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라비던의 마녀 (2)
천사 같은 외모에 천사 같은 심성으로도 유명한 라미엘의 등장에 일촉즉발의 분위기가 한 방에 사라졌다.
영애들은 차기 공작의 눈에 들기 위해 방금 전 사건을 아무것도 아닌 양 치부했고, 영식들조차 천사의 미소에 홀려 어색한 표정을 풀었다.
라미엘은 자기 자신의 위치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소란이 있는 곳으로 ‘직접’ 와서 무슨 일이냐 물은 것이겠지. 그 덕분에 더 이상 독설가, 무례한 레이알렉시스가 설치지는 못했지만.
“후후. 나 오늘 꽤 괜찮았다.”
레이에겐 만족스러운 하루였다. 오늘 오전부터 천사 강림 전까지 그녀는 바지런히 연회장을 돌아다니며 사람들에게 시비를 걸었다.
“내가 생각해도 아침부터 나 진짜 재수 없었어.”
마치 영화 속에 나오는 악당 오른팔의 왼팔쯤 되는 사람 같았다고 할까.
레이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연회장의 커다란 창밖으로 연결된 테라스로 나와 혼자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이제 이 정도면 괜찮겠지?”
사람들의 경멸 어린 시선을 보니 계획은 아주 잘 진행되고 있는 듯싶다. 1년에 한 번 있는 대형 연회에서 그렇게 막말을 흩뿌리고 다녔으니 앞으로 이런저런 연회나 파티 따위에 부모님이 저를 밀어 넣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소문의 그 천사님, 라미엘까지 실제로 봤으니 오늘은 가히 최고의 업적을 달성한 날이다.
‘이름도 어쩜 라미엘이야. 이름부터 천사 같은데 실물, 미친. 소문보다 오조 오억 배는 더 잘생겼어.’
“잘했어. 레이알렉시스, 너 아주 오늘 최고였다.”
레이가 뿌듯하게 자화자찬을 했다.
***
르아넬로가의 장녀가 이상했다.
고열로 앓아누웠던 레이알렉시스는 기어이 정신을 잃고 말았다.
가족들의 눈물, 걱정 속에서 나흘 만에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180도 다른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가 커질 일이 생겨도 조용히 자리를 회피할 뿐이었던 온순한 성격의 레이는 병이 낫자마자 약혼자를 뻥 차 버리는 기행을 저질렀다.
그뿐인가. 제게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며 가족들과 신경전을 벌이는 것도 모자라, 여기저기서 사람들과 다투고 다녔다.
“존맛. 이거 미쳤네.”
가끔 알아들을 수 없는 이상한 소리를 하는 것은 덤이었다.
기간산업으로 큰돈을 번 졸부들은 귀족을 견제하려는 황실의 비호를 등에 업고 나날이 성장하며 ‘신흥 귀족’이라는 칭호까지 얻어 냈다.
물론 진짜 작위를 받은 귀족은 아니었으나, 태자가 귀족 세력을 억누르고 황권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에게 실제로 작위를 내리려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인다는 점에서 이미 준귀족이나 다름없었다.
오늘내일하는 황제를 대신해 태자가 정사를 보게 된 지도 벌써 1년 가까이 되었다. 그동안 태자는 자신의 세력을 키워 왔고, 그 일환 중 하나가 졸부들과의 결합이었다.
이 신흥 귀족들은 막대한 부와 더불어 명예까지 손에 넣고 싶어 했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태자를 지지했고, 또 다른 방편으로 가난해서 파산에 이른 귀족들에게 접근해 작위를 돈으로 사는 불법적인 일도 저지르곤 했다. 그보다 더 보편적이면서 합법적인 방법은 귀족과 혼인 관계를 맺어 명예를 얻는 것이었다.
르아넬로가 역시 이런 졸부 가문 중의 하나였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방대한 땅은 그 어떠한 자원도 없는 불모지였다. 나오는 거라곤 하등 쓸모도 없는 속 빈 마력석뿐, 땅만 많은 집안으로 유명했다.
그런데 넓은 땅덩이에서 검은 물이 나오면서 한순간에 르아넬로의 이름이 리담에 널리 알려졌다.
리담은 수도인 라비던을 기점으로 크게 여덟 개의 도시로 나누어진, 이누아라는 대륙에 있는 나라였다. 현 황제 가문이 이누아에 존재하던 여덟 개의 나라를 하나로 통일하며 지금의 리담을 탄생시켰다.
라비던에 있는 황실에서 황제와 그 일가가 거주하고, 기사들과 황실 소속 마법사들이 황제와 성을 지켰다. 마력을 이용해 특정 지역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는 황실에서 관리했는데, 황족에게 허가를 받아야만 사용 가능한 최단 시간의 이동 수단이었다.
그다음으로 빠른 것이 열차였다. 철로가 놓이면서 물자 수송 비용이 현저하게 줄었고 게이트를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비교적 짧은 시간 내 수도를 오갈 수 있게 되었다.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으로 리담은 전에 없던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고, 철도 사업이 크게 부흥했다.
물론 이러한 기반 사업의 최종 승인자는 황실이었다. 그래서 철도 관련 회사들은 어떻게든 황실에 연줄을 대기 바빴다. 열차 연료로는 석유와 마력석이 사용되는데, 마력석은 화력이 좋으나 가격이 몹시 비싸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에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검은 물, 석유가 대체제로 떠오른 것이다. 지금에 와서는 리담 석유 생산의 절반 이상을 르아넬로가에서 담당하고 있으니 그 부의 크기는 가히 엄청났다.
다만 수도의 귀족들은 아직도 석유를 대단찮게 여기고 있었다. 여러 기간산업으로 자신들을 위협하는 졸부의 대부분이 그 원동력으로 석유를 이용한다는 점 때문에 더더욱 그러했다.
그런 신흥 귀족을 본래의 구 귀족들이 좋아할 리는 없었다. 그들은 결코 졸부들을 신흥 ‘귀족’이라 부르지 않았고, 그들과 결탁하는 것을 돈에 명예를 팔았다며 수치로 여겼다.
이런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어렵게 백작가의 차남과 장녀의 약혼을 성사시켰는데, 레이가 그야말로 그 약혼자를 뻥 차 버릴 줄이야. 르아넬로 부부는 상상도 못 했다.
죽을 고비를 넘기고 겨우 눈을 뜨더니 투신을 하려고 하고, 곧이어 약혼자에게 모욕을 주며 파혼을 통보한 딸에게 부부는 결혼 소리를 꺼낼 수조차 없었다.
물론 레이는 결혼하기 싫어서 그랬다고 말한 적이 없었다. 대체 왜 그랬냐는 질문에 실수라고 말했지만 부부가 보기에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실수가 아니었다. 회복 직후 파혼부터 하는 걸 보고 그럴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었다.
레이의 자살 기도는 가문의 극비 사항이었다. 부부와 처음 발견한 하녀 외에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없었다. 심약하고 소심한 르아넬로가의 수장 오스카는 이 일로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고 일주일을 앓아누웠다.
그 후 레이는 조용히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고, 이것으로 파혼의 충격을 상쇄하려는 듯했다. 그리고 레이가 르아넬로가 사업에 끼어든 이후, 남들 뒤만 좇아 겨우겨우 체면이나 유지하던 열차 사업이 최근 점점 좋은 평가를 받고 있어 슬쩍 무마가 되어 가는 중이다.
딸이 파혼을 한 지도 벌써 3개월이 지났다. 그때도 신랑감을 찾느라 혼기를 놓쳤지만 어렵게 성사시킨 것인데, 다시 혼처를 찾을 생각을 하려니 오스카는 골치가 아팠다.
그런데 이 와중에 딸은 미친 건지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다니며 난동을 부리고 있었다. 그때의 고열이 뇌를 끓여 버린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호되게 앓은 이후 레이는 사람이 바뀌기라도 한 것처럼 굴었다.
그 와중에 가장 기가 막힌 건 결혼을 안 하겠다고 버티고 있다는 점이었다. 정확히는 본인의 결혼은 본인이 알아서 할 테니 내버려 두라고 했지만 레이의 나이를 생각하면 절대 그럴 수가 없었다.
레이알렉시스 아르히 다 시즈 르아넬로는 올해 스물네 살의, 이제는 결혼 시장에 떨이로라도 팔아 치워야 하는 처지가 되어 버렸다.
그러나 이 상황에서 가장 큰 문제는 딸이 또 위험한 선택을 할까 두려워 예전처럼 적극적으로 결혼을 밀어붙일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하여 르아넬로 부부는 강수를 두었다. 대연회에 오스카 대신 레이를 보내기로 한 것이다. 소심한 오스카는 도저히 이런 큰 연회에 나설 수 없을 것 같다는 이유로 몸져누운 척하기로 하고, 부인 에이나는 남편 병간호를 핑계로 빠지고 대타로 장녀를 참석시켰다.
다행히 부부의 장점만을 닮아 어여쁘기 그지없는 얼굴을 어떻게든 어필시키기 위해 르아넬로 가문은 열성을 다해 레이를 치장해서 황실로 보냈다.
그리고 아름다운 레이알렉시스는 그 기회를 아주 잘 써먹었다. 웬만한 결혼 상대자가 모두 모였다고 볼 수 있는 황실 대연회에서 거하게 깽판을 쳐 놓은 것이다. 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이 정도로 난리 부렸으니 나한테 결혼하란 말 절대 못 하겠지?”
누가 라비던의 마녀와 결혼을 하고 싶어 하겠는가. 돈이 아무리 중하다고 해도 귀족들은 평판이란 것을 가장 중시했다. 그렇기에 돈만 많고 평이 나쁜 자신에게 혼담이 들어올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분 상승을 꿈꾸는 명예욕 쩌는 어머니가 나를 귀족 아닌 자와 결혼시킬 리는 없을 테고.’
레이의 계획은 간단했다. 쭉정이 같은 남자를 찾아 눈속임용 결혼을 하고 얼른 이혼해 버린 뒤 라비던을 훌쩍 떠나는 것이었다.
엄격한 신분제는 수도에 한정된 이야기였다. 물론, 수도 외 도시에도 신분제가 있긴 있으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직업이 있어 생업에 종사하다 보니 신분에 크게 구애받지 않았다. 즉, 수도에 비해 계층 간 고정화가 그리 심하지 않다는 이야기다.
특히 소도시의 지도자인 집정관은 신분이 아닌, 주민들의 추천을 받은 자가 오르는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 때문에 수도와는 달리 여성도 어느 정도 정치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다. 평판, 즉 ‘여론’이 집정관이 되는 데 중요한 요소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비록 아직까지 여성 집정관은 없었지만, 여성도 정치 사회적인 여론 형성에 기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수도보다 나았다.
레이는 인생 목표를 낙향으로 잡았다. 한국에서 이미 너무 많은 것을 겪은 그녀는 몸은 리담으로 돌아왔지만, 삶의 방식마저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을 얻은 지금, 레이의 목표는 자신의 취향에 맞고 살기 좋아 보이는 도시로 가서 ‘혼자’ 사는 것이다.
결혼을 당연시 여기는 리담의 사회 분위기를 바꾸겠다는 거창한 목표는 엄두가 나지 않았기에, 제대로 된 결혼을 피하려고 어깃장을 놓고 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도 결혼하려고 하지 않는 여자.
이 얼마나 멋진 타이틀인가!
“그 온화한 케이틀린을 열 받게 만들었으니, 대성공이지. 미안해요, 다들. 뭐, 아주 본심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부터 좀 살아야지.”
그리 심한 말한 것도 아니었잖아? 오늘부로 난 아마 사교계에서 제명될지도 모르니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야.
‘앞으로 동생인 피아나가 사교계에 데뷔하면 부모님은 피아나를 통해 신분 상승을 하려고 할 테니까 난 빠져도 되겠지?’
피아나를 제물 삼는 것 같아 마음속 양심이 쿡쿡 찔렸지만 또 다른 자아가 일단 ‘나부터 살고 봐야지, 괜찮다.’ 하고 레이를 달랬다.
“이제 난 개도 안 데려갈 거야.”
심지어 그 자리엔 천사님도 있었다. 레이가 뿌듯하게 오늘의 성과를 다시금 곱씹고 있을 때였다.
“훗.”
뒤쪽에서 아주 작게 웃음소리가 들렸다.
‘여기엔 분명 아무도 없었는데!’
레이는 놀라서 뒤를 돌았다. 그리고 예상 밖의 광경에 놀라 휘청거렸다.
“어, 어어…….”
쓰러지려는 레이를 붙잡아 준 것은 사교계의 천사, 라미엘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니 절로 말이 떨려 나오는 미모였다. 푸른빛이 돌 정도로 맑은 은발 아래로 최상급 금을 녹여 만든 것 같은 눈동자가 레이를 바라보고 있었다. 연회장에서 봤을 때 반짝이던 게 화려한 조명 때문인 줄 알았는데 라미엘 본인의 자체 발광인 듯했다.
‘도련님처럼 곱게 잘생긴 사람이 마물 토벌이라니.’
이 남자는 신이 존재하는 온갖 좋은 것을 다 들이부어 정성을 다해 빚어낸 사람 같았다.
“만찬에 참석하시지 않고 왜 여기 혼자 계십니까?”
유주가 이런 목소리를 뭐라고 했더라. 은쟁반을 구르는 옥구슬 소리였나? 들어 본 적은 없지만 필시 그것보다 더 좋을 게 분명했다. 심지어 귀족이 아닌 제게 건네는 말투도 정중했다.
성인 남성의 낮은 목소리가 부드럽게 귓가를 스치자, 왠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어서 레이는 슬쩍 제 귀를 문질렀다. 아까와는 달리 아무 잡음 없이 다이렉트로 고막에 꽂히는 천사의 음성은 놀랍도록 찬란했다.
“왜 저렇게 많이 먹느냐고 사람들이 쪼아 대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요.”
그릇 위 여백을 미덕으로 여기는 귀족들에게 빈틈없이 빼곡히 들어찬 레이의 접시는 그야말로 탐욕의 상징으로 보였을 것이다. 두 번, 세 번 뜨는 게 귀찮아서 한 번에 담은 것뿐인데. 그래서 아예 음식을 연회장 밖, 테라스로 가지고 나와서 혼자 즐기던 중이었다.
자신을 욕하는 눈빛도, 듣기 싫은 소리도 없이 연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을 배경 삼아 잘 가꿔진 정원을 바라보며 먹는 저녁은 꿀맛이었다. 거기에 더불어 오늘의 성과 셀프 칭찬도 좀 하고.
레이의 거침없는 대답에 라미엘이 미소를 지었다.
‘어라? 방금…….’
천사님 미소가 좀 싸했던 것 같은데. 아닌가. 착각인가?
“라미엘 님은 왜 여기 계십니까?”
“음, 조금 쉬고 싶어서?”
놀러 오는 연회장에서 ‘쉬고 싶다’는 표현이 나오다니. 인기남의 비애였다.
사람 상대하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웃고만 있는 것도 기력이 빠진다. 여기저기서 찾아오는 사람들 상대로 웃으며 몇 마디만 해도 에너지가 몽땅 빨릴 터였다. 특히나 말 한마디로 전쟁을 치르는 수도 사교계이니만큼 더더욱.
‘하필이면 쉬려고 나온 곳에 마녀가 떡하니 버티고 있으니 잠깐 살벌한 미소가 흘러나온 거겠지.’
그에게 지은 죄는 없으나 갑자기 마음이 불편해졌다. 식사도 다 마쳤겠다, 고해성사 및 자화자찬도 했겠다, 레이는 자리를 비켜 주려고 했다.
“그럼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라미엘을 스쳐 지나가려는데 그가 물었다.
“결혼, 안 할 겁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