갈무리한 해인은 빗자루를 내려두고 공터로 향했다.

“하여튼 못 말려.”

소매를 야무지게 걷은 수철이 지극정성으로 그의 차를 닦고 있었다.

* * *

“으아아, 죽겠다. 형이 내 노고를 알아줘야 할 텐데.”

마루에 벌러덩 드러누운 수철은 영감처럼 앓는 소리를 냈다. 오렌지주스 한 잔을 내온 해인은 수철에게 잔을 내밀며 못 말린다는 듯 웃었다.

“뭘 그렇게까지 정성스레 닦아. 괜히 힘들게.”

“이왕 할 거면 깨끗하게 해야지.”

일어나 단숨에 잔을 비운 수철은 힘쓰느라 발갛게 익은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가뜩이나 하얗게 먼지가 쌓였던 그의 세단은 며칠 전 번갈아 내린 눈과 비로 엉망이 됐다.

볼 때마다 저 상태로 차가 움직이긴 하겠느냐며 걱정하더니, 결국 수철이 팔을 걷고 나섰다. 덕분에 저도 돕느라 힘을 썼더니 삭신이 쑤셨다.

그래도 깨끗해진 세단을 보니 뿌듯함이 이루 말할 수 없더랬다.

다시 마루에 드러누운 수철은 끔벅끔벅 천장을 보며 물었다.

“형은 언제쯤 올까?”

해인의 시선이 먼 하늘로 의미 없이 뻗어갔다.

“글쎄…. 일이 많이 바쁜 거 같아.”

“누나는 형 무슨 일 하는지 알아?”

“잘은 몰라. 얘기해 준 적 없어서.”

“흐음… 영화에서 나오는 조폭들처럼 술집이나 도박장 같은 거 관리하고, 막 무섭게 칼 들고 싸우고… 형도 그럴까?”

해인의 눈매가 조금 가늘어졌다. 영화 속 조폭들의 모습을 떠올려보았다.

죄다 무섭고 위험하고 악랄한 건달들의 모습밖엔 떠오르는 것이 없다. 제가 아는 남태건을 대입하기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 그림이었다.

“나는 사실 형이 조폭이라는 거 전혀 와닿지 않았거든. 얼굴도 겁나 곱상하게 생겼잖아. 완전 부잣집 도련님처럼.”

해인은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잘생기다 못해 말도 안 되게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알고 보니 심성도 고와 더더욱 그와 조폭을 한데 묶지 못했었다.

“근데 나 괴롭히던 깡패들이 형한테 찍소리도 못 하는 거 보고 조금 실감 났어. 이 형 진짜 존나 무서운 형이었구나 싶더라고.”

“음… 사실 나도 그때 좀 그랬어.”

“그치? 누나도 알잖아. 그 깡패들도 진짜 개 무섭다는 거. 근데 그런 놈들이 형한테 벌벌 긴다는 건 형이 무지하게 세다는 거잖아. 쪽수로도 쨉이 안 됐는데, 멸치 아저씨랑 단둘이서.”

다시 생각해도 놀랍다는 듯 혀를 내두르던 수철은 벌떡 일어나 앉으며 대뜸 물었다.

“누나는 괜찮아?”

“뭐가?”

“어쨌든 조폭인 건 사실이잖아. 누난 형 무섭지 않냐고. 우리가 모르는 모습이 어떨지 모르는 거잖아. 난 상상하기도 무서운데.”

“…….”

글쎄…. 그의 일에 관해선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몇 번 물어보긴 했으나 두루뭉술하게 답을 흘리는 그를 딱히 붙잡고 늘어지고 싶지 않았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조금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궁금하긴 하지만 내심 알고 싶지 않기도 한 마음.

- 푸하악! 하악! 학!

간밤의 통화에서 갑작스레 들려왔던 웬 남자의 목소리가 문득 스쳐 갔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음에도 두려움이 느껴지던 그 목소리에 찰나 간담이 서늘했었다.

그러나 모른 척했다. 그 후 다시 전화가 걸려왔을 때도 해인은 묻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았다.

혹 그를 두려워하게 될까, 구태여 또 다른 모습의 그를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냥….”

침묵 끝에 운을 뗀 해인은 사랑방 툇마루 아래를 건너다보았다. 그가 발가락만 끼우고 질질 끌고 다녔던 슬리퍼를 바라보며 제가 아는 남태건을 생각했다.

화내고 돌아서다 채소 바구니를 정리해주고, 저를 대신해 초롱이를 챙겨주고, 진심으로 어르신들을 공경하고.

내 이름을 다시 찾아주고 구원이 되어준 남태건을.

“내 눈에 보이는 것만 믿고 싶어.”

설령 그것이 전부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괜찮다.

“내가 아는 그 사람은 그래.”

뒤에 숨겨진 모습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사람이라 하더라도.

“심성 곱고 다정하고 멋지고…. 그냥 그것만 보고 싶어.”

그러니 굳이 알려고 하지 않을 거다. 어떤 상상도 하지 않을 거였다.

남태건은 그저 내가 아는 남태건으로만.

기우뚱 고개를 기울인 채 가만히 듣던 수철이 한순간 입을 찢으며 웃었다.

“나도 그렇긴 해.”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수철의 미소에 해인은 덩달아 입꼬리를 당겼다.

“좀 무섭긴 한데, 태건이 형 멋있어서 좋아. 츤데레 같은 매력이 있어.”

천진하게 씩 웃던 수철은 담장 너머의 먼바다를 건너다보며 서울까지 닿을 듯 크게 외쳤다.

“아아! 보고 싶다, 태건이 형! 멸치 아저씨도!”

웬일이야, 얘가.

수철이 그를 좋아하는 마음이야 몰랐던 건 아니지만 표현에 인색한 녀석이 별일이었다. 의외롭다는 듯 눈썹을 들썩이던 해인은 그만 피식 웃으며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게. 나도 참 보고 싶다. 남태건 씨.

포털에 사진 퍼진 거 알면 그도 놀랄 텐데. 아직 자고 있으려나. 혹시나 걱정할지도 모르니 미리 문자를 남겨둬야겠다.

보닛에 걸터앉은 태건은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으며 기와로 쌓은 흙벽을 둘러보았다. 그 너머 암자의 풍경은 저 홀로 세월이 멈춘 양 예스럽고 고즈넉하기 그지없었다.

평대문에 못을 박아 시뻘건 글씨로 삭막하게 걸어놓은 푯말을 보았다.

「 수행도량이오니 출입을 금합니다. 」

그러니까, 이렇게 얌전하게 말을 듣고 있을 때 알아서 기어 나오면 오죽 좋을까.

문 앞을 지키던 놈들 중 한 놈이 헐레벌떡 뛰어들어 간 지 족히 5분은 된 듯싶건만 어째 강덕구가 대가리를 내밀 생각을 않고 있다.

스님들 수행도량이라는데 쳐들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이를 어쩐다.

오줌통이 터질 것 같다며 산속에서 볼일을 보고 온 춘섭이 바지 지퍼를 찍 올리며 멀찍이서 소리를 빽 쳤다.

“마! 저저 시발럼들 저거. 아직까이 저라고 있네. 으디 하늘 그튼 상무님 앞에서 칼을 빼 들고 있노? 셰끼들이 예의를 똥꼬로 잡솼나.”

태건의 앞에서 엉거주춤한 자세로 칼을 쥐고 있던 강덕구의 부하 대여섯이 마른침을 꿀떡 삼켰다.

내내 코트에 양손을 찔러 넣고 얌전히 보닛에 앉아있었건만, 대뜸 칼을 들이대니 태건으로선 심히 억울한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춘섭이 저벅저벅 다가오자 벌벌 떨리던 칼끝이 더더욱 진동했다. 춘섭을 향했다가 태건을 향했다가, 덜덜 떨면서도 도망은 안 가니 교육은 잘 받았구나 싶다.

쯧, 혀를 찬 춘섭이 태건의 곁에 다가와 필터만 씹고 있던 그의 담배 끝에 불을 붙여 주었다.

놈들 보란 듯이 더더욱 예의를 차려 공손히 상무님을 대접하고 저도 담배를 집어 문다.

삐딱하게 골반을 비틀고 한쪽 다리를 건들거리던 춘섭은 여전히 칼을 흔들고 있는 놈들에게 달래듯 말했다.

“에헤이, 칼 쫌 고마 내라라. 신성한 암자 앞에서 그래가 되겠나? 부처님이 뭐라칸데이 너거.”

그러나 쉽사리 가드를 풀지 않은 놈들은 주춤거리며 외려 칼끝을 바짝 세웠다. 얼마나 제자리에서 발을 굴렀던지 구둣발 아래의 흙바닥이 움푹 팼다.

지루한 얼굴로 연기를 뱉어낸 태건은 개중 낯익은 얼굴의 덩치를 가만히 불렀다.

“백두야.”

“예, 예에?”

춘섭의 세 배는 됨직한 두툼한 몸통이 움찔 튀었다.

“부회장님 안에 계시냐.”

심상한 어조로 건너간 질문에 놈들의 시선이 어설프게 맞부딪혔다. 어쩌지, 하며 정직하게 오가는 눈빛만으로도 이미 답은 나온 거나 다름없었다.

아… 그렇게 찾아 헤맸건만 강원도 산골짜기 암자에 계실 줄이야.

강덕구는 어떻게 알고 이곳을 찾아냈을까. 저 혼자 몰래 부회장을 붙잡고 뭘 하려 했을까.

장장 5분을 넘게 기다려줬으니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이젠 좀 알아야 하겠다.

툭툭, 검지 끝에서 빨간 불씨가 불꽃처럼 털려 나갔다.

“섭아. 광대한테 전화 넣어라.”

“예, 행님.”

멀찍이 꽁초를 튕기고 일어선 태건이 구둣발을 뗐다. 춘섭이 그 뒤를 따르며 후문을 지키고 있던 광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내다. 드가자.”

칼끝을 향한 걸음은 주저함이 없었다. 외려 주춤주춤 뒷걸음치던 놈들이 결국엔 괴상한 기합 소리를 내며 일시에 달려들었다.

실로 짧은 순간.

「 수행도량이오니 출입을 금합니다. 」

푯말이 걸린 문짝이 싱겁게 떨어져 나가 종잇장처럼 덜렁댔다.

화장실에 처박혀 줄기차게 담배만 빨고 있던 강덕구가 멱살을 잡혀 질질 끌려 나왔다.

얼마나 팔자가 늘어지셨는지. 여태 추리닝 바람으로 눈곱도 채 떼지 못한 몰골이 가관이었다.

마당에 패대기쳐진 강덕구는 대번 무릎을 꿇고 태건의 구둣발 앞까지 기어와 주절댔다.

“나, 남 상무. 내 얘기 좀 들어봐. 응? 내, 내가 남 상무를 배신하려고 했던 게 아니고. 나, 나는 그냥 잠시 바, 바람이나 쐬러, 그러니까 잠시 쉬러 온 거야, 쉬러. 그, 이사회에는 당연히 참…!”

주절거리다 말고 히끅 딸꾹질을 삼킨 강덕구가 얼른 이마 위로 팔을 올리고 눈을 질끈 감았다.

한쪽 무릎을 접어 앉은 태건이 강덕구의 면상 앞에 다가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강 이사님.”

나직한 부름에 강덕구가 슬그머니 한쪽 눈을 떴다. 태건은 새집이 된 강덕구의 머리칼을 다정히 빗겨주며 말했다.

“우리 얘긴 이따 하시고.”

반대로 기울어진 회갈색 시선이 서늘하게 뚝 떨어졌다.

“부회장님께 인사를 먼저 해야 할 것 같은데. 어디 계십니까?”

두 채의 암자 중 뒷마당의 작은 수도장에 마상배가 누워있었다.

산소 호흡기까지 갖춰 놓고 여태 숨을 붙들어 놓은 걸 보니 마상배를 돌봐왔다던 스님이 대길 어르신 못지않게 꽤 명의인 모양이다.

그러나 여전히 의식이 없단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이곳에 숨어든 직후 단 한 번도 눈을 뜨지 못했더란다. 오늘 새벽 고비를 넘기긴 했으나 아무래도 더는 힘들 것 같아 슬슬 마지막을 준비하려던 차였다고.

강덕구가 마상배를 찾아낸 건 이미 한 달 전이다.

청운에 흡수되기 전 경기 지역 조직에서 함께 활동했던 둘은 한때 막역한 사이였다. 개인사를 일절 떠들지 않아 아무도 몰랐던 마상배의 과거를 유일하게 알고 있었던 사람. 그가 강덕구였다.

아주 어렸을 적 이곳에 버려져 유년기를 보냈다는 사실은 강덕구 이외에 아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었다.

혹시나 하여 조용히 찾아본 이곳에서 마상배를 발견한 강덕구는 쾌재를 불렀을 터였다.

조석현을 감방에 처넣을 문서가 다름 아닌 이곳에 있었다. 잘만 이용하면 조석현을 잘라내고 본인이 회장에 오를 수 있으리라 꿈에 부풀었을 거였다.

생각지도 못하게 돌아온 남태건은 어차피 제 표가 없으면 회장 자리를 차지하지 못할 터.

이사회를 망치고 조석현을 처넣은 후, 남태건을 처리하는 건 그 이후에 생각해보자.

여기까지가 치밀한 듯 허술하기 이를 데 없는 강덕구의 계획.

태건은 바짝 야위어 이미 시체와 다를 바 없는 마상배를 뒤로하고 수도장을 나섰다. 비록 온 마음 다 바쳐 충성으로 모신 보스는 아니었으나 저를 꽤 아껴주었는데, 마음이 썩 좋지는 않다.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길은 제 손으로 보내드릴 수 있을 듯싶으니 다행이었다.

그가 마상배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사이, 눈두덩 한쪽이 시퍼렇게 멍이 든 강덕구가 마당에 걸레짝처럼 늘어져 있었다.

태건은 손에 든 USB를 매만지며 제 앞에 대가리를 박은 강덕구를 내려다보았다.

“우리 부회장님 장례 치러주시려고 혼자 수고롭게 여기 계셨던가 봅니다.”

번쩍 고개를 쳐든 강덕구가 좋다고 맞장구쳤다.

“어, 어어! 그거야, 그거! 물론 요, 요즘이야 좀 서먹해져서 그렇지. 내가 또, 우리 부회장님이랑 동고동락을 했는데, 어떻게 또 혼자 외롭게 가시게 두겠나. 그, 예, 옛정이 있는데. 안 그래? 허, 허허허.”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리며 애써 웃는 얼굴이 예술이었다.

이 와중에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주절주절 생뚱맞은 수다가 줄줄이 이어졌다.

그동안 내가 또, 종종 찾아와서 지극정성으로 몸도 닦아드렸는데. 그건 몰랐지? 아아. 이제 가망이 없다니 얼마나 애통한지 몰라. 아! 그거 그거! 그 USB는 안 그래도 내가 남 상무 주려고 딱 챙겨놨다니까? 조석현 그 새끼는 이제 끝났어. 못해도 무기징역은 때릴 수 있을 거야. 그지? 핫하하!

“근데 우리 강 이사님이….”

잠자코 들어주던 태건은 뒷목을 주무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이렇게 나오면 어떻게든 시간을 끌어보려 용을 쓰는 게 너무 대놓고 티가 나는데.

“똥통에 처박혀서 SOS라도 치셨나?”

부어터진 눈이 화들짝 커졌다. 역시 치밀한 듯 허술하기 짝이 없는 강덕구의 낯짝은 이렇게나 투명하다.

강덕구는 지저분하게 흙먼지가 묻은 손으로 파다닥 손사래 쳤다.

“어이구 설마! 여기까지 올 사람이 누가 있다고! 바, 반가워서 그러지, 반가워서.”

큼큼 헛기침을 뱉은 강덕구는 은근하게 태건의 수족들을 살폈다.

양춘섭과 박광대. 그리고 입구 밖에 둘. 남태건까지 해봐야 고작 다섯이다.

강덕구는 그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았다. 이 새끼가 나를 아무리 물로 봐도 그렇지, 꼴랑 다섯이서 뭘 어쩌겠다고 쳐들어온 건가.

천하의 강덕구 자존심이 좆같이 구겨졌으나 어쨌든 잘된 일이다. 위기가 기회가 됐다. 이런 사태를 대비해 근방에 대기시켜둔 제 수족들이 족히 이십은 되었다.

일단은 시간을 끌어야 했다. 자빠져 자고 있던 놈들이 연장을 챙겨오려면 조금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아니 이제 곧 도착할 때가 됐다.

강덕구는 다시 고개를 쳐들고 주저리주저리 떠들었다.

“그, 그러고 보니 여태 남 상무랑 통화만 하다가 이렇게 만난 것도 오랜만이네. 그렇지?”

허허허 웃는 낯짝 위로 태건의 무심한 시선이 떨어졌다. 조금만 더 들어줄까, 고민이라도 하는 듯 고개가 반대로 삐딱하게 기운다.

“남 상무까지 잘못됐으면 어쩌나 했는데, 아이고호! 이렇게 멀쩡히 돌아와 줘서 정말 다행이야. 이제 남 상무가 돌아왔으니 걱정할 일 없겠어! 솔직히 남 상무 없는 동안 조석현이 그 새끼가 우리 청운을 아주 좆같이 굴렸….”

아무래도 여기까지.

“광대야. 이거 아가리 좀 막아라.”

“예, 형님.”

개 짖는 소리를 더는 견디지 못한 태건이 귓바퀴를 문지르며 돌아서려던 순간이었다.

“형님!”

입구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부하 한 놈이 안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새끼들 올라옵니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소식에 태건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하. 이 새끼 봐라….”

아래로 뚝 떨어진 눈동자가 어이를 상실한 채 강덕구를 보았다.

강덕구는 벌겋게 피가 낀 치아를 드러내며 히죽 웃었다.

“나도 살아야지, 남 상무. 응? 미안하게 됐어.”

피떡이 돼서도 끅끅거리며 웃는 얼굴이 종전과는 전혀 딴판으로 악랄해졌다.

태건의 뒤에 서 있던 춘섭이 목을 두둑두둑 꺾으며 탄식했다.

“아… 놔, 셰끼. 어예 이마이 기대를 저버리지 않지.”

소란스러운 소리가 빠르게 가까워졌다. 여러 대의 차 소리가 마구 밀려들었다. 이내 암자 밖에 세워둔 춘섭의 차량 뒤로 시꺼먼 세단들이 우르르 굴러와 섰다.

저마다 각목을 쥐고 차에서 내리는 놈들을 건너다본 춘섭은 설핏 상기된 얼굴로 빙글거렸다.

“와아 따, 이기 웬 떡이고.”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고상한 마무리를 꿈꿨던 태건은 영 못마땅한 듯 혀를 차며 목덜미를 주물렀다.

각목을 어깨에 척 걸친 놈들이 껄렁대며 거리를 좁혀왔다. 끅끅끄, 승리를 예감한 강덕구의 웃음소리가 징그럽게 흘러나왔다.

돌연 광기가 번뜩인 춘섭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친 건 그때였다.

“자아, 아우들아. 요 구경 함 와 봐라! 이야- 마, 상다리 뿌라진다!”

갑작스레 칼춤을 추는 춘섭의 모습에 어리둥절해진 강덕구는 오래지 않아 사색이 됐다.

“읏따, 성님. 찬이 허버 많소. 히어, 이거 언 놈부터 쑤시야 될란가?”

암자 밖을 유령처럼 점거하고 있던 용무늬 셔츠들이 소 떼처럼 모여들고 있었다.

노을이 짙어질 무렵이었다.

“형 연락 기다려?”

마루를 닦다 말고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해인은 한 박자 늦게야 고개를 들었다.

“…응?”

온 줄도 몰랐던 수철이 마루에 걸터앉으며 재차 물었다.

“핸드폰만 뚫어져라 보고 있길래. 태건이 형 연락 기다리나 했지.”

“아….”

해인은 머쓱하게 웃으며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았다.

“아니야, 그냥 한번 본 거야. 이 시간엔 태건 씨 원래 바빠. 밤늦게야 연락 오거든.”

실은 온종일 기다렸다. 해가 떠 있는 시각엔 원래 연락이 뜸했던 그이지만 깨어나 호텔을 나서기 전엔 꼭 전화를 했었는데…. 오늘은 노을이 짙어지도록 온종일 연락이 없었다.

포털에 제 이름이 도배가 된 건 봤을까.

철용에겐 괜찮은 척했지만 실은 내내 긴장을 놓지 못했다. 내심 그가 걱정해주는 다정한 목소리가 듣고 싶었다.

혹시라도 ‘내가 갈까’ 말해준다면 못 이긴 척 와 달래야지, 하며 홀로 설레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런데….

설마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겠지.

이따금 예고 없이 연락이 안 될 때는 늘 그랬듯 걱정부터 앞섰다.

시선이 자꾸만 핸드폰으로 끌려갔다. 조금 전에 분명히 확인했으나 혹 무음으로 돼 있는 건 아닐까, 다시 슬그머니 핸드폰을 손에 쥐던 때였다.

수철이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아. 요즘 깡패들 없으니까 읍내가 엄청 조용해. 울 편의점 사장님이 그러는데, 근처 시에 있는 유흥가도 겁나 평화롭대. 거기까지 진짜 싹 사라졌나 봐.”

“깡패들이 어딜 갔는데?”

“몰라. 며칠 전부터 코빼기도 안 보여. 경찰이 다 잡아갔나? 암튼 용무늬 셔츠 안 보이니까 진짜 천국이야, 천국.”

그러고 보니 엊그제 장에 다녀왔던 용순도 비슷한 얘기를 했었다. 희한하게 읍내가 깨끗해 보이는 것이 공기가 달라졌다고. 용순은 미처 깨닫지 못했던 이유가 그 때문이었을까.

깡패들의 갑작스러운 부재가 궁금할 일은 아니지만, 문득 태건이 했던 말이 스쳐 갔다.

“가깝게 지내는 거 아니야. 그냥 필요해서 잠깐.”

혹시 그와 관련이 있는 건….

묘하게 기분이 아리송해지던 차였다.

“아 참, 이거 주러 왔는데.”

잠시 잊었던지 손뼉을 맞잡은 수철이 별안간 바지 주머니를 뒤적였다.

“뭔데?”

고개를 빼쭉 내민 해인은 수철의 호주머니에서 구겨져 나오는 작은 상자를 멀뚱히 바라보았다.

“며칠 전에 편의점에 들였거든.”

“이게 뭐….”

곧장 제 손으로 건너온 그것을 확인한 해인은 차마 말을 맺지 못하고 입을 떡 벌렸다.

맙소사. 이게 뭐야….

“내가 사장님한테 계속 졸라서 겨우 들여놨는데, 거짓말 안 하고 하나도 안 팔려. 역시 이렇게 큰 사람은 잘 없나 봐.”

“…….”

느닷없이 엑스 라지 콘돔을 건네받고 민망해진 건 저뿐인 모양이다.

해인은 마치 사탕이라도 건넨 듯 아무렇지 않게 어깨만 으쓱거리는 수철을 바라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저 홀로 민망해 얼굴이 화끈거렸다.

“넌 정말… 아니, 누나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아?”

“왜. 콘돔이 뭐 어때서? 피임 기구가 나쁜 것도 아닌데. 건전한 성생활을 위해선 반드시 필요한 거라고 배웠어.”

조목조목 맞는 말만 하니 할 말도 없고.

지난 어느 날, 수철이 일반 콘돔을 그에게 주려다 퇴짜맞았던 날을 떠올린 해인은 결국 고개를 흔들며 웃고 말았다. 그렇다고 큰 사이즈를 굳이 들여놓을 줄이야.

세차까지 하겠다고 복작대더라니, 아무래도 그에게 뭐라도 자꾸만 해주고 싶은 모양이다.

“진짜 너 땜에 못 살겠다.”

프흐흐, 천연하게 웃던 수철은 뿌듯한 얼굴로 말했다.

“형 오면 주려고 했는데, 일단 누나도 하나 가져. 선물이야.”

“고맙다고 해야 하는 거지?”

“당연하지. 나 사비 잘 안 터는 거 알잖아.”

아휴, 얘를 정말 어쩌면 좋아.

“그래. 고마워. 누나 생각해주는 사람은 역시 우리 수철이뿐이네.”

차마 잘 쓸게, 라는 말까진 하지 못했다. 이걸 언제쯤에나 쓸 수 있을까.

민망하긴 하지만 쓸 수 있는 날이 빨리 오면 좋겠다, 나도.

그가 실망하지 않게… 정말 쓸 수 있는 날이.

몹시 순수한 의도로 건네준 선물임이 분명하건만, 상상만 해도 몸이 더워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제가 엉큼한 건 맞는 것 같다.

“수철이 와 있냐.”

갑작스러운 기척에 고개가 반짝 들렸다. 이르게 퇴근해 온 대길이 막 담장을 지나 대문을 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오셨어요? 오늘은 일찍 오셨네요.”

“잉, 그려.”

콘돔을 얼른 주머니에 쑤셔 넣은 해인은 마당으로 내려가 대길의 손에 들린 봉지를 받아 들었다. 속살이 뽀얀 토종닭이 세 마리나 들어 있다.

“웬 닭이에요?”

“통통허니 살집이 좋길래 사 와봤다. 오늘은 요놈이나 고아 먹게. 넉넉헐 텐께 수철이 니도 챙기 가서 어메랑 묵고잉.”

“넵, 감사합니다.”

“맛있겠다. 얼른 준비할게요.”

해인은 묵직한 봉지를 품에 안아 들고 주방으로 향했다. 그 잠깐 사이 마루 위로 건너간 시선은 자석처럼 핸드폰에 찰싹 붙었다 떨어졌다.

닭 세 마리를 푹 고아 수철이네 몫을 덜어주고 한 그릇을 싹싹 비울 때까지.

아니, 상을 치우고 대길과 막걸리를 양껏 비우고 잠자리에 누울 때까지 그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 * *

비즈니스 책상 위에 피 묻은 시계가 툭 놓였다. 그 곁으로 던지듯 놓인 담배 케이스와 라이터도 굳은 피로 문양을 새긴 건 마찬가지였다.

“하….”

피로에 전 얼굴을 쓸어내린 태건은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욕실로 향했다.

걸음걸음마다 힘 빠진 손끝에서 옷가지가 툭툭 떨어졌다. 까만 슈트와 셔츠에 스미어 달리 티가 나지 않을 뿐, 벗어 던진 옷가지도 온통 피로 범벅이 됐다.

샤워기 아래에 서서 눈을 감자 캄캄한 눈앞이 핑글 돌았다.

싸움질에도 적응 기간이 필요한 건지, 오랜만에 몸을 썼더니 어째 체력이 예전만 못했다. 가뜩이나 간밤에 인천을 오가느라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머리가 배로 무거웠다.

이 지경으로 몇 시간을 돌아다녔던가. 그러고 보니 밤이 되도록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일찌감치 강덕구 패거리를 정리하고 백 총장을 만나 애매하게 미뤄둔 협약을 마무리 지었다. 그의 손에 넘어간 조석현의 비리 문서는 머지않아 세상에 공개될 것이었다.

와중에 암자를 지키던 광배에게서 연락이 왔다. 마상배의 숨이 영 불안해졌노라고.

박 변과 함께 급히 암자로 돌아가 생기를 잃어가는 손가락에 인주를 묻혔다.

그것이 현세에서의 제 마지막 의무라도 되었던 양, 마상배는 지분 위임장에 손도장을 찍기 무섭게 숨을 거뒀다.

모시던 보스의 죽음 앞에서 감히 ‘기가 막힌 타이밍’이라 말하긴 죄송한 일이겠으나, 실로 이보다 적절할 수 없었다.

그간 생사가 불투명해 공중에 붕 떠 있던 마상배의 지분을 이로써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를 핑계로 태건의 회장 후보 출마에 회의적이던 몇몇 이사들도 이제 더는 할 말이 없을 것이었다.

밤이 짙어질 무렵. 마지막까지 큰일을 해주시고 떠난 보스의 장례는 치러야겠기에 차게 식어가는 그를 싣고 암자를 벗어났다.

물론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아올 조석현이 어떤 액션을 취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변수이겠으나, 제아무리 대가리가 비었다 한들 서울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진 못할 것이었다.

혹여 만에 하나 미친놈처럼 날뛰어 빼도 박도 못할 죄목 하나를 더해준다면 이쪽이야 외려 감사한 일이기도 하고.

다만 가급적 출혈이 발생하기 전에 긴급체포 명령이 적절히 떨어져 준다면 더더욱 깔끔한 마무리가 될 것이었다.

해서 장례식장은 부러 서울 밖을 벗어나지 않는 곳으로 급히 수소문했다.

비어 있는 빈소를 찾고 찾다가, 이제야 겨우 적당한 곳에 준비를 시켜두고 핏물이나 닦자며 호텔로 잠시 들어온 참이었다.

따스한 물이 무거운 몸을 나른히 휘감았다. 제 것이 아닌 핏물들이 모두 씻겨 내려간 후에도 왼쪽 팔뚝에서 선혈이 조금 오래 흘러내렸다.

종일 처치 없이도 대강 말라붙었던 상처가 온수에 조금 벌어진 모양이었다.

“하아.”

연신 한숨이 흘렀다. 싸움으로 인해 삭신이 쑤시는 이 피로감은 수년이 흘러도 여전히 엿 같았다.

그러니까 오늘은 좀 더.

여느 때보다 노곤했다. 많은 것이 해결되었고 실로 고지가 얼마 남지 않았건만 오늘은 유독 의지가 꺾이는 날이다.

늘 이랬던 인생인데 새삼스럽게. 언제는 뭐 얼마나 고상하게 살았다고 이제 와 손에 피를 묻힌 것에 회의감이 드나.

세상 고아한 이해인을 만나 마음은 저 홀로 이미 선비가 됐다. 현실은 여전히 제 손에 피를 묻히게 하니 심신만 회의에 빠져 지쳐가고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견디면 될 거였다. 며칠 후에 있을 이사회만 끝내고 나면.

태건은 샴푸를 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물줄기를 꽤 오래도록 맞았다. 선 채로 잠이라도 든 양 감긴 눈은 떠질 줄을 몰랐다.

캄캄한 시야 속에 펼쳐진 안진의 바다가 이렇게나 그리웠던 적이 없었는데.

근 20일을 내내 긴장하며 삭막한 놈들과 부대꼈더니 좀 쉬고 싶다. 지금은 그저, 고적한 언덕집의 마루 위에서 해인의 가슴에 코를 박고 잠들고만 싶었다.

“…….”

문득 눈이 떠진 건 그때였다. 생각이 흐르다 이해인에 머물렀을 때. 그때야 비로소 아차 한 태건은 공연히 욕실 문을 돌아보았다. 보이지 않는 시계를 떠올리다 서둘러 몸을 씻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하루 내내 해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욕실을 나서니 시간이 어느덧 새벽 3시에 다다라 있었다.

피가 멈출 줄 모르는 팔을 수건으로 대강 감아두고 핸드폰을 쥐었다. 제일 먼저 해인이 남겨놓은 메시지를 확인했다.

[ 기사 봤어요? 나 오늘 오랜만에 연예인인 거 실감했잖아요. ㅎㅎㅎ ]

의아해 인터넷 어플을 열자 연예면 첫 페이지에 해인의 얼굴이 떡하니 떠 있었다.

“뭐야, 이게.”

정신이 없던 하루 동안 무수히 쏟아진 기사들을 확인하는 손이 바빴다.

「 반가운 얼굴, 이해인 목격담 」

「 그날 이후 2년 만 ‘이해인’, 부쩍 야윈 얼굴 」

「 ‘이해인’ 목격. 전라도 바다는 어디? 」

대강 보니 SNS가 어쩌고 종일 지랄이 났던 모양이다. 설마 어제 그 호빵 짓인가.

“아….”

긴 탄식을 내뱉은 태건은 난감한 얼굴로 하관을 문질렀다.

다시 문자를 열어 자음으로 남겨놓은 웃음 표시를 오래도록 보았다.

아무리 많이 나아졌다곤 하지만 그래도 종일 불안했을 텐데 이 여자는 또 괜찮은 척이다. 혹여 또 제가 걱정할세라 부러 씩씩한 척 문자를 보냈겠지.

“아… 하여튼 이해인.”

이런 날 종일 전화 한 통 해주지 못했으니….

[ 오늘 많이 바쁜가 봐요. 난 이제 자려고 누웠어요. ]

마지막으로 문자를 남긴 시각이 2시간 전이었다.

짙어지는 한숨에 낭패감이 서렸다. 통화 버튼 위에 엄지를 띄운 채 머뭇거리던 그는 결국 메시지 창을 열었다.

[ 미안. 문자 이제 확인했어. 잘까 봐 문자 남겨. 일어나면 연락해. ]

전송 버튼을 누르고 잠시 소파에 목을 기댔다. 커다랗고 무거운 무언가가 얼굴을 짓누르고 목을 지나, 점차 온몸을 잠식하듯 몸이 한없이 바닥으로 까라졌다.

그 와중에 복잡하게 돌아가는 머릿속엔 여러 가지 일들이 어지럽게 휘돌고 있었다.

해인과 조석현. 그리고 서울에서 해결해야 할 일들.

실타래 속을 휘청대며 헤매다 잠시 정신을 놓았다. 잠이라기보단 기절에 가까웠던 찰나.

아니, 찰나인가 싶었으나 벨 소리에 눈을 뜨니 동이 트고 있었다.

소파에 앉은 채로 잠이 든 태건은 눈 감은 채 핸드폰을 귓가에 대었다. 통화가 연결되기 무섭게 춘섭의 목소리가 잠을 깨웠다.

- 행님, 조석혀이 왔십니다!

“하….”

씨발. 빨리도 왔네.

태건은 푸석한 얼굴을 쓸어내리며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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