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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6화 (6/160)

6화. 천사의 계약 (1)

“제가 ‘결혼’이 좀 필요해서요.”

“예. 그건 알고 있습니다.”

사실을 알고도 이렇게 태연할 수 있다니. 레이알렉시스는 상대가 그 누구라 할지라도 진심으로 결혼 생각이 없는 것이었다. 라미엘은 마음속에서 그녀에 대한 점수를 추가했다.

“라미엘 님께서 작위는 필요한데, 결혼은 원치 않는다는 사실도 알겠습니다.”

라미엘의 포커페이스가 일순 작게 흔들렸다. 계약 결혼이라는 한 단어로 맞은편의 ‘마녀’는 제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며칠간 르아넬로가를 조사하면서 알게 된, 최근의 경영 상태가 좋아지기 시작한 이유가 바로 짐작되었다. 새로이 경영 전문가를 들인 이력이 없으니 맞은편의 이 영애가 사업에 참여한 것이 분명했다.

‘예상보다 상황이 더 재미있게 돌아가는데.’

라미엘은 흡족한 기분이 들었다. 대연회에서 테라스로 피신한 건 절호의 기회였던 듯했다. 결혼 생각이 없는 여자가 리담에 존재한다는 것도 기적인데, 그런 사람을 딱 만나다니. 하늘이 준 기회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단둘이서 독대를 하는 중에도 여자의 눈빛에는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저 사람들이 자신에게 보내는 찬사, 그 정도가 전부였다.

게다가 레이알렉시스는 제 생각보다도 훨씬 더 눈치 빠르고 똑똑해 보였다. 졸부 집안이라는 점이 거슬렸으나 지금의 그녀가 그 부분을 모두 상쇄하고 있었다.

이 ‘계약’에 있어 레이알렉시스 르아넬로는 그야말로 어디에도 없을 ‘완벽한 신부’였다.

“제가 궁금한 건.”

이 여자의 입에서 어떤 질문이 나올지 궁금하다.

“네, 영애. 말씀하십시오.”

“왜 계약 상대로 저를 찾아오셨는지입니다.”

레이알렉시스가 찻잔을 들어 목을 살짝 축이고 말을 이었다.

“아시다시피 저는…….”

라미엘은 레이알렉시스가 결혼 생각이 없다고 대답할 줄 알았다. 그래서 그 때문에 당신을 계약자로 생각했다고 말하려는데, 상대의 입에서 예상외의 말이 나왔다.

“평판이 아주 바닥입니다. 소문 설마 못 들으셨나요?”

“무슨 소문인지?”

“싸가지 없고 무례하고, 쟤는 왜 저럴까!”

레이알렉시스가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적나라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졸부 집안이 그렇지’의 대표 격, 입만 열면 막말에, 예의 없고 기품 없고, 마녀 같은 여자 등등.

‘자기 악담을 저리 신나게 이야기할 수가 있다니.’

라미엘이 소리 내어 웃었다.

이는 지난번 ‘개도 안 데려갈’ 이후 그녀를 향한 두 번째 웃음이며, 그의 인생을 통틀어 소리 내어 웃은 두 번째 웃음이기도 했다.

“라미엘 님은 저 같은 사람이 아니라 그, 걔, 누구였더라……. 아! 케이틀린! 그런 영애하고 어울려요!”

스스로의 욕을 실컷 하다가 이젠 중매까지 서고 있다.

“라미엘 님의 창창한 앞길에 불순물이 될 순 없지요.”

생각도 못한, 심지어 웃긴 이유였다.

“그러니까 저 때문에 이 결혼을 안 하시겠다?”

레이알렉시스의 고개가 격하게 위아래로 흔들렸다. 어딘가 절박해 보이기까지 한 동작에 라미엘은 다시금 웃음이 나왔다.

“전 그냥 혼자 조용히 살렵니다.”

어떤 식으로든 라미엘처럼 튀는 사람과 엮인다면 이래저래 시끄러울 텐데 결혼이라니. 파장이 필시 클 터였다.

레이는 절대로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취향이고 뭐고 싹 다 무시하는 엄청난 미인의 유혹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는 건 아니었으나 자신의 미래가 더 급했다.

“라미엘 님도 우리 둘을 좀 보세요. 천사와 마녀예요. 이런 극악의 조화가 어디 또 있겠어요? 심지어 머리털도 흑과 백이야. 우리는 정말 안 어울려요.”

“그겁니다.”

“뭐가요?”

“절대 섞일 일이 없다는 것. 그게 계약의 중요점이 될 겁니다.”

결국 원점이다. 레이가 애를 쓰며 자신을 어필한 것이 허사였다. 그가 원하는 건 최대한 아주 쓸모가 없는 결혼이란다.

‘쓸모없는 결혼이라…….’

레이가 원하던 바였다.

쭉정이와의 결혼, 그리고 이혼.

다만 눈앞의 남자는 빈말이라고 해도 쭉정이라고 할 수 없는 거물일 뿐.

일단 서로 원하는 바는 맞는 듯했다. 원점으로 돌아온 화제에 레이도 진지하게 임하기로 했다.

“계약 내용은 사람들의 눈을 속여 결혼을 발표하고, 그럴싸하게 결혼 생활을 하는 척하다가 정식으로 작위를 승계받으면 끝낸다. 이건가요?”

정확히 내린 진단에 라미엘도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와 약혼을 하고 표면적으로 결혼 생활을 하는 척만 해 주시면 됩니다.”

들을수록 바라던 바였다. 레이는 조금씩 들뜨려는 마음을 겨우 다잡고 최대한 평온을 유지하려 애를 쓰며 물었다.

“라미엘 님은 이 계약으로 작위를 얻으시는데, 제가 이 계약으로 얻는 건 무엇이 있습니까?”

이번 대연회는 레이의 부친인 오스카가 ‘철도 산업이 확산될 수 있도록 석유를 원활히 공급해 제국민의 생활 편의에 기여한 공로자’로서 참석했어야 하는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귀족들에게 레이를 선보이기 위해 병을 가장해 대타로 딸을 보냈다.

레이는 극구 안 가겠다고 버텼지만, 식은땀까지 흘려 가며 그런 큰 자리는 무리라고 앓아눕는 아버지를 대신해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태자가 대필했다고 해도 황제에게서 받은 친서니 어지간히 큰일이 아니고서야 안 갈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친이 편찮으시다고 들었는데, 회복이 좀 되셨는지?”

레이의 질문에 상대에게서 대답 대신 난감한 질문이 나왔다.

오스카는 도저히 거동할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레이를 보냈다. 그리고 황제에게 거짓말을 했다는 심적인 부담으로 정말 앓아누웠다가 얼마 전에야 겨우 회복했다. 아팠다는 게 아주 거짓은 아닌 셈이었다.

레이는 자신에게 온 기회를 아주 잘 활용했다. 어설프게 퍼져 있던 무례하단 소문을 제대로 확장시킬 수 있게 되었으니 나쁘지만은 않은 장사였다. 대타로 보내진 연회장에서 자신의 얼굴에 먹칠을 하고 올 작정으로 돌아다녔는데 그게 이런 식으로 효과를 발휘할 줄이야.

“아니면 회복된 척을 하시는 건지?”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작게 움찔했다. 오스카의 꾀병은 가족들만 아는 사실이었다.

“영애가 가업에 일조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 사실로 협박을 하려던 라미엘은 주제를 넘겼다. 이런 걸로는 레이알렉시스가 결코 흔들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제, 제가요?”

모른 척 시치미를 떼는 레이의 모습에 라미엘이 차분히 말을 이었다.

“헬라와 키즈웰 간 열차. 영애 작품이죠?”

루이반의 정보력은 어디까지일까. 르아넬로 가족들만 아는 이야기들을 전혀 상관없는 가문에서 온 사람의 입으로 듣자니 소름이 끼쳤다.

철도 시장을 꽉 잡고 있는 텔덱, 위먼, 르아넬로의 세 철도사는 온갖 물자와 사람들이 모여 있는 리담의 수도 라비던과 이어지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중 르아넬로는 이 세 회사 중에서 인맥, 명예, 수완 모두 부족했기에 레드오션인 수도행 열차 사업권을 따내기가 유독 어려웠다. 초반에야 주원료인 석유를 들이밀며 저렴한 가격으로 물량 공세를 퍼부었으나 시장이 과열되면서 서서히 열차 이용 순위와 점유율이 떨어져 갔다.

철도사들은 모두 도시에서 수도로 가는 철로 사업에만 기를 쓰고 있고, 그게 당연하게 여겨지던 사회적 분위기가 있었다.

그런데 얼마 후 르아넬로는 거기서 손을 떼더니 수도가 아닌 헬라와 키즈웰을 연결하는 철도 건설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선례가 없어 성공 여부가 불투명하니, 보통 무모한 도전이 아니었다.

그걸 소심하기 짝이 없는 오스카 르아넬로가 해냈을 리가 없다.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의 영애가 이뤄 낸 일이라고.

“작위와 마찬가지로 기혼자만이 가업을 물려받을 수 있지요.”

라미엘의 말에 찻잔에 고정되어 있던 레이알렉시스의 시선이 그의 얼굴로, 눈으로 향했다.

“작위와 사업. 이게 계약을 하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거란 말이죠.”

“그렇습니다, 영애.”

라미엘이 꽤 자신 있게 던진 패에 잠시 말이 없던 레이알렉시스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이것부터가 타고난 장사꾼이란 생각이 들었다.

원하는 조건을 제시해도 결코 반색하지 않고 최대한 차분하게 대응해서 더 많이 가져올 것. 이게 거래의 기본인데, 레이알렉시스는 그것을 훌륭히 소화해 내고 있다. 심지어 라미엘 루이반을 상대로 말이다.

“저는 가업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라미엘은 레이알렉시스를 잘못 파악하고 있었다.

레이는 사업에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가 답답해 옆에서 돕기는 했지만 사업을 이어받을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저 자신이 낙향하기 전에 집안이 망해 돈이 없어질까 봐 최소한의 방어막만 쳐 두고 있는 것이었다.

“만약 제가 가업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면, 결혼이 아니라 전문 경영인을 고용하는 게 될 겁니다. 그편이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올 테니까요.”

라미엘은 태연한 표정을 유지했으나 속으로는 당황했다. 쉽게 넘어올 거라 생각했는데 도통 먹히질 않았다. 라비던의 마녀는 토벌전에서 가장 애를 먹었던 마물 1급보다도 더 어렵고 까다로웠다.

그는 다른 수가 더 있는 것처럼 여유로운 척 의자에 몸을 깊게 기대며 머릿속으로는 치열하게 계산을 했다.

대화를 하면 할수록 눈앞의 여자가 탐이 났다. 계약을 하는 데에 가장 걸림돌이 될 ‘감정’이란 게 눈에 보이지 않았고, 예상한 것보다 훨씬 영리한 것도 마음에 들었다.

라미엘은 귀족 사회에 등장한 이후, 든든한 집안 덕분에 어지간하지 않은 이상 마음먹은 대로 모든 일을 쉽게 할 수 있었다. 특히나 천사같이 곱상한 외모는 상대방을 안심시키는 데에 특효였다.

그런데 자신의 집안도, 외모도 시큰둥해하는 사람 앞에선 이 모든 게 무용지물이었다.

‘어떻게든 저 계약자의 마음을 돌려야 하는데.’

라미엘은 묶인 매듭은 푸는 것보다 잘라 내는 것을 선호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무언가를 풀어내는 것은 그에게 있어 꽤나 귀찮은 일이었다. 자신이 시종도 거느리지 않고 ‘직접’ 행차한 시점에서 이미 상대방은 반쯤 넘어와 있어야 했는데, 그게 아니라는 점에서 어딘가 어긋난 것이다.

그는 지금 난생처음으로 틀어진 이 상황을 어떻게든 풀어 보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여기 오기 전에 분명히 목소릴 들었는데…….’

그녀가 모친에게 혼나고 있던 분위기였다. 라미엘의 머리가 재빠르게 회전했다.

“레이알렉시스 영애, 고작 안 좋은 평판 하나 때문에 결혼을 안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십니까?”

“전 그냥 혼자 조용히 살렵니다.”

그 말이 생각나자마자 라미엘은 그 문장에 레이알렉시스가 원하는 모든 것이 실려 있음을 알았다.

‘혼자, 조용히.’

“리담에 결혼하지 않은 사람이, 그것도 여자가 조용히 살 곳이 과연 있긴 할까요?”

그녀가 허를 찔린 듯 슬쩍 주먹을 쥐는 것이 보였다.

“일이 마무리되면 수도에서 벗어나 그 어떠한 간섭도 없이 조용히 사실 수 있게 돕겠습니다.”

레이알렉시스가 라미엘의 눈을 바라보았다. 이제야 계약 조건을 제대로 들어 보려는 눈빛이었다.

“제가 영애 곁에 있으면 그 누구라도, 설령 당신의 부모라 할지라도 쉽게 간섭할 수 없게 됩니다.”

작위가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공작 부인’이라는 점에서 다른 사람들이 쉽게 어쩔 수 없는 힘이 생기기는 한다.

레이는 라미엘의 빠른 두뇌 회전력에 놀라고 있었다.

자신은 단 한 번도, 그 누구에게도 ‘수도를 벗어나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라미엘은 그럴 수 있도록 해 주겠단 말을 했다. 방금 전의 대화에서 눈치껏 추리해 낸 결과가 분명했다.

‘이 남자는 단순히 운과 무력으로만 토벌전에서 살아 돌아온 게 아니구나.’

레이의 눈에 반짝, 흥미의 빛이 돌았다.

처음으로 내보이는 상대의 감정에 라미엘은 지금의 이야기가 먹힐 수 있겠다고 직감했다.

“레이알렉시스 영애, 당신이 염려하는 부분. 그것도 처리하죠.”

“제가 무엇을 염려하는데요?”

“안심하고 믿을 만한 경영 전문인을 가문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보수는 물론 이쪽에서 지불하도록 하지요.”

솔깃한 제안이긴 했으나 레이 자신에게 직접으로 좋은 조건은 아니었다.

“제가 수도를 벗어나 조용히 살 수 있도록, 어떻게 도우실 겁니까?”

‘설마 그게 전부는 아니겠지?’라는 의미로 레이가 물었다.

“루이반 가문 소유의 별장이 리담 여기저기에 여럿 있습니다. 개중엔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도 상당하고요. 그중에서 영애가 원하는 곳을 하나 계약금으로 드리겠습니다.”

생각지도 못한 대어가 낚였다. 그것도 잡을 생각도 안 하고 있던 어부의 어망에 스스로 들어온 대어였다.

‘계약금에 별장이라니!’

레이는 과연 이 초대형 생선이 어떤 조건을 내걸지 기대하며 물었다.

“계약 착수금에 루이반가의 별장이라. 그렇다면 계약 완료 시엔 어떤 것이 있습니까?”

“10로베를 드리죠.”

믿을 수 없는 금액에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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