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라비던의 마녀 (1)
“감정 표현을 잘 못 하신다고요?”
레이알렉시스의 물음에 오늘 처음 귀족들에게 인사를 한다는 백작가의 아들이 눈을 빛냈다.
“네. 그래서 무뚝뚝하다는 소릴 많이 듣습니다. 본심은 그렇지 않은데. 하하.”
처음부터 그녀에게 추파를 던지던 남자였다.
본인은 티를 안 내려고 하는 것 같았지만, 조금만 신경 써서 보면 그의 눈빛이나 행동이 노골적으로 레이알렉시스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마부한테 왜 그렇게 화를 내신 거예요? 아까 입구에서 난동 부리던 거, 그쪽 맞죠?”
신분이 확실한 자들만 올 수 있는 황실 주체 연회에서 상대방을 ‘그쪽’이라 칭하는 건 무례한 언사였다.
모임에 오는 자들을 기억해 주는 시종을 따로 둘 만큼 상대방을 기억하는 건 이 연례 모임에선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그 사실을 그녀 역시 잘 알고 터였다.
“예? 아, 그건. 그가 일을 제대로 못해서 질책을 좀 한 겁니다. 별거 아니에요.”
“무뚝뚝해서 감정 표현을 못 하신다더니 화는 왜 그렇게 잘 내시는지?”
“예?”
남자는 멍한 얼굴로 눈을 껌뻑이며 반문했다.
“무뚝뚝 같은 소리하네.”
레이가 서늘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뚝뚝해서 감정 표현을 못 하면 화도 못 내셔야죠. 화는 감정 아닌가? 설마 감정이 뭔지 모르는, 약간 모자란…….”
그러다 이제 와 말을 가리는 척, 말끝을 흐렸다.
“예? 지금 뭐라고 하신 겁니까?”
어딘가 성의 없는 그녀의 태도에 남자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가셨다.
“전 똑똑한 사람을 좋아해서요. 그럼 이만.”
레이는 남자가 대답을 할 틈도 주지 않고 뒤를 돌아 자리를 벗어났다. 그 광경을 본 주변 여자들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수군거렸다.
“저런. 차기 백작이 소문에 어두운 모양입니다.”
“저 마녀의 외양이 내용물에 비해 그럴싸하니까 걸려든 거죠.”
“세상에, ‘그쪽’이라니. 기본 상식도 없나 봐요.”
레이알렉시스를 한마디로 정의하자면 ‘무례함’이었다. 예의는 지나가는 개한테 다 줘 버린 듯 막말을 일삼는 인간으로, 도를 지나친 거침없는 언사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였다.
“저래서 졸부는 어쩔 수 없나 봐요.”
기존의 귀족들이 척을 진다는 신흥 귀족인 졸부. 이전 같았으면 이곳은 저런 상인 출신들이 평생 구경도 한 번 못 해 볼 공간이었다. 이건 병으로 골골한 황제 대신 태자가 정무에 나서면서 시작된 변화였다.
기존 귀족들을 견제할 요량으로 태자 파르베제는 요즘 국책사업이나 기간산업으로 큰 부를 차지한 졸부들에게 작위를 하사하거나, 그들을 제 곁에 두기 시작했다. 나라 기반 사업을 잘 이끌기 위해 그들의 행동에도 어느 정도 ‘자유권’을 제공해야 한다는 게 그 이유였다. 그 일환으로 작위를 준 것이고.
언제 죽을지 모르는 병상의 황제를 버리고 태자에게 붙는 기존 귀족들도 있었고, 태자의 노선에 반대하며 황실과 척을 지는 귀족들도 있었다. 이럴 때 졸부라면 어떻게든 태자에게, 귀족들에게 잘 보여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해야 했다.
하지만 레이알렉시스는 사교계에, 귀족 사회에 보란 듯이 무례를 일삼고 다녔다. 저렇게 사회 분위기 파악도 못 하는 한심한 작태라니. 저런 게 귀족이 되어도 큰 문제가 될 터였다. 귀족이라는 고귀한 위신이 바닥으로 처박힐 게 분명했다.
본디 귀족이라 함은 이렇게 대놓고 신랄하게 누군가를 험담해서는 안 된다고 여기던 사람들이 레이알렉시스가 등장한 이후로는 우회적인 표현조차 하지 않고 대놓고 그녀를 비난했다.
무리들 중에 서로 사이가 안 좋은 사람들도 더러 있었으나 ‘레이알렉시스’ 앞에선 하나가 되어 그녀를 험담했다. 도마 위에 올려놓을 공공의 적이 하나 생기면서 단단히 뭉치게 된 격이었다. 귀족 사회의 작은 소란이었다.
“라미엘 루이반 님께서 오셨습니다!”
그때, 귀족 사회에 큰 소란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도착했다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라미엘 님이요? 그분도 오늘 오시는 거였나요?”
레이알렉시스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신나게 요리하던 사람들이 급히 매무새를 정돈하고 자신의 치장을 살폈다.
이윽고 연회장 안으로 온갖 시선을 받으며 한 남자가 등장했다.
라미엘 차이제임스 아틸 루이반.
눈부시게 밝은 은발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그는 금빛 눈동자를 가진 조각 같은 미남이었다. 아름다운 은발과 외모 때문에 눈에 띄는 남자는 오늘 순백의 제복까지 갖춰 입고 있어 더더욱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라미엘이 유명한 것은 비단 미모 때문만이 아니었다. 그는 고작 스물두 살에 임시 공작위를 받았다. 보통은 서른쯤에나 받는 작위를 일찍 받게 된 이유는 리담의 골칫거리였던 서쪽 변방의 마물들을 깡그리 토벌한 것에 따른 보상이었다.
황실에서 몇 년이나 고심하던 부분을 시원하게 해결했으니, 작위야 얼마든지 내릴 수 있을 터였다. 루이반 후작가는 아직 임시이긴 하나 이전처럼 공작가가 되었다. 더불어 황제는 라미엘에게 마치 새로운 성을 부여한 것처럼, ‘빛나는 자’라는 뜻의 ‘아틸’이란 말까지 붙여 부르기에 이르렀다.
라미엘 아틸 루이반. 황제가 칭송하는 영광스러운 자가 되었다는 것은 이전 루이반 후작 대의 평가가 모조리 뒤집혔다는 말이었다.
루이반 가문은 초대 황제 시절부터 존재해 황실을 도운, 그야말로 진성 정통 귀족이었다. 공작 작위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일 텐데 그에게 아틸이란 수식어까지 하사한 이유는 토벌전에서 살아남은 루이반은 고작 라미엘 한 명뿐이었기 때문이다. 루이반이라는 이름은 그 존재만으로 상징하는 바가 크기 때문에 황실에서도 특별히 신경 쓸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루이반가는 당연하게도 방대한 부를 자랑했다. 하여 라미엘은 고스란히 집안의 재산을 혼자서 차지하게 되었다. 젊은 공작인 데다가 가지고 있는 부도 막대하고, 심지어 미모까지 빼어나니 라미엘 루이반은 그야말로 모두가 노리는 최고의 신랑감이었다.
다만 그의 태생엔 약점이 하나 있기는 했다.
일부일처가 법인 리담에서 바람을 피우는 사람들은 많았으나, 애인을 만들 뿐 측실을 들이는 이는 없었다. 루이반 후작을 제외하고.
귀족 사회에서 한때 큰 소란이었던 루이반 후작의 첩이 바로 라미엘의 모친이었다.
첩의 아들이라는 태생적인 약점이 있었으나, 라미엘은 모친을 빼다 박은 아름다운 외모와 똑똑한 머리로 그 약점 자체를 희석시켰다. 거기에 착한 심성과 마물 토벌을 용감하게 해낸 명성까지. 그랬기에 그 약점은 라미엘에게 결코 흠이 되지 못했다.
다만, 리담에서 작위를 받는 것은 기혼자만 가능했는데, 그는 아직 미혼인 상태였다. 심지어 결혼을 약속한 사람조차 없었다. 한창 사교계에 데뷔하고 얼굴을 비치며 혼인 상대자를 찾는 시기는 보통 열일곱에서 열여덟 살쯤인데, 그는 이 시기에 마물 토벌전에 나가 목숨을 걸고 검을 휘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 늦은 나이에 한 사교계 데뷔지만 라미엘은 귀족 사회에서 그 누구보다 빛났고, 현재 라비던 최고의 신랑감으로 누구든 탐을 내는 대상이었다.
뒤에 후광이라도 달고 온 양 번쩍이는 라미엘의 모습에 다들 심장을 부여잡고 있을 때.
“그래도 난 지질하게 뒤에서 험담은 안 해요.”
여자들 사이를 불쑥 가르며 들린 레이알렉시스의 목소리에 몇몇은 놀라 작게 비명까지 질렀다. 라미엘의 등장으로 잠시 잊고 있던 마녀는 놀란 사람들의 얼굴에도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고귀하신 귀족들께서 졸부 집 여식을 이 큰 연회에 초대해 주신 건 감사하나…….”
말끝을 흐리는 듯했던 마녀가 다시 목소리를 키웠다.
“어? 잠깐. 이 중에 정말 귀족이신, 그러니까 ‘작위’를 받은 분이 있나요? 여자한테는 작위 안 주잖아. 그럼 다들 나랑 똑같은 수준인 거네요.”
기가 막힌 소리를 내뱉는 레이알렉시스를 보는 사람들의 눈빛엔 경악이 스며들었다. ‘똑같다’니. 저런 근본도 없는 졸부의 자식이 감히 내뱉을 소린 아니었다.
“영애. 어찌 그런 말을 하시는지.”
레이디들의 중심, 사교의 꽃, 마음씨와 외모의 아름답기가 어디 비할 데 없다는 케이틀린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마그스너 후작가의 딸로, 사랑스러운 분홍빛 머리카락에 신비로운 보랏빛 눈동자를 지닌, 인형처럼 예쁜 열여덟 살 아가씨였다.
다른 사람들이 레이알렉시스를 노골적으로 비난해도 지금까지 그녀는 동조하지 않았는데, 그런 착한 아가씨가 빙 돌려 말하지도 않고 직접적으로 입을 열었다.
‘오죽하면 저 케이틀린이 이런 말을 꺼냈을까.’
모두의 생각이었다.
“제가 한 말 중에 틀린 말은 없는 것 같습니다만.”
“맞는 말을 하더라도 상대가 거북하게 받아들인다면 안 하셔야 합니다. 영애의 말은 아주 무례하군요.”
케이틀린의 말에 레이의 귀가 번쩍 뜨였다.
‘좋아, 한 건 했다! 나보고 대놓고 무례하대! 이 기세를 몰아서 한 술 더 떠 볼까?’
아까 그 백작 영식처럼 제게 다가오는 이가 한 명도 없어야 했다. 보아하니 레이알렉시스가 버릇없고 몰상식하다는 소문이 아직 덜 퍼진 듯했다. 소문에 종지부를 찍을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하다.
‘더 재수 없어 보이게, 뼈를 치는 폭언이 뭐가 있을까.’
레이는 머리를 데굴데굴 굴렸다. 지금 이 기세를 유지해야 했다.
“맞는 말 들으시고 무례하다니. 그냥 듣기 싫으신 건 아닌지…….”
이 말은 제가 들어도 꽉 막힌, 답 없는 무뢰한 같았다. 레이는 누군가가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곧바로 다음 말을 내뱉었다.
“그저 운이 좋아 귀족 부모 밑에서 태어나 호의호식하고 있는 건데 대단한 특권인 것처럼 구는 거 좀 웃기네요. 저도 물론 부모 잘 만나 호사 누리며 살고 있지만, 그렇게 태어났으면 감사한 줄 알고 살아야지, 사람의 급을 나누는 건 아니지 않나요?”
레이의 신랄한 대사에 다들 표정을 관리하는 것도 잊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죠.”
무리 중 한 명, 케이틀린의 오른팔을 자처하는 자작가의 아가씨가 입을 열었다.
레이가 방긋 웃으며 응수했다.
“그래요? 내가 송충이라고 누가 정했는데요? 내가 송충이라면 거기 레이디께선 뭔가요? 나방? 파리?”
“말씀이 좀 심하군요. 이 자리에서, 이런 날 하실 이야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1년에 한 번, 성의 가장 큰 홀에서 수도의 귀족들 혹은 직위는 없어도 사회에 여러모로 영향력을 끼치는 사람들을 모두 모아 놓고 여는 대형 연회 날이었다.
케이틀린이 두 사람 사이를 살짝 막아섰다.
‘몸으로 막기까지 하는 걸 보니 내가 정말 잘하고 있나 보다. 좋아. 여기서 크게 간다.’
작게, 혼잣말을 하는 것처럼. 하지만 목소리를 분명하게 내서 다들 듣게 해야 한다.
“심하다니. 누가 보면 내가 사람이라도 뒤지게 패고 다니는 줄 알겠네.”
효과는 확실했다. 레이의 혼잣말 아닌 혼잣말에 주변 사람들이 경악을 했다.
“세상에, 맙소사. 내가 지금 무슨 소릴 들은 거죠?”
“어쩜, 너무 저급하네요.”
어떤 영애는 황당한 얼굴로 부채를 마구 펄럭여 댔다.
“저거 라비던 밖 빈민가에서나 쓰는 말 아닌가요?”
“저 마녀가 딱 그 수준인 거죠. 뭐, 내용물은 비슷한 것 같군요.”
수런거리는 소리를 다 들은 레이는 다시 반격을 준비했다.
“거기 영애.”
레이는 손가락으로 척, 다른 사람을 가리켰다.
“라비던 밖 빈민가를 잘 아시나 봐요? 그럼 그들이 어찌 사는지도 잘 아시겠네요. 그렇죠? 영애께선 그런 빈민들을 위해 ‘귀족’으로서 어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보였나요?”
레이의 질문에 웅성거리던 사람들 사이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거봐요. 귀족이라고 떵떵거리고 권리는 다 누리면서 의무라곤 하나도 안 지키고 있잖아요.”
“이봐요, 영애! 지금……!”
케이틀린 수호대로 유명한, 그녀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구애하는 남자 무리 중 하나가 레이에게 소리를 치려는 순간이었다.
“무슨 일이 있습니까.”
달콤하지만 결코 흘려 넘기기에 가볍지 않은, 뇌로 직접 전달되는 듯한 음성이 모두의 고막에 꽂혔다.
천사 강림.
은발 금안의 천사가 소란의 한가운데에 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