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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7화 (17/160)

17화. 나야말로

소파가 침대와 마주하고 있어서 맞은편에 누워 있는 라미엘의 모습이 아주 잘 보였다.

침대는 제가 누웠을 땐 엄청 넓었는데 길쭉한 사람이 누우니 보통 사이즈로 보였다. 새삼 그의 키가 참 크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리사하고는 어떻게 아는 사입니까?”

그는 잘 생각이 없는지 레이를 향해 돌아누우며 물었다.

“피터요? 아아. 제가 피터 가게 단골이었어요.”

피터의 가게는 일대에 소문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재료뿐만 아니라 가게 인테리어나 서비스 등 모든 면에서 고급을 추구하는 가게였다.

음식 값이 쓸데없이 비싼 게 아니라 맛과 품질에 비하면 이 가격은 싼 것이라는 평을 받았던 그의 레스토랑은 그 일대에서 꼭 한 번 가 봐야 하는 이른바 ‘맛집’이었다.

피터는 황실 파티에 초대되어 연회 음식을 담당할 정도로 대단한 명성을 자랑했으나 애석하게도 가게는 오래가지 못했다.

애초에 가게를 시작할 때 빚을 많이 졌는데, 피터의 완벽주의적 성격이 그러한 위험 요소에 기름을 부었기 때문이다.

그의 성정에 고급 식재료가 그냥 버려지는 일도 허다했다. 어지간하면 내놓아도 손색없을 정도의 상품인데도 불구하고 가차 없었다. 품질 좋은 요리를 먹는 손님들은 좋으나 경영에 있어선 극악의 사장인 셈이었다.

벌어들이는 수익은 전부 가게 운영비와 빌린 돈을 갚는 데만 쓰이게 되고 이윤은 남지 않자, 많은 이들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피터의 가게는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피터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가게 문을 닫아 내리던 날.

레이는 통탄을 하다 못 해 피터의 팔을 붙잡고 울었다. 이런 맛집이 없어지면 어떡하느냐고.

“진짜 울었습니까?”

이야기를 듣던 라미엘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진짜 울었는데요.”

“그렇게 좋으면 피터를 르아넬로가에 고용했으면 되지 않습니까. 지금 베르니에서 고용했듯이.”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크게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그런 건 차마 생각지도 못했다는 표정이다.

밥 좋아하는 머리 좋은 아가씨가 저 생각을 못 했다니. 예상외의 허점과 넋이라도 나간 듯한 표정에 라미엘은 저도 모르게 슬쩍 웃었다.

“그, 그러게요. 어어,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평범한 시민으로 지냈던 한국 생활이 뼛속 깊이 새겨진 탓일까.

본디 레이는 석유 재벌집 딸이다. 곤경에 빠진 피터를 얼마든지 집안 요리사로 고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한순간의 실수로 루이반에 피터를 뺏겼다 생각하니 뒤늦게 극렬한 아쉬움이 찾아왔지만, 어차피 피터가 르아넬로가로 왔어도 자신은 결혼해 집을 떠났을 터이니 어쩌면 이편이 더 나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 후로는?”

눈앞의 엉뚱한 아가씨가 그다음을 어떻게 진행했는지 궁금했다.

“일단 남아 있는 소자본으로 할 수 있는 가게를 만들어서 재기를 노려 보자고 했어요.”

그 제안엔 레이의 욕망이 숨어 있었다.

“핫도그를 만들어 팔자고 했죠.”

한국에 있으면서 가장 좋아했던 간식이었다. 본래 세계로 돌아와 한동안 핫도그 앓이를 하느라 시름시름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레이는 본인이 직접 핫도그를 만들어 먹기로 했다. 재료는 이곳에도 있으니 맛있는 소시지를 구해 밀가루 반죽을 입히고 빵가루를 묻혀 튀기면 될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에 피터의 가게가 문을 닫게 되었고, 레이는 쿨하게 핫도그 레시피를 그에게 건넸다.

소시지에 밀가루 반죽을 발라 튀긴 빵.

피터에겐 이상하고 괴상한 조합의 생소한 음식이었지만, 그때 그는 무언가를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아이 셋을 키우려면 당장 돈이 필요했다.

“그 핫도그가 레이 당신이 개발한 거였다고요?”

라미엘도 알 만큼 유명한 라비던의 간식이었다.

남녀노소, 신분 고하를 막론하고 먹어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는 핫도그는 피터라는 고급식 전문 요리사를 요리계의 팔방미인으로 재평가 받을 수 있게 했다.

그런데 그런, 이른바 ‘국민 간식’을 만든 것이 피터가 아니라 레이알렉시스였다니, 제법 충격을 주는 이야기였다.

“그런 레시피를 개발하고선 아무 대가도 없이 그에게 준 거라고요?”

‘레이가 개발했다’는 말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레이 역시 원래 있던 레시피를 전달해 준 전달자에 불과하니까. 밀가루 반죽의 밀도나 튀김 온도 등 세부적인 것들은 모두 피터가 찾아낸 것이었다.

다만 손잡이로 쓰이는 나무젓가락 대신 이곳 상황에 맞게 종이로 감싸 주는 걸로 대처를 했고, 케첩 대신 기존에 리담에 존재하던 소스를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되었지만.

피터는 그 후 핫도그와 잘 맞는 소스를 직접 개발하고 언제나 레이에게 가장 먼저 달려와 맛 평가를 받았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간식으로 화려하게 재기에 성공한 피터는 가게 관리를 아내에게 넘기고, 현재 베르니에 요리사로 고용되었다.

“저도 친구에게 전해 들은 요리법이라 정확히는 몰랐어요. 이곳의 핫도그는 전부 피터가 찾아낸 방식으로 만든 거예요.”

“이곳? 친구가 라비던에 있는 게 아닌가요?”

라미엘의 질문에 레이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라비던 밖뿐이랴, 이누아 대륙에도 없다. 그녀의 한국 친구는 다른 차원에서 살고 있으니까.

갑작스레 한국에 가게 된 것처럼 돌아오는 것도 갑작스러웠다.

아무 징조도 없이 훌쩍 원래 세계로 돌아온 레이의 마음속엔 내내 친구 유주가 걸려 있었다. 갑자기 말도 없이 사라져서 얼마나 걱정을 하고 있을까.

“……아주 멀리 있어서 만날 수 없어요. 제 친구는.”

애정이 깃든 사람을 그리워하는 눈빛.

라미엘이 말로만 들었던 그 표정을 눈앞에서 레이가 짓고 있다.

“친구가 보고 싶나요?”

“그럼요. 무척이나. 같이 놀러 가기로 했었는데.”

해외여행이었다. 이곳으로 치자면 다른 대륙으로 가는 여행. 심지어 기차로 달리는 게 아니라 하늘을 날아서 간다고 해서 얼마나 기대했는지 모른다.

레이알렉시스는 평생 해 본 적도 없는 노동이란 걸 한국에서 처음 경험했다. 그리고 하늘 한번 날아 보겠다고 투잡을 뛰었다. 고되고 힘들었지만 그 속에서 사람 사는 건 어느 차원이나 다 똑같다는 것을 깨닫기도 했다.

“거기 가서 잘생긴 남자랑 놀다 오자고…….”

“이 땅은 글렀다. 우린 글로벌이다!”

……를 외치던 유주의 얼굴이 떠올랐다.

한국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음이 울적해졌다. 편지라도 써서 보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남자랑 놀아?”

“잘생긴 남자랑 한번 진득하게 놀아 보고 싶…….”

친구의 소망을 얼결에 흘리던 레이가 라미엘의 눈빛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여기선 저런 말이 먹히질 않겠구나. 생각이 다른 곳이니까.’

“졸리네요.”

레이가 쿠션을 팡팡 두드려 가운데를 살짝 납작하게 누르더니 그걸 베고 누웠다.

“갑자기?”

“졸음은 원래 갑자기 오는 법이죠. 라미엘 님도 안녕히 주무세요.”

“아침인데 다시 자야 할 이유는 잘생긴 남자와 진득하게 노는 게 어떤 건지 설명하기 어려워서인가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한텐 라미엘 님뿐인데요.”

레이의 뻔뻔한 말에 웃음이 나오다가 남자랑 진득하게 논다는 말이 다시 생각나 미소가 사라졌다.

여자가 남자를 원한다는 말이 불쾌한 건지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저 말을 듣고 왠지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뭐, 그 친구는 결혼을 안 했으니 그럴 수도 있죠.”

레이가 뒤늦게 수습을 했다.

“아마 말은 그렇게 해도 진짜 남자 만날 생각은 안 했을 거예요. 그러느니 맛있는 거나 더 먹자는 친구라.”

유주는 이세계에서 온 저를 단지 나이가 같고 예쁘다는 단순한 이유로 덥석 친구 삼고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유주를 비롯한 또래 친구들과 격의 없이 지내면서 레이는 자신이 먹을 것을 좋아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애초에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생각해 본 적 없던 삶이었는데, 그곳에서는 당연하게 사회에서 정해 놓은 미래가 아니라 자신만의 앞날을 꿈꾸고 개척해 나갔다.

“맛있는 거 먹는 걸 좋아해서 잘 맞았어요. 나는 그 친구 아니었으면 내가 이런 사람인지 평생 모르고 살았을 거예요.”

그리고 부모님이 정해 준 대로 웨버와 결혼해서 평생 졸부라고 무시당하면서 살았겠지.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레이알렉시스가 스스로 선택하고 움직인 결과 눈앞의 남편은 라미엘 루이반이 되었다.

웨버 다음이 라미엘이라니. 새삼 그가 계약 제안을 해 준 것이 너무도 고마워졌다.

라미엘이 처음 저를 찾을 때만 해도 지옥문이 열린 줄 알았는데, 천사가 열어 주는 천국의 문이었다. 미래를 꿈꿀 수 있는 발판이 되어 줄 계약 결혼을 하게 된 건 제게도 큰 도움이었다.

레이는 맞은편에서 제 말을 경청하고 있는 라미엘을 보며 미소 지었다.

“라미엘 님. 앞으로 1년 잘 부탁드려요.”

웃으면서 이 사람과 헤어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레이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맞은편 소파에 누워 조잘대던 레이가 조용해졌다 싶더니 잠이 들었다.

라미엘은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잠들면 최소 점심때에 눈을 뜨겠단 이야기인데.

“……샤메인이 좋아하겠군.”

주인 부부의 짧은 방문 기간을 내내 아쉬워하던 베르니의 고용인들이었다. 하룻밤만 머물고, 그것도 다음 날 점심을 먹자마자 떠난다는 일정에 샤메인은 아쉬운 얼굴을 했다.

별장이란 공간에 부부가 함께 온다는 것. 그런데 그 부부가 여느 부부와는 다르게 사이가 좋다는 건 가문에 소속된 고용인들의 어깨가 으쓱할 일이었다.

보통의 부부와 달리 ‘진짜 부부’인 사람은 수도 내에 드물었다. 정략적인 계약혼의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집안 분위기도 대부분 사무적이고 경직된 곳이 많았다.

부부 사이가 좋으면 가문의 분위기부터 평화롭다. 그러면 고용인들 역시 일하기가 훨씬 수월해진다. 그리고 자신의 소속 집단에 긍지가 생긴다. 일종의 직업적 자부심이다.

즉, 주인의 부부 사이가 고용인들에겐 중요한 환경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이 시기에 서로가 좋아서 결혼을 하겠다는 주인 부부가 나왔으니 말해 무엇 하랴. 고용인들에게 루이반 부부는 그야말로 콧대를 세울 수 있는 최고의 복지인 셈이었다.

그들은 사랑스러운 신생 부부를 곁에서 조금이라도 더 보필하기를 원했다.

그리고 그 간절한 바람이 이루어진 것인지,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곤히 잠든 루이반 마님은 주인님이 안아 들어도 깰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았다.

라미엘은 침대 위로 레이를 조심스레 내려놓았다.

“으음.”

잠시 몸을 뒤척이던 레이가 그의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잘 부탁드려요.”

“……나야말로.”

뒤늦게 레이의 말에 대답을 한 라미엘은 한동안 그녀에게 잡힌 채로 가만히 있었다.

고요하고 평화로운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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