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7화 (7/160)

7화. 천사의 계약 (2)

“10로베를 드리죠.”

“…….”

10로베라니.

“라미엘 님, 방금 로베라는 말씀 정말이십니까?”

리담의 화폐 단위는 파브, 라블, 로베 세 종류다. 그중 파브를 가장 대중적이고 흔하게 사용했다.

라블과 로베는 단위가 크기 때문에 일상 용도보다는 규모가 큰 사업이나 부동산, 재산 등을 표기할 때 주로 쓰였다. 1라블은 1억 파브를 이르는 말이었고, 10라블은 1로베가 된다.

지금 라미엘이 말한 10로베는 파브로 치면 100억이라는 말이었다. 얼마 전 키즈웰에 있는 르아넬로 역사를 깨끗하게 개·보수하는 데 쓰인 비용과 맞먹었다.

‘말이 개·보수지, 거의 새로 짓다시피 한 거나 다름없었는데.’

웬만한 사람은 평생 구경도 못 할, 사업 규모에서나 나올 액수였다. 루이반가가 보통 부유한 게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저 금액을 고작 계약 결혼 따위에 덜컥 줄 수 있다는 걸 보니 그의 가문이 지닌 부는 자신의 상상을 초월하는 듯했다.

그녀의 반응을 본 라미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이고 말했다.

“그럼 레이알렉시스 영애, 계약서를 작성할까요?”

***

계약 결혼을 숨기기 위한 스토리는 대충 이랬다.

지난여름 연회에서 만나 몰래 사랑을 키우다가, 그 사랑이 너무 커져 이젠 도저히 숨길 수가 없으니 결혼을 하기로 했다는, 참으로 담백하고 단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였다.

다만 이 이야기에서는 ‘사랑’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였다. 차후 계약 기간이 끝나 서로 갈 길을 가게 됐을 경우, 그 누구도 두 사람에게 재혼을 권할 수 없도록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리담의 귀족들은 사랑 없이, 가문과 가문끼리 조건만 맞으면 결혼이라는 ‘계약’을 맺는 게 보통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여느 귀족들과는 다른 노선으로 가기 위한 시나리오를 짰다.

라미엘이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서 그녀 외에는 아무도 곁에 둘 수 없다는 분위기를 형성하는 것.

레이알렉시스는 사랑을 원하는 남편을 두고 떠난 악녀가 되어 수도에서 사라지고, 라미엘은 아내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된다. 유치하고 단순한 방법이지만 이 이상으로 좋은 수단은 없었다.

귀족들은 자유연애결혼을 돈 없는 평민들이나 하는 거라고 폄하했으나, 막상 그들이 보는 고급 연극이나 예술 작품들의 테마는 대부분 ‘절절한 사랑’이었다. 결국 그들의 연애결혼 비하는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후려치는, 일종의 질투심인 셈이었다.

때마침 요즘 수도에서 유행하는 연극이 어느 귀족 영식의 애절한 사랑 이야기였기에 여론 몰이에도 딱 좋은 시기였다.

두 사람은 일련의 내용과 조건을 간단하게 작성해 가계약을 마쳤다. 정식 계약은 루이반가에 가서 하는 것으로 하고, 계약서가 완성되면 라미엘이 연락을 주겠다고 했다.

“조심히 가세요.”

라미엘이 마차로 향하는 모습을 보며 레이가 인사를 했다.

보안 유지가 중요한 계약이라 그런지 라미엘은 극도로 소수의 인원만 동행했다.

마부, 말 두 마리, 루이반 가문의 상징이 없는 평범한 검은 마차. 말과 마차는 사람이라고 칠 수 없으니 사실상 마부와 달랑 둘이서만 온 것이다.

‘아무리 무예가 뛰어난 남자라곤 하지만 고작 마부와 단둘이서 여기까지 오다니.’

라미엘은 머리카락에서부터 발끝까지가 모두 사람들의 찬사를 받기 위해 만들어진 사람이었다. 심지어 키까지 껑충 커서 모습을 꽁꽁 싸매 감싸지 않는 이상 스쳐보기만 해도 그가 루이반 공작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너무나도 눈에 띄는 표적이라는 것. 누군가 못된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그를 습격할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라미엘 님께서 더 잘 알고 계시겠지만 되도록 마차 창문은 열지 마시고, 조심하세요. 댁에 무사히 도착하시길 바랍니다.”

염려 가득한 말에 누군가 큭, 하고 웃음소릴 냈다.

레이는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마부가 이쪽을 보며 히죽거리고 있었다.

‘루이반 소속의 일꾼일 텐데, 지금 주인과 거래하는 손님의 인사를 대놓고 비웃었겠다?’

무슨 버르장머리인지.

하나 라미엘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주인이 조용하니 이쪽에서 무어라 할 수도 없는 일이라 레이는 그저 저 빨간 머리, 초록 눈동자의 수박바 같은 마부를 한 번 째려보는 걸로 만족해야 했다.

“벌써 계약 이행인가? 습득이 빠르군.”

“네?”

무표정하게 말을 내뱉던 라미엘이 저 멀리에서 이쪽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한 미소를 장착했다. 갑작스레 어딘가에서 조명이 켜진 것 같았다. 노을이 아침 햇살로 바뀌는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니. 미남 만세였다.

하나 외모는 ‘만세’여도 말투는 ‘글쎄’였다.

“하긴. 지금부터 계약 성립이니 주변에 다정한 분위기를 보여 줄 필요는 있겠지.”

“저기, 저기요. 라미엘 님?”

레이의 부름에 말하라는 듯 라미엘이 살짝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말이 갑자기 좀 짧아지신 것 같은데…….”

“앞으로 계속 같이 있으면서 사이좋은 부부인 척해야 하는데 말을 높여야 하나?”

생글생글 천사처럼 웃으면서 말투는 얼음 같았다. 본색을 드러낸 라미엘에게 놀란 레이의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계약에 대해 이야기하는 내내 묘하게 느껴지던 권위감이나 차갑고 딱딱한 말투는 ‘라미엘’이라고 하는 수도의 천사님과는 이질적이었다. 계약 때문에 긴장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본질이 이런 쪽이었던 모양이다. 라비던 사람들은 아무도 모를 게 분명한 천사의 실체가 보였다.

“아아. 그러니까 자기 사람한테는 존대 안 한다 이거지? 알았어.”

레이의 말에 서늘한 공기가 내려앉았고, 라미엘이 미간을 슬쩍 구겼다.

“지금 뭐라고…….”

“존대 안 하는 거라면서. 아닌가?”

리담에서는 남편은 반말을 하고 아내는 존대를 하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당연히 그래 왔고, 이상하다 여겨 본 적 없던 일이었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반말을 들으니 라미엘은 기분이 조금 이상했다.

그의 굳은 표정을 보고 레이가 말을 이었다.

“라미엘 님, 올해 스물둘이라 하셨죠? 공작위도 임시로 받았으니 정식 공작은 아직 아니시고요. 그럼 우리 둘 다 작위가 없는 건 마찬가지네요?”

레이가 방긋 웃었다.

“상놈은 나이가 계급인 거 알지? 내가 두 살 더 먹었으니까 너보다 위네. 나 앞으로 말 깐다?”

차원 이동으로 레이가 한국 생활을 하던 때, 버스에서 ‘어른에게 자리 양보’를 강요하며 학생에게 싸가지니 예의니 난리치는 노인에게 뒷자리에 앉아 있던 또 다른 노인이 한 말이었다.

“상놈이나 나이가 벼슬이지.”

“난 딱히 계약 안 해도 아쉬울 것 없는데. 동등한 입장, 동등한 대접 못 받을 거면 계약도 필요 없지. 파기해.”

마부가 박장대소하는 소리가 두 사람의 귓가를 울렸다.

***

크레하는 이틀 전 일을 떠올리며 다시금 키득거렸다.

“그 여자 생각할수록 웃기네.”

다 죽였다 생각했던 1급 마물이 달려들 때도 무표정했던 라미엘이다. 단 한 번도 본 적 없던 그 당황한 얼굴이라니.

그것도 그의 어깨에나 올까 싶은 자그마한 여자 하나가 천하의 라미엘 루이반을 무너지게 했다. 이 귀한 광경을 자기 혼자만 본 것도 크레하의 어깨를 으쓱하게 만들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루이반 가문에 무력, 지력까지 쥔 데다 조만간 정식 공작위까지 손에 넣게 될 남자다. 그를 둘러싼 여러 가지 바깥일에는 관심도 없고, 뭣도 모르는 크레하였지만 라미엘이 거물이란 것 정도는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누가 라미엘을 ‘먹인단’ 말인가. 그럴 수 있는 인물은 태자 이상은 되어야 할 거라 생각했는데, 이건 뭐 예상에도 없던 인간이 튀어나왔다.

행정관인 테일러나 집사인 윌포프가 그 레이알렉시스라는 여자를 만나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크레하는 벌써부터 즐거웠다. 자신의 언행도 질색하는 사람들이 저보다 더한 사람을, 그것도 상전이 될 여자를 만날 텐데.

“왜 아까부터 자꾸 이쪽을 보며 웃는 거야? 기분 나쁘게.”

테일러가 손에 쥐고 있던 펜을 탁 소리 나게 내려놓으며 크레하에게 물었다. 얼굴에 멍은 덕지덕지 달아 놓고선 키득대는 꼴이 살짝 미친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아무것도 아냐. 킥킥.”

아까부터 께름칙하게 실실대던 크레하다. 자신이 휴가를 간 사이 주인과 뭘 하고 온 모양인데 그게 못내 마음에 걸린다.

‘이 짐승 새끼가 대체 뭘 한 거지.’

크레하는 주인이 토벌전에서 주워 와 루이반의 기사단장으로 꽂은 남자였다.

토벌전 이후 라미엘은 작정한 듯 집안의 모든 사람들을 갈아 치웠다. 예전부터 계획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이전 루이반 후작의 흔적을 지우고 자신이 고른 사람들로 저택을 채웠다. 후작과 그 일가에게 온갖 천대를 받던 서자가 보란 듯이 루이반을 먹어 치운 것이다.

그런 대대적인 숙청, 아니 물갈이 기간에 살아남은 극소수의 인물 중 하나가 테일러였다.

“태자가 세력이 큰 귀족들을 견제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그의 눈에 띌 필요는 없겠지요.”

선대의 모든 고리를 끊어 버리고 새로이 시작하려는 라미엘에겐 여기서 더 덩치를 키워 황실과 불화의 싹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도 걸림돌일 것이다. 더 거대해질 필요도 없는 가문이지만 혹여 키운다 한들 나중에 천천히 해도 될 일이었다.

테일러는 챙겨 온 서류를 라미엘에게 올렸다. 일전에 주인 명으로 윌포프가 정리한 서류에서 추려 낸 명단이었다. 윌포프의 명단을 본 후에도 주인이 별다른 지시나 말이 없어 후보 선택지를 줄여서 다시 보고한 것이다.

후보들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적당히 그럴싸한 가문의 여식들이었다. 이는 아내가 출산하기 전 마지막으로 했던 일이었고, 이게 일주일 전이었다.

라미엘은 내어준 한 달의 휴가를 모두 쓰고 오라고 했지만, 루이반을 지키는 든든한 집사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비보에 저택을 비웠다는 소식을 듣고 총알같이 달려온 터였다.

루이반의 행정과 관리의 부재. 물론 이 큰 저택에 인재가 둘뿐이겠느냐마는 남겨진 인간 중에 크레하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

‘저 인간이 무슨 짓을 벌일 줄 모른다!’

요즘은 거의 사라지다시피 한 용병 집단. 남아 있는 용병들은 말이 용병이지, 무리 지어 약탈이나 일삼는 깡패나 다름없는 자들이었다. 크레하는 그런 용병, 그것도 용병단의 리더였고, 잔혹하기로 악평이 자자한 바닥 중의 바닥인 자였다.

라미엘은 크레하의 용병단을 데리고 토벌전에 나섰다. 당시에는 루이반의 그 누구든 오히려 라미엘을 해치면 해쳤지 그를 지켜 줄 리 만무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그것도 지금 돌이켜 보면 라미엘이 짠 판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싶다. 용병으로 굴러먹던 놈이 마스터 경지 가까이 올라 있을 줄 그 누가 알았을까.

토벌전에 용병들을 써먹고 버리고 올 줄 알았더니 살아남은 크레하를 데리고 올 줄이야. 처음에 라미엘이 저걸 주워 왔을 때 테일러는 눈앞이 다 캄캄했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저택에서 사람 노릇하며 살고 싶으면 제대로 예의를 배워 격식을 갖추고, 자신과 윌포프에게 ‘기라고’ 명령해 준 라미엘 덕분에 크레하를 어느 정도 통제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세 사람의 통제하에 사람 구실을 하고 있다고는 하나 그는 결정적인 곳에선 여전히 핀트가 어긋났다. 그리고 지금이 딱 그렇다고 테일러의 직감이 속삭이고 있었다.

그래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하디귀한 갓 태어난 딸과 제 목숨이랑 바꿔도 좋을, 이제 막 출산을 한 사랑하는 아내를 뒤로하고 저택으로 달려온 것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는 선택이었지만 후회가 되진 않았다.

방금 전까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