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베르니 (2)
“그야 별장이니까요.”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별장이 뭐 어때서요?”
이런 점에서 레이가 귀족이 아니라는 티가 났다.
‘귀족들의 별장’은 사용인이 많은 저택을 벗어나 그야말로 부부끼리 진하고 진득하게 부부생활을 하겠다, 둘이 붙어서 놀겠다는 의미가 내포된 공간이었다.
실제 부부가 아닌 내연 관계인 경우에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즐기는 곳 또한 별장이었다. 중혼이나 배우자의 바람이 허용되는 것은 아니지만, 정략혼으로 맺어진, 어찌 보면 전략적인 계약 부부들은 마음을 다른 곳에 두고 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 라비던의 귀족 중에는 주위 시선을 피해 수도 외의, 경치 좋고 사람 없는 한적한 곳에 별장을 짓고 서로의 묵인하에 정인과 즐기는 사람들도 꽤나 많았다.
그렇다고 별장이 외도의 공간으로서의 기능만 하는 것은 아니었다. 부부끼리 사이가 좋아서 별장 외출을 즐기는 경우도 있고, 부부 사이를 좋게 하려고 오는 경우도 많았다.
“보통 별장은 몸을 섞겠다고 오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귀족 별장의 쓰임새에 레이가 당황한 얼굴을 했다. 역시나 몰랐던 것이다.
‘귀족들은 상상을 초월하는구나.’
“아, 그래서 라미엘 님이 같이 와 주신 거군요. 우리는 사랑하는 부부니까.”
라미엘의 동행 덕분에 졸지에 오늘 밤은 한 방, 한 침대에서 취침하게 생겼다. 하루만 머물 예정이라 어찌나 다행인지.
‘응? 한 침대?’
레이는 화들짝 놀라며 침대 외에 사람이 잘 만한 곳이 또 있는지 주변 시설을 훑어보았다.
“휴, 다행이다.”
저 널찍하고 큰 소파, 저 정도면 성인 남자 한 명 정도는 괜찮을 것 같다.
“뭐가 다행입니까?”
“소파가 커서요.”
라미엘은 그 말의 뜻을 바로 알아들었지만 짐짓 모르는 척 태연한 얼굴로 침대에 앉았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짓이었지만, 레이가 어떻게 나올지가 궁금해서 일부러 그랬다.
라미엘의 행동에 멈칫한 레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침대에 몸을 날리듯 엎드렸다. 풀썩, 침대에 깔린 꽃잎들이 파르르 하늘을 날았다가 레이의 몸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설마, 설마 예비 공작 각하가 레이디를 상대로, 아니죠?”
몸을 날리다니. 역시 레이알렉시스는 제 예상을 웃돈다.
라미엘이 아예 침대로 몸을 뉘자 레이가 입까지 턱 벌렸다.
“라미엘 님. 우리 이러지 말아요. 헤어질 때 멋있어야 진짜 좋은 거예요. 그리고 라미엘 님은 이런 분, 아니시잖아요.”
라미엘이 눕는 바람에 다시금 펄럭인 꽃잎이 레이의 입술 위에 붙었다.
“라미엘 님. 라미엘 님! 정말, 정말 여기서 잘 거예요? 그래요?”
레이는 예상 못 한 라미엘의 행동에 입술에 뭐가 붙어 있는지도 몰랐다.
“세 사람도 너끈히 잘 수 있을 것 같은데, 두 사람이라고 무슨 문제가 있을까요.”
“문제가 그게 아니잖아요!”
그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테일러입니다.”
별장에 놀러 온 부부가 침실로 들어갔다면 그건 방해하지 말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공작 부부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도 했고, 두 사람이 허울뿐인 것을 알고 있는지라 테일러는 아무 거리낌 없이 방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그런데 들어오라는 라미엘의 말에 방으로 들어선 그는 보이는 풍경에 절로 걸음을 멈췄다.
‘뭐야, 이건?’
침대 밖으로 다리를 내린 채 누워 있는 주인의 머리 위쪽으로 레이가 엎드려 있었다.
야릇하거나 다정해 보이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게 마냥 아무것도 아닐 일은 아니었다.
‘라미엘 님이 왜 레이알렉시스랑 한 침대에 누워 있지? 이게 무슨 일이야?’
레이가 루이반에 온 이후 테일러의 눈동자는 자주 지진을 일으켰다. 지금 역시도 그랬다.
라미엘에겐 ‘인간 결벽증’이 있었다. 그는 자신의 테두리 안에 있지 않은 사람에겐 가차 없었다. 특히나 싫어하는 사람과는 악수는커녕 그 어떠한 작은 접촉도 피했고, 같은 공간에 있는 일조차 싫어하는 사람이었다. 그 때문에 라미엘의 외출 필수품 중 하나가 장갑이었다.
그런 그가 레이알렉시스와 ‘한 침대’ 위에 있다는 건 그녀가 생각보다 더 라미엘의 마음에 들었다는 이야기였다.
“무슨 일이지?”
라미엘이 누운 채로 물었다.
“샤메인이 주인님께 그간 베르니의 행정 보고를 올려야 하는지 물었습니다. 아시다시피 일전의 교량 개·보수 때문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 직접 보고드리고 싶어 하는 눈치입니다.”
“지금 가지.”
라미엘이 몸을 일으켜 침대를 벗어났다. 그 바람에 그의 몸에 붙어 있던 꽃잎들이 하늘하늘 떨어져 내리는데 꼭 누군가가 하늘에서 흩뿌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천사님의 강림을 축하하는 꽃잎 세례 같은 배경과 비현실적인 미모에 레이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테일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벌어지려는 입을 간신히 다물었다. 수년째 보고 있는 사람이지만, 이런 광경을 볼 때마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라미엘은 매일 자신의 미모를 갱신하는 듯했다.
라미엘이 뭐 하냐는 눈빛으로 미간을 살짝 한 번 찌푸리자 테일러는 정신을 차렸다.
‘잊지 말자. 이 하얀 천사 속에는 까만 게 들어 있음을.’
사실, 샤메인은 주인 부부의 즐거운 시간을 결코 방해하지 않겠다며 내일 떠나기 전 오전 중으로 약식 보고를 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부부의 즐거운 시간은 당연히 없을 터였다. 하여 테일러는 지금 주인께 보고를 올려 보겠다며 훌쩍 집무실을 벗어났다.
그리고 본 광경은 샤메인의 말이 10퍼센트 정도는 맞았나 싶은 것이었다.
“잘 다녀와요. 회의 제대로, 확실하게 하고 와야 해요? 별장이라고 대충 하면 절대 안 돼요.”
레이의 괴상한 인사 겸 충고에 라미엘이 소리 없이 피식 웃는 모습은 옆에 있는 테일러만 볼 수 있었다.
***
창밖에 어스름한 기운이 가시는 것을 보니 아침인 듯싶었다.
늦게까지 돌아오지 않은 라미엘 덕분에 레이는 혼자 욕실을 쓰고 혼자 침대 위에서 잠을 잘 수 있었다. 홀로 침실에 남겨진 마님을 안타까워하는 시종들의 눈빛이 부담스러웠으나, 라미엘과 함께 있는 것보단 훨씬 나았다.
귀족들의 별장은 무시무시했다. 부부는 욕실도 함께 쓰는 것이라니. 눈속임 부부로서는 라미엘이 바빠서 너무나도 다행이었다.
레이는 침대 옆 테이블에 있던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몸을 돌렸다.
“……응?”
눈앞에 보이는 믿을 수 없는 광경에 잠이 확 깼다.
천사님이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뭐지. 내가 자다가 죽기라도 한 건가?’
라미엘이 싫어하는 자신과 한 침대에서 잤을 리가 없으니 이건 필시 하늘의 천사이리라.
“제가 생각보다 죄를 적게 지었나 봅니다. 주둥이를 막 놀린 대가로 지옥에 떨어질 줄 알았는데 천사님이 마중을 다 나오셨군요.”
레이의 이상한 참회에 라미엘이 웃음을 터트렸다.
그가 천천히 눈을 뜨는 모습에 레이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꼭 해가 뜨는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희미하게 보이는 금빛 광채가 서서히 면적을 넓히며 반짝이다 이내 레이의 모습을 담는다.
“……라미엘 님.”
심장 떨리게 잘생긴 얼굴이 웃음을 달고 저를 보고 있으니 아마 여긴 천국이 확실히 맞지 싶은 기분이었다.
“네. 레이.”
“언제 온 거예요?”
“얼마 안 됐어요.”
밤을 샜다는 이야기였다.
“피곤하겠어요. 한숨도 못 잤죠?”
레이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침대에 아직 남아 있던 꽃잎이 그녀의 몸에서 라미엘의 몸 위로 굴러떨어졌다.
“난 충분히 잤으니까 비켜 줄게요. 라미엘 님 쉬세요.”
흰 잠옷 위로 붉은 꽃잎을 주렁주렁 단 레이가 훌쩍 침대를 벗어났다.
“레이?”
“난 소파에서 쉴 테니까 침대에서 편히 자요.”
레이디 운운하던 여자가 온정을 베풀고 있었다. 말릴 틈도 없이 소파로 쪼르르 달려간 레이는 쿠션을 정리해 베개 삼아 제 몸을 기댔다.
“레이. 저녁 때 한 말, 농담이었어요. 이리로 와요.”
라미엘이 몸을 일으켰다. 자신이 아무리 어린 시절 별채에 갇혀 아무 도움도 받지 못하고 컸다고 해도, 여자를 침대에서 내몰 만큼 몰상식하지는 않았다.
침대에 누운 것은 방에 들어서고 나서 한참 뒤의 일이었다. 레이가 깨어날 듯 보여서 그녀의 반응을 보려던 것이다. 그야말로 ‘장난’의 일종이었다.
라미엘이라는 사람은 결코 하지 않을 짓이었지만.
지난 저녁때처럼 파르르 반응할 레이를 기대했는데, 예상 외로 그녀는 밤새 일하고 피곤할 자신을 배려해 주었다. 낯설고 어딘가 뭉클한 감각이 라미엘의 몸을 휘감았다.
“으응. 괜찮아요. 라미엘 루이반 님의 신사도는 나중에 발휘해 주세요.”
“레이, 날 그렇게 꼭 쓰레기로 만들어야겠어요?”
“라미엘 님이 날 쫓아낸 것도 아니고, 가라고 명령한 것도 아닌데 왜 쓰레기예요? 이쪽이야말로 일하느라 밤새고 온 사람 천대하면 쓰레기가 되는 거예요.”
생글생글 웃으며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에는 그늘 한 점 없었다. 저를 배려하는 게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표정이었다.
이런 사람이 라비던의 마녀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릴.”
작게 내뱉은 소리에 레이가 ‘네?’ 하고 반문했지만 그는 그저 웃음으로 넘겼다.
라미엘은 한 방에 다른 사람이 있으면 잠을 못 자는 성격이었다. 자지도 않을 사람이 침대를 양보받는 게 어색했지만, 모처럼 온정으로 배려받은 김에 그걸 더 누려 보고자 모르는 척 침대에 푹 몸을 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