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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5화 (15/160)

15화. 베르니 (1)

“실례합니다.”

방 안에 있을 줄 알았는데 응접실 소파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을 보며 테일러가 인사를 하다가 멈칫했다.

‘방금 라미엘 님이 소리 내 웃었던가?’

저 무기질 인형 같은 남자는 감정이란 게 분노 말고는 없을 사람이다.

“10분 뒤면 헬라 역에 도착합니다.”

라미엘의 시선이 테일러의 얼굴로 향했다.

뚫어질 듯 쳐다보는 눈길에 테일러는 살짝 당황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너도, 윌포프도 좀 더 정신 차리는 게 좋겠군.”

‘대체 왜? 뭔데? 갑자기 뭐가 문제야?’ 테일러가 주인의 의중을 알기 위해 겉으로는 태연한 표정으로 머리를 마구 굴리는데 레이가 말을 덧붙였다.

“엎드려 절 받기 안 할래요. 전 그냥 돈이나 벌고 이 바닥 뜨렵니다.”

더불어 레이는 자신이 라미엘에게 어떤 사람으로 존재하는지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돈으로 해결하기 좋을 계약 당사자라고 여기는 것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는 발언이었다.

‘……다람쥐 치고는 괜찮은데.’

한편, 그 발언을 듣고 저도 모르게 라미엘의 눈치를 보던 테일러의 눈에 지진이 일었다.

시장통 시정잡배들이나 할 법한 레이알렉시스의 말에 라미엘의 입꼬리가 스윽 올라갔다. 입술 한쪽만 올라간 게 아닌, 양쪽이 균일하게 호선을 그리고 있다.

그가 웃고 있었다.

‘뭐야, 그럼 앞에 들은 웃음소리가 진짜였단 말이야?’

라미엘은 저렴한 말은 보통 무시하지만 차라리 혐오를 보이면 보였지, 결코 웃을 리가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방금 전까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에 이런 상황인가.

테일러는 경이로운 눈빛으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이 여자 진짜 정체가 뭐야?’

루이반의 그 누구도 해내지 못한 일을 고작 나흘 만에 해내고 있다니.

그간의 언행을 종합해 보건대, 라미엘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고 저렇게 활개 칠 수 있다는 건 그가 모든 상황에 ‘허용’ 사인을 주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는 건 레이알렉시스가 라미엘의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테일러의 생존 본능이 기민하게 이 사실을 눈치챘다.

그게 무슨 일이었는지, 두 사람 사이에 어떤 거래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라미엘의 마음이 움직였으니 이건 일대 사건이었다.

‘앞으로 레이알렉시스한테도 신경을 써야겠구나.’

레이에게 매겨진 테일러의 평가가 긴급히 상향 조정되었다.

***

헬라 역에 마련된 루이반의 마차를 타고 30분 정도를 달리자 목적지에 도착했다. 레이가 명단을 보고 추려 낸 다섯 개 중 첫 번째 별장, 베르니였다.

라미엘의 에스코트로 마차에서 내린 레이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게 별장?”

그냥 제2의 루이반 저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대한 건물 앞에서 레이가 눈을 깜빡거렸다.

오래된 멋이 있는 커다란 저택이었다. 벽돌을 쌓아 올려 만든 흰 벽은 이제 그 본연의 맑은 색을 잃었지만 오래된 색이 주는 고풍스러움이 있었다. 붉은 지붕과 잘 어울리는 베르니는 마치 성 같았다.

명단에 오른 곳 중 가장 면적이 넓고 역사가 깊기에 단가가 비쌀 줄 알고 1순위로 선택하긴 했지만, 그림을 보고 상상했던 것보다 몇백 배는 더 비싸고 좋아 보여서 조금은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이 정도로 거창한 걸 원한 건 아니었다.

“윌포프가 감이 아주 좋은 모양입니다.”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시선을 돌려 여전히 에스코트해 준 자세 그대로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 별장은 루이반 가문의 저택이었습니다. 전대 공작까지 사용했죠.”

“그렇게 대단한 건 줄은 몰랐어요.”

‘어쩐지 별장에 이름까지 있더라니.’ 집사는 이런 가장 중요한 설명을 쏙 빼놓고 잡다한 역사만 알려 주었다.

“아, 그래서 윌포프가 내게 이 이야길 안 해 준 거군요? 별장 중 하나가 내 것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해서.”

역시나 이해가 빠르다.

“아예 이곳을 빼고 명단을 주지 그러셨어요.”

라미엘은 루이반 가문의 사람으로 키워진 적도 없었고, 루이반 사람들에게 인간 취급을 받은 적도 없었다.

그러니 루이반의 역사라고 해도 별 감흥이 없었다. 루이반의 장대한 역사나 전통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닌, 그저 방대한 재산일 뿐이었다.

이곳 역시도 ‘그저 루이반의 별장’ 중 하나였다. 오히려 없애 버리고 싶은 곳에 더 가깝다. 부친 루이반 후작이 전통 타령하며 애지중지하던 곳이었기 때문이다.

현재 루이반을 애틋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죽었고, 역사에 자긍심을 가질 만한 사람은 윌포프뿐이다. 하지만 그에게 루이반의 재산을 어찌할 수 있는 권한은 없었다. 그래서 이곳도 여느 별장들과 같이 한데 묶여 레이알렉시스의 손에 들어갈 수 있었다.

“글쎄요. 레이의 1년이 이만큼의 가치가 없나요?”

“제가 아무리 대단한들 루이반의 역사만 할까요. 초대 황제의 건국부터 함께한 명문가인데.”

“……명문이라.”

그때, 별장의 문이 열렸다.

“어서 오십시오, 주인님.”

짙은 푸른색 머리카락을 가진 40대 초반 정도의 여자가 두 사람을 반겼다.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마님.”

정중히 인사를 하는 여자에게서 풍기는 기백은 보통이 아니었다. 레이가 여자의 인사에 저도 모르게 라미엘의 손을 꼭 힘주어 잡을 정도로 엄청난 에너지가 느껴졌다.

“저는 이곳의 집사장이자 별장 최고 관리인, 샤메인 크레즈비라고 합니다. 두 분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녀의 직책을 듣고 레이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여성이 집사를, 그것도 집사장을 맡는 건 들은 적도 본 적도 없었다. 심지어 나이도 젊어 보였다.

놀랐지만 티를 내면 실례가 되는 것 같아 레이는 꾹 참고 샤메인의 인사를 받으며 라미엘과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샤메인 뒤에 두 줄로 나란히 서 있는 고용인들의 수는 얼핏 봐도 스무 명은 되어 보였다. 루이반 주인 부부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나온 최정예 직원의 숫자가 이 정도라면 이곳에 소속된 사람이 적어도 백 명 이상은 된다는 소리다.

아무리 화려하고 큰 별장이라고 해도 보통 관리인은 스물다섯 명 내외이다. 역시 여긴 별장이 아니다. 저택이다.

“머무시는 동안 그 어떤 불편함도 없이 두 분을 모실 사람들입니다.”

샤메인이 간략하게 앞에 서 있는 고용인들을 소개하는데, 약간 호텔 VIP 대접 같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레이가 피식 웃었다.

“여기로 결정한 건가요?”

라미엘이 귓가에 속삭였다.

“네?”

“레이가 웃는 거 보니 다른 건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서요.”

“그건 아니에요. 이걸 제가 가져가면 윌포프 쓰러져요.”

다정하게 손을 잡고 귓속말까지 주고받는 주인 부부를 보며 고용인들은 속으로 감탄했다.

신이 빚어 낸 것 같은 주인과 그 옆에 나란히 선 예비 마님은 눈에 띄는 머리카락 색이 정반대임에도 불구하고 이질감 없이 잘 어울렸다. 주인의 약혼이 늦어져 걱정이 많았는데, 한시름 놨다.

“이쪽은 주방을 책임지는…….”

“피터?”

샤메인이 소개를 하려는데 레이의 목소리가 겹쳤다.

“어어? 알렉스 아가씨? 아가씨예요?”

“어머, 어머!”

레이가 피터에게 달려가듯 다가갔다. 다른 사람들이 의외의 친분에 놀라 그들을 쳐다보았다.

“어떻게 여기 있어?”

“안 그래도 아가씨께 편지 보내려고 했는데 여기서 이렇게 보네요.”

피터가 얼굴에 함박웃음을 달고 허허허 웃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아니, 그런데 우리 아가씨, 이게 뭡니까?”

“왜, 왜? 뭐 이상해?”

피터의 급변한 표정에 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더 이뻐지셨잖아요. 난 저기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천사인 줄 알았네.”

피터가 다시금 웃으며 말했다.

“아하하하하! 피터는 보는 눈이 너무 정직하다니까!”

레이의 웃음소리가 저택을 울렸다. 듣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지는 상쾌한 웃음이었다.

“레이.”

한참을 웃던 두 사람은 라미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아차, 오랜만에 친한 친구를 만나서 그만……. 라엘, 여기 데려와 줘서 정말 고마워요.”

레이가 활짝 웃으며 라미엘에게 다가오자, 그는 다시금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여기서도 사이좋은 척을 해야 하는 거구나.’

레이는 그가 내민 손을 잡으며, 주변 사람들에게 보란 듯 행복이 듬뿍 묻어나는 미소를 활짝 지어 보였다.

레이가 라미엘의 손을 잡는 것을 본 피터도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헛, 잠깐. 그럼 알렉스 아가씨가 루이반의 안주인? 저 루이반 공작의 아내라고?’

갑자기 눈앞에 있는 레이가 멀어지는 기분이었다. 비록 별장이라고는 하나 루이반에 취업하게 된 것보다 더 비현실적인 느낌에 그는 다시금 얼떨떨한 얼굴로 레이를 바라보았다.

“열차 이동으로 아내가 지쳤으니, 인사는 이쯤 하지.”

방금 전까지 아는 사람을 만나 생기 넘치게 좋아하던 마님이었지만 주인이 지쳤다고 하면 만성 피로가 되는 법인지라, 주인 내외에게 방 안내를 해야 하는 샤메인을 제외하고는 다들 군소리 없이 흩어져 제자리로 향했다.

“두 분께서 바로 쉬실 수 있게 방으로 안내하겠습니다.”

샤메인의 안내에 따라 두 사람은 사뿐사뿐 발걸음을 옮겼다.

***

“여기 방이 왜 이래요?”

샤메인의 안내에 따라 부부 침실로 온 레이가 본 저택과 심히 다른 침실 구조를 보고 물었다.

본디 귀족의 부부 침실이라 함은 커다란 방 하나를 둘로 나눠 쓰거나 방 두 개를 연결하는 문이나 통로 하나를 두는 게 보통이었다. 부부가 함께한다는 명목 아래 서로의 생활공간을 분리해 사용하는 것이다.

귀족들의 일반적인 혼인 방식이 정략혼이다 보니, 부부가 되고서도 각자의 공간을 가지고자 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정착이 되어 부부 침실은 ‘한 방, 두 공간’이 당연시되고 있었다.

그런데 어인 일인지 베르니의 침실은 분리 공간 없는, 누가 봐도 진짜 부부만 써야 할 것 같은 큰 방 하나였다.

커다란 침대 위에 흩뿌려진 꽃잎은 무엇이며 방에서 풍기는 이 야릇하고 오묘하고 좋은 향기는 무엇인고.

심지어 이 너른 공간 그 어디에도 나뉜 부분이 없었다. 문이 하나 보여 열어 봤지만 역시나 사방 꽃밭인, 아주 로맨틱한 분위기의 욕실이었다.

“그야 별장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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