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드레스와 검
“어이구, 여긴 어디래?”
저택의 무수한 방 중에 하나가 아니라 밖이 보였다. 문을 열자마자 바로 바깥은 아니고, 열 걸음 정도 걸어 나가야 완전히 밖으로 나가는 짧은 통로였다.
‘어쩐지, 여느 문보다 크고 무겁더라니.’
어제 집사가 설명하길, 연무장으로 연결되는 문이 두어 개 있다고 하더니 이게 그것인 듯했다.
그 너머로는 너른 터가 있는데, 장정들 여럿이 엉켜 있었다. 훈련이 있어 이 문을 잠그지 않고 열어 둔 모양이었다.
“어?”
훈련을 하는 이들 중 단연코 눈에 띄는 인물이 있었다. 날리는 흙먼지를 혼자서 다 피해 가는, 후광이라도 단 것처럼 빛이 나는 단 한 명.
“……라미엘.”
훈련장 상석으로 보이는 위치에서 그가 크레하를 상대로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둘이 대련하는 모습은 마치 예술 영화에 나오는 검무 같은 게,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흔히 볼 수 없는 어렵고 힘든 검술을 최강자들이 직접 선보이는 귀한 광경에 기사들은 고된 훈련 와중에도 시선을 둘에게 던지고 있었다.
하지만 레이는 무술, 무예 쪽으로는 전혀 지식이 없기 때문에 눈앞에 보이는 두 사람의 대련에 얼마나 많은 기술들이 부딪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또 실제로 칼을 들고 싸우는 모습을 보는 것이 처음이기도 해서 현실감이 느껴지질 않았다.
다만 잘생긴 남자 둘이서 검을 맞대는 모습에 루테인이라도 털어 먹은 것처럼 눈이 환해짐을 느낄 뿐이었다.
‘라엘, 아, 이게 아니지. 라미엘 님도 크레하처럼 윗옷을 벗고 있었으면 더 좋았을 텐데. 음, 더 가까이 볼 수 없나.’
레이는 연무장 가까이로 발걸음을 옮겼다. 통로를 벗어나 근처 나무까지 다가가 가까이서 보이는 두 사람의 모습에 숨을 삼켰다.
라미엘의 옷은 땀에 젖어 찰싹 몸에 달라붙은 탓에 대단한 섹시미를 풍기고 있었다. 반면 웃옷을 아예 벗어 던진 크레하의 상체 근육들은 움직일 때마다 터질 듯 불끈거렸다.
“크흡. 전자기기 없는 삶도 좋은 거였어.”
시력이 좋아서 정말이지 너무도 다행이었다. 한국에서처럼 아침에 눈 떠서 저녁에 눈 감기 직전까지 들여다보던 스마트폰 중독의 삶이었다면 이처럼 선명하게 보질 못했으리라!
‘다시 돌아온 보람이 있네.’
원래 세계로 돌아와서 전자기기 없는 삶이 숨 막히게 불편했는데 리담 나름의 장점이 이제야 발견된 기분이었다.
“어라?”
멍하니 두 사람의 대련을 바라보던 레이가 문득 의아한 눈빛을 했다.
“이상하다. 저거 아무리 봐도 크레하가 밀리는 걸로 보이는데.”
주인이라 봐주는 건가? 다른 기사들 눈도 있고 하니까.
‘근데 원래 검술 대련이라는 게 저렇게 살벌한 건가? 모르는 내가 봐도 누구 하나 죽어야 끝나는 것처럼 하네.’
레이가 자문자답으로 생각을 하는데 수세에 몰리던 크레하가 눈을 번뜩이며 히죽 웃는 게 보였다.
“수박바, 쟤 지금 웃고 있는 거야?”
저런 경우 한국에서 많이 봤다. 약간 돌아이 재질 낭낭한, 여주 처돌이 남주가 악조들 처단할 때나 보이는 눈빛 아니더냐. 왜 지금 이 순간, 여기가 한국이 아닐까.
‘미친. 금손님, 제발 빨리 오셔서 이거 연재해 주세요.’
레이가 있을 수 없는 일을 기원하는 순간.
챙!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요란하게 동강 난 검이 레이에게 날아들었다.
검 따위가 부러진 것으로 라미엘이 흔들리거나 당황할 리는 절대 없었다. 그 누구보다도 크레하가 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라미엘의 측근들 그 누구도 모를 일이겠지만, 크레하가 라미엘과 동질감을 느꼈던 지점이 이 부분이었다. 수세에 몰릴수록 더 광기에 젖는다는 것.
하지만 순간적으로 스친 라미엘의 눈에는 놀라움이 어려 있었다.
‘절대 이럴 리 없는 사람인데.’
게다가 반격은커녕 움직임을 멈추며 부러진 검을 바닥에 던지기까지 했다. 대련을 잊은 듯한 행동에 크레하는 무슨 일인가 싶어 라미엘의 시선을 좇아 뒤를 돌아보았다.
연무장 입구 쪽 나무 근처에서 레이가 눈을 깜빡이며 굳어 있었다.
‘저분이 여길 왜 왔지?’
“다친 건 아닌 것 같고…….”
라미엘의 말에 자세히 보니 그녀의 발치 바로 앞에 부러진 검날이 꽂혀 있었다.
간발의 차였다. 레이가 조금이라도 몸을 숙였거나, 한 뼘이라도 더 앞으로 걸어 나왔다면 그대로 부러진 칼이 몸에 박혔을 터였다.
두 사람이 갑작스레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본 기사들도 전부 둘의 시선을 좇았다.
“마님이시잖아?”
누군가가 작게 내뱉은 소리에 기사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하는데, 레이가 부러진 검을 뛰어넘고는 다다닥, 두 사람을 향해 빠르게 달려왔다.
“레이, 여긴 어쩐 일로…….”
“괜찮아요?”
라미엘의 말을 뚝 잘라먹은 것도 모자라 그녀는 그의 주변을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어디 다친 데 있는 거 아니죠?”
레이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라미엘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멀쩡해요.”
라미엘이 괜찮다는 말을 하고 나서야 레이의 인상도 풀렸다.
“사람을 그렇게 못살게 굴면 어떡해!”
“예, 예? 저요?”
돌연 레이의 질타를 받게 된 크레하가 당황한 얼굴로 손바닥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물었다.
“그럼 경 말고 또 누가 있는데? 우리 라엘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
레이의 입에서 연타로 흘러나온 말은 곁의 두 남자에게 각기 충격을 주었다.
크레하는 당황했다.
이게 웬 미친 소리인가.
여보세요, 댁의 남편은 이 이누아 대륙의 그 누구도 다치게 못 할 거요.
그리고 대련하는 거 못 봤어? 죽일 듯이 몰아붙여서 숨통 조이던 거 이쪽이 아니라 라미엘 님이라고!
물론 이 말을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아무리 무서울 거 없는 인생을 산다지만 적어도 할 말 못 할 말 구분은 했다. 이전에 용병단을 굴려 먹을 때 깨우친 진리였다. 입은 무거울수록 좋다는 것.
“……레이는 괜찮나요? 레이야말로 놀랐을 텐데.”
라미엘이 물었다. 심지어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훈련을 방해했다고 으르렁거릴 줄 알았는데, 주위에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지 다정함을 연출하는 모습에 크레하는 속으로 박수를 쳤다.
‘멀리 있는 기사들에겐 어차피 들리지도 않을 텐데 완벽히 연기하고 있어!’
라미엘은 ‘다정함’과는 상극인 남자였음에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상냥해 보였다.
“전 순발력이 좋아서 괜찮아요.”
그게 무슨 개소리야.
크레하는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는 말을 꾹 참아 삼켰다.
“당신 한 발자국만 움직였어도 크게 다쳤어.”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자신의 몸 여기저기를 확인해 보기 시작했다.
“어? 정말이네. 치마 찢어졌다.”
레이의 말을 들으니 라미엘은 기가 찼다.
기척이 너무 약해 그녀가 여기에 와 있는 줄도 몰랐다. 이전에도 생각했던 바지만 작고 약해서 아무리 이를 세우고 덤벼들어도 아무 타격도 없을, 그런 작은 동물 같은 여자.
그런 여자는 자신과 크레하의 대련을 보고 칼이 부러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제가 밀리고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이런 방면에 아무런 지식도, 보는 눈도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야말로 저에게 ‘무해’ 그 자체인 여자가 오히려 자신을 걱정하고 있었다. 진심 어린 눈빛을 하고 크레하를 몰아붙이면서.
심지어 레이는 라미엘을 지키려는 것처럼 그를 자신의 뒤로 두고, 자연스레 반걸음 정도 앞서서 크레하와 대적하듯 서 있었다.
라미엘이 평생 겪어 본 적 없는 ‘보호’였다. 자신을 낳은 모친도 어린 자식의 뒤에만 서 있었지, 먼저 나서서 보호해 준 적은 없었다.
‘이것도 부부 연기 중 하나일까?’
그러나 연기라기에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동작이었다.
─우리 라엘.
억지로 집어넣은 듯한, 어색하기 짝이 없는 애칭이랑은 전혀 다르다.
“경, 내 드레스 물어내.”
“네?”
“경이 라엘의 검을 부숴서 이렇게 된 거잖아. 원인 제공자가 보상해야지.”
“그게 무슨 억집니까? 칼이 부러질 정도로 몰아붙인 건 라미엘 님인데요. 나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기사단장이 퍽이나 민간인을.
레이가 만약 라미엘이 들으면 헛웃음을 토하게 할 말을 하려는데, 그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늘 훈련은 이대로 끝이다. 해산해.”
해산 명령에 기사들이 살았다는 얼굴을 했다.
라미엘이 직접 참가하는 훈련은 그야말로 지옥 그 자체였다. 하루를 꼬박 지독하게도 굴려 먹어서 훈련이 끝나면 전쟁이라도 치른 것처럼 목숨이 간당간당한 기분이 들 지경이었는데, 예상 못 한 마님의 난입으로 저녁 훈련이 모두 취소되었다.
레이는 지금 이 순간 루이반 기사들의 구세주였다.
“들어가죠. 레이, 저녁 식사는 하고 온 겁니까?”
“아뇨, 이제 먹을 예정이에요.”
진짜 부부 같은 모습으로 연무장을 벗어나는 두 사람을 보며 기사들은 환호성을, 크레하는 경악을 내질렀다.
“아, 징그러워. 언제 애칭까지 만들어 붙인 거야?”
그가 고개를 저었다.
***
저택에 들어오자마자 윌포프가 두 사람을 반겼다. 내내 레이를 찾아 저택을 헤맨 듯한 모습이었다.
“주인님과 계셨던 겁니까.”
집사의 질문에 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집사 뒤로 하녀 넷이 있으니 지금은 공개 석상이다. 레이는 라미엘의 눈치를 빠르게 한 번 슥 보고는 말했다.
“라엘과 함께 저녁 먹을 거니 이 사람 목욕 준비부터 빨리 해 줘, 집사.”
윌포프는 레이의 호칭에 속으로 움찔하며 라미엘의 기색을 살폈다.
라미엘이 버젓이 옆에 있음에도 레이는 그를 ‘라엘’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다. 놀람, 당황, 불쾌, 의아, 황당 중 그 어느 것도 해당하지 않는 듯했다.
‘정말 저 말도 안 되는 호칭이 상호간에 합의된 거였단 말이야?’
“라엘, 우리 내일 일정이 있어요. 알고 있죠? 슬슬 서로에 관한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집사가 집요하게 공부를 시키기 전에, 레이는 본래 목적인 ‘일정 만들기’에 돌입했다. 그녀는 맞은편의 윌포프를 등지고 서서 라미엘의 얼굴을 보며 목소리를 내지 않고 입을 뻐끔거렸다.
계. 약. 금.
“아, 그거.”
“내일이라고 말해 줘요. 제발, 제발!”
레이는 윌포프가 듣지 못하게 속삭이며 사정했다. 오늘 하루 루이반의 집사가 임시 마님을 어지간히도 굴려 먹었나 보다.
루이반의 주인인 자신에겐 그렇게나 배짱 좋게 대하는 레이가 집사에게는 어쩌질 못하는 모습이 이상하게 재밌었다.
첫 만남부터 묘하게 웃음을 건드리는 무언가가 레이에게는 있었다. 비웃는 게 아니라 뭔지 모르게 웃음이 나올 법한 그런 상황들 말이다.
“먼저 식당으로 가 있어요. 금방 갈 테니.”
그렇게 말하면서 라미엘은 집사와 자기 방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