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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8화 (8/160)

8화. 계약 완료

루이반의 저택에 테일러가 예상치도 못한 인물이 당도했다. 리담 석유왕의 장녀, 사교계의 악녀라는…….

‘레이알렉시스 르아넬로였던가. 대체 그녀가 왜 루이반에?’

그것도 대동한 하녀나 시종도 없이 혼자 저택 앞에 서 있었다.

“루이반엔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르아넬로 영애.”

“제가 왔다고 알려 주세요. 라미엘 님은 알고 계실 겁니다.”

고작 일주일간의 부재중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라미엘과 레이알렉시스 사이에 접점이라곤 조금도 없을 텐데.

루이반의 일 중에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휴가 중이라고 해도 저택의 소식은 자신에게 당연하게 보고되었다.

그러나 일주일간 르아넬로에 관해서는 그 어떤 보고도 없었다.

“어? 왔어요?”

저택을 어슬렁거리던 크레하가 레이를 보고 알은체를 하며 다가왔다.

“네, 왔네요. 어머, 무슨 일이 있었나요?”

크레하의 얼굴을 보며 레이가 놀라 물었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별일 없었는데요.”

“그래요?”

레이가 크레하의 인사에 대꾸하는 것을 보자 테일러는 무언가가 제 머리를 훅 강타한 기분을 느꼈다.

‘이 새끼 때문에 보고가 안 된 거구나! 얘가 저택 보조 행정관에게 말을 안 했을 테니까!’

주인과 크레하 둘이서 지난 일주일간 레이알렉시스와 연관된 무슨 짓을 했다.

‘지난주의 큰 행사라곤 대연회 하나뿐이었는데, 설마 거기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 아냐, 그랬다면 내가 몰랐을 리 없어.’

머리가 팽팽 돌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일인지 테일러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테일러, 이거 진짜야. 라미엘 님이 부르신 거 맞아!”

“……이거? 설마 ‘이거’가 날 말하는 건가?”

레이가 싸늘히 웃으며 묻자 크레하가 와하하 웃더니 ‘이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 부연했다.

‘두 사람도 만난 적이 있구나.’

테일러는 자신의 일주일 휴가가 정말이지 너무도 후회되었다. 하필이면 왜 집사마저 저택에 없었을까. 자신보다 배는 깐깐하고 규칙을 따지는 윌포프가 있었다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터였다.

‘아냐, 이런 일이라니.’

아직 무슨 일이 벌어진 게 아니다. 별일 아닐 거야.

“테일러는 이 영애 처음 보지?”

아, 이거 싫다. 이 야생마 새끼가 엄청 아는 척하고 있어. ‘넌 모르지?’ 하는 저 눈빛 좀 보라지.

“앞으로 자아아주 보게 될 거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간 발언에 저도 모르게 테일러의 이마에 힘줄이 비죽 솟는데.

“아, 재수 없어.”

“응?”

마음속으로만 했지 내뱉지는 않았다. 테일러는 순간 마음의 소리가 밖으로 튀어 나간 줄 알았는데 맞은편의 영애가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씩 웃는다.

평판 꽝인 라비던의 마녀가 테일러에게 처음으로 점수를 딴 순간이었다.

***

라미엘이 내민 계약서는 이틀 만에 작성된 것이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상세한 내용으로 작성되어 있었다.

「이 계약은 당사자 외에는 비밀로 한다.」

「그 외에는 사이좋은 부부인 척할 것. 필요 시 어느 정도의 신체적 접촉도 허용한다.」

「계약일 기점으로 한 달 내 결혼 발표를 하고 1년간 부부 생활을 한다.」

「레이알렉시스가 루이반 부인으로 생활하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은 루이반에서 제공한다.」

「절대 상대에게 반하지 않는다.」

「계약 위반 시, 유책임자는 상대에게 계약 완수금의 두 배를 지불한다.」

……와 같은 내용이 계약서에 적혀 있었다.

레이는 꼼꼼하게 쭉 읽어 보고는 끝에 서명을 했다.

지난번 반말 사건으로 무산될 뻔한 계약은 완수금이 10로베에서 15로베가 되는 것으로 합의되었다. 한국에서는 말 한마디로 천 냥 빚을 갚는다는데 여기는 말 한마디로 5로베 빚을 진 셈이었다.

이 계약의 내막을 아는 사람은 당사자 둘뿐이지만 계약 기간 후 헤어지는 걸로 합의 봤다는 결론을 아는 사람은 총 다섯이 될 것이라 했다. 행정관인 테일러와 집사장인 윌포프, 그리고 레이가 아직까지 마부로 알고 있는 루이반 기사단장인 크레하까지.

“그 외는 전부 우리가 사랑 넘치는 커플로 보여야 하는 대상이라는 거죠?”

라미엘이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그럼 라미엘 님, 앞으로 1년 잘 부탁드립니다.”

“저 역시도. 그런데 영애.”

“네.”

“왜 혼자 오셨습니까?”

“아무래도 계약이 확정되기 전까진 아무도 모르는 편이 좋을 것 같아 보안에 만전을 기했습니다.”

혹시나 지난번처럼 어긋날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염두에 둔 행동이었다. 계약이 잘 안 됐는데 루이반가의 사람과 만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면 르아넬로가가 시끄러워질 게 분명했다.

라미엘의 방문 이후 르아넬로 집안은 발칵 뒤집어졌다. 레이가 파티에서 실례를 해서 사과를 받으러 직접 왔다는 핑계로 겨우 넘어갔지만 ‘그 루이반’에 실수를 했다고 외출 금지까지 당했다.

지금도 르아넬로가 사람들은 레이가 침대에 누워 자는 줄로만 알고 있다. 그야말로 몰래 찾아온 것이다.

“하지만 영애의 목숨이 위험했을지도 모를 선택이군요. 나는 영애가 잘못된다면 이 귀찮은 짓을 다시 한번 해야 합니다.”

천사의 입에서 악마 같은 소리가 나왔다. ‘안전이 걱정된다’가 아니라 ‘귀찮음’이 먼저라니.

세상이 이 천사에게 속고 있다. 이건 겉모습만 멀쩡하지 속은 까맣고 못돼 처먹은 사람이었다.

‘에휴. 본성을 어찌 탓하리. 속고 계약한 내 잘못이지. 뭐 어차피 내 남편도 아니고. 1년은 금방이니까.’

다른 사람은 충격이 클지 몰라도 레이는 라미엘의 천사 같은 다정한 부분은 외모 말고는 겪어 본 적이 없어서 충격파가 그리 크진 않았다.

“예. 라미엘 님 귀찮을 일 없게 조심하지요.”

“계약이 성사됐으니 귀가하실 땐 댁까지 모셔다드리겠습니다.”

“그거 참 감사하네요.”

누구에게도 들어 본 적 없는 비꼬는 말투에 라미엘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는 자신에게 도전적인 사람에게 결코 관대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레이알렉시스는 뭐랄까.

‘다람쥐나 새끼 고양이? 아니면 강아지인가.’

기척이 읽히지도 않는 작고 약한, 자신에게 이를 드러낸다 해도 위협도 되지 않을 그런 짐승이 가르랑대는 모습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물론 그는 작은 짐승을 보며 귀여워하는 사람도 아니었으나, 눈앞의 계약자가 으르렁대며 성질을 내는 것 같은 모습이 마냥 우스웠다.

“근데 라미엘 님. 우리 호칭도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요? 라미엘 님, 레이알렉시스 영애. 이건 누가 들어도 생판 남이잖아요.”

레이알렉시스의 의견에 라미엘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우린 리담에 다신 없을 애정 만점 귀족 부부이니 호칭 정리부터 가요. 라미엘 님은 이제부터 절 레이라 불러 주세요.”

“보통 알렉스로 부르지 않나요?”

“맞아요. 그런데 이건 제 가족만 부르는 애칭이에요.”

“그러죠.”

“전 라미엘 님을 뭐라고 부를까요? 그냥 라미엘이라고 부르면 될까요?”

침묵이 내려앉았다.

“애칭을 만드는 게 나으려나……. 그, 그럼 음, 라미?”

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귀엽게 끝 이름만 부를까? 아냐, 이건 좀 느낌이 안 살아.”

라미엘은 저 혼자 제 이름으로 이것저것 호칭을 만들어 보며 중얼거리는 레이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뭘 해도 자신의 마음에 안 들 테니 그냥 이름으로 부르라고 하려는데, 레이가 찾았다는 얼굴로 방긋 웃으며 그를 불렀다.

“라엘.”

예상치도 못한 호칭에 그의 모든 움직임이 멈췄다.

“라엘이라고 부를게요.”

“어디서 들었습니까.”

“뭐, 뭐를요?”

갑작스레 싸해진 분위기에 레이가 살짝 겁을 먹은 듯했다. 하지만 라미엘은 요동치는 속을 진정시키기 위해 작게 심호흡을 해야 했다.

“그 호칭.”

아주 오래전에 듣던 이름이었다.

“라엘, 아가.”

라미엘과 닮은 아름다운 얼굴엔 생기가 없었다. 웃어도 처연하고, 톡 건드리기만 해도 당장 눈물을 떨굴 것 같은 유약한 인상의 여자.

‘라엘’은 오래전 모친이 그를 부르던 아명이었다.

그것도 단둘이 있을 때만 부르던 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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