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루이반의 집사
루이반 저택이 소리 없는 아우성으로 가득 찼다.
“설마 했는데, 정말이었단 말이야?”
“어떻게 저 영애랑 그럴 수 있어?”
“윌포프 님이랑 테일러 님은 알고 계셨던가 봐. 엄청 평온하시네.”
하지만 시종들끼리 있을 때나 이 사건이 이야깃거리가 될 뿐, 저택 안은 여느 때처럼 평온했다.
“……루이반 굉장하네요.”
루이반 저택 관리자들을 소개받고 저택을 대강 구경하는 데만 반나절이 걸렸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구두 벗고 맨발로 걸을걸.’
레이가 후회할 즈음 집사가 휴식을 권했다.
그렇게 지친 그녀가 응접실에서 잠시 쉬는 중, 레이가 그곳에 있다는 것을 전해 들은 라미엘이 친히 찾아왔다. 사이좋은 두 사람을 연출하기 위한, 계획된 방문이었다.
응접실의 거실에서 집사가 솜씨 좋게 내린 차를 마시며 레이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나 같은 사람이 안주인 된다고 하면 난리 날 것 같은데 전혀 동요가 없네요. 뒤에서 뭐라고는 하겠지만 시종들 관리가 대단한가 보네.”
너무나도 정곡을 쿡 찌르는 말이라 순간 윌포프는 표정을 잃을 뻔했다.
보통 저렇게 생각은 해도 입 밖으로는 안 내뱉지 않나?
“칭찬, 감사합니다.”
어쨌든 칭찬이니 그는 감사 인사로 예를 표했다.
루이반의 집사는 노란빛이 도는, 푸석하고 희끗한 머리카락을 지닌 젊은 남자였다. 처음엔 멀리서 머리카락 색만 보고 당연히 노인일 줄 알았는데 가까이 보니 기껏해야 서른 초반이었다.
보통 이런 큰 가문은 대대로 집안을 지켜 오는 노련한 노신사가 집사장을 하곤 했다. 주변과 비교해 보면 이례적이고 파격적인 인사였다. 처음 집사를 소개받았을 때 윌포프가 집사장이라고 해서 레이는 크게 놀랐었다.
‘하긴 수박바도 기사단장이니.’
루이반은 나이와 전혀 상관없이 능력이 있으면 그대로 차출하는 모양이었다. 좋은 시스템이었다.
“말씀 편히 하십시오.”
레이는 루이반 저택에 도착한 이후 계속 주변에 존대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잠깐 머물다가 훌쩍 사라질 거라 해도,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주인의 반려로 결혼을 위해 루이반에 온 것이었다. 즉, 주인마님과 같은 위치라는 이야기였다.
주인과 동등한 신분으로 온 것이니 시늉만 할지라도 일단 존중은 해야 했다. 루이반이 예비 안주인에게 제대로 된 대접도 하지 않고 쫓아냈다는 소릴 듣게 할 수는 없었다.
“그럴게.”
레이의 대답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라미엘이 입을 열었다.
“레이.”
“네.”
“윌포프는 서른둘입니다.”
“어쩐지 젊어 보인다 했더니. 굉장하네요. 능력이 아주 좋은가 봐요.”
레이의 순순한 칭찬에 윌포프는 조금 우쭐해졌다.
“레이보다 연상이지요.”
이어지는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동작을 멈췄다.
‘라미엘 이 자식 너, 설마…….’
“저는 아직 작위를 받지 못했고, 그렇기 때문에 그대 역시 아직 공작 부인이 아닙니다.”
라미엘이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윌포프는 도통 짐작이 되질 않았다.
분명 맞는 말을 하긴 했는데 갑자기 왜 자신의 나이가 나오며, 그다음 주제는 왜 작위인 것인지? 자신이 모르는 무슨 암호 같은 것인가, 아니면 주인이 제게 의미 담긴 수수께끼를 던지는 것인가.
윌포프는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을 가장하고 라미엘이 뱉은 말의 의미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렇지만 레이에겐 무언가가 있던 모양인지 그녀가 육안으로도 훤히 보일 만큼 이를 악물었다.
‘지금 여자가, 그것도 결혼 예정자인 ‘라미엘 루이반’ 앞에서 대놓고 인상을 구기며 죽일 듯 노려보다니!’
주인이 가장 싫어하는 게 그 어떤 작은 행위라도 자신의 심기에 거슬리는 짓을 하는 것이었다. 이유 없는 반항? 그런 걸 라미엘 앞에서 했다간 목이 잘릴 터였다. 직장을 잃든지, 정말 목숨이 날아가든지 두 가지 경우로 말이다.
그런데 어찌 된 일인지 라미엘은 즐거운 기색이었다.
‘대체 뭔데 이거?’
윌포프가 혼란의 급물살을 타고 있을 때.
“윌포프.”
“네, 주인님.”
“이제 좀 쉬었으니 레이에게 마저 저택 안내를 해 주세요.”
“예, 알겠습…….”
주인의 명령에 자연스레 대답하던 윌포프는 방금 전 들은 말을 상기하며 저도 모르게 말을 멈췄다.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것인가. ‘해 주세요’라니? ‘해 주세요’라니!’
평생 단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던 라미엘의 존대였다. 제 귀가 미친 건가, 주인의 입이 미친 건가.
‘라미엘 님이 대체 왜 이러시지?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었나?’
아니다. 잘못한 게 있으면 라미엘은 가차 없이 화를 낼 사람이지 이런 식으로 빙 둘러 표현하지 않는다.
“……일어날게요.”
이를 바득 갈던 레이는 좀 전의 그 기색을 다 물리치고 비실비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아, 상놈 드립은 치지 말걸.’
라미엘이 뒤끝 있는 사람일 줄이야.
‘하긴 5로베짜리였으니 없던 뒤끝도 생기겠지.’
레이가 쉽게 체념한 것에 비해 사정을 모르는 집사의 정신은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고 있었다.
“윌포프, 마저 안내해 줘요.”
레이의 요청에 윌포프는 잠시 머뭇하고 말을 이었다.
“두 분께서는 절대로 제게 말씀을 높이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이는 하얗게 질려 가는 집사의 얼굴을 보았다.
그녀는 집사와 하루 반나절을 함께하면서, 이 사람은 집사로 일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칼에 찔려도 무표정일 거라 생각했다.
‘집사’라는 직업이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윌포프가 될 것이다 싶을 정도로 집사 그 자체인 남자였다. 표정부터 시작해, 정말 머리부터 발끝까지 품위 있고 격식 있는 사람이었다. 어지간한 일로는 흥분도 안 할 듯 보였다.
다만 예의 바르고 정중한 것과는 별개로 레이는 그에게서 지나치게 형식적인 친절을 받는 기분을 느꼈다. 아무튼 접대 로봇이 아닐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도 했던 그런 집사가 지금 평정을 잃어 가고 있는 게 레이의 눈에도 확연히 보였다.
“높이지 못할 것도 없죠.”
라미엘의 대답에 집사의 안색은 하얗다 못해 파래지기 시작했다.
“라미엘 님, 집사가 쓰러질 것 같은데요.”
보다 못한 레이가 슬쩍 라미엘에게 집사의 난감함을 알렸다. 물론 그가 모를 리 없겠지만 이렇게라도 집사의 숨구멍을 터 주어야 할 것 같았다. 실제로 순간 집사의 얼굴에 ‘살았다’는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익숙지 않아 그럴 겁니다.”
레이는 라미엘의 얼굴에 서린 웃음기를 보았다.
‘웃고 있는 걸로 보인다면 내 착각인가.’
“집사의 표정은 익숙해지고 싶지 않아 보이는데요.”
“그럴 리가요. 정식 작위가 없는 저보다 나이로 보면 더 귀족이신 분인데. 익숙해지겠죠.”
웃는 거 맞구나. 저렇게나 천사같이 온화하고 우아하게 미소 지으면서 돌려 까고 있어. 나를!
레이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지었고, 라미엘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며 태연히 차를 마셨다.
두 사람의 묘한 신경전을 보는 윌포프는 누가 뒤통수를 세게 친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지금 내가 뭘 보고 있는 건가.’
라미엘 루이반과 기 싸움을 하는 여자라니! 듣도 보도 못했다. 아니, 상상으로도 그려 본 적 없는 구도였다.
‘작위 때문에 임시방편을 구한 걸로 알고 있는데, 이게 대체 무슨 그림?’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서로 존대 중이었다.
‘이것도 기 싸움의 일종이었나? 그런 것 같지는 않았는데.’
아니다, 이게 중요한 게 아니다. 제발 누구든 나 좀 살려 주세요!
집사가 마음속으로 온갖 구원자들을 찾아 부르는 사이, 레이가 맞은편에 앉아 있는 라미엘에게 가까이 다가가 귓가에 속삭였다.
“우리 일에 다른 사람 끼워 넣지 맙시다.”
레이는 다시금 집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당신 집사가 죽어 가고 있어요.”
“그렇게 만든 건 레이입니다만.”
라미엘은 놀랍게도 지금의 상황이 즐거웠다. 즐겁다는 감정을 느껴 본 게 너무도 예전이라 맞는 표현인지는 모르겠으나, 자신의 눈치를 하나도 보지 않고 겁내지도, 무서워하지도 않는 사람이 전혀 다른 분야에서 당황하는 모습이 재미있었다.
“……정말이지 지난날의 내 주둥이를 치고 싶네요.”
“풋!”
윌포프는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진, 또 한 번의 믿기 힘든 상황에 입을 쩍 벌리고 다물지 못했다.
‘라미엘 님이 지금 소리 내 웃은 거지?’
라비던의 마녀는 정말 마법이라도 부리는 것인가.
윌포프의 머리카락은 원래 갈색이었다. 그런데 토벌전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받았던 스트레스 때문에 하얗게 세었다. 라미엘이 가문을 안정시키면서 차츰 노란빛이 돌기 시작해서 머지않아 머리카락 색이 돌아올 것이라 여겼다.
그런데 지금은 그 색이 한층 더 하얗게 바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극악의 응접실 존대 사건 이후, 핼쑥해진 집사를 살린 건 라비던의 마녀였다.
“흠흠, 그 건은 우리 둘한테만 적용하는 거로 해요. 본의 아닌 피해자가 생기네요.”
‘그 건’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입도 못 다물고 어버버하는, 생애 최초로 보는 게 분명할 집사의 가련한 모습에 라미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으로 상황은 일단락되었다.
마녀가 자신을 구할 줄이야. 이 역시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윌포프는 남몰래 식은땀을 훔치며 저택 설명의 가장 마지막이자 하이라이트인 레이의 방, 부부 침실로 그녀를 이끌었다.
“이곳이 앞으로 사용하시게 될 방입니다.”
루이반의 안주인이 사용하는 방이라 그런지 여태 소개받은 장소들과 확실히 다른 분위기였다.
넓이야 말할 것도 없고 공간을 채우고 있는 가구나 장식, 창틀의 문양마저도 달랐다. 성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그야말로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루이반에 올 때 타고 온 마차와 분위기가 딱 맞는 그런 방.
방 안 여기저기 번쩍이는 화려한 조각상들이나 보석들이 장식되어 있는데도 전혀 과하다거나 천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화려함이 자연스러운 방이었다. 깔끔하고 단조로운 분위기였던 르아넬로가의 침실과는 정반대였지만, 이렇게 화려한 것도 마음에 쏙 들었다.
레이는 방 가운데를 차지한 침대로 다가가 손으로 살짝 짚어 보았다. 네 사람도 너끈히 잘 수 있을 것 같은 커다란 침대는 손이 푹 잠길 정도로 푹신했다.
“이게 진짜 내 방이야?”
볼까지 분홍빛으로 물들이며 묻는 모습을 보니 진심으로 마음에 든 듯했다.
햇살이 비치는 바다처럼 반짝이는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순수하고 사람 좋아 보이는 인상의 소녀 그 자체다. 심지어 내면도 악평이 자자한 사람치고 무례하거나 악랄해 보이지 않는 듯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직 본모습이 드러나지 않은 건가.’
방심할 수는 없지만 의외인 건 확실했다.
“네. 물론입니다.”
레이의 혼잣말에 윌포프가 대답을 했다. 천진해 보이는 저 미소에 속으면 안 된다. 아직까지 확실히 모르는 일이니까.
“여기 보이시는 이 문을 열면 주인님 방과 연결이 됩니다.”
이른바 부부 침실이었다. 각자의 공간이 따로 있으나 언제든지 서로의 공간에 들어설 수 있는 그런 구조의 방.
“이 문을 열면 루이반 주인의 방이란 거지? 응?”
손잡이가 돌아가지 않고 철컥 소리를 내며 걸렸다. 레이가 몇 번 더 흔들어 봤으나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이거 안 열리는데?”
“주인님이 잠가 두셔서 그럴 겁니다.”
“잠가? 이 문 잠기는 거였어?”
“네. 주인님이 계신 방에서 잠글 수 있게 되어 있습니다.”
“이런 건 여자 방 쪽에서 잠겨야 하는 거 아닌가?”
황당한 구조에 레이가 반문했다.
아무리 상대방이 목숨 귀한 가문의 수장이고 주인이라고는 하나, 이곳은 부부 침실이라는 특수한 장소 아닌가. 부부 둘만 두고 보는 관점에서 문을 잠글 수 있는 권한을 가져야 하는 건 아내 쪽이어야 했다.
“아직 약혼 전이시지 않습니까.”
‘아하. 그러니까 나도 루이반의 수장을 노릴 수 있는 괴한 중에 하나라 이거지?’ 이렇게 생각하니 묘하게 기분이 나빴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직접 데려온 사람인데 이런 취급이라니.
윌포프의 접대는 깍듯했다. 예의를 차렸고, 졸부 출신인 그녀를 무시하거나 비하하지도 않았다. 마녀라는 악명이 있다고 해도 그걸로 초장부터 편견을 가진 접대를 하진 않았다.
다만 이 사실로 레이는 윌포프가 자신을 루이반에 온 ‘손님’으로서 존중은 하되 믿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눈치챌 수 있었다.
루이반에서의 앞으로 1년.
라미엘보다 윌포프가 더 어려울 수도 있겠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