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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0화 (10/160)

10화. 이런 조합

“……누구라고 하셨습니까?”

얼이 빠진 윌포프를 대신해 그나마 제정신인 테일러가 물었다. 하지만 그들의 주인은 ‘들었으면서 뭘 물어?’ 하는 표정으로 미간을 살짝 구길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2초 만에 정신을 차린 윌포프가 대답을 하고 방을 나서자 테일러가 황급히 그 뒤를 따랐다.

‘레이알렉시스라니!’

테일러와 윌포프가 둘 다 없던 이틀의 그 짧은 시간, 주인이 미친놈과 둘이서 결혼 상대자를 찾아 왔다.

아무리 눈가림용이라고 해도, 짧은 기간 시늉만 한다 해도 이건 아니었다. 너무 튀지 않는 적당한 상대가 필요한 거지, 라비던의 마녀와 만날 필요까지는 없었단 말이다!

어쩐지, 그 여자가 왜 갑자기 루이반에 왔나 했다.

“알고 있었습니까?”

스산하게 묻는 윌포프의 목소리엔 약간의 비통함마저 실려 있었다.

“그럴 리가요.”

어쩌면 테일러보다도 더 충격을 받았을 그다.

대대로 루이반의 집사를 해 온 윌포프의 집안은 자신이 지키는 ‘루이반’이라는 가문에 대한 프라이드가 상당히 높았다. 루이반이 계속 명문가로 위치하는 데에 자신들이 일조했다는 걸 명예로 여기던 사람들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루이반 후작 일가가 모두 사망했다는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더불어 서자가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었다는 사실은 그들의 명예와 일생 모두를 망가뜨려 버린 것이나 다름없다고 여겼다.

후작에게 붙어 입 안의 혀처럼 굴었던 게 이전 집사 월터 드라레타였다.

라미엘의 모친을 데려와 노리개 삼게끔 한 것도 그였다. 루이반 후작이 원하는 것을 찾아다 주는 것. 월터는 그것이 루이반을 지키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그 예쁜 노리개에게 홀려 가문도 주변 평판도 모두 잊은 채, 제 집 별채에 두고 첩으로까지 삼게 될 줄은 몰랐다. 일생일대의 실수였다. 별채의 모자는 자신의 실수를 상기시키는 존재였기에 당연히 그들을 좋게 대할 수 없었다.

루이반의 저택에서 기거하는 월터에겐 자식이 넷 있었는데, 그중에서 윌포프는 별난 구석이 있었다. 다들 꺼리는 별채의 모자를 남몰래 챙겨 주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엔 그들에게 푹 빠진 루이반 후작에게 잘 보이기 위해 그런 줄 알았는데, 제 용돈까지 몰래 쥐여 줘 가면서 돕는 걸 알았을 땐 하늘이 노래질 지경이었다.

아무리 제 가문이 루이반의 집사로서 온 헌신을 다해 왔다고는 하지만, 그건 상대가 ‘루이반’일 때의 이야기였다. 언젠가 버려질 별채의 벌레들은 루이반이 아니었으니까 챙겨 줄 필요도 없었다.

별채의 일로 월터는 윌포프를 아들 취급하지 않았다. 그저 가문의 명예를 더럽히는 지질하고 쓸데없이 정이 많은 골칫덩이로 여겼다.

그런데 언제까지나 쟁쟁할 줄 알았던 루이반이 토벌전에서 그리 허망하게 사라질 줄은 몰랐다.

‘서자 따위가 이끄는 루이반이 어찌 진정한 루이반이라 할 수 있단 말인가!’

월터는 이렇게 생각했다. 그래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유일하게 남은 루이반의 후계에게 목이 잘려 나갈지도 몰랐으니. 그간 라미엘을 어떻게 취급했는지 그 자신이 너무도 잘 알았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가문의 명예를 핑계로 잘리기 전에, 토벌전에서 서자가 돌아오기 전에 일을 그만둔 후 가족들을 데리고 부리나케 루이반을 나왔다. 별종 같은 셋째 윌포프만을 남겨 두고.

루이반에 남겨진 드라레타 집안 별종의 최종 목표는 라미엘이 높은 곳에 우뚝 서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여전히 루이반은 건재하며 아름다운 가주가 훌륭히 버티고 있다는 것을 도망간 이들에게 보이고 싶었다.

그런데 갑자기 이게 무슨 일?

‘르아넬로가라니! 라비던의 마녀라니!’

작위는커녕 돈밖에 가진 것이 없는, 허접하기 짝이 없는 가문이다. 심지어 요 근래 무례하다고 악명을 떨치고 있는 여자가 주인의 짝이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테일러와 고심해서 만든 명단이 있을 텐데 그건 어디로 가고, 왜 레이알렉시스가 갑자기 튀어나온 건지!’

자신이 저택을 비운 이틀. 고작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믿을 수 없는 일이 터져 버렸다.

가족들과 연을 끊은 지 1년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여 장례식에 갈지 말지 살짝 고민이 되긴 했으나, 그래도 가족이고, 자신을 낳아 준 모친이니 가 보는 게 도리라 생각해서 간 것이다.

‘어차피 거기서 좋은 꼴 하나 못 보고 왔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절대로 안 갔을 것이다. 아무리 레이알렉시스와 나중에 헤어질 것이라고 해도 이건 정말 아니었다.

“……라미엘 님이 결심하신 거면 바꾸지 못합니다.”

수십 번의 깊은 한숨과 주먹 쥐기, 미간 찡그리기 끝에 허탈하게 나온 윌포프의 말에 테일러도 수긍했다.

“못 바꾸지요. 대체 뭐에 홀린 건지 모르겠습니다.”

지난번 자살 사건 때 사실 알게 모르게 충격을 받았던 걸까? 그래서 절대 마음이 가지 않을 사람을 구했다거나.

“라미엘 님이 마음을 바꿀 수 없으니, 상대방이 바꾸게 하면 되는 일이겠군요.”

윌포프가 가뿐한 말투로 말했다.

“응? 네?”

“이런 조합, 저는 반대입니다.”

“저도 이런 조합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만, 라미엘 님께서 저리 강경하시니…….”

“약혼은 결혼이 아닙니다. 파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요. 라미엘 님께 파혼 같은 건 흠도 안 됩니다.”

윌포프의 눈이 결의로 빛났다.

어릴 적부터 라미엘의 주변은 모친을 제외한 모두가 적이었다. 호의를 가지고 접근하는 이들도 모두 속내가 따로 있었다.

라미엘이 루이반의 모든 것을 삼키며 대중에게 화려하게 나타나기 전까지 모두 그를 서자라며 손가락질했다는 것을 테일러는 잘 알고 있었다.

“이걸로 입으십시오.”

처음으로 라미엘이 사교계에 모습을 선보이는 날, 테일러는 그가 원래 입고자 하던 검은색의 제복을 치우고 새하얀 제복을 내밀며 말했다.

“그리고 무조건 활짝 웃으십시오. 상대가 무슨 말을 해도 웃는 겁니다. 화가 나도 꾹 참으시고 여유롭게 웃으며 응대하셔야 합니다.”

겉으로는 미소 지으면서 뒤에서 베는 것이 수도의 사교계였다. 그 소리 없는 전쟁에서 무기는 ‘입’이었다. 사교계의 전쟁에서 실제로 목숨을 잃는 이는 없지만, 자칫 잘못하면 사회적 명성의 사망을 가져올 수가 있었다.

이제 막 세상에 모습을 보이는 루이반의 서자가 시작부터 불리한 것은 이루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니 시작부터 무너지지 않게 그가 가진 최고의 장점을 이용해서 사람들의 마음을 홀려야 했다.

그 최고의 장점은 바로 천사처럼 아름다운 외모였다. 비록 내용물은 겉모습과 사뭇 다르지만 포장지가 그럴싸하다는 건 큰 이점이었다.

라미엘은 내켜 하지 않았지만 테일러의 말을 들었고, 그 결과 ‘라비던의 천사’라는 별명을 얻고 돌아왔다. 화려한 외모, 격식 있는 언변,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를 챙기며 오히려 자신을 낮추는, 부드러운 미소의 귀공자.

그의 첫 등장은 아직도 ‘순백의 천사가 강림했다’며 회자되고 있었다. 토벌전에서 구르다 왔으니 예의 없고, 거칠고, 귀족 사회를 전혀 모르는 백치일 거라 예상한 사람들의 편견을 완벽히 부순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손가락질받던 ‘서자’이며 ‘루이반의 망신’이라는 사실을 잊었다. 물론 잊지 않은 자도 있었으나 그들은 여론에 순응하지 못하고 입을 잘못 놀린 대가로 사교계에서 조용히 매장되었다. 그렇게 고작 1년 만에 루이반의 천사는 사교계를 집어삼켰다.

바로 옆에서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테일러는 희열을 느꼈다. 아마 윌포프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 역시도 라미엘이 그 어떠한 흠결 없이 우뚝 서길 바랐다.

“사흘 뒤에 그녀가 옵니다. 우리도 손님맞이 준비를 철저히 해야겠습니다.”

윌포프의 말에 테일러가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답했다.

***

르아넬로가는 그야말로 축제 분위기였다. 고생 끝에 수도에 르아넬로의 열차를 개통시켰을 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저택을 몰래 빠져나간 일로 정신 나간 대역죄인 취급받던 레이는 사실 라미엘을 만나고 싶어서 그랬다는 거짓말 한마디에 희대의 사랑꾼이 되었다.

“네가 그래서 그때 그런 극단적인 선택을 하려고 했던 거였구나.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는데 부모라는 사람이 그걸 몰라보고 라이트 가문에 약혼을 밀어붙였으니.”

“아무리 비밀이라고 해도 그렇지, 조금 언질이라도 주지 그랬니. 연애하는 게 무슨 죄라고 그걸 앓듯이 그렇게 꽁꽁 숨기고 있다가 그랬어.”

집안을 말아먹는다, 쟤 때문에 못 살겠다, 르아넬로 부부 만병의 근원, 결혼 못 한 골칫덩이라고 손가락질받던 장녀에게 순식간에 가문을 우뚝 세운 영웅, 유혹의 여신 등등의 수식어가 붙었다. 급기야 마녀처럼 입을 놀린 이유도 라미엘을 믿고 설친 거라는 결론까지 내기에 이르렀다.

아냐, 그거 아니야. 나 그렇게 악조연 같은 건 아니었어.

“……헤어지면 집에는 말하지 말아야지.”

레이는 계약이 끝나면 잽싸게 수도에서 튄 다음에 집안에는 편지 같은 걸로 슬쩍 결별을 알려야겠다고 결심했다.

‘이혼했음을 밝힙니다. 송구스러워 차마 부모님 얼굴을 뵙지 못하고 홀로 조용히 수도를 떠나 살고자 합니다. 찾지 말아 주세요.’

이 정도면 되려나.

리담은 효 사상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어른을 공경해야 한다는 예절도 없었다. 더불어 라비던에선 부모 자식 간의 정이 그리 돈독한 편이 아니었다.

라비던의 귀족은 주된 사회 지배 계층이었고, 그런 귀족에게 있어 자식은 가문의 부와 명예를 이어 갈 혈육으로 만들어진 수단 같은 존재였다. 수도의 세력 가문들에게 일반적인 부모 자식 간의 정을 기대하기는 조금 어려웠다.

르아넬로 집안 역시도 부모 자식 사이가 돈독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편지 한 장 쓰고 사라진다는 것에 대한 미안함이나 죄책감 같은 건 그리 크게 들지 않았다. 편지로 안부나 전하고 살다가 부모님의 화가 풀릴 즈음, 그때가 되면 다시 찾아와도 괜찮을 것이다.

‘앞으로 1년이면 난 자유다.’

그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 다가오고 있다. 레이가 벅찬 가슴으로 미래의 단꿈에 빠져 있을 때였다.

“히에엑. 언니, 언니. 진짜 루이반 마차야…….”

저택 앞에서 함께 마차를 기다리고 있던 동생 피아나가 감탄을 내뱉었다. 오스카와 에이나 부부 역시 작게 감탄했다. 지금은 온 가족이 가문을 드높인 레이알렉시스를 배웅하러 나온 길이었다.

라미엘이 보낸 마차는 크기가 엄청나게 큰 건 아니지만 누가 봐도 부유함이 느껴지는 최고급이었다. 마차에 새겨진 화려한 무늬도 그렇지만 곳곳에 박힌 작은 조각상이 한층 마차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그러고 보니, 저 조각들은 비싼 돈을 얹어 주어도 수개월을 기다려야 하는 수려한 솜씨의 장인이 세심하게 깎아 만들었다고 했었지.

‘전대 루이반 가주가 화려한 것을 좋아했다던가.’

가문을 상징하는 장미와 도마뱀은 루비와 에메랄드로 만들어져 마차 귀퉁이에 박혀 있었다.

‘창틀 마감 저거 진짜 금인가?’

“어머?”

마차의 장식들을 유심히 보던 레이 앞으로 크레하가 다가왔다.

“수박……. 크레하 경이 여기까진 어찌 오셨는지?”

“라미엘 님께 일이 생겨 직접 오지 못하시고 저를 대신 보내셨습니다. 주인님께서 죄송하단 말씀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어머, 얘 뭐야. 이렇게 번듯하게 말하니까 어색하다. 뒷골목 양아치들 같은 말투를 구사했던 것 같은데.’ 알록달록했던 얼굴은 치료 마법이라도 받았는지 멀끔해진 상태였다.

“이쪽은 루이반의 기사단장인 크레하 경이에요.”

뚫어져라 시선을 보내는 가족들에게 레이가 크레하를 소개하자 순식간에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기사단장’이 장녀를 데리러 왔다는 점에서 그들이 흥분하는 것이 느껴졌다.

가족들이 크레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며 말을 붙일 것 같아 레이는 얼른 인사를 했다.

“저 갈게요. 피아나, 간다.”

“잘 가렴, 내 딸.”

“레이, 우리 결혼식 때 보자꾸나.”

“언니, 잘 가!”

리담의 신부는 결혼하는 가문의 생활을 익히기 위해 결혼 최소 한 달 전부터 신랑의 집으로 가서 사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렇게 가문의 습관을 익히고 어느 정도 안주인으로서의 풍모를 갖추면 바깥에 약혼 발표를 하고 결혼식을 올렸다.

신랑의 가문으로 들어가는 순간부터 신부는 온전히 그 가문의 사람이 되었고, 안주인으로 대접받았다.

마차가 르아넬로 저택을 벗어나 점으로 보일 무렵, 레이가 창을 열고 밖을 보았다. 말을 타고 있던 크레하가 마차 가까이로 다가왔다.

“내가 기사단장인 건 누가 말했어요?”

“라미엘 님이요. 마부인 줄 알았는데, 어마어마한 분이셨네요.”

마부였다는 줄 알았다는 말에 크레하가 크하학, 하고 웃었다.

그래, 수박바 얘는 이거지.

“하녀들한테 물어보니까 결혼 때문에 집 떠나기 전엔 잠도 안 오고 그런다던데.”

“다 아시는 분이 왜 이럴까. 내가 못 잤겠어요?”

‘이런 말투, 패기, 정말 마음에 든단 말이지.’ 자신만 보면 잡아먹질 못해 안달하는 집사와 행정관을 말로 조목조목 패고 다닐 레이의 행방이 참으로 기대되었다. 크레하가 킥킥 웃고는 말을 이었다.

“난 그쪽이 참 마음에 듭니다. 루이반에서 잘 버텨 줬으면 좋겠어.”

생각 없이 불쑥 ‘그쪽’이라 예의 없이 칭해 버려서 뜨끔했지만, 레이는 개의치 않아 하는 듯했다. 오히려 그에게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흐음. 뭐, 싫다는 것보단 낫네요. 저기, 그런데 나 궁금한 게 있는데.”

막상 집을 떠나 루이반으로 가고 있자니 궁금증이 생길 법도 했다. 마침 라미엘도 부재중이니 크레하는 레이가 제 주인이나 가문에 대해 궁금한 걸 물어보면 뭐든 다 대답해 줄 생각이었다.

“뭡니까?”

레이가 창틀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이거, 진짜 금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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