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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4화 (14/160)

14화. 계약금

식사 후. 라미엘의 손짓에 집사가 레이에게 정중히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게 뭐예요?”

두툼한 서류 뭉치를 받아 든 레이가 라미엘에게 물었다.

“루이반의 부동산 목록입니다.”

그 말에 레이가 다시금 제 손에 들린 묵직한 서류 뭉치에 시선을 주었다.

“그대가 좋아할 것들로 일단 추려 왔는데, 이 중에 마음에 드는 게 없으면 이틀 내로 전체 명단 정리한 걸 줄게요.”

라미엘의 말에 레이는 놀라서 아무 말도 못 했다.

이렇게 두꺼운데도 전부가 아닌 일부라니. 건국 시기부터 황제를 도와 왔던 가문의 역사는 이 두툼한 재산 목록에 잘 나타나 있었다.

선대 루이반이 무능하여 후작위를 받아 가문을 이끌게 되었다 해도, 현 황제에게 ‘아틸’이란 수식까지 하사받은 사람이 서자여도 루이반은 루이반인 것이다.

집사에게 어제 내내 들었던 루이반 가문의 대단함이 이제야 실감되는 기분이었다.

“건물에 대한 설명까지 적혀 있는 거니 레이가 읽어 보고 마음에 드는 후보를 골라요.”

감동으로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은 입을 레이가 겨우 막았다.

‘루이반이여, 영원하라!’

식사 전에 집사와 사라졌던 이유가 이걸 정리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다.

서류를 대강 훑어보니 루이반은 여덟 개 도시 어디 한 곳 빼먹지 않고 구석구석 많이도 건물을 보유하고 있었다. 유서 깊은 귀족 가문이다 보니 수도에만 집중할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라미엘은 서류 더미를 펄럭이며 눈을 반짝이는 레이를 흥미로운 얼굴로 관찰하고 있었다.

레이는 무언가를 좋아하면 바로 티가 났다. 안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그녀에게 큰 관심을 두지 않았음에도 보였다.

밥 그리고 돈.

이 두 가지는 확실했다.

아마 레이는 본인이 지금 미소를 짓고 있다는 것도 인지 못 할 게 분명했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웃음이라는 티가 났다.

그런데 어쩌나.

“레이.”

그의 부름에 레이가 시선을 돌려 라미엘을 바라보았다.

“네.”

“그것들에 대한 설명은 윌포프가 잘 해 줄 겁니다.”

“……네?”

“여기 집사가 설명해 줄 거라고요.”

왜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아니, 이 양반아, 내가 집사 공부가 싫어서 계약금 핑계로 도망가는 건데 그걸 던져 버리면 어떡하시나.

“이렇게 설명이 잘 되어 있는데 왜 힘들게 집사를 부려 먹으려 들어요? 제가 알아서 할게요.”

퍽이나 윌포프를 위한다고 하지만 레이의 눈동자는 ‘너 나한테 왜 그러냐?’ 하고 묻고 있었다. 그 직설적인 눈빛에 라미엘은 웃음이 나왔다.

그는 평생 자신의 속내, 감정을 꼭꼭 감춘 사람들만 상대해 왔다. 어릴 적 자신과 모친을 담당하는 하인들부터 지금의 귀족들까지.

뒤에서 루이반의 수치라고 쑥덕이던 그들은 제가 처음 대중에게 공개적으로 모습을 보이던 날 만면에 진심 같은 미소를 지으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눈빛으로 본심을 흘리던 하인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완벽한 눈이었다. 그래서 처음엔 속아 넘어갈 뻔도 했었다.

‘이게 귀족사회인가.’

그가 느낀 첫 감상이었다. 다들 속에 무언가를 품고 있었지만 결코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데 레이알렉시스는 그런 수도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녀가 귀족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었다. 소위 ‘신흥 귀족’이라 칭해지는 졸부들도 귀족들처럼 그럴싸한 가면을 썼다. 오히려 사람들 상대로 장사를 하는 이들이기에 조금 더 노련한 가면을 쓰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처음엔 레이 역시 그런 인물 중 하나인 줄 알았다. 사교계에 마녀 같은 여자라고 좋지 않은 별명과 소문이 붙어 있는, 사교계 나름의 ‘유명인’이었으니까.

언뜻 본 레이알렉시스의 눈빛은 여느 귀족들처럼 감정 없이 냉랭했다. 그녀 역시 별다른 특징도 없는, 그저 그런 신흥 귀족 중 하나였다. 라미엘이 신경도 쓰지 않을, 평생 전혀 접점도 없을 그런 사람.

“그래도 난 지질하게 뒤에서 험담은 안 해요.”

레이가 내뱉는 말엔 독이 박혀 있었다. 듣는 자의 뇌리에 스미는 독이었다.

어투가 거칠고 귀족들이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써 가며 막말을 내뱉었지만 반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레이알렉시스가 사실을 명확히 직시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녀는 사람들이 보이면 그들에게 다가가 무표정한 얼굴과 거친 언어로 입을 다물렸다.

제삼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꽤나 통쾌한 장면이기도 했다. 그토록 체면 따지고 근본 없다며 그녀를 무시하던 귀족들이 막상 당하면 입도 벙긋 못 했으니까.

‘레이알렉시스’는 라미엘이 처음 겪어 보는 종류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와 뭘 어떻게 해 보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그날 밤 바뀌고 말았다.

사람들의 질척거림에 질리고 지친 라미엘이 몰래 테라스로 도망치듯 자리를 벗어났을 때, 당연히 혼자 있을 줄 알았던 곳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이 정도로 난리 부렸으니 나한테 결혼하란 말 절대 못 하겠지?”

신나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레이알렉시스의 목소리가 들렸다.

“뭐, 아주 본심은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부터 좀 살아야지.”

그녀가 내뱉는 의미심장한 말에 테라스를 나가려던 라미엘의 걸음이 멈췄다.

“그리 심한 말한 것도 아니었잖아? 오늘부로 난 아마 사교계에서 제명될지도 모르니 앞으로 볼 일 없을 거야.”

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했다. 자신이 직면한 문제에 이 여자를 돌파구로 이용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겼다. 이전에 겪었던 계약 결혼 사건이 머릿속에 자동 재생되었다.

그가 그렇게 재빨리 판을 짜는 사이.

“이제 난 개도 안 데려갈 거야.”

마치 나라를 정복하기라도 한 것 같은 즐겁고도 뿌듯한 목소리에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현재, 개도 안 데려간다는 레이알렉시스가 눈빛으로 저를 욕하고 있었다.

집사의 손에 식당을 끌려 나가면서.

***

헬라로 가는 르아넬로 열차의 1등석 칸.

호화스러운 로열석 응접실은 천장에 마력석으로 만든 고급스럽고 화려한 샹들리에가 매달려 은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라미엘의 뒤편으로 보이는 문손잡이는 섬세하게 조각된 장식품이었고, 그 문을 열면 세 사람은 너끈히 자고도 남을 커다란 침대가 있는 방이 나온다. 침대에 달린 고급스러운 캐노피는 수도의 유명 장인이 손수 짠 것이었다.

침대방 안쪽으로는 우아하고 커다란 욕조가 있는 욕실도 마련되어 있었고, 식사 시간 때에는 열차 주방 칸에 있는 특급 요리사가 음식을 만들어 자리까지 배달해 준다.

값비싼 1등석 열차는 그야말로 달리는 저택인 셈이었다.

같은 열차인데도 좌석만 빽빽하게 있는 5등석 칸하고는 비교가 되질 않았다. 물론 가격 역시 그랬다.

한국에 있던 시절의 비행기와 비교하자면 퍼스트클래스와 이코노미클래스 같은 개념이지만, 그 차이보다 더 큰 것 같았다. 아무리 퍼스트클래스가 좋다고 해도 호텔방이 딸려 있는 건 아니었으니까.

“레이, 아직도 화났습니까?”

그리고 이런 고급 저택의 일부분 같은 화려한 1등석 안에서도 결코 빛이 바래지 않는 남자가 생글생글 웃으며 레이에게 삐쳤냐 묻고 있었다.

“라미엘 님, 제가 구해 달라는 눈빛을 그렇게 보냈는데도 싹 무시하시더군요.”

레이는 눈에 독기를 품고 씩씩대고 있었다.

열차를 타기 위해 루이반을 떠날 준비를 하기까지 레이는 윌포프에게 붙잡혀 다시금 ‘루이반 저택의 유구한 역사’ 중 별장 편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굳이 배울 필요가 없는 쓸데없는 지식이었다. 아마 제가 ‘진짜 루이반의 안주인’이 된다 하더라도 필요 없을 게 분명했다.

“이미 서류에 다 나와 있는 설명을 굳이 집사에게 들으란 이유는…….”

계약금 지불의 날이었다.

두 사람의 다정한 커플 놀음을 슬슬 바깥에 알리기 위해 라미엘도 레이의 계약금 정산 여행에 동참했다.

“이유는 뻔해요.”

라미엘의 말을 툭 잘라먹고 레이가 툴툴거렸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누구도 제 말을 이렇게 끊고 들어온 적은 없었다.

“라미엘 님께서 절 싫어하니까 집사가 괴롭히는 거죠.”

예상외의 대답에 그의 미간 주름이 펴졌다.

‘내가 이 여자를 싫어하는 티를 냈다고?’

라미엘은 사람들을 대할 때 언제나 대외용 가면을 쓰고 있었다. 어릴 적부터 쌓아 온 일종의 습관, 혹은 버릇이었다. 살아남기 위해 자동으로 익힐 수밖에 없었던 일이기도 했다.

시간이 흐른 지금, 이 가면은 꽤나 견고해져서 최측근이 아닌 이상에야 그의 진짜 표정을 보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었다.

라미엘은 레이알렉시스라는 인물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건 아니고, 굳이 따지자면 약간의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말 그대로 흥미일 뿐, 레이알렉시스는 라미엘에게 있어 작위를 위한 계약자로 그야말로 무맛, 무색, 무취의 인간이었다.

그렇기에 레이 앞에서 가면을 벗을 리가 없었으니 제 본색을 그녀가 알아차릴 순 없을 터였다.

“레이가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궁금하네요.”

“집사와 행정관이 나한테 하는 거 보면 알겠던데요.”

의외의 대답이었다. 저 두 사람이 등장할 줄은 몰랐던 그는 레이에게 계속 말해 보라는 듯 눈빛을 보냈다.

“엄청 표면적이고 형식적인 것만 알려 주고, 또 날 그렇게 대한다는 거요. 물론 그들은 제가 임시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럴 수도 있겠지만, 라미엘 님이 날 마음에 들어 한다면 그 두 사람은 잠깐이라도 진심을 담아 날 대우하겠죠.”

라미엘은 놀랐다. 정말 진심으로 놀랐다. 두 사람의 대우로 여기까지 추측을 할 줄이야.

레이알렉시스라는 인물이 이렇게까지 똑똑하고 눈치 빠를 거라고는 전혀 생각도, 기대도 안 했다.

“잠깐이기 때문에 표면적인 예우만 한다고는 생각 안 하나요?”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그렇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테일러와 윌포프 그 두 사람. 특히 윌포프는 루이반 가문에 대한 자긍심이 굉장히 높아 보였어요. 그런 사람들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손님일지언정 결코 진심 없이, 허투루 대접하진 않을 거예요.”

명확한 대답이었다. 루이반에 온 지 이제 겨우 나흘인데, 고작 이 짧은 시간 동안 눈앞의 여자는 두 사람을 파악하고 자신이 받는 예우의 무게를 알았다.

“그들이 당신에게 무례했습니까?”

“아뇨. 전혀요.”

두 사람은 지나치게 깍듯했다. 굳이 무례라고 한다면 오히려 크레하 쪽이 그에 가까울 것이었다.

“그렇다면 레이는 어떤 점에서 허투루 대접받았다고 느낀 건가요?”

라미엘은 레이와 나누는 지금의 대화가 흥미로웠다. 저도 모르게 맞은편의 그녀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무례하지 않더라도 알 수 있어요. 대우에 마음이 담겼는지, 그렇지 않은지 상대방이 모를 거라 생각해요? 아뇨, 다 알아요. 짐승들도 자기 예뻐하는 사람한테 가서 애교 부리는데, 하물며 사람이 모를 리가요.”

라미엘이 작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저 자신에게 관심 없고 돈 좋아하는, 그래서 다루기 쉬울 적당한 파트너를 골랐다고 생각했는데 훨씬 더 괜찮은 사람을 파트너로 삼은 모양이다. 라미엘은 레이알렉시스에 대한 평가를 조금 더 상향 조정했다.

리담의 석유왕으로 신흥 귀족 소리를 듣는 졸부 집안 장녀라는 것 말고는 아무 특징도, 정보도 없던 그녀는 황실 주최 파티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여느 귀족 아가씨들처럼 곱게 꾸미고 나와 화사하고 아름다운 미소를 짓는 레이알렉시스의 입엔 가시가 돋아 있었다. 이 머리 좋은 여자는 항간에서 ‘결혼 부적격자’라는 평가를 받기 위해 예전부터 판을 짜고 나왔으리라.

“우리 집사와 행정관이 레이에게 한 방 먹었군요. 물론 나도.”

라미엘 본인이 그랬듯, 루이반의 가신들도 레이알렉시스를 여느 가문의 여식처럼 쉽게 생각했던 거다. 그러니 이처럼 단번에 들켜 버린 거지.

그때 마침 그 문제의 행정관, 테일러가 노크를 하며 들어왔다.

“실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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