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별채의 모자
후작은 라미엘 모자가 있는 별채에 자주 들르진 않았지만, 올 때마다 무언가를 가지고 왔다. 간식이나 장난감 같은 것들을.
그가 누구인지 라미엘은 어려서 잘 몰랐다. 그저 대단한 귀족이라는 것만 알았다. 제 아비인 것도 몰랐다. 별채에 놀러 와 자신을 예뻐해 주는 귀족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지력이 생길 나이가 될 즈음에야 루이반 후작이 아비라는 걸 알게 되었다.
‘아버지…….’
여덟 살이 된 지금, 라미엘은 자신의 처지가 남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이곳에서 평생을 처박혀 자랐어도 하녀들이 뒤에서 쑥덕이는 소리를 못 알아들을 만큼 멍청하지는 않았다.
초가을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는 어느 날, 라미엘이 물었다.
“저기, 아버지 아니, 후작님 계신 곳에 가도 돼요?”
라미엘의 질문에 모친은 난감한 얼굴로 웃었다. 아이가 처음 하는 질문이었고, 처음으로 후작을 아비라 지칭한 날이었다.
“거긴 왜?”
“형들이 있대요. 만나고 싶어요.”
모친인 리트아나는 조용한 사람이었다. 소리 내어 웃은 적도 없고, 큰 소리를 낸 적도 없다. 요란하게 뛰어다니거나 쿵쿵거리며 빠르게 걷지도 않았다. 고요가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리트아나 같으리라.
그 때문인지 모자가 머물고 있는 별채는 항상 고요했다. 시중을 드는 하녀 둘도 별다른 말이 없었다. 묵묵히 주어진 일만 하고 별채를 나갔다. 그래서 라미엘의 세상은 적막과 고요가 전부였다.
크게 소리를 내는 일은 없어야 하는 거라 생각했다. 즐거운 일이 많지는 않았지만, 가끔 아버지가 책을 여러 권 선물로 주실 때처럼 기쁜 일이 생길 때조차 크게 소리 내 웃지 않았다.
“형들을 만나고 싶다고?”
끄덕끄덕.
몸이 약한 리트아나는 아침에 잘 일어나지 못했다. 점심쯤에나 느릿하게 눈을 뜨곤 했다. 그에 맞춰 라미엘도 항상 해가 한창 반짝일 즈음에나 눈을 떴는데, 오늘은 평소와 달리 별채 근처에서 들리는 낭랑한 목소리에 일찍 잠이 깼다.
라미엘은 눈을 비비고 일어나 소리가 나는 곳을 찾아 삐걱대는 창문을 열었다. 푸르게 펼쳐진 잔디 위에서 남자아이 둘이 목검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누구지?’
그동안 별채 근처에서 사람을 본 적은 없었다.
라미엘과 모친은 별채 밖을 나갈 수 없었다. 고작해야 그 근처 정원을 산책하는 정도만 허락이 되었다. 그 이유를 모친은 끝내 알려 주지 않았고, 하녀들은 원래 라미엘을 상대하는 일이 없었기에 말을 붙일 일이 없어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라미엘은 사람들이 자신만의 공간에서만 움직여야 하는 규칙이 있나 보다고 받아들였다. 자신과 모친이 아비가 있는 본채에 가지 못하는 것은 이 규칙 때문이리라.
그 생각대로라면 아비가 이곳을 찾아오는 게 불가능한 일이지만 그것까지 받아들이기에 라미엘의 세상은 조금 비상식적이고 너무도 좁았다.
“쟤들은 누구지?”
규칙을 어긴 건가.
자신보다 한두 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 아이들은 요란한 소리를 냈다. 비명을 지르며, 우다다 뛰어다니고 검을 맞부딪치며 화를 내기도 했다. 이렇게 요란한 소리는 처음 들어 보는 것 같았다.
“이 멍청아!”
“우하하하! 지니까 성질 내냐?”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던 라미엘은 그들이 돌아가고 나서 하녀에게 물었다.
“……그 애들이 누구냐고, 요?”
요정같이 예쁜 아이가 직접 말을 거는 건 처음이었다. 평생 대화할 일이 없을 거라 여겼던 하녀는 말을 어찌해야 할지도 몰라 당황했다. 무시해야 할지, 존대를 해야 할지.
고민 끝에 일단은 주인인 후작이 챙기고 있는 아이니 언젠가 가문에 정식 입적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고려해 어설프게 존대를 붙였다.
“후작 각하의 아드님들이에요.”
“후작 각하요?”
“이 저택의 주인님 말이에요.”
“그렇다면…… 내 형제인 건가요?”
“어, 뭐, 엄밀히 따지면 그, 그렇죠? 헙.”
하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라미엘이 또 무언가 말을 붙이려 하기 전에 잽싸게 자리를 피했다.
“허유, 제 엄마 닮아 진저리치게 이쁘네. 홀려서 술술 다 말해 버릴 뻔했어. 요망한 것. 다신 마주치지 말아야지.”
네 처지가 어떤지 아냐며, 어린애 붙잡고 조용히 살란 쓸데없는 소리까지 할 뻔했다.
“후작 각하의 아드님…….”
형이란 이야기였다.
‘내게도 형제가 있었구나.’
라미엘은 소리로 가득한 형제들을 만나고 싶어졌다.
“요즘 오전에 형들이 여기서 검을 가지고 놀아요. 저도 형들처럼, 형들이랑 검 가지고 놀고 싶어요.”
“라엘, 아가.”
라미엘의 말에 모친이 몹시 난처한 얼굴로 웃으며 그의 얼굴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던 리트아나는 어린 아들을 품에 안고 토닥인 후에 입을 열었다.
“후작님께 말씀드려 볼게.”
***
라미엘은 배를 걷어차여 연무장 바닥으로 쓰러졌다.
“윽!”
쓰러지면서 처음 모친이 아비에게 외출 허락을 구하던 장면을 떠올렸다.
자신을 앞에 둔 모친은 뒤에서 제 양어깨를 붙잡고 겨우 말했다.
“라미엘에게도…… 검술을 가르쳐 주실 수 없을까요?”
양어깨에 놓인 리트아나의 손은 축축했고 벌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잔뜩 긴장했다는 것을 어린 라미엘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는 모친이 왜 그렇게 떨어야 하는지 몰랐다. 그저 허락한다는 후작의 말에 너무 기뻐서 활짝 웃으며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묻느라 바빴으니까.
루이반 후작의 첫째 아들은 라미엘을 걷어차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계속 씩씩거렸다.
별채의 거머리들을 부친이 끼고도는 것도 분해 죽겠는데 검술 수업까지 같이 하란다. 어머니도, 저와 동생도 절대 싫다며 난동을 부렸지만 아버지는 이미 눈이 돌아 있는지라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함께 검술 수업을 듣게 되었는데.
‘이 빌어먹을 흰둥이 새끼가!’
자신들이 한 달이나 배웠던 걸 고작 사흘 만에 따라잡았다. 뭘 하든 빠르게 습득했고 하루가 다르게 일취월장했다.
검술 선생도 이례적인 반응을 보였다. 언제나 무표정한 얼굴로 ‘예, 잘하셨습니다.’ 하고 앵무새처럼 대꾸하던 사람이 라미엘에게는 진심을 담은 칭찬을 늘어놓았다.
버르장머리 없고 까다롭기만 한 후작의 아들을 어르고 달래 잘한다고 해 줘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선생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루이반가의 서자를 마냥 배척하기에는 실력이 너무도 월등했다. 하나를 가르쳐 줘도 열을 깨우쳤다. 이해도 습득도 빠르고, 머리도 좋은지 바깥의 정보들을 빠르게 수집해 제 것으로 만들었다.
세기에 나올까 말까 한 천재, 그게 루이반의 서자였다. 외모도 실력도, 하다못해 인성까지도. 루이반의 온갖 좋은 것이 그에게 모두 쏠린 모양이었다.
그 사실을 후작의 아들들이 모를 리 없었다. 질투심과 열등감, 자기보다 못한 별채의 버러지에게 뒤처진다는 생각은 결국 라미엘을 향한 폭력으로 표출되었다.
“버러지 같은 새끼가 내 검을 부러뜨려?”
예상치 못한 공격에 라미엘이 나가떨어졌다.
대련 중에 목검이 부러지는 건 흔한 일이라고 했다. 검이 부러져도 그건 절대 잘못이 아니라고 했는데 왜 형이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폭력보다 더한 충격이 연이어 들어왔다.
“별채 버러지 주제에 감히! 너 네가 어떤 새낀 줄은 알아?”
악을 쓰며 고래고래 저와 모친을 욕하는 형의 얼굴을 라미엘은 멍하게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제가 속한 세계가 어떤 건지, 어렴풋이 짐작하던 진실을 맞닥뜨린 날이었다.
리트아나는 상처투성이로 돌아온 라미엘을 보며 울고 또 울었다.
“라엘, 우리 아가. 내 라엘. 미안해. 정말 미안해.”
검술 수업은 그만두었다. 후작 각하와 마님이 서자가 적자의 자리를 넘보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막았기 때문이다.
이후 라미엘의 천재성을 본 후작은 서서히 별채에 발길을 끊었고, 총애 끊긴 첩 따위를 제대로 돌볼 하인이 있을 리 없었다.
리트아나가 숨을 거둔 뒤, 별채의 라미엘은 1년이 넘도록 후작을 만날 수 없었다. 하인들의 모진 학대와 어른들의 방치 속에 남겨졌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별채로 들이닥친 후작의 손에 이끌려 다시 검술을 시작했다.
천재는 여전했다. 잃어버렸던 감각을 빠르게 되찾고 나날이 성장했다.
그의 실력이 루이반의 기사들과 비등해졌을 무렵, 라미엘은 가문에 정식으로 입적되었다. 그리고 머지않아 ‘라미엘 루이반’으로서 토벌전에 최연소로 참가하게 되었다.
***
“어디서 들었습니까. 그 호칭.”
라미엘의 기색이 사나웠다. 조금만 더 요동치면 살기라도 흘러나올 것 같은 정도였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더라.’
레이가 식은땀을 흘렸다.
“……그걸 감히.”
한편, 라미엘은 갑작스레 떠오른 과거를 억누르느라 이를 악물어야 했다.
“그 이름을 어찌 내뱉었는지?”
“레이, 라엘, 발음도 어울리는 것 같고 부르기도 좋아 보여서…….”
라엘이란 아명은 루이반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유일하게 아는 사람이 있다고 해도 윌포프 정도겠지만, 그가 저택을 안내하는 그 잠깐 동안 레이알렉시스라는 인물에게 이런 걸 말했을 리는 절대 없다.
그저 라미엘이라는 제 이름을 놓고 이런저런 궁리 끝에 별생각 없이 내뱉은 단어일 터였다. 쉽게 추측이 되는 일이지만, 너무도 오랜만에 생각지도 못한 사람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평정을 잠시 잃고 말았다.
‘라엘, 그까짓 게 뭐라고.’
이제는 아무것도 아닌, 그저 이름을 줄여 만든 단순한 호칭에 불과했다. 괜히 예민하게 받아들일 건 없었다.
“라미엘 님이 불편하시면 그냥 이름으로 부르겠습니다.”
레이알렉시스가 재빨리 제안을 철회했다.
“레이, 라엘 좋습니다. 서로 그렇게 부르는 걸로 하죠.”
말은 괜찮다고 해도 절대 안 그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우연하게 용의 역린을 제대로 건드린 사람의 심정으로 레이가 물었다.
“……정말 괜찮으세요?”
“안 괜찮을 것도 없습니다. 고작 호칭인데.”
전혀 그렇지 않아 보이는데.
‘절대 저 호칭은 단둘이 있을 때 쓰지 말아야겠다. 어차피 남들한테 보여 주기용이니까.’
레이는 다른 사람들의 시선이 있어서 라미엘이 함부로 자신을 못 해칠 때, 그때만 애칭을 쓰기로 마음먹었다.
물론 라미엘이 호칭 하나 때문에 사람을 어찌할 정도로 악마 같지는 않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라는 사태에 대비할 생각이었다.
레이가 조심스레 라미엘의 표정을 살폈다. 평온하게 차를 마시는 모습에 분위기를 바꿔 주제를 살짝 돌렸다.
“네. 그럼 다음번부터는 그리 부르겠습니다. 저기 근데 그 사람이요, 그 마부.”
“마부?”
“저번에 같이 왔던 빨간 머리 남자요.”
레이는 아직도 크레하를 마부라 여기는 듯했으나 라미엘은 그걸 굳이 정정해 주지 않았다.
“그자가 왜요? 영애 심기에 불편한 짓을 했습니까?”
“그건 아니고 얼굴이 얼룩덜룩하던데…….”
너무도 아무렇지 않게 별거 아니라고 해서 그냥 넘겼지만 얼굴이 거의 알록달록한 색종이였다. 마치 누군가에게 심히 맞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레이는 혹여나 그가 다른 사람들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됐다.
라미엘 앞에서 대놓고 깐족이며 박장대소하던 모습으로 미루어 어디 가서 맞고 다니긴 딱 좋을 성격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막상 맞아서 터진 꼴을 보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저택 안을 어슬렁거리고 있던데, 라미엘 님은 못 보셨나요?”
“아아. 그거 별거 아닙니다.”
“어떻게 별거 아니에요? 사람 얼굴이 무지개가 됐는데. 혹시 누가 괴롭히는 게 아닐까요?”
귀족 가문의 여식이 아니어서 그런 건지, 레이가 특이한 경우인지는 모르겠으나 사용하는 어휘가 여느 영애들과는 달랐다.
‘무지개라니.’
그가 작게 큭, 소리를 내며 웃고 말을 이었다.
“아까 말씀드렸던 루이반의 기사단장 크레하가 그자입니다.”
“네?”
“저와 대련하다 다친 상처이니 심려치 마시길.”
말이 대련이지, 일방적으로 얻어맞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라미엘과 만나기 전 크레하는 인근에 대적할 자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거 하나 믿고 여기저기 뻗대고 다녔는데 검이라곤 쥐어 본 적도 없어 보이는 천사 같은 남자에게 나가떨어질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
그렇게 늘씬하게 두들겨 맞고, 대련에서 처참하게 진 크레하는 그 후로도 몇 번이나 기습을 시도했지만 여태 단 한 번도 라미엘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의 상처는 이틀 전 박장대소의 대가로 ‘대련’이라는 이름하에 라미엘에게 일방적으로 얻어터진 것이었다.
“마부가 아니었구나…….”
‘단장쯤 되니까 그렇게 까불거리면서 웃을 수 있던 거였나 보다.’ 레이의 마음속에 작은 오해가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