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5화 (5/160)

5화. 라비던의 천사 (2)

“앗.”

“괜찮으십니까.”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구석에서 조용히 술만 마시고 있던 영애였다. 연회 내내 겉돌기만 하던, 이름 외우는 하인들조차도 누군지 모르던 이였다.

석유를 공급받아 각 업체에 보내는 중개인 집안의 딸, 헤일런이었다. 각계의 인사들을 모두 초청하는 대연회인 만큼 곳곳의 인물들이 초대되었다는 방증이었다.

“가, 감사합니다.”

헤일런이 취기에 비틀거리는 걸 본 라미엘이 조용히 다가가 부축했다.

“영애, 가족분들은 어디 계십니까?”

라미엘의 말에 헤일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대연회에 초대받았을 때만 해도 온 가족이 기뻐했다. 그녀의 가족들을 보는 주변의 시선은 항상 싸늘했었다. 돈도 없는 것들이 남의 부를 시기 질투하며 욕하는 걸 듣는 게 지긋지긋했는데 한 방에 보상을 받은 기분이었다.

잘만 하면 연회에서 헤일런의 짝을 찾게 될 수도 있고, 그렇다면 자신들도 귀족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우리는 조만간 당신들이 얼굴도 못 쳐다볼 신분이 될 거요. 지금처럼 오만방자하게 굴면 무사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헤일런의 가족들은 급기야 이런 말을 하기에 이르렀다. 그렇게 그들은 꿈에 들뜬 채 귀족들에게 절대 기죽지 않도록 철저히 준비를 했다.

대연회 초대는커녕 황실 구경 한 번 못 해 본 동네 사람들을 잔뜩 비웃어 주며 드디어 연회장에, 황실에 입성했지만…….

그들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단박에 기가 죽고 말았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건 이쪽도 지지 않았다. 그야말로 몇 달을 매달려 준비했으니까. 하나 아무리 겉모습을 완벽히 치장하고 준비한다고 해도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다.

귀족의 인사는 악의로 가득 차 있다는 말에 받아칠 준비도 다 해 왔지만, 정작 그 인사를 누구에게도 받지 못했다. 눈이 마주치면 가볍게 웃으며 눈인사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먼저 인사를 하고 자신을 소개하며 무리에 있으려 했지만 대화 수준이 달라 오래 어울리기 힘들었다.

범접할 수 없는 분위기에 헤일런 가족은 돈만 믿고 뻐기며 살아온 자신들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깨달았다.

그렇게 자존심이 팍삭 무너진 부부는 휴게실로 도망치듯 몸을 피했다. 그 와중에도 딸을 귀족에게 시집보내겠다는 욕심은 버리지 못하고, 헤일런만은 절대 따라오지 못하게 막았다.

그리고 그 후 계속 이런 상황이었다. 헤일런 혼자 구석에서 술만 마시게 된 상황.

“네? 아, 지, 지금 잠시 휴게실에…….”

모든 이들이 루이반 공작 근처에서 말 한마디라도 걸어 보려 애쓰는 게 보였다. 등장 이후 연회의 중심을 차지한 이였고, 애석하게도 자신은 그와 평생 말 한 번 못 해 볼 것이란 걸 알았다. 자존심이 여기서 한 번 더 상했다.

아마 저런 남자는 성격이 개차반일 것이라고 애써 정신 승리를 하고 있는데, 그런 헤일런에게 라미엘이 와서 말을 걸고 있는 것이었다. 심지어 가족들까지 언급해 주었다. 이곳의 그 누구도 자신이 누군지, 누구와 왔는지 모르는데 이 대단한 남자가 그걸 알아주었다.

‘외모만 멋진 게 아니라 성격까지도 천사 같구나.’

헤일런의 부서진 자존심이 순식간에 회복되었다.

“술이 조금 과한 것 같은데 영애도 가족분들과 함께 조금 쉬는 편이 좋겠습니다.”

“어? 엇, 저기, 잠깐만요.”

라미엘은 다시 연회장 한가운데로 돌아가려 했다.

‘이대로 돌아간다고? 나한테 반한 게 아냐? 그게 아니라면 구석에 있는 날 찾아온 이유가 어디 있어?’

인근에서 꽤나 예쁘다고 소문난 헤일런이다. 그런 자신이 잔뜩 꾸미고 오기까지 했으니 저 공작의 눈에 든 것이라 생각했다.

“무슨 일이신지.”

라미엘이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세상에 이렇게 잘생긴 인간이 존재한다니.’

눈이 멀 것 같은 미인이 자신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것과 술기운이 더해져 용기가 솟았다.

“그, 그게, 제가 좀 어지러워서…….”

“휴게실까지 영애를 에스코트할 기사를 불러 드리죠.”

“네? 지, 직접 해 주시…….”

헤일런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라미엘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저 사람 지금 루이반 공작께 직접 데려다 달라고 하려던 거예요?”

“설마요. 그렇게 정신이 나갔으려고.”

“마그스너 영애가 그랬어도 난리가 났을 텐데 저런 분이 어찌…….”

“라미엘 님이니 그냥 넘어간 거지, 다른 분이었다면. 어휴.”

“한바탕 난리가 났겠죠.”

주변에서 수군대는 소리에 헤일런은 술이 다 깨는 기분이었다.

에스코트 요청은 신분이 높은 쪽에서 먼저 해야 하는 일이다. 특히나 미혼 남녀 간은 더더욱. 외양은 철저하게 꾸몄지만 수도의 예의에 대해서는 준비할 생각도 하지 못한 헤일런의 큰 실수였다.

“무례하기가 마녀에 이를 데 없네요.”

“아, 그 마녀. 저쪽을 보니 또 싸우고 있나 봐요.”

“라미엘 님께서 가서 말리시려나 봐요. 어쩜 이런 것과 저런 일까지 다 신경을 써 주실까요.”

“그러게요. 웬만하면 다 무시하고 말 일들인데.”

헤일런은 라미엘이 불러 준 기사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황급히 휴게실로 사라졌다. 창피해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

“후.”

라미엘이 장갑을 벗어 던졌다. 아까부터 치워 버리고 싶었다. 수많은 사람과 악수하고 접촉하던 게 떠올라 보기만 해도 피곤해지는 장갑.

라미엘은 사람들의 눈을 피해 겨우 테라스로 몸을 숨긴 참이었다. 어딜 가나 시선이 따라붙었기 때문에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혼자 쉴 수 있는 때를 찾기가 어려웠다. 정말 힘들게 얻은 휴식이었다.

대연회 내내 여기저기 다니며 연회장 내 온갖 군상들을 상대했다. 심지어 아무도 건드리지 않는 사람까지 기억하고 찾아내 얼굴을 비쳤다. 피곤한 대신 이미지는 더욱 확고해졌고 그의 핏줄을 들먹이던 것들도 절반 이상은 회유되어 넘어왔다.

‘이 정도면 됐다.’

그의 얼굴에 있던 천사 같은 미소가 씻은 듯 사라졌고 딱딱하게 굳은, 무감정한 얼굴이 드러났다. 오래 쉴 수도 없다. 분명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찾는 사람들이 생길 테니 길어야 15분 정도일 것이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숨 돌릴 곳을 찾아 다행이었다. 딱 미치기 직전이었으니까.

그런데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한 공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로 난리 부렸으니 나한테 결혼하란 말 절대 못 하겠지?”

방금 전까지 다른 이들과 맹렬히 싸우던 여자의 목소리였다. 순식간에 짜증이 솟구치는데, 그녀가 뱉은 문장 중 한 마디가 귓가에 울렸다.

“결혼하란 말 절대 못 하겠지?”

“그 온화한 케이틀린을 열 받게 만들었으니, 대성공이지. 미안해요, 다들. 뭐, 아주 본심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부터 좀 살아야지.”

여자는 혼자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본심을 주절거리고 있었다.

“이제 난 개도 안 데려갈 거야.”

예상치 못한 곳에서 괜찮은 수를 찾은 듯해 절로 웃음이 나왔다.

***

레이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미엘을 보며 어벙한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연회 기간 내내 저 천사님을 피해 다니느라 거의 구석진 곳에만 처박혀 있었건만. 연회가 끝나고 이렇게 집으로 떡하니 찾아올 거라곤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아니, 그 라미엘 루이반이 르아넬로가에 올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냐고.’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방문이었다. 대체 이 남자가 왜 여길?

‘혹시 연회 때 나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

아무리 라미엘이라 할지라도 껄끄러운 것은 껄끄러운 것. 지금 이 상황이 레이에겐 적잖이 불편했다.

‘설마 그때 부르는 걸 쌩까고 그냥 간 거 때문에? 아냐. 저 매너, 성격 좋기로 소문난 천사가 그런 사소한 거 때문에 집에까지 찾아올 일이 뭐가 있어?’

라미엘이 와서 좋은 점이라곤 다들 르아넬로 집안을 욕한다는 소식을 들은 모친이 연회에서 집안 망신을 제대로 시키고 왔다며 퍼붓던 잔소리를 뚝 멈춘 것뿐이었다.

자살 미수 사건 이후 딸아이 잘못될까 내내 눈치 보며 싫은 소리 한 번 못 하던 부모님이었다. 그런데 대연회에서 제대로 마녀로 낙인 찍혀 온 사실을 알고 간만에 그간 참아 왔던 불을 뿜는 중이었다.

“저어기…….”

레이가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라미엘이 있는 응접실은 기이할 정도로 고요에 휩싸여 있었다. 수도에 소문이 자자한 그를 실제로 한번 보려고 집안 시종들이 기웃거리는 기색 외에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두 사람의 분위기는 주변의 그런 조용한 소란과는 사뭇 달랐다.

“……절 만나려 하셨다고요.”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이며 주변에 시선을 툭 던졌다. 그걸 인식한 레이가 주변인들을 모두 물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영애께 계약을 하나 제안하고자 합니다.”

“사업 이야기는 저의 부친과 나누셔야 할 텐데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픽 웃음을 흘렸다.

“르아넬로의 가업과는 상관없는 이야기입니다만.”

사업에 관한 일도 아니라면 대체 무슨 볼일인지 상상이 되질 않았다. 정말로 지난 연회 때, 부름을 무시했던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아 여기까지 직접 찾아온 거라면 너무 속 좁은 것 아닐까.

“그럼 라미엘 님은 무슨 일로 여길 오셨습니까?”

“영애와 결혼을 하고자 합니다.”

레이는 방금 제가 제대로 들었는지, 제 귀가 잘못된 건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라고요?”

“결혼 제안을 했습니다만.”

“누가요?”

“제가요.”

“누, 누구랑요?”

“레이알렉시스, 당신.”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결혼을 원하는 귀족은 자신의 초상화를 상대에게 보내고 혼인 의사를 묻는 게 기본이었다. 초상화에 자신과 가문에 대한 설명을 달아서 보낸 후 이에 상대가 응하면, 그때부터 가문에서 나서서 결혼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보기 위한 접촉을 시작한다.

그렇게 확인이 된 이후에나 당사자들이 만나기 시작하는데, 지금 이 상황은 무엇인지? 본인이 직접 와서 이렇게 당사자에게 다이렉트로 청혼을 하고 있다니.

기존 절차를 깡그리 무시하고 몇 단계나 건너뛰는 경우는 순서대로 할 필요가 없는 신분의 집안이나 당사자들이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는 경우 말고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단계를 무시하고 제 앞에 앉아 있는 남자는 보통 가문도 아닌 그 루이반이다. 기세가 대단하다는 정통 귀족 가문.

‘저 남자가 나한테 한눈에 반해 직접 청혼을 하러 왔을 리는 당연히 없고.’

혼란 속, 레이가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상황을 찾아내 물었다.

“혹시 라미엘 님, 술 드셨습니까?”

한참 만에 나온 상대의 대답에 라미엘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천사의 웃음이 아니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술밖에 생각이 안 나니?’ 정도의 의미 되시겠다.

“결혼이라는 건 대외적인 위장이고, 정확히는 ‘계약’이 되겠군요.”

“계약 결혼……?”

라미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남자가 나랑 계약 결혼을 하자고 우리 집에 직접 찾아왔다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들었음에도 믿기 힘든 일이었다.

한국도 아닌 리담에서 이런 단어를 듣게 된 것도 놀라운데, 라미엘이라는 명사가 이런 말을 먼저 꺼내고 있다는 것도 현실감이 없게 느껴졌다. 차라리 한눈에 반해 청혼하러 왔다는 게 더 현실성이 있을 지경이다.

“……라미엘 님이 왜 이런 제안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랜 고민 끝에 꺼낸 듯한 레이알렉시스의 대답이었다.

라미엘은 오히려 놀랐다.

자신을 보고 여느 사람들과는 다른 반응을 하기에 설마 했지만, 아무래도 레이알렉시스는 ‘라미엘’이라는 인물에 대해 외모와 이름 말고는 모르는 듯했다. 그에게 결혼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라비던 내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제가 ‘결혼’이 좀 필요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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