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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2화 (12/160)

12화. 루이반에서의 하루

얼굴로 쏟아지는 햇빛에 레이가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전날 밤에 또 창가에서 놀다가 커튼 안 치고 잤던가.’

“으윽. 눈부셔.”

이불 속으로 구물구물 몸을 집어넣으려는데, 감긴 눈으로도 얼굴에 쏟아지던 빛이 가신 것이 느껴졌다. 누군가가 커튼을 닫아 줬다는 이야기였다.

‘피아나가 이른 아침부터 방에 놀러 왔나?’

레이가 잠결에 생각을 하는 찰나.

“마님.”

작게 누군가를 부르는 낯선 목소리에 잠이 달아났다.

“누, 누구세……. 아. 아아. 맞다. 로사, 안녕. 안나도 안녕.”

루이반에서 맞이하는 첫날 아침이었다. 지난밤에 소개받은 전담 하녀인 로사가 커튼가에서 레이를 부르고 있었다.

“주무시는데 깨워서 죄송합니다. 주인님께서 마님 걱정을 하셔서요. 아침도 거르셨는데 점심 식사는 드셔야 할 것 같아 실례를 범했습니다.”

안나의 말에 레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점심이라고?”

“네.”

그녀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키며 로사에게 방 안의 커튼을 다시 열어 달라고 부탁했다.

촤르륵.

커튼 너머로 한낮의 해가 반짝이고 있었다.

어쩐지 푹 잘 잤다는 느낌이 들더라니만 많이 자서 그랬나 보다. 하루 꼬박 이어졌던 저택 구경이 은근히 힘들었던 모양이다.

‘하긴 집이 보통 컸어야지.’

게다가 루이반 저택의 장식과 상징물들에 관한 설명과 그 역사까지 들어야 했다. 그야말로 혹독한 신고식이었다.

어제 저녁 식사를 한 뒤, 방으로 돌아와 목욕을 하고 하녀들을 물린 후, 낑낑대며 무거운 소파를 겨우 문 앞까지 밀어 옮기고 침대에 쓰러지듯 누운 기억이 끝이었다. 침대에 머리가 닿자마자 그야말로 기절하듯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어머, 이게 왜 여기 있지?”

부부 방을 나누는 문 앞에 묵직한 일인 소파가 놓인 것을 본 로사가 안나와 함께 그것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았다.

저건 레이 나름의 안전 장치였다. 혹시나 야밤에 라미엘이 들어올지도 모르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방어막을 쳐 둔 것이다. 이쪽에서 문이 안 잠기니 이런 물리적 장치를 추가할 수밖에.

“마님께서 일부러 놓아두신 건지요?”

안나가 설핏 당황이 서린 레이의 눈동자를 보며 물었다.

“아, 음, 그게. 어제, 그러니까…….”

저택 사람들에게 두 사람은 열렬한 연애를 하는 사이로 되어 있었다. 옆방 남자를 막기 위해 제 힘으로 최대한 옮길 수 있는 무거운 걸 갖다 두었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었다.

“밤에 라미엘 님하고 이야기를 나누느라. 그, 목소리를 좀 더 잘 듣고 싶어서!”

괴상한 핑계였다. 이제 곧 부부가 될 예정인 사람들인데 한 방에서, 아니 한 침대에서 해도 될 일이 아닌가.

“밤새 이야기라니. 그래서 늦게 일어나셨던 거군요.”

이 맹한 대답에 로사가 속아 넘어갔다. 어쩌면 그저 속아 주는 척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어찌 되었든 대충 위기는 넘긴 셈이었다.

레이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며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이.”

그때 중간 문이 벌컥 열리며 라미엘이 모습을 보였다.

‘저 문 라미엘 방 쪽으로 열리는 거였구나.’

레이가 있는 방에서 밀고 라미엘이 있는 곳에서 당기는 방향. 그러니까 간밤에 소파를 옮긴 건 뻘짓이었던 게다.

“이런, 아직도 침대 안에 있다니.”

라미엘의 말에 가까이에 있던 안나가 레이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아침에 주인님께서 마님을 기다리셨어요.”

‘왜 날 기다리지?’라는 물음이 머릿속에 떠올랐다가 급히 지워졌다. 자신과 그는 ‘사랑’으로 맺어진 예비부부이므로 저택 안에서는 그럴싸한 시늉을 해야 했다.

“피곤해서 못 일어났어요.”

“알아요. 레이가 곤히 잔다고 해서 그냥 두라고 했으니까.”

라미엘이 레이에게 다가오자 하녀 둘이 눈치 빠르게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그리고 방에 단둘이 남자마자 라미엘의 얼굴에 희미하게 서려 있던 미소는 씻은 듯 지워졌다.

“옷 갈아입고 나갈 테니, 라미엘 님 먼저 식사하세요.”

“잠옷 차림으로 있는 거 부끄럽지 않습니까?”

흰 원피스 형식의 잠옷이었다. 천이 얇아 밝은 곳에서 보면 실루엣이 조금 비치긴 하나 속이 들여다보인다거나 어느 한 구석이 툭 트여 있어 살갗이 드러나거나 하지는 않는, 평범하디평범한 옷이기에 부끄럽지는 않았다.

“이게 왜요? 벗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게 아니라, 지금 이 시간까지 게으름 피우는 게 창피하지 않느냐는 말이었습니다만.”

“라미엘 님께서 어제 윌포프랑 같이 ‘루이반 저택의 대단함’ 여행을 못 해 봐서 그래요.”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신고식이었어. 새내기 괴롭힘이라고. 누가 복도 조각상 나부랭이의 역사를 궁금해하냐고. 금인 건 알겠는데요, 저는 그걸 훔칠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윌포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마다 댓글 달 듯 대답을 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꾹 참았다. 나중엔 힘이 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날 지경에 이르렀지만.

“사람이 이야길 듣다 죽을 수도 있다는 걸 믿을 수 있겠던데요.”

라미엘이 말을 툭 던졌다.

“그런데 어쩌지?”

“뭐가요?”

“오늘의 주된 일정은 루이반의 역사 공부가 될 것 같은데요.”

“네?”

“윌포프가 당신을 철저하게 루이반의 사람으로 교육시킬 모양입니다. 서재에 책 쌓아 놓은 거, 아직 못 봤겠군요.”

아무리 임시변통의 아내라 해도 엄연히 루이반의 사람으로서 ‘루이반’ 타이틀을 달고 다닐 터였다. 스쳐 지나갈 사람일지언정 루이반인 이상 윌포프가 그냥 놔둘 리 없었다.

“당신, 글은 읽을 줄 알죠?”

결혼 후 남편을 도와 가문의 안살림을 책임지는 일도 종종 있어 귀족 영애들은 대부분 글을 읽을 줄 알았지만, 보통 여자들은 문맹인 경우가 많았다.

신흥 귀족들이나 부를 축적한 집안의 여식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이 추세로 슬슬 자리를 잡고 있으나, 보통의 사람들은 여성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다.

“아뇨. 저 까막눈이에요. 문맹이 사람으로 현신한다면 그게 바로 접니다.”

부친을 도와 사업을 진행하던 여자가 글을 모를 리는 결코 없다. 게다가 얼마 전 문서로 작성된 계약서까지 주고받았다.

레이의 말은 허튼소리임이 분명했지만, 저렇게까지 질색을 하며 아니라고 하니 웃음이 절로 나왔다. 라미엘은 웃음이 흔한 남자가 아니었음에도.

“점심 든든히 드셔야 할 겁니다. 공부하는 것도 꽤나 열량을 많이 소모하니까요.”

“아악, 아아아!”

레이가 고통으로 몸부림치는 소리를 들으며 라미엘은 방을 나섰다.

***

우리 집안 족보도 모르는데. 내 조상이 뭘 했는지도 관심이 없는데. 선선대 루이반 공작이 무장이었다는 거 알고 싶지 않아요.

‘루이반은 대단하다’ 계열의 세뇌 교육을 받는 것 같았다. 레이는 마음속으로 계속 윌포프의 말에 트집을 잡았지만 차마 입 밖으로 내지는 못하고, 그저 낑낑대는 강아지의 표정으로 넋이 반쯤 나간 채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이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습니다.”

길고 혹독했던 루이반 역사 교육이 끝났다. 끝맺는 말이 너무 반가워서 눈물이 질금 나올 정도였다.

낑낑대던 강아지의 얼굴이 주인이라도 만난 것처럼 활짝 펴지는 것을 보며 윌포프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동시에 의문을 품었다.

‘대체 어쩌다가 마녀라는 오명이 붙었을까?’

레이알렉시스와 만난 지는 이제 고작 이틀째지만 사교계에 퍼져 있는 악명처럼 그녀는 무례하지도 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오만한 다른 귀족들보다 사람에 대한 예의가 있고 똑똑했다. 세간의 평가를 생각하면 놀라운 사실이었다.

뿐만 아니라 레이알렉시스는 집안 하인들에게도 이따금 존대를 하곤 했다. 물론 그럴 때마다 하인들은 화들짝 놀랐지만. 주인인 라미엘조차도 존대를 해 주는 마님인데 어찌 감히 자신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단 말인가.

게다가 무표정이 기본인 주인이 마님을 보면 그 기세를 누그러뜨리고 미소를 짓는다. 주인도 휘어잡은 예비 마님의 위력에 하인들은 더더욱 몸을 사려야 했다.

실제 그 현장에 있지 않았다 해도 다들 루이반에 닥쳤던 피의 숙청 기간을 잘 알고 있었다. 괜히 주인의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했다가 실업자가 되든지, 목숨을 잃는 선택의 기로에 설 순 없었다.

원래도 제 할 일 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그들은 더욱더 깍듯하게 루이반 마님을 모셨다.

“내일은 내가 일정이 있어. 라미엘 님하고 나갈 거니 그리 알아.”

레이가 사전에 집사의 교육을 차단했다. 사실 라미엘하고 협의된 스케줄은 없었으나, 없어도 만들어야 했다. 분위기상 이 교육은 오늘로 끝이 아닌 듯했기에.

“내일 주인님께선…….”

“있어! 나랑! 나와 개인적인 일이 좀 있네!”

집사가 주인의 일정을 모를 리는 없겠으나, ‘마님’이라는 변수를 넣으면 될 일이다.

레이는 윌포프가 뭐라 말을 붙이기도 전에 뛰듯이 서재를 벗어났다. 빨리 라미엘을 찾아야 한다!

“라미엘 님!”

우렁차게 부르고 나니 눈앞의 윌포프와 주변의 하인이 생각났다. 레이는 급히 지난번에 만든, 공개석 전용 라미엘의 애칭을 불렀다.

“라엘! 어디 있어요?”

그녀는 미친 듯이 라미엘을 부르며 그를 찾아 나섰다.

‘지금 당장 라미엘과 일정을 만들리라!’

집사가 뒤에서 놀란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당연히 레이는 알지 못했다.

‘지금 뭐라고……. 내가 뭘 들은 거지?’

귀부인은 그렇게 크게 소리치면 안 된다는 예절 교육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믿기지 않는 단어가 귀에 들렸다.

‘레이알렉시스가 주인님을 분명 ‘라엘’이라 부른 거지?’

멍한 정신의 윌포프의 귀에 다시금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라엘!”

주인은 작위를 받으면 레이알렉시스를 정리하겠다는 뉘앙스로 말을 했었다. 이른바 ‘계약 결혼’이라는 소리였다.

그런데 대체 어째서 저 가짜 안주인이 주인의 아명을, 그것도 오래전에 라미엘의 모친이 부르던 그 이름을 부르고 있는 것인가?

‘라미엘 님이 저 호칭을 쓰라고 허락했을 리가…….’

없다고 결론을 내리자마자 윌포프는 멍한 정신을 차리고 레이의 뒤를 쫓아 달렸다. 저건 루이반에서 거의 금기된 거나 다름없는 사어다. 마녀의 입에서 나올 만한 단어가 절대 아니었다.

“잠시만 거기 서 주십시오!”

저택 안에서 뛰는 집사라니. 루이반의 하인들은 그 놀라운 광경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윌포프는 고상하고 품위 있는 걸음걸이로 빨리 걷되 어지간해서는 뛰지 않는 사람이었다.

“어머나.”

레이는 집사가 쫓아오는 것을 알자마자 달리는 속도를 더 높였다. 보나 마나 라미엘을 만나기 전에 내일 공부 스케줄을 잡으려는 게 분명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잡히면 죽는다!’

일단 집사를 피해서 좀 숨자는 생각으로 그녀는 가장 가까이에 보이는 문을 벌컥 열었다.

“어이구, 여긴 어디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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