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 >
1화. 프롤로그
부드럽게 찰랑이는 결 좋은 검은 머리카락이 등을 감싸고,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는 별처럼 반짝였다. 보석처럼 맑은 피부에 붉은 장미꽃잎이라도 베어 문 것 같은 입술이 우아하게 움직였다.
“웨버도 원하는 일 아니던가요?”
흑발 벽안의 미인 레이알렉시스. 속칭 알렉스. 애칭 레이.
레이알렉시스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하는 말에 웨버는 얼빠진 표정을 지울 수가 없었다. 자기 말이라면 그저 고개를 끄덕이며 네, 네, 하던 약혼녀가 여상한 말투로 파혼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심입니까?”
한참 만에 표정을 추스른 웨버가 빈정거리는 투로 물었다. 레이알렉시스는 고개를 한 번 끄덕해 보였다. 그 성의 없는 대답에 웨버가 한층 더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다시 한 번 더 묻지. 진심이냐 물었습니다, 알렉스.”
항상 순한 강아지처럼 제 말을 따르던 레이알렉시스였다. 웨버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파혼 이야기는 아마도 자신을 유혹할 질투 유발 작전 같은, 어딘가에서 어설프게 주워들은 연애 공작에 불과할 게 뻔했다.
“장난하는 거라면 후회할 텐데요. 난 당장 이대로 돌아가 집안에 파혼을 알릴 겁니다.”
“네. 그러세요. 그러라니까요?”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짜증 가득한 목소리였다.
‘뭐지, 이 불손한 말투는?’
웨버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레이알렉시스의 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웨버야말로 내가 장난하는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요.”
“하, 알렉스. 지금 뭐 하자는…….”
레이알렉시스가 그의 말허리를 뚝 잘라먹었다. 이 역시도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장난 아니니까 빨리 댁으로 돌아가서 파혼 알리세요. 본인이 본인 입으로 떠들고 다녔잖아요. 나 같은 졸부랑 결혼하는 건 돈에 명예를 파는 귀족의 수치라고.”
실제로 웨버가 공공연히 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레이알렉시스와의 약혼이 결정된 직후부터 단 한 번도 지껄일 수 없었다. 제가 욕하던 명예 팔이를 본인도 똑같이 하고 있었으니까.
물론 그의 의지대로 진행된 약혼은 아니긴 했다.
“어떻게 작위를 받은 형을 보내니?”
라이트 백작 부부는 점점 어려워지는 형편을 타개하기 위해 작위를 받지 못한 차남을 졸부 집안과 약혼시켰다. 작위를 받은 장남으로 집안의 대를 잇고 차남으로 돈을 끌어와 재산을 건사하려는 속셈이었다.
그 차남인 웨버 라이트는 죽상으로 끌려와 약혼을 했다. 돈에 팔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약혼이 결정되자마자 르아넬로가는 즉시 라이트가의 빚을 해결해 주었으니까.
놀라운 것은 그 정도 액수는 그들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이 점이 그는 너무도 수치스러워 인근에서 예쁘다 소문난 약혼녀에게도 심드렁해했다.
그뿐만 아니라, 제 할 말도 못 하고 입을 다물어 버리는 착하고 유순한 약혼녀에게 폭언과 막말을 퍼붓는 것으로 금이 간 자존심을 회복하려 했다.
“……죽다 살았다더니 미치기라도 한 겁니까, 알렉스?”
만약 파혼을 한다고 해도 귀족인 제 쪽에서 먼저 말을 꺼내야 했다. 감히 저 근본도 없는 졸부 집안에서 내뱉으면 안 됐다.
“미쳐도 너만큼 미쳤을까.”
냉하고 똑 부러지는 그녀의 말투에 웨버는 크게 충격을 받았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제가 알던 레이알렉시스가 아니었다.
원래의 알렉스라면 제 말에 이런 대답을 할 수 없을 터였다. 아니, 말을 꺼내기는커녕 놀란 얼굴을 애써 감추며 바들바들 떨고만 있어야 했다. 충격을 받은 웨버는 당황해서 순간 말을 잃었다.
레이알렉시스의 말이 이어졌다.
“라이트 집안에서 지금 무슨 상단을 하나 사겠다고 설치고 있던데, 그럴 돈은 있어? 나 믿고 설치는 거 아냐? 파혼하면 후회하는 건 내가 아니라 그쪽이지.”
“지, 지금 뭐라고 했어. 그쪽? 설쳐?”
우아하고 아름다운 레이디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거친 말에 웨버는 심하게 당황했다.
“왜? 너는 매번 욕하고 못된 말만 했으면서, 나한테서는 고작 반말 하나 못 듣겠어?”
웨버의 눈동자는 충격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레이알렉시스는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이전과는 눈빛부터가 달랐다.
눈동자에는 이채가 어려 있고, 자신과 시선을 부딪쳐도 예전처럼 피하지 않았다. 당당하게 고개를 들고 등을 곧게 편 자세부터도 확실히 전과는 달랐다.
‘정말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인가.’
한편, 레이는 충격받은 웨버의 얼굴을 앞에 두고 속으로 시원스레 웃으며 생각했다.
‘레이알렉시스가 미쳤다고 수도에 소문이 나면 혼삿길이 더 막힐 테니 그것도 나쁘지 않은 방법이지.’
그리고 무감한 표정으로 입을 뗐다.
“나한테 차여서 정 마음이 불편하면, 내가 미친 것 같아서 파혼했다고 집안에 전해.”
***
어느 날, 갑자기 고열에 시달리게 된 레이는 찬바람을 쐬기 위해 창문을 열다가 발을 헛디뎌 3층 아래로 추락했다.
“헉!”
그대로 크게 다치거나 죽을 줄 알았는데 뜻밖에도 그녀는 다른 차원에서 눈을 떴다.
처음 보는 옷과 이상한 물건들이 가득 넘치고, 밤도 대낮처럼 환한 곳. 사람들은 그곳을 ‘대한민국’이라고 했다.
레이는 영문도 모른 채 가게 된 한국에서 10년을 살았다.
그 다른 차원에서 보낸 시간은 레이의 모든 것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입맛, 성격, 어투뿐만이 아니라 인생 전체를 아우르는 가치관까지.
그곳에서 레이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자신의 성격이 사실은 리담에 맞춰진 것임을 깨달았다.
귀족은 아니지만 부유한 집안의 장녀로 태어나 부모님이 정해 준 약혼자와 결혼해서 가정을 꾸리는 것, 그것이 인생이라 생각하며 고분고분 따랐던 삶이었다. 리담의 괜찮은 집안 영애라면 누구나 당연하게 생각하는 삶이었기에.
레이는 본인의 성격이 순하고 조용하다고 생각하며 자랐다. 부모님의 말씀을 거스른 적도, 제 의지로 어떤 일을 결정해 본 적도 없었다. ‘삶을 살고 있다’고 느낀 적이 없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은 달랐다. 모두 스스로 선택한 방식으로 살아갔다. 눈빛을 반짝이며 자신의 길을 찾는 모습이 대단해 보였다. 레이는 이 자유로운 나라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녀는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친구와 맛있는 것을 찾아 거리를 신나게 누볐고, 별것 아닌 이야기를 몇 시간이고 조잘조잘 떠드는 것이 즐거웠다. 친자매 같은 친구와 자유로이 지내면서 알게 된 본인의 진짜 성격이었다.
리담과 모든 것이 다른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해 레이는 많은 것을 바꿨다. 그리워도 리담으로 돌아갈 방법을 알 수 없었기에, 이곳에서 살기 위해 저를 백지로 비우고 다시 새로이 채웠다.
가족들이 떠오를 때면 서글프고 눈물이 났다. 한국처럼 돈독하고 애정 어린 가족 관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혈연지간이니까. 부모님과 여동생이 생각나면 속이 헛헛해지곤 했다. 그럴 때 함께 살던 친구 유주가 가족이 되어 주었기에 점점 낯선 나라에 적응해 나갔다.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레이는 베란다 문을 닫으러 나갔다 정신을 잃었다.
“헉!”
그리고 다시 리담의 수도 라비던, 즉 원래의 현실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떨어진 그날처럼.
눈을 뜬 곳은 르아넬로 저택 레이알렉시스의 침실, 바로 제 침대 위였다.
너무도 오랜만에 보는, 낯익으면서도 낯선 풍경에 레이는 잠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가족들이 그리워서 나도 모르게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건 꿈일까, 현실일까.’
레이는 옷장으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그곳엔 여전히 제가 입던 옷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아직도 이게 꿈인지 아닌지 구분이 되질 않았다.
“어라? 뭐야…….”
분명 10년을 살다 왔다. 그런데 거울에 비치는 건 이 침대에 누워 있던 시절의 그 얼굴이다. 굵직한 웨이브가 진 파마머리가 아닌, 허리까지 오는 긴 생머리에 익숙하게 봐 오던 것보다 조금 더 어린 얼굴.
“역시 꿈인가?”
하지만 마냥 꿈으로 치부하기에는 얼굴뿐만 아니라 방까지 너무도 그대로였다. 마치 시간이 하나도 흐르지 않은 것처럼.
태어나 20년 넘게 자란 조국, 다른 차원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써 잊고 살았던 과거를 실제로 접하니 새록새록 선명히 기억났다. 마치 어제 자고 일어나서 오늘 막 깬 것처럼 기억은 순식간에 생생해졌다.
그래서 더더욱 분간이 안 됐다. 꿈이라기에는 너무 현실 같고, 현실이라기엔 시간이 그대로여서 오히려 꿈 같았다. 혼란에 빠진 레이는 우선 지금이 현실인지 아닌지 확인해 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잠시 고민하던 레이는 차원 이동을 한 그날 그 상황을 똑같이 재현해 보기로 마음먹었다.
‘그때 분명 잠옷을 입고 있었지.’
고열이 펄펄 끓던 중이라 며칠째 침대 밖을 벗어나지 못했었다. 레이는 입고 있는 옷을 벗어 잘 개어 넣고 옷장 속에 있던 잠옷으로 갈아입었다. 그날 창밖으로 떨어질 때 입고 있던 것과 비슷한 옷을 입고 다시 창가로 다가갔다.
쿵쿵쿵쿵.
심장이 목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격하게 뛰었다.
‘만약 현실이라서 그냥 추락만 하게 된다면?’
그야말로 개죽음이다.
하지만.
‘여기서 살아 봤자 웨버 같은 남자랑 결혼해서 돈만 빨리다 죽을 텐데.’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판돈은 치명적인 상처, 혹은 목숨. 운이 좋으면 타박상 정도로 그칠 수도 있다.
무서웠지만 이미 자유로운 삶에 푹 빠져 오랜 시간을 산 이 감정과 기억은 절대 예전으로 되돌아갈 수가 없었다. 다시 막막해진 미래에 레이는 과감히 결심했다.
‘설마 죽진 않겠지.’
꿈이니까.
그렇지만 만약, 정말 만약의 확률로 현실이라고 한다 해도 믿는 구석은 있다. 르아넬로 집안에 남아도는 게 돈이다.
‘혹 크게 다쳐도 치료 마법으로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있으니까.’
그렇게 결심한 레이가 창밖으로 몸을 날리려는 순간.
“아가씨!”
담당 하녀가 새파란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달려왔다. 하녀의 손에 잡혀 겨우 추락을 면한 레이는 창틀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생각했다.
아, 현실이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