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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4화 (4/160)

4화. 라비던의 천사 (1)

“결혼, 안 할 겁니까?”

예상치도 못한 질문에 레이의 걸음이 멈췄다.

라비던에서 결혼을 안 하겠다는 여자는, 과장을 조금 보태면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과 비슷한 눈총을 받았다.

아무리 악명을 높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지만, 이런 소문은 곤란했다. 가문에 해를 끼치는 종류의 소문이 퍼지면, 제 발로 나가기 전에 집안에서 빈손으로 쫓겨날 확률이 높다.

“……결혼, 할 건데요.”

레이는 지진이라도 난 것 같은 눈동자로 라미엘을 보며 대답했다.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갑자기 그건 왜 물으시는지…….”

악담을 퍼붓는 무례한 마녀 레이알렉시스의 어투가 눈에 띄게 조심스러워졌다.

“방금 전, ‘나한테 결혼하란 말 절대 못 하겠지?’ 이 말이 제 귀엔 영애가 결혼 안 하겠다는 소리로 들렸습니다.”

라미엘의 대답에 그녀의 동공에 일어난 지진이 한층 더 거세졌다. 너무 놀란 나머지,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리던 레이가 더듬더듬 물었다.

“그, 저기, 그러니까, 그게……. 라미엘 님, 언제부터 여기 계셨나요?”

“아마, ‘아침부터 나 진짜 재수 없었어.’ 여기부터?”

테라스에서의 식사를 끝낸 직후부터 있었다는 말이다. 레이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었다. 보통 당황스러운 것이 아니었다.

“마그스너 영애께 미안하다, 이제 난 개도…….”

“그, 그만! 그만하세요!”

그다음 대사가 천사님의 입에서 쏟아져 나오기라도 할까 레이는 급히 라미엘의 말을 잘랐다. 대체 사람이 무슨 기척도 없이 나와서 이렇게 허를 찌른단 말인가.

“결혼을 왜 안 하실 건지, 물어봐도 될까요?”

“벌써 물어봐 놓고 뭘……. 헙.”

레이가 제 입을 턱 막았다. 하루 종일 머릿속에서 필터링을 거치지 않고 하고픈 말, 막말을 있는 대로 다 하고 다녔더니 그만 본심이 흘러나와 버렸다.

“시, 실례가 많았습니다.”

당황한 레이는 저도 모르게 꾸벅 고개를 숙이는, 리담에 존재하지도 않는 인사를 하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다급히 테라스를 벗어났다.

뒤에서 라미엘이 자신을 부른 것 같았지만 과감히 무시하고 그저 앞만 보고 달렸다.

뭔가 느낌이 좋지 않았다.

***

라미엘 차이제임스 아틸 루이반.

루이반 후작가의 유일한 후계이며 예비 공작인 그는 요즘 초조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기혼자가 아니면 작위를 받을 수 없다니.’

리담의 법은 쓰레기였다. 법을 바꿔 버리고 싶지만 개정안을 낼 수 있는 자는 황실과 귀족뿐이었기에, 그러려면 귀족이 되어야 했다. 라미엘의 미간에 깊게 주름이 잡혔다.

얼마 전, 저택으로 찾아와 작위를 받을 수 있게 계약 결혼을 해 주겠다던 여자는 처음과 달리 라미엘의 마음을 요구하며 난동을 부렸다. 사전에 철저히 검증을 거쳐 계약하게 된 여자였음에도 내면에 숨겨진 광기는 알아낼 수가 없었다.

정확히는 제 작위를 들먹이며 계약을 걸어오는 여자니 보통 정신머리는 아닐 거라 생각했음에도 눈빛에 살짝 보이던 광기를 무시한 게 화근이었다. 라미엘에게 조금씩 집착을 보이던 여자는 계약 위반을 통보받던 날, 자신이 가질 수 없다면 누구에게도 당신을 뺏길 수 없다며 단검을 휘두르다 루이반 저택 지하에 구금되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라미엘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겠다며 그를 죽이려던 칼로 자신의 손목을 그어 싸늘한 주검이 되었다. 그녀는 죽음으로 그의 마음에 남겠다 했지만, 애석하게도 라미엘은 광기로 죽어 간 여자의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했다. 그저 ‘작위 승계 과정에 소동이 있었다.’라고만 기억할 뿐이었다.

결혼, 아이, 가정 같은 건 라미엘에게 있어 가장 쓸모없고 관심 없는 분야였다.

태어나는 순간부터 모친을 제외한 주변의 모두가 적이었다. 왜 모친이 저택 안에서 숨어 사는지, 어째서 형들이 자신을 죽일 듯 미워하는지를 깨닫게 되었을 때부터 그는 ‘가족’이란 것이 주는 애정과 애착에 대한 기대를 버렸다.

그러다 보니 쓸데없는 짐만 얹게 되는 결혼에도 회의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에게 결혼이란 거추장스럽고 불편하고 안 하느니만 못한 것이었다.

토벌전에서 일가가 전부 죽어 버려 가문의 모든 것을 삼키게 되었을 때, 그는 인생의 큰 숙제가 해결된 기분을 느꼈다. 언젠가 제거해 버리겠다 마음먹었던 걸림돌들이 이렇게나 일찍 없어지게 될 줄은 그도 예상하지 못했다. 작위라는 또 다른 숙제가 남겨질 줄도 몰랐지만.

힘든 토벌전을 치렀고, 그 때문에 가족들을 모두 잃어 심적으로 당분간은 결혼 생각을 할 수 없다는 것은 대외적으로 좋은 핑계가 되었다.

그렇게 임시로 공작위를 받게 된 지 1년. 이쯤이면 정식으로 작위를 내려 줄 법도 한데, 황제는 그놈의 법 타령을 하면서 약혼이라도 하고 오라며 라미엘을 떠밀었다.

“법을 들먹이는 걸 보니 오늘내일하는 사람치곤 제정신이네요.”

크레하가 손가락으로 귓구멍을 쑤시며 말했다. 그 경박한 언행을 집사인 윌포프는 질색했지만, 크레하를 제재할 그는 현재 이 방에 없었다.

“조사한 건?”

크레하가 윌포프가 두고 간 서류를 내밀었다. 라미엘은 서류에서 르아넬로에 관한 것만 빼내고 다른 것은 옆으로 치웠다.

르아넬로 하나만 짚어 알아 오라고 하면 눈치 빠른 집사는 주인이 하려는 일을 알아챌 수도 있어, 눈속임 차원으로 귀족뿐만 아니라 귀족이 아닌 웬만한 가문도 포함해 결혼 적령기 여식이 있는 가문에 대한 조사를 맡긴 참이었다.

서류에는 여러 가문을 조사하라고 한 것치곤 제법 세세한 내용까지 담겨 있었다.

“……석유왕이라.”

레이알렉시스의 부친, 오스카 르아넬로의 별명이었다. 그가 그리 불러 달라 한 게 아니라 사람들이 그리 부르고 있다고는 하나, 왕이라는 칭호가 붙었다는 점에서 자칫 꼬투리라도 잡히면 반역죄로도 몰리기 쉬울 터였다.

‘이런 것 하나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맹한 사업주라.’

지금이야 솟아나는 석유로 돈을 긁어모은다고 하지만 이렇게 감이 떨어지면 조만간 머리 좋은 사기꾼들에게 다 털릴 터였다. 최근 경향을 보니 새로 사람을 구한 건지 정신을 차린 듯하지만, 그게 얼마나 갈지는 현재로선 미지수다.

갑작스레 불어난 재산을 사치 부리는 데에만 쓰는 부인 에이나와 마녀로 악명이 높은 장녀 레이알렉시스, 그리고 이제 열두 살이 되는 막내딸 피아나까지. 르아넬로 가문은 대단한 재산 규모만 빼면 지극히도 평범한 졸부 집안이었다.

***

마차에서 내리기 직전 라미엘은 한 손으로 가볍게 얼굴을 문질렀다. 앞으로 몇 시간을 인형처럼 웃어야 하니, 지금 잘 풀어 두지 않으면 나중에 얼굴 근육이 꽤나 뻐근해지기 때문에 약간의 준비가 필요했다.

지난여름 연회 때 고생했던 걸 떠올리면 두통이 생길 지경이었다. 평생 웃어 본 걸 다 합쳐도 반나절이 안 될 것 같은데 하루 내내 미소를 띠고 있어야 했다. 최대한 자연스레 웃느라 정신력 소모도 상당했던 기억이 떠오르자 억지로 지어 내려던 미소마저 싹 사라졌다.

대연회장에 아직 도착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피곤했다.

“라미엘 루이반 님께서 오셨습니다!”

자신의 입장을 알리는 소리가 들리자 벌써부터 내부가 술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라미엘은 속으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겉으로는 그 누구보다 화사하게 웃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공작.”

연회장에 들어선 라미엘을 가장 먼저 반긴 건 아이러니하게도 루이반을 탐탁잖게 여기는 사람 중 으뜸인 메르혼 후작이었다. 그를 필두로 그와 뜻을 같이하는 자들이 몰려와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메르혼 후작.”

“앞으로 연회에는 계속 참가하실 겁니까.”

“공작이 오니 분위기가 화사해집니다. 허허허.”

“이번에도 혼자 오시다니요.”

─네가 어쩐 일로 연회를 두 번이나 연속으로 참가하냐.

─마물만 잡던 짐승 새끼가 여기 계속 올 수 있겠어?

─왔으면 꽃처럼 굴다가 가.

─작위도 없는데 무슨 공작이야.

─피 냄새 때문에 레이디들이 접근도 못 하는 거 아닌가. 그렇지 않고서야 ‘그 루이반’이 아직 약혼도 못 할 리가.

─역시 서자여서 전대 후작이 제대로 안 돌봤던 게 분명해.

─맞아.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여태 혼자겠어.

─이래서야 가문의 정식 후계자라고 할 수 있나?

따뜻하고 고운 인사말 뒤로는 다들 날카로운 속내를 품고 있다. 저들의 인사말은 필시 이런 뜻을 내포하고 있는 중이었다.

지난 연회에서 혜성처럼 등장해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은 라미엘 루이반. 겉으로는 모두에게 찬사를 받았지만 그들의 속내까지 같다고는 할 수 없었다.

여느 제국민과 다르다는, 귀한 핏줄임을 강조하는 귀족 사회였기에 그의 출신을 흠으로 느끼는 사람들 또한 존재했다. 토벌전에서 세운 공 때문에 차마 대놓고 내색을 하지 못할 뿐이었다.

사교계에서 여자들만 소리 없는 전쟁을 하는 건 아니었다. 남자들은 뒤로 빠지는 듯 보여도 비슷한 뜻을 가진 이들끼리 뭉쳐 소문을 만들곤 했다. 그런 이들이 먼저 친절한 척 웃으며 다가와 건넨 모든 인사말이 저를 향한 공격이나 다름없다는 걸 알면서도 라미엘은 모르는 척했다.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귀족들의 대화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배배 꼬여 있어, 대답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상대의 언사에 숨겨진 진심을 모르면 속뜻도 모르는 머저리가 되고, 잘 알아들었다면 비슷한 수준의 말로 받아쳐야 했다. 하나 상대가 설령 저를 공격했다 하더라도 그를 인지하지 못한 척도 해야 한다.

“말씀대로 가족과 대연회에 함께 오지 못해 마음이 많이 아픕니다.”

잠시 미소를 지우고 라미엘은 처연한 표정을 지었다. ‘혼자’ 왔냐는 건 신분, 처지, 그를 둘러싼 모든 상황을 비꼬는 말이었는데 이를 순수하게 호의적 인사로 받아들이고 죽은 가족을 그리는 모습을 보인 것이다.

한순간에 분위기가 달라졌다. 연회장의 모두가 주목하고 있는 중이다. 몇 년의 고생스러운 토벌전에 가족까지 잃은 자를 공격한다는 인상을 주게 되면, 인간쓰레기로 매장되는 건 메르혼 무리가 된다. 라미엘의 순순하고 우아한 답인사 한 번에 오히려 그를 얕잡던 사람들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당황했다.

“……그렇지요. 워낙 고생을 많이 하셨던 것 압니다.”

메르혼의 무리 틈으로 라미엘 루이반과 친분을 쌓고자 했던 우호적인 사람들이 끼어들었다.

“이번 연회에 참석하시지 않을까 봐 걱정한 분들이 많았는데 이리 오셔서 다행입니다.”

“워낙 다망하시니 말입니다.”

라미엘과 교류를 원하는 자들, 그를 영웅시하며 토벌전 이야기를 듣고 싶어 하는 자들이 메르혼 무리가 빠지는 자리를 빠르게 메꿨다.

연회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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