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장
붉은 해가 수평선을 향해 착실히 기울었다.
온종일 고요했던 바다와 달리 한바탕 폭풍이 다녀간 언덕엔 회오리 먼지만 휑하게 휘돌고 있었다.
용순은 난리가 난 언덕집 마당을 정리하며 혀를 내둘렀다.
“인간들이 워째 이래 경우가 없나 몰러. 아, 사람이 쓰러져서 실려 간디 즈들은 사진이나 찍어댄다고 이 난리를 부리게 해싸고. 아이고, 참말…. 호환 마마보다 무섭단기 사람이라두만 그 말이 딱이랑게.”
병원으로 실려 가는 해인을 우르르 쫓아가던 놈들도 참 너무한다 싶었지만, 대문이 열렸다고 멋대로 마당에 들어와 해인이 머물렀던 공간을 찍어대던 놈들은 모질기가 이를 데 없었다.
보다 못한 주민들이 저마다 집기 하나씩을 집어 들고 겨우 쫓아내고 보니 집 마당이 개판이 돼버렸다.
양손에 뚝배기를 쥐고 흔들어댔던 순애가 주방 정리를 마치고 나오며 동조했다.
“내 말이 그 말이네. 무단 침입죄로다 싹 다 콩밥을 맥여브러야 된디. 어휴, 우리 슨상님이 참말로 고생이 많았겄어. 아, 서울서는 더 난리를 부렸을 거 아인가.”
“그란께 뭣도 없는 여까지 숨어들었겄지요. 저도 숨 좀 쉬겄다고. 그런 사람을 기언치 찾아내서 이 사달을 내블고, 어구 썩을 놈들. 장기탠지 뭔지 그놈 면상에 침이라도 뱉어브렀어야 된디 분이 안 풀려브네요.”
“아, 그라고 봉게 그 육시럴 놈이 양자식품 아들내민 줄 니는 알었냐?”
“알아 뭣 혀요. 관심도 없었제.”
“쯧쯧. 하여간에 돈 많은 것들이 더 염병을 해싼단께. 느 슈퍼서 양자식품 물건들 싹 빼브러라! 꼴도 보기 싫응게.”
“안 그려도 똥간에 처박을라 허네요.”
바득바득 이를 갈며 장독 뚜껑을 닫은 용순은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 아가씨는 정신을 좀 차렸는가 모르겄네. 수철이 번호가 여 어디 있을 것인디.”
눈물 콧물을 흘리며 함께 따라나선 수철의 번호를 찾아 연락처를 뒤적이던 때였다.
지이잉, 지이잉. 제 것이 아닌 진동음이 어디선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러고 보니 몇 분 전에도 스치듯 들렸던 듯한데 경황이 없어 살펴볼 새가 없었다.
“으디서 자꾸 진동이 울린디야.”
혹시나 싶어 해인의 방문을 열자 소리가 조금 더 선명히 들렸다. 신을 벗고 방에 올라선 용순은 책상 다리에 부딪혀 울고 있는 폴더폰을 집어 들었다.
“오메, 태건이고마!”
얼른 통화 버튼을 누른 용순은 고자질하듯 성마르게 쏟아냈다.
“잉, 그려. 태건이냐? 나여, 수퍼. 아, 여가 시방 난리가 났당게! 기자들이랑 언넘들이 마구잽이로 몰려와서는! …아, 기사로다 봤든가? 어이구, 긍게 긍게. 그 난리가 나브러서 시방 썬그리 처자가! …이잉, 근당게! 것두 기사가 볼쎄 나브렀어? 잡것들 빠르기두 허네. …병원? 거는 나가 잘 모르고, 수철이가 따라붙었응게 그짝으로 전화를 혀 봐라. 갸 번호를 문짜로다가 찍어줄랑게. …시방 서울서 오구 있는겨? 그려, 그려. 조심혀서 내리와라잉.”
어느 틈에 방에 들어와 귀를 바짝 대고 있던 순애가 폴더를 닫기 무섭게 물었다.
“태건이 오구 있디야?”
“잉. 근다네요. 병원으로 바루 가지 싶으네.”
천군만마를 얻은 양 돌연 화색이 돈 순애는 인중을 바들거리며 양 주먹을 불끈 쥐었다.
“잘됐고만! 양자 아들내미 맥아지나 따부러라 허지 그랬냐!”
용순은 널브러져 있던 해인의 이불을 곱게 개며 여상하게 말했다.
“말 안 혀도 알어서 따지 않겄으요?”
* * *
해가 저물어가며 기온이 뚝 떨어졌다.
해인이 인근 시의 대학병원으로 이송된 지도 두어 시간이 훌쩍 흘렀으나, 주차장을 메운 기자들의 차량은 꼼짝도 하지 않고 새로운 이슈를 기다리고 있었다.
개중 몇몇은 여기까지 따라와 정성스럽게 쇼를 하고 있는 장기태의 세단 근처에서 그의 동태를 살폈다.
해인이 입원실로 옮겨졌다는 소식에 한 차례 면회를 시도하다 실패한 장기태는 세단 뒷좌석에 짱박혀 핸드폰으로 몇 시간째 기사만 훑고 있었다.
10분 전 심기일전하여 병실로 향했던 박양자가 피곤한 기색으로 돌아왔다.
표정만으로도 결과는 뻔한 터라, 장기태는 심드렁히 혀를 차며 다시 핸드폰 속에 시선을 박았다.
“아후, 그놈의 영감 고집이 보통이 아니네.”
“그래도 빈손이네. 준다고 받기는 했나 봐?”
곧 저녁 시간이었다. 양손이 무겁게 먹을거리를 바리바리 사 들고 갔던 박양자의 손이 비어있었다.
박양자는 버럭 성을 내며 말했다.
“아, 받기는 뭘 받어! 얼굴도 못 보고 쫓겨났는데. 병실 앞에 뒀으니 버리든지 먹든지 알아서 하겠지. 어휴, 내 팔자야. 자식새끼 하나 잘못 둬서 종일 이게 무슨 꼴이냐고, 대체!”
박양자는 한 점 거짓 없이 진심이었다. 제 못난 자식 때문에 고생했을 해인에게 진심으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싶었다.
이쯤 되면 그 아이도 상처가 꽤 아물었겠지, 용서까지는 힘들지라도 제 사과 정도는 받아줄 수 있겠지.
찻잔 들고 마주 앉아 회포를 푸는 상상을 하며 내려왔더니 이게 대체 무슨 난리인가 말이다.
여태 미안해서 차마 자리를 못 떴다. 뭐라도 좋은 걸로 먹이고 싶어 근방을 1시간을 뒤적여 바리바리 사 들고 마지막으로 찾아갔던 차다.
한데 그마저 해인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고 영감에게 욕만 들어먹고 오니 열이 머리꼭지까지 올라 부글거렸다.
하물며 그런데, 이 사태의 장본인인 제 아들놈은 이 와중에 빙글거리며 핸드폰만 붙잡고 있으니, 이제는 천불이 나다 못해 온몸이 전소될 지경이었다.
“너는 이 상황에 웃음이 나니? 해인이 저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미안하지도 않아?”
장기태는 눈가를 찌푸리며 콧방귀를 뀌었다.
“해인이도 그냥 쇼하는 거야. 방에 오도 가도 못 하고 갇혀 있으니까 빠져나오려고 걍 쓰러진 척한 거지. 나도 전에 그랬잖아. 엄마 기억 안 나? 유명인들 이런 쇼 하는 게 뭐 한두 번도 아니고.”
“애 실려 갈 때 하얗게 질려있던 거 보고도 그런 소리를 해?”
“우리 해인이가 원래 피부가 백옥같이 고와요오.”
“허.”
이 화상이 진정 내 아들이 맞긴 한가. 박양자는 순간 처음으로 제 아들이 참 징그럽다고 생각했다.
박양자는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엄마는 할 만큼 했어. 더는 못 해. 김 기자가 알아서 포장 잘해 줄 테니까 너도 이쯤 하고 그만둬.”
하품을 찍 뱉던 장기태는 시트에 시루떡처럼 몸을 파묻으며 말했다.
“엄마 먼저 가. 난 근처에 호텔이나 하나 잡아주고.”
“넌 안 가겠다고?”
“내일 한 번 더 찾아가는 척은 해야지. 그 정도 성의는 보여야 더 진심으로 보일 거 아냐. 댓글 좀 봐봐. 나 불쌍하게 보는 사람도 이제 슬슬 생기고 있다니까? 이럴 때 쐐기를 박아야지.”
미친놈, 미친놈. 박양자는 질린 얼굴로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내 배로 낳았지만 어쩌면 인간이 이럴까, 영악함에 기가 질렸다.
“몰라! 엄마는 갈 테니까 이제 너 알아서 해.”
백을 고쳐 든 박양자가 제 세단으로 건너가려 엉덩이를 들썩댔다.
“아, 엄마!”
얼른 모친을 붙든 장기태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성의 없이 말했다.
“경호원 한 다섯만 두고 가.”
“어휴! 쯧.”
썩을 놈, 달걀을 맞든 돌을 맞든 알 게 뭐야. 팽 하니 등을 돌리면서도 결국 자식은 이기지 못한다.
차에서 내려선 박양자는 근방에서 쉬고 있던 홍보부 직원 몇에게 장기태를 부탁하곤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그새 더 깊숙이 기운 해가 수평선 아래로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겨울의 공기가 시릴 만큼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겨울의 초저녁은 밤과 같았다. 시커먼 선팅 창만큼이나 하늘이 금세 어둑해졌다.
장기태는 실시간으로 올라오는 기사 반응을 보며 웃다가 열을 냈다가,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느라 저 홀로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차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 하나가 차 문을 열며 물었다.
“식사 안 하십니까?”
그제야 고개를 든 장기태는 캄캄해진 문밖을 돌아보았다.
“뭐야. 벌써 저녁이야?”
시간이 가는 줄도 모르고 참 오래도 개겼다. 오늘은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시트에 깊게 파묻고 있던 몸을 바로 세운 장기태는 선팅 창에 코를 박고 바깥 동태를 살폈다.
병원 정문 앞이며 제 세단 주변에 진을 치고 있던 기자들이 그새 몇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시간이라선지 그들도 배를 채우기 위해 흩어진 모양이었다.
“아… 씨. 지금 뜨면 재미없겠는데.”
자리를 뜨기 전에 한 번 더 병실을 찾아가 볼 생각이었다. 당연히 문전박대를 당할 테니 그제야 마지못해 병원을 떠나는 모습을 적절히 연출한다면 훌륭한 마무리가 될 것이었다.
그런데 카메라가 이렇게나 적어서야.
“쯧.”
하는 수 없이 다시 시트에 등을 파묻은 장기태는 담배를 물며 말했다.
“가서 먹고들 와요. 밥 먹다가 김치 싸대기 맞을지도 모르는데 내가 어딜 가서 밥을 먹어.”
차 문을 붙잡고 선 남자가 조용히 실소했다. 그걸 알기는 아냐, 싶은 눈빛이다.
저를 향한 눈길을 알 길 없는 장기태는 창밖 건너편에 보이는 음식점을 턱짓했다.
“난 저기서 애그마요 샌드위치나 하나 사다 줘요. 빵은 플랫으로 하고 모짜렐라 넣어서 소스는 핫칠리로 듬뿍. 그리고 그, 베이컨 좀 추가하고 피클은 다 빼달라고 하세요. 콜라는 꼭 제로콜라로 갖고 오시고요.”
“…….”
방심하다 줄줄이 흘러 가버린 주문을 놓친 남자가 멍하게 눈을 깜박이다 물었다.
“…예?”
빨아들이던 연기를 침 뱉듯 훅 뱉어낸 장기태가 짜증스레 면박했다.
“아, 그것도 못 외워? 아오, 멍청하기는…. 핸드폰 줘봐요.”
이를 악다문 남자가 핸드폰을 내밀었다. 메모 창을 열어 주문 내용을 휘리릭 적은 장기태는 핸드폰을 던지듯 내밀며 말했다.
“내 거부터 사다 주고 식사들 하고 오세요.”
똥 씹은 표정이 된 남자는 대꾸도 않고 힘주어 문을 닫았다. 차체가 휘청이자 욕설을 짓씹은 장기태가 차창 밖을 노려보았다.
“문짝 떨어지겠네, 씹.”
꽉 막힌 차 안은 금세 뿌연 담배 연기가 가득 찼다. 창을 조금 내리려다 생각을 바꾼 장기태는 최대한 슬픈 표정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몇 시간을 차 안에만 박혀 있었더니 허리가 뻐근하던 차였다.
차 문에 등을 기대어 서서 고개를 푹 떨군 장기태는 보란 듯이 침울한 표정으로 담배를 태웠다. 와중에 멋은 포기할 수 없으니 한쪽 바지 포켓에 손을 찔러 넣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발끝만 보고 있음에도 두어 번 번쩍이는 플래시가 머리꼭지로 용케 느껴졌다. 이쯤에서 하늘을 향해 한숨 쉬듯 연기를 뿜어주면 사진이 꽤 분위기 있게 나올 터였다.
그러나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져 똥폼 잡기도 오래는 못 하겠다.
“으, 추워.”
적당히 폼을 잡고 담뱃불을 끈 장기태는 얼른 차에 올라 다시 핸드폰을 열었다.
가장 최근 기사를 찾아 정렬하자 해인이 면회 금지를 걸고 안정을 취하고 있노라는 기사가 맨 위에 올라있었다. 새삼 기가 차 코웃음이 터졌다.
“이해인도 별수 없네. 이런 쇼도 다 하고.”
병원의 전경과 해인의 화보가 나란히 붙은 사진을 보고서는 불끈거리는 바지 앞섶을 괜히 한 번 추켜올렸다.
“기집애가 이쁘긴 하단 말이야.”
이런 거를 제대로 맛보지도 못하고, 쯧.
아쉬워 입맛을 다시며 스크롤을 내리다 보니 진창이 된 댓글창이 보였다. 베스트 댓글부터 눈에 보이는 활자들이 죄다 저를 향한 저주였다.
“장기태 나가 죽어라? 씨발, 하여튼 만나면 오줌이나 지릴 놈들이 찌질하게 손가락만 살아서는…. 너.나 디.지.세.요.”
한 음절씩 씹어뱉으며 여러 저주 글에 일일이 댓글을 달고 있을 때였다.
달칵, 뒷좌석 문이 열렸다. 군침 도는 샌드위치 냄새가 시린 겨울바람에 물씬 실려 왔다. 가운데 자리에 사뿐히 놓이는 샌드위치 봉투를 힐끗 내려다본 장기태는 키패드를 두드리며 지시했다.
“나 이거 먹고 해인이 보러 갔다가 호텔로 바로 갈 거예요. 준비하고 있으세요. 아, 기자들 다시 모이면 내릴 거니까 다들 오면 얘기….”
차체가 묵직하게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옆자리는 물론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며 두 남자가 동시에 차에 올라탔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기 무섭게 운전석에 오른 남자가 핸들을 만지작대며 말했다.
“아아따, 차 좋네.”
“뭐, 뭐야?”
댕그래진 장기태의 눈이 이쪽저쪽을 바쁘게 오갔다.
룸미러에 비친 작고 날카로운 눈에 한 번. 제 옆에 앉아 묵묵히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웬 조각 같은 얼굴에 한 번. 그리고 다시 룸미러로.
작은 거울에 비친 얍실한 눈매가 히죽 휘어졌다.
“맛있겠네, 쌘드위치. 마이 잡수소. 먹고 디진 귀신이 똥도 이뿌다 카는데.”
“다, 당신들 뭐야?”
“장기태 씨.”
곁자리에서 묵직한 중저음이 울렸다. 장갑 목 부분을 바짝 당긴 남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래 못 기다려주니까 빨리 처먹기나 해.”
“뭐, 뭐가 어째? 아니, 근데 씹….”
붉으락푸르락 얼굴을 붉힌 장기태는 바짝 등을 곧추세우고 언성을 높였다.
“니들 뭐야? 뭐 하는 새끼들이야?!”
“마! 옥타브 좀 낮차라. 잠도 몬 자고 내리와가 피곤해 죽겠구마는 셰끼가 골 울릴구로.”
깡마른 남자가 빽 호통치곤 다짜고짜 기어를 D로 맞췄다. 세단이 주차장을 벗어난 건 일순간이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연방 헛숨을 뱉던 장기태는 시뻘게진 눈을 뒤집으며 곁에 앉은 미남자의 멱살을 움켜쥐었다.
“너 뭐야, 새끼야. 이해인 회사에서 보낸 놈들이냐? 엉? 그래? 이 새끼들이 감히 내가 누군지 알고! 세워! 안 세워?! 씨발, 이 기집애가.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치사하게 나온다 이거지.”
바락 고함치던 장기태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112를 누르려던 때였다.
“!”
쥐고 있던 핸드폰이 깃털처럼 손아귀를 빠져나갔다. 빼앗긴 건지 힘이 빠져 놓친 건지 분간도 되지 않을 만큼 찰나였다.
쿵! 이내 창에 뒤통수가 부딪쳤다.
“억!”
아니, 제 핸드폰이 입 안에 틀어박힌 것이 먼저였을지도 몰랐다.
“시간을 줬는데.”
순식간에 코앞에 다가온 남자의 얼굴이 장기태의 땡그란 눈에 가득 차 있었다. 얼음결정 같은 회갈색 눈동자가 서늘하게 번득였다.
“먹기 싫으면 어쩔 수 없고.”
남자는 입 안에 쑤셔 박은 핸드폰을 더 힘주어 밀어 넣으며 무감정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리 더 벌려.”
“컥!”
어느샌가 스피커를 타고 흐르던 라디오 소리가 한층 더 커졌다. 경쾌한 비트의 댄스 음악이 아스팔트를 내달리는 차체 밖으로 둥둥 울렸다.
등 뒤의 소란은 마치 들리지도 않는 양, 핸들을 쥔 남자는 둠칫둠칫 어깨를 들썩이며 흥겹게 노래를 흥얼거렸다.
* * *
“안정제에 수면제 성분이 좀 있어서 그런 거래요. 혈압 맥박 다 정상이라니까 너무 걱정 마세요.”
- 그래, 그래. 깨나면 바로 연락 줘. 기자들은 아직이야?
“그렇죠, 뭐. 장기태도 생쇼하느라 아직 안 갔을 거예요. 아우, 진짜 미친놈.”
- 절대 못 들어오게 막아. VIP실로 옮겼지?
“네, 좀 전에 옮겼어요. 보안직원 경호도 부탁드렸구요. 절대 못 들어오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 그래, 고맙다. 나 이제 출발해. 금방 갈게.
“네. 운전 조심해서 오세요, 대표님. 제가 잘 보고 있을게요.”
철용과 통화를 마친 지윤은 다시 병실로 돌아가 해인을 살폈다. 철용에겐 걱정하지 말라고 했지만, 도통 깨지를 않으니 저 역시 걱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제가 도착하기 전에 한 차례 눈을 떴다가 다시 잠들었다곤 하나 마음이 졸아드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약이 무지하게 센가 보네…. ”
지윤은 곤히 잠든 얼굴을 애틋하게 바라보며 해인의 한 손을 포개어 쥐었다.
“기집애. 괜찮아졌다더니 이게 뭐야, 속상하게….”
화장실에서 수건을 적셔 가져온 수철이 침울한 얼굴로 말했다.
“누나 진짜 많이 좋아졌어요.”
지윤의 맞은편에 의자를 끌어다 앉은 수철은 따스한 물수건으로 해인의 손을 정성스레 닦았다.
“선글라스 안 쓰고도 사람들하고 얘기도 잘하고 잘 웃고. 정말 많이 좋아졌었는데….”
“그러게. 겨우 잊고 좀 살아보려는 애한테 어쩜 이러니.”
“아씨, 돌이라도 던져버릴걸.”
수철은 물수건을 움켜쥔 손을 불끈거렸다. 웬 떡대들을 끼고 와선, 손을 뻗어도 뻗어도 장기태에게 닿지 않아 얼마나 울화통이 터졌던지 몰랐다.
모가지, 맹치, 꼬추! 멸치 아저씨한테 배운 기술을 써먹어 볼 절호의 기회였는데.
“어쨌든 고마워. 우리 해인이 곁에 있어 줘서. 마을 사람들 덕분에 정말 좋아졌다고 얘기 많이 들었거든.”
부르르 주먹을 떨던 수철은 다시 해인의 손을 조심스레 닦으며 말했다.
“저야 뭐… 마을 어른들이 많이 도와주신 건 맞지만, 사실 결정적으로 영향을 끼친 건 태건이 형이죠.”
“태건이 형? 그게 누군데?”
“아. 누나한테 형 얘기는 못 들으셨어요?”
“글쎄…. 그런 이름은 들은 기억이 없는데….”
혹 듣고도 잊은 건가, 지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어 보던 때였다.
“여그여, 여그. 아직 자구 있을 거여. 맥박은 괜찮응게 걱정허덜 말고.”
담배를 태우러 갔던 대길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문밖에서 무어라 말소리가 들리다 드르륵, 문이 열렸다.
둘의 시선이 가벽을 돌아 들어오는 대길에게 건너갔다가 동시에 위로 바짝 들렸다.
“어!”
수철은 대번 울 것 같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형!”
의식이 든 것 같다가도 까라졌다. 익숙한 목소리들이 흐릿하게 들리다 사그라졌다.
그러다 한번은 정신이 반짝 들어 대길과 수철의 얼굴을 보았다.
여기가 어디예요, 괜찮아요, 그냥 좀 졸린 것 같아요.
몇 마디를 웅얼거리고는 또 잠이 몰려와 눈을 감았다.
“약 기운 따문에 그려. 할애비가 옆에 있을 텐게 걱정허지 말고 더 자, 어여.”
손등을 톡톡 두드려주던 따뜻하고 거칫한 손의 온기에 마음이 놓였던가 보다. 그제야 선잠 없이 깊이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비교적 머리가 개운했다. 잠시 정신이 들었던 그땐 창밖이 온통 주황빛이었는데, 어느새 칠흑이 되어 있었다.
하얀 천장을 얼마쯤 멍하니 마주 보던 해인은 병실을 휘둘러보았다.
잠깐 깼을 때완 그새 병실이 달라졌다. 웬만한 호텔 룸과 별다를 바 없어 보이는 걸 보니 VIP실로 옮겨온 모양이었다. 지윤이가 왔구나, 해인은 대번 감으로 알았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병실 안이 휑했다.
다들 어디 갔지.
시간이 많이 늦은 걸까 싶어 벽시계를 찾아 시선을 옮기던 때였다.
발밑 어디쯤에서 기척이 들렸다. 화장실로 추정되는 문이 달칵 열렸다. 병실이 쓸데없이 넓어 발아래로 멀찍이 떨어진 그곳을 가는 눈을 뜨고 내려다보았다.
이윽고, 웬 시커멓고 커다란 형체가 각막에 맺혔다. 검은 팬츠와 검은 셔츠를 정갈하게 차려입고, 포머드로 깔끔하게 머리칼을 올린 남자가 조금씩 가까워졌다.
몹시 익숙한 얼굴인데 또 너무 낯선 모습이라, 해인은 찰나 여러 번 눈꺼풀을 깜박였다.
“…어?”
그를 똑똑히 보고도 입이 떨어지기까지 족히 5초는 걸린 것 같았다.
한 손에 가습기 물통을 들고 핸드폰을 두드리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저를 향해 부드럽게 휘는 입꼬리를 마주한 순간, 고요하던 심장이 덜컥 빠르게 맥동했다.
“깼어?”
구둣발을 저벅저벅 옮겨 다가온 그가 머리맡 가습기에 물통을 채우고 곁에 앉았다.
눈 한 번 깜박이지 않고 그의 얼굴에 빤히 닿은 해인의 시선이 자리에 앉는 그를 따라 아래로 떨어졌다.
조금 맹한 얼굴로 바라만 보고 있자, 그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뭐야, 이 현실감각 없는 표정은.”
나직한 저음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렸다. 겉모습만큼이나 조금 낯선 스킨 향이 물씬 밀려왔다.
그제야 동그랗게 떠 있던 해인의 눈이 ‘땡’ 소리라도 들은 양 깜박였다. 둥둥, 조금 더 빠르게 뛰는 제 심장 소리가 귓가에 선명히 들린다.
세상에. 진짜 왔나 봐, 이 남자.
“…아직, 꿈꾸나 해서.”
여전히 조금은 멍한 채로 말하자, 그가 가볍게 볼을 꼬집으며 웃었다.
“꿈 아니야. 그만 정신 차려. 기다리다 목 빠질 뻔했어.”
볼을 놓은 손이 이마로 향했다. 머리칼을 간종그리고 다시 볼을 감싸고는 엄지로 가만가만 살결을 매만진다. 정말 꿈일 수가 없는, 몹시도 생생한 감각이었다.
“괜찮아?”
다정하게 묻는 소리에 이제야 온전히 현실임을 깨달은 해인은 잠긴 목소리로 되물었다.
“어떻게 여기 있어요? 장례식은 어쩌고.”
태건은 건조하게 마른 해인의 입술을 매만지며 부드럽게 말했다.
“산 사람이 더 중요해서.”
“…….”
마음이 울렁거려 입이 꾹 닫혔다. 고맙고 반갑고 떨리고, 괜히 서럽기도 하고.
차마 연락할 수 없었던 시간 동안 애써 묻어뒀던 서운함과 그리움까지 일시에 목 끝까지 차올라 절로 눈두덩이 뜨끈해졌다.
태건은 그렁그렁한 해인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작은 손을 모아쥐었다. 달래주듯 손등에 입술을 꾹 누르고는 빨개진 코를 손끝으로 툭 튕기며 나무랐다.
“왜 연락 안 했어.”
“그냥… 괜히 신경 쓸까 봐.”
“너 하나 입 다문다고 내가 몰라?”
“거야… 바빠서 인터넷도 못 볼 줄 알았죠.”
“하여튼 한마디를 안 지네.”
겸연쩍게 입술을 말아 문 해인은 괜히 병실을 휘둘러보며 말을 돌렸다.
“할아버지랑 수철이는요? 서울에서 친구도 왔을 텐데….”
“시간이 늦어서 들어가시라고 했어. 수철이도. 지윤이라는 친구랑 박철용 씨는 근처 호텔로 모셨고.”
“아. 철용 오빠도 온 거예요? 전화해줘야겠어요. 걱정하고 있을 텐데.”
얼른 머리맡을 살피는 눈이 챙겨오지도 못한 핸드폰을 무의식적으로 찾아 헤맸다.
태건은 반대편으로 돌아간 해인의 고개를 붙들어 제게서 벗어난 시선을 되돌려놓았다.
“조금만 이따가.”
성큼 가까워진 그가 가볍게 입술을 머금고 떨어졌다. 회갈색 눈동자가 목전에서 숨 막히도록 근사하게 일렁였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다른 사람 신경 쓸 겨를도 있네. 섭섭하게.”
“아니, 그게 아니라….”
촉, 다시 입술이 닿았다. 메말라 있던 아랫입술을 촉촉하게 머금고 떼어내다 다시금 진득이 입술을 맞댄다.
내리뜬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한 그는 촉촉해진 입술을 엄지로 가볍게 닦아주었다.
“뭐라도 좀 먹자.”
그인 듯 그가 아닌 듯, 조금은 낯선 모습으로 돌아온 태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어쩐지 기분이 몽롱해졌다. 역시 꿈인가, 아주 잠시 혼란이 스쳐 갔다.
* * *
봐도 봐도 신기하다.
차림과 헤어스타일만 좀 다를 뿐인데 어쩜 이렇게 완전히 다른 사람 같을까.
적당히 세운 침대에 기대어 앉은 해인은 태건에게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했다.
처음엔 잠이 덜 깨서. 다음엔 너무 놀라서. 그다음엔 오랜만에 봐서인지 새삼 너무 떨려서.
도무지 5초 이상을 쳐다보지 못하고 배회하던 시선이 이제야 그를 졸졸 쫓아다녔다.
조금은 품이 넓었던 나이커 바지 대신 핏이 딱 떨어지는 슈트 팬츠를 입고, 노브랜드 시장표 티셔츠 대신 잔근육의 움직임이 은근하게 드러나는 검은 셔츠를 차려입은 채, 아디오스 운동화가 아닌 클래식한 검은 구두를 신고 재규어처럼 움직이고 있는 남자를.
볼수록 신기하고 낯설었다.
남태건이라는 사람은 원래 이런 모습이었겠지. 그러고 보면 처음 피투성이가 되어 나타났던 날에도 이런 차림이었다. 전신이 피로 물들어 제대로 볼 겨를이 없었을 뿐.
제가 알던 안진에서의 모습은 그를 알던 이들에겐 외려 낯설었을 거라 생각하니 기분이 조금 묘해졌다.
일에 관한 건 차치하더라도, 그에 대해 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본래의 모습을 보고 나니 어째선지 묘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물론 싫지는 않다. 낯설지만 설렜다. 실은 너무 근사해서 가슴팍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쇼크로 졸도한 사람이 이래도 되나 싶게.
해인이 비운 죽 그릇을 부지런히 치운 그는 커피포트의 물이 끓기를 기다리며 선반 앞에 팔짱을 낀 채 서 있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몇 번이고 오르내리는 해인의 시선에 태건의 뒷모습이 닳아 없어질 지경이었다.
다시 검고 단정한 머리칼을 보았다. 기분 탓인지 더 넓어진 것 같은 어깨를 보고, 팔짱을 끼어 팽팽하게 당겨진 날개뼈의 굴곡도 보았다. 잘록한 허리와 길게 뻗은 다리를 훑다가 또다시 단단한 목덜미까지 단번에 시선을 옮겼다.
탁. 보글보글 끓던 커피포트의 버튼이 튀어 올랐다. 자스민차 티백을 넣은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채워 몸을 돌리던 그와 눈이 마주쳤다.
찌를 듯이 제게 박혀 있는 시선에 움칫 멈춰 섰던 그가 헛웃음 치며 다가왔다.
“보랄 땐 실컷 딴 데만 보더니.”
태건은 해인에게 머그잔을 건네며 의자를 당겨 앉았다.
“이제 와서 뭘 그렇게 뜯어 봐.”
해인은 포머드로 올려 훤히 드러난 그의 이마와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좀 이상해서요.”
“뭐가.”
“그냥…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무슨 뜻이냐는 듯 살짝 고개를 비튼 그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해인은 태건의 차림을 아래위로 훑으며 물었다.
“원래 이러고 다녔던 거죠?”
태건은 제 옷을 내려다보며 되물었다.
“왜. 별로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너무 멋있어서요, 라고 하기는 어쩐지 쑥스러워 공연히 머그잔만 기울였다.
뒷말을 삼키고 차만 들이켜는 해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태건은 제 차림을 다시 내려다보곤 사뭇 진지하게 물었다.
“나가서 나이커 바지 사 올까?”
풉, 입 안에 머금었던 차를 뿜으려다 겨우 삼킨 해인은 웃으며 손사래 쳤다.
“됐어요, 무슨.”
그러나 저 홀로 심각해진 태건은 연방 제 옷을 살피며 고민했다. 혹시나 너무 삭막해 보여 거부감이 드나 싶은 것이었다.
해인이 옅게 웃으며 그의 시선을 당겼다.
“진짜 이상한 거 아니고, 좀 낯설다는 뜻이었어요. 이런 모습 처음 봐서.”
그제야 마음을 놓은 그가 싱겁게 웃었다.
“싫은 거 아니면 됐어.”
“그런 거 아니에요, 정말. 멋있어요. 잘 어울려.”
은근슬쩍 속마음을 내비치며 수줍게 웃자 그도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었다.
마주 보며 오간 실웃음이 어딘지 모르게 괜히 어색했다. 아주 찰나 내려앉은 정적은 여지없이 마음을 무겁게 내리눌렀다.
죽을 먹다가도 이따금 그랬었다. 잠깐의 정적만 깔려도 해인은 불현듯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도 기사를 봤을 테니 누가 저를 찾아왔는지 알게 되었을 텐데.
장기태에 관해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이름을 입에 올린다는 것 자체가 몹시도 힘겨웠으나, 아무 말을 않기에는 내심 신경 쓰고 있을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머그잔을 쥔 손에 빠득 힘이 실렸다. 정리는 하지 못한 채 마음만 급해 두서없이 운을 뗐다.
“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그 한마디로 이미 해인의 마음을 헤아린 그는 더 말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 해인의 말을 가로막았다.
“충분히 괜찮아졌어. 그냥 알레르기 같은 거야.”
만지지 않고, 먹지 않고, 보지 않으면 아무렇지 않을. 그냥 그런 알레르기 같은.
“그러니까 낙담하지 마. 더 생각하지도 말고.”
그는 구태여 장기태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단 몇 마디로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먼저 말해주길 바라고 있을 줄 알았는데, 정작 그는 아니었던가 보다. 너무도 남태건다운 배려였다.
고마움에 뭉클해진 해인은 희미하게 웃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알았어요. 또 찾아올까 봐 조금 겁나긴 하지만….”
“다신 못 올 테니까 그것도 걱정하지 말고.”
어쩐지 확신하는 듯한 어조에 의아해 고개를 기울이던 때였다.
“뭐 더 먹고 싶은 건 없어?”
무어라 물을 새도 없이 질문이 건너왔다. 해인은 죽으로 가득 채운 배를 문지르며 고개를 저었다.
“배불러요. 죽을 너무 많이 먹었어. 것보단 좀 씻고 싶어요. 땀을 흘렸더니 찝찝해서.”
태건은 욕실 쪽을 눈짓하며 말했다.
“샤워 시설 잘돼 있어. 필요한 거 다 있고.”
“그래요?”
그럼 좀 씻어야겠다, 하며 이불을 걷자 그가 불쑥 물었다.
“씻겨줘?”
장난인 줄 알면서도 내심 경악한 해인은 얼른 손사래 쳤다.
“괜찮아요. 나 그렇게까지 환자는 아니에요.”
침대에서 발을 내려 슬리퍼를 꿰어 신던 순간, 그가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는 얼굴로 재차 말했다.
“내가 씻겨주고 싶어서.”
“…….”
분명히 사양을 했는데.
그것도 무려 세 번이나 아주 정중히 사양했건만 어쩌다가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해인은 욕실까지 그림자처럼 따라붙는 그를 차마 네 번은 밀어내지 못하고 인형처럼 서 있었다.
그가 환자복 단추를 풀고 속옷을 벗겨낼 때까지, 정말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환자처럼 가만히.
바짓단과 셔츠 소매를 돌돌 걷어 올린 태건이 샤워기를 쥐고 수전을 틀었다. 따뜻하게 온도를 조절한 물이 어깨에 닿아 가슴 위로 간지럽게 흘러내렸다.
이내 온몸을 적신 물이 줄줄 흘러 수챗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둘이 서기에도 모자람이 없을 만큼 너른 샤워부스 안은 금세 뽀얀 수증기로 가득 찼다.
태건의 앞에 멀뚱히 선 해인의 몸은 속절없이 발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여태 그의 앞에서 온갖 야한 행위는 다 했으나, 팬티까지 벗고 맨몸을 보인 건 처음이라 여간 민망한 게 아니었다.
도무지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온몸이 불타 없어질 것 같았다. 다소곳이 모아쥔 손이 자꾸만 중심을 가리려 삐죽삐죽 내려갔다.
그러거나 말거나 몹시 태연한 얼굴로 구석구석 꼼꼼히 물을 적셔준 태건은 그녀의 손에 샤워기를 잠시 들려주었다.
샤워볼에 바디워시를 묻혀 거품을 내던 그가 해인을 힐끗 내려다보곤 은근하게 웃으며 말했다.
“진짜 씻겨주기만 할 거니까 흥분하지 마.”
“무, 무슨, 안 해요, 그런 거.”
대번 발끈해 대꾸하자 그가 거품이 묻은 검지로 젖꼭지를 튕기듯 건드렸다.
“아.”
“벌써 꼭지 세워놓고 말로만.”
아니, 이건 추워서 그런 거예요. 라고 핑계를 대기엔 솔직히 양심 없는 소리라 눈만 새치름히 떴다.
그가 브래지어 후크를 풀고 팬티를 내리던 순간부터 이미 아래가 젖기 시작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하여튼 제 몸이지만 왜 이리 예민하고 엉큼한지 모를 일이다.
“돌아봐.”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앞보다야 등을 보이는 게 낫겠지.
냉큼 돌아선 해인은 샤워기 몸체를 마주하고 섰다. 까끌까끌한 샤워볼이 곧장 등에 닿았다. 어깨와 등에 샤워볼을 빙글빙글 굴리는 손길이 연약한 아이를 다루듯 조심스러웠다.
민망한 건 둘째치고, 사지 멀쩡한 채로 몸을 맡기고 있자니 문득 무안해진 해인은 머쓱하게 물었다.
“근데, 꼭 이렇게 해야 해요? 나 진짜 멀쩡한데.”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괜찮았다. 이렇게 좋은 병실을 차지하고 있기가 민망할 만큼 몸도 마음도 말짱해졌다. 만병통치약인 그가 곁에 있으니 낮 동안의 소동이 외려 단순히 스쳐 간 악몽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런데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게 하니 어찌나 민망하고 멋쩍은지.
등 뒤에서 희미하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알아. 사심 채우는 중이니까 얌전히 있어.”
“하… 정말….”
덩달아 피식 웃고 말았지만 아무래도 민망한 건 어쩔 수 없다. 양 볼이 뜨끈할 만큼 점점 열이 오르고 있었다.
불타는 고구마가 돼가는 그녀를 아는지 모르는지, 금세 하얀 거품에 덮인 등을 보며 태건은 혼잣말처럼 말했다.
“참 작네.”
새삼스레 더 작아 보이는 몸을 훑으며 그가 덧붙였다.
“그새 더 마른 거 같은데.”
“아니에요. 살쪘어요. 할아버지랑 밤마다 막걸리 마셔서.”
“안 쪘어. 더 쪄야 돼.”
“안 돼요. 복귀하려면 이제 슬슬 관리… 아.”
민망해 부러 더 떠들려던 찰나 말꼬리가 삼켜졌다. 팔뚝으로 떨어졌던 샤워볼이 불시에 옆구리에 닿았다. 참을 수 없는 간지러움에 절로 허리가 움찔 휘었다. 엉덩이로 떨어질 땐 또 반대로 움찔움찔.
나름 정성스레 닦아주던 그가 쿡쿡 웃었다.
“왜 이래. 꽈배기야, 뭐야.”
“아니, 간지러워서…. 그냥 빨리해주면 안 돼요? 진짜 너무 간지러워.”
진심으로 간절히 바랐으나 그는 짓궂게도 더 천천히 거품을 둥글렸다. 엉덩이 위에서 한참 동안 회오리를 만들고는 다시 옆구리로 올라가 신나게 장난을 쳤다.
아, 진짜! 버럭 소리를 내지른 해인이 손등을 찰싹 내리치고서야 겨우 허벅지로 느긋하게 손을 내렸다.
그러나 사타구니 근방에 닿았던 손은 비교적 빠르게 발목까지 뚝 떨어졌다. 짓궂게 장난은 치면서도 해인의 트라우마는 잊지 않고 배려해준 그였다.
“다 했어. 다시 돌아.”
저도 모르게 눈을 꾹 감고 있던 해인은 고개만 빼쭉 돌리며 물었다.
“이제 내가 하면 안 돼요?”
“안 돼.”
단호하게 뚝 떨어진 말과 동시에 몸이 빙글 돌려졌다.
그새 더 빨개진 얼굴이 다시 그와 마주했다. 홀딱 벗겨놓고 정녕 아무런 감흥이 없는지, 태건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몸을 닦아주는 데만 열중했다.
누군 이 와중에도 다리 사이에 열이 지글지글 끓는데. 혼자만 젖어가고 있으니 그게 또 왜 은근히 약이 오르는지.
“…….”
마주 선 이후 말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어디를 봐야 할지 몰라 고개만 수줍게 비튼 채 얌전히 몸을 맡겼다.
손목부터 정성스레 팔을 타고 올라간 거품 뭉치가 쇄골을 지나 가슴 위로 떨어졌다.
흠칫 어깨를 옹송그린 채 견디다 보니 어쩐지 이상한 기분이 든다.
이쯤 되면 배 위로 떨어져야 할 거품 뭉치가 유난히 오래도록 가슴 위에 머물러 있었다.
샤워볼로 둥근 언덕을 빙빙 덧그리며 손끝으로 유두를 슬쩍 건드리는 손길엔 아무래도 어떠한 의도가 다분히 엿보였다.
세모꼴이 된 눈을 휙 치뜨자,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술 끝에 야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해인은 연신 정점을 자극하는 그의 손과 짓궂은 눈빛을 보며 불만스레 중얼댔다.
“흥분하지 말라면서, 이러면 반칙이지….”
태건은 세상 억울한 얼굴로 뻔뻔하게 응수했다.
“이게 뭐. 씻겨주는 건데.”
“일부러 가슴만 건드리는 건 무슨 심보냐고, 그러니까…”
들릴 듯 말 듯 꿍얼거리자 머리 위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부서졌다.
“그래서.”
그의 엄지가 또 한 번 유두를 튕기듯 쓸고 갔다.
“싫어?”
“아니, 그….”
짐짓 원망스러운 심정으로 고개를 들던 순간, 불쑥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촉, 소리 나게 입술을 머금고 떨어진 그가 얄밉게 웃으며 손을 내렸다.
“알았어. 안 할게.”
“…….”
미련 없이 가슴을 떠난 그의 손이 홀더에 걸어둔 샤워기를 집어 들었다. 다시 착실한 간병인 모드로 돌아가 어깨 위로 물줄기를 흘려보낸다. 개운하게 씻겨 내려간 거품이 작은 발꿈치 뒤로 하얀 물길을 만들었다.
해인은 어느샌가 민망함도 잊고 빙글거리는 얼굴을 빼쭉 흘겨보았다.
실컷 달아오르게 건드려놓고 얼른 발을 빼니 아무래도 약이 올라 죽겠다.
장장 이십여 일이나 만나지 못했건만, 제 맨몸을 보고도 여유가 넘치는 그가 그러잖아도 은근히 서운하던 차다.
태건의 셔츠와 여유만만한 미소를 번갈아 살피는 눈에 막간의 갈등이 들끓었다. 맨손으로 제 몸을 문지르며 거품을 씻겨주던 그의 손이 가슴을 스쳐 간 순간, 결국 짧았던 갈등은 막을 내렸다.
작은 두 손이 부연 수증기를 가로질렀다. 이내 태건의 시선이 아래로 뚝 떨어졌다. 슬슬 벌어지는 셔츠 앞섶 사이로 탄탄한 복근이 드러나고 있었다.
해인을 향해 다시금 치떠진 눈동자에 묘한 웃음이 스몄다.
“뭐 하는 거지?”
해인은 부러 어여쁘게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태건 씨는 내가 씻겨줄게요.”
그가 픽 웃으며 해인의 손을 붙잡았다.
“난 괜찮아. 너 자는 동안 씻었어.”
그러나 약이 오를 대로 오른 해인은 태건의 손을 떨쳐내고 꿋꿋이 단추를 풀었다. 그러며 그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내가 씻겨주고 싶어서.”
기가 막혀 헛웃음을 친 태건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꼬물거리는 해인의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런 도발은 좀 위험한데.”
나직한 경고 따위 귓등으로 흘려버린 해인은 기어코 남은 단추를 모두 풀어내고 팬츠 버클을 쥐었다. 과감히 버클까지 풀 때는 언제고, 지퍼를 내리는 손은 설핏 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꿋꿋이 끌어내린 지퍼 사이로 이미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조금씩 드러났다. 선단에서 흘러나왔을 쿠퍼액이 회색 드로어즈를 짙게 물들인 채였다.
저와 별다를 바 없었던 그의 사정을 확인한 해인은 한층 더 억울한 심정이 됐다. 이래놓고 잘만….
“언제부터 이랬어요?”
몰래 속옷을 적시다 걸려놓고 그는 여전히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너 벗길 때부터.”
“뭐야… 그래놓고 아닌 척….”
태건은 짐짓 난감한 척 한숨을 내쉬며 능청을 떨었다.
“하… 그러게. 들켰네.”
그라고 설마 아무렇지 않았을까.
물론 시작은 몹시 순수한 마음이었으나 벌어지는 환자복 사이로 가슴골이 드러나던 순간부터 이미 좆뿌리는 드글드글 끓기 시작했다.
위기가 어디 한두 번이었던가.
지금껏 팬티 속에 숨긴 채 작은 손이 매만졌을 음부를 온전히 눈에 담은 순간 한 번.
엉큼하게 솟아오른 젖꼭지를 장난스레 튕기다 외려 또 한 번.
작은 등을 품에 안고 싶어 손이 근질거릴 땐 아주 아슬아슬하게.
수줍게 붉어진 얼굴을 모로 기울인 채 가슴을 들썩이는 모습을 바라보다 완전히.
해서 결국 참지 못하고 장난을 가장해 젖꼭지를 건드리다 애꿎은 좆만 터질 듯이 더 키웠던 차였다.
맹세코 오늘은 건드리지 않으려 했었다. 아무리 괜찮아졌다지만 불과 몇 시간 전에 숨이 꼴깍 넘어가 쓰러졌던 여자를 상대로 정욕을 풀고 싶진 않았다.
아니, 솔직해지자면 해인이 견디지 못하고 먼저 도발해주기를 바랐다. 완전한 허락이 떨어지기를 내심 기다리며, 은근하게 흥분점을 건드려 자극하면서.
한마디로 상당히 약았던 거지.
메마른 샤워부스 밖으로 검은 셔츠가 툭 떨어졌다. 팬츠도 드로어즈도 연이어 낮은 언덕처럼 쌓였다. 직전까지 도 닦는 선비처럼 덤덤했던 그가 평정을 잃은 건 한순간이었다.
깊숙이 기울어진 그림자가 단숨에 수증기를 가르고 다가왔다. 금세 열에 달뜬 목소리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나직이 밀려들었다.
“못 참겠다, 이제.”
갑작스레 덮쳐오는 그림자에 해인의 몸이 절로 기울어졌다. 단단한 팔이 강하게 허리를 휘어 당겼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꽉 맞닿았다.
아무렇게나 바닥을 나뒹구는 샤워기 헤드에서 물줄기가 분수처럼 솟구쳤다.
잇새로 밀고 들어오는 혀의 움직임이 여느 때보다 거칠었다. 고개를 기울일 때마다 머금어 당기는 힘이 입술을 뜯어낼 기세로 맹렬했다. 쪽쪽, 혀를 빠는 소리가 요란하게 욕실을 울렸다.
“하….”
태건은 열기에 차오른 숨을 토해내며 다시금 해인의 입술을 삼켰다. 힘 조절에 실패한 손이 엉덩이를 꽉 움켜쥐고 제게로 바짝 붙당겼다. 나무토막처럼 단단하게 솟은 페니스가 납작한 배에 모양을 새기듯 움푹 파묻혔다.
“아읍.”
그동안 하지 못했던 키스를 몰아치듯 사정없이 입술이 먹혔다. 내내 그가 다가오기를 바랐으나 정작 고삐를 풀고 사납게 밀고 들어오는 그를 받아내느라 해인의 몸은 버겁게 뒤로 밀리고 있었다.
이럴 걸 그렇게나 참고. 혼자 애태우게.
얄미움에 새치름히 눈초리를 세운 건 고작 찰나였다.
금세 흥분감에 휩싸인 그녀가 그의 목에 매달리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하아, 하아.”
“하….”
신음과 뒤섞인 수증기가 안개처럼 부옇게 욕실을 메웠다. 맞댄 입술을 연신 교차하며 서로의 살결을 더듬는 손이 바빴다.
그리도 보고팠던 얼굴을 꽉 붙든 채 정신없이 혀를 얽었다.
그토록 닿고팠던 가슴을 틈 없이 맞댄 채 서로의 살결을 물고 핥으며 마음껏 울혈을 새겼다.
어느 틈에 물방울 맺힌 벽에 밀쳐진 해인은 젖꼭지를 갉작이는 아찔한 쾌감에 부르르 몸을 떨었다.
“아….”
고개가 절로 들렸다. 목마른 사슴처럼 젖가슴을 빨아대는 태건의 머리칼을 마구 헤집으며 연방 신음했다. 매 순간마다 감관을 채우는 흥분감에 시야가 금세 몽롱하게 흐무러졌다.
하염없이 태건의 머리칼만 움켜쥐고 있던 손이 아래로 끌려 내려갔다. 그가 당연한 순서처럼 검은 음모 위까지 해인의 손을 이끌어놓았다.
물에 젖은 음모가 손끝에 닿았다. 기다렸다는 듯 균열을 파고드는 손가락이 뜨끈한 액에 푹 담겼다.
“하아.”
여전히 분수처럼 솟구치고 있는 샤워기 소리 위로 점성 짙은 물소리가 포개어졌다. 찌걱찌걱 균열을 가를 때마다 울컥 넘쳐나온 애액에 사타구니가 끈적하게 젖어갔다.
더 깊숙이 찔러넣은 손가락을 꺼내어 음핵 위를 둥글리던 때였다. 그가 연신 젖꼭지를 핥아 올리며 별안간 해인의 손을 쥐었다.
불시에 그의 입가로 당겨진 손가락이 진홍빛 입술 사이로 쏙 빨려들었다. 몽롱하게 풀려있던 해인의 눈이 당황해 번쩍 뜨였다.
“그, 그걸 왜.”
얼른 손마디를 굽혔으나 태건은 억센 힘으로 굽은 손가락을 휘어 감고 쪽쪽 빨아당겼다. 끈적한 액을 샅샅이 빨아먹고도 혀를 길게 내어 손가락을 핥아 올린다.
제게 빤히 닿은 눈이 야릇하게 휘어졌다.
“왜. 맛있는데.”
“민망하게….”
얼굴을 붉히며 미간을 우그리자, 그는 쿡쿡 웃으며 다시금 해인의 손을 음부로 이끌었다.
“더 많이 묻혀. 또 빨아먹게.”
웃음 섞인 탁성이 귓가에 나직이 스미었다. 부끄러워 흘길 겨를도 없이 뾰족한 혀가 귓구멍 속을 헤집었다. 아래를 휘젓는 소리와 닮은 그것이 귓속으로 총탄처럼 쏟아졌다.
“하….”
전신으로 번져나간 전율에 해인은 어깨를 바짝 움츠렸다. 동시에 유두를 긁어대는 자극에 척추가 움찔움찔 휘었다.
쉴 새 없이 쾌감에 휩쓸렸다. 온몸을 데운 열기에 머리꼭지가 아찔하게 흔들린다. 절정을 좇아 제 젖은 비부를 마구 문지르자 여느 때보다 빠르게 짜릿한 감각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음핵을 둥글리던 움직임이 절정을 목전에 두고 별안간 더뎌졌다.
게슴츠레 뜬 눈이 먼지처럼 부유하는 수증기를 말끄러미 보았다. 열에 젖어 간잔지런해진 눈동자가 일순 미세하게 흔들렸다.
“다음에 만나면….”
보지 못하고 만지지 못했던 시간 동안, 늘 곱씹었던 한마디가 뜨거운 열기 속을 맴돌고 있었다.
찰나의 상념과 고민과 결심으로 일렁이던 눈빛이 저를 가둔 커다란 어깨를 바라보았다.
끝내 음부에서 멀어진 해인의 손이 제 젖가슴을 주무르던 그의 손등을 가만히 포개었다.
귓불 아래에 울혈을 새기던 그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내리뜬 시선이 왜, 하며 묻듯 눈꼬리 끝에 닿았다.
해인은 사뭇 긴장 어린 얼굴로 숨을 골랐다. 촉촉하게 수증기가 맺힌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태건 씨가….”
봉긋한 가슴이 얕게 들썩였다. 곧장 잇지 못한 말을 입 안에 머금고 잠시간 눈꺼풀만 빠르게 깜박였다.
이윽고, 그의 손등을 쥔 작은 손에 힘이 꾹 실렸다.
“…만져줘요.”
겨우 뱉어놓고 제가 더 긴장한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
하나 그는 말이 없었다. 등허리에 닿아있던 다른 한 손에 조금 힘이 실렸을 뿐이었다.
태건의 침묵을 민망하게 견디던 해인은 그의 손등을 더욱 힘주어 쥐며 말했다.
“다시 만나면, 그러기로 했으니까….”
그제야 참고 있던 숨을 고요히 뱉어낸 태건은 해인의 귓불을 부드럽게 머금으며 말했다.
“안 돼. 너 오늘은….”
힘들 거라 말하려 했다. 가뜩이나 장기태로 인해 지친 몸이 트라우마를 견디지 못할 거라고.
그러나 이미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해인은 기어코 그의 손을 아래로 붙들어 내렸다. 손바닥이 해인의 아랫배에 닿은 순간, 태건은 손목에 바짝 힘을 실었다.
“해인아.”
“도와줘요. 다 잊을 수 있게.”
사뭇 결의에 찬 눈이 똑바르게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긴장해 떨면서도 태건을 향한 눈동자는 굳센 고집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 만나 그에게 안길 날만을 기다렸던 그녀였다. 하루빨리 태건에게 온전히 사랑받고 사랑하고 싶었다.
결국엔 지난 과거로 인한 압박감 탓일지도 몰랐다. 이깟 트라우마 때문에 행여 그 역시 제게 지쳐갈까 두려워서.
그러나 그에게 온전히 안기고픈 욕구 또한 분명한 진심이었다.
해인의 강강한 눈빛에도 태건은 선뜻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검은 눈동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재차 묻고 있었다. 정말 괜찮겠느냐고.
대답이라도 하듯 해인이 그를 향해 고개를 기울였다. 살며시 입술을 맞대고, 손톱만큼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태건은 제 입 안을 깔짝거리는 말랑한 혀를 가만히 받아냈다. 고집스레 내리뜬 눈은 저를 유혹하기 바쁜 얼굴을 빤히 지켜보고 있었다.
촉, 입술을 떼어낸 해인이 감았던 눈을 떴다. 만져달라 갈구하는 키스치고는 어설프기 그지없었으나 충분히 꼴리고도 남았다.
아니, 만지는 게 다 뭔가. 머릿속에선 이미 환장하게 좁은 구멍 속에 몇 번이고 저를 파묻었다.
여전히 납작한 아랫배에 닿아있는 그의 손에 움찔 힘이 실렸다. 마지막 인내가 간당간당하게 끊어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해인이 떨리는 눈을 들어 재차 그를 갈구했다.
“만져줘요, 태건 씨가.”
증기 속에 스며드는 호흡이 더욱 뜨거워졌다. 애써 고요로 포장했던 회갈색 눈동자가 결국엔 무너졌다. 상상만으로도 선단이 젖고 말았으니 참기엔 이미 늦은 거였다.
“하….”
신음 같은 숨이 허공에서 충돌하는 순간, 태건의 고개가 깊숙이 기울었다. 강하게 입술이 빨리고 함부로 입 안이 헤집어졌다.
단단히 흥분한 그가 입술을 가볍게 맞댄 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지는 걸로 안 끝난다고, 분명히 말했어.”
찰나 움칫했으나 해인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재차 입술을 빨아당긴 그가 성마르게 해인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나가자.”
“어, 어딜요?”
태건은 커다란 수건으로 해인의 몸을 돌돌 감싸주었다.
“그래도 처음인데, 욕실에서 박을 수는 없잖아.”
바닥에 내팽개쳐진 뽀얀 이불 위로 흐린 달빛이 내려앉았다.
달빛도 닿지 않는 좁은 침대 위에선 톱니바퀴처럼 얽힌 나신이 맞닿은 살결을 눅진하게 비벼대고 있었다.
해인은 태건의 팔을 베고 모로 누운 채 바짝 몸을 굳혔다. 긴장을 감추려 쉼 없이 그의 몸을 어루만졌으나, 자꾸만 꽉 다물리는 턱은 흠씬 두들겨 맞은 양 욱신거렸다.
또다시 앙다문 턱이 바들거리자, 그가 잔뜩 굳은 해인의 턱을 어루만지며 코끝에 입을 맞추었다.
“힘들어도 참아. 멈출 생각 없으니까.”
언뜻 야속하게 들리는 말이었으나 그것이 외려 그의 배려임을 모르지 않았다. 지난 20여 년을 괴롭혀온 지독한 악몽을 비로소 잊게 해주리란 결심임을 알았다.
해인은 태건의 어깨를 꽉 그러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구의 품에 안겨 있는지, 단 1초도 망각하지 않으려 똑바르게 눈을 떴다.
태건은 저를 담은 눈동자를 지그시 바라보며 모로 안긴 여체를 바로 뉘었다. 뻣뻣하게 맞붙은 다리 사이를 무릎으로 파고들자, 접착제로 붙여놓은 양 떨어질 줄 몰랐던 해인의 다리가 조금씩 벌어졌다.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허벅지를 밀고 더 밀어 무릎으로 단단히 포박했다. 긴장하면서도 착실히 젖어있던 음부가 찌걱, 야릇한 소리를 내며 훤히 벌어졌다.
“젖었네. 야하게.”
해인은 붉어진 얼굴을 그의 가슴팍에 파묻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너무….”
휑하게 벌어진 다리 사이가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조금이라도 오므리려 꿈틀거려보지만, 허벅지를 꽉 내리누른 그의 무릎은 돌덩이 같았다.
“괜찮아. 힘 풀어.”
태건은 단단해진 젖꼭지를 손끝으로 둥글리며 작은 얼굴 곳곳에 입을 맞추었다. 아래로 신경을 쏟지 못하도록 이곳저곳을 빨고 핥으며 애무를 이어갔다.
다리는 뻣뻣이 굳은 채 가슴만 들썩였다. 긴장과 흥분이 공존하는 몸이 외줄 위에 팽팽하게 선 채 떨리고 있었다.
젖무덤 하나를 꽉 움켜쥔 그가 빠르게 유두를 갉작였다. 대번 머리꼭지로 치솟은 야릇한 쾌감에 솜털이 쭈뼛 섰다.
“아아….”
들썩이는 가슴이 그의 입 안으로 빨려들어 갔다. 뾰족하게 세운 혀가 그 속에서 딴딴하게 영근 젖꼭지를 휘어 감고 핥아대기를 반복했다.
움찔거리는 구멍 밖으로 주룩 흐르는 액의 느낌이 선연했다. 두려움에 떨면서도 중심은 속절없이 젖어 드니 심신이 분리된 듯 혼란스러웠다.
동아줄처럼 그의 어깨만 꽉 쥐고 있던 손이 붙들린 건 그때였다.
태건은 계속해서 젖꼭지를 핥아 올리며 해인의 손을 아래로 끌어 내렸다.
제 손을 음부로 이끄는 그를 내려다보며 해인은 의아한 얼굴이 됐다.
“왜….”
태건은 고개를 들어 입술을 맞대며 속삭이듯 말했다.
“같이 만져.”
이내 입술이 빨렸다. 정신을 혼몽하게 흩트리는 거친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그러다 한순간.
어떠한 준비도 전조도 없이, 포개어진 두 손이 젖은 균열 사이로 깊숙이 미끄러졌다.
“아…!”
한순간 휩쓸렸다. 긴장할 새도 없이 전율에 몸이 떨렸다.
불시에 음부에 닿은 손은 분명 제 것이었으므로, 여느 때처럼 몸이 경직되기도 전에 쾌감이 먼저 밀려왔다.
다음 순간 아래에 함께 닿은 그의 손을 분명히 인지했으나, 몸이 떨리는 이유가 거부감 탓인지 희열 때문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하아, 하…!”
음부를 덮은 손이 질펀한 물을 헤치고 올라와 도도록한 살점을 문질렀다. 정점을 자극하는 것이 제 손인지 그의 손인지 이젠 그조차도 알 수가 없다.
다만 이따금 질구를 건드리는 손끝이 제 것이 아님을 선명히 느낄 때면 여지없이 골반이 뒤틀렸다.
또 한 번, 그의 손이 해인의 손가락 사이를 가르고 젖은 균열 속을 꾹 내리눌렸다.
“아!”
발작하듯 몸이 튀어 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