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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8화 (18/160)

18화. 천사와 악마

다시 잠든 레이는 점심때가 다 되어 가는데도 눈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서 잠시 눈을 붙인 라미엘이 일어나 다가가도 꿈쩍하지 않았다.

차후 일정을 더 이상 미룰 수가 없어 레이를 깨우자 잠투정을 했다.

“레이, 일어나요.”

“으음, 싫어어. 안 일어나.”

“점심 안 먹을 겁니까?”

먹을 걸 좋아하는 레이를 먹이로 꾀어 봤으나 그녀의 눈은 움직이질 않았다.

“아이, 안 먹어. 저리 가아.”

그녀는 깨우려고 다가간 라미엘의 팔을 꽉 잡고 이마를 묻으며 칭얼거렸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온기가 그의 팔에 닿았다. 몇 시간 전처럼.

“레이알렉시스.”

원래의 루이반 저택이었다면 레이가 늦잠을 자든 말든 신경도 쓰지 않고 내버려 뒀겠지만, 지금은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해야 하는 스케줄이 남아 있기에 마냥 둘 수가 없었다.

이미 늦춰진 일정을 생각하면 조금 짜증이 나는 일이었다. 라미엘이 수장이 된 이후 지각이나 일정 변동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엄한 목소리로 부르자 심상찮은 기색을 느꼈는지 레이가 천천히 눈을 떴다. 미간에 잡혀 있던 주름이 펴지고 내내 가려져 있던 푸른 눈동자가 반짝 빛을 보인다.

“……어?”

눈을 뜨고도 비몽사몽이던 레이는 눈앞의 라미엘을 보고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그러더니 제 얼굴에 닿아 있는 그의 손을 보고 화들짝 놀란 얼굴을 했다.

“어머! 어머나! 내가 미쳤나 봐!”

본인이 잠투정이 있다는 건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녀는 벌떡 일어나서 부스스한 머리를 대강 손으로 빗어 내더니 라미엘의 눈치를 살폈다.

“내가 라엘한테 진상 부렸어요? 그랬죠? 아이. 이렇게 잠들 생각이 아니었는데…….”

레이는 정말 놀랐는지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심지어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때만 쓰던 호칭으로 그를 부르고 있었다.

“라엘은? 라엘은 좀 잤어요? 내가 왜 여기 누워 있지? 라엘 못 잤죠? 어떡해.”

그런 와중에 자신을 챙기는 레이의 모습에 신기하게도 라미엘은 짜증이 풀렸다.

“레이, 단장 마치면 피터를 올려 보내죠.”

그 말을 끝으로 라미엘은 시중을 들 하녀를 방으로 불러들이고 자신은 밖으로 나갔다.

피터를 왜 올려 보내나 했는데, 단장을 마치고 그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익숙한 냄새가 레이의 코를 찔렀다.

“아가씨!”

어제 봤는데도 여전히 반가워하는 그를 맞으며 레이는 손짓으로 하녀들을 물렸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난감한 얼굴을 했으나, 레이의 단호한 손짓에 뭐라 입을 벙긋하다 조용히 방을 나섰다.

시선을 신경 써야 할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 와구와구 편하게 먹기만 하면 된다. 이곳에 와서 기품 있고 교양 있는 레이디의 모습으로 있느라 은근히 기가 빨리던 터였다.

“와, 피터가 직접 만든 핫도그 너무 오랜만이다.”

그의 손에 들린 쟁반 위엔 익숙한 모양의 간식이 올라가 있었다. 먹는 걸 좋아하는 레이의 성향을 파악한 라미엘이 빨리 잠 깨라고 올려 보낸 특효약이었다.

“아, 아가씨라고 부르면 안 되겠구나. 마님이죠, 이제.”

마님 소린 루이반에 들어온 이후 계속 듣던 호칭이었으나 자신의 지인에게 듣자니 또 새로웠다.

“우리 아가씨를 대체 누가 데려가나 했는데 이 정도면 인정입니다.”

최소 공녀나 최대 황녀를 갖다 대야 급이 맞을 법한 루이반이건만 콩깍지 제대로 씐 절친은 레이를 높이 평가하며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마치 자신의 딸을 보는 눈빛과도 같이 따뜻해서 레이의 마음도 푸근해졌다.

“루이반 공작이 보는 눈이 좀 있더라고.”

두 사람은 동시에 푸하핫, 하고 웃었다.

“아이고, 제가 또 이런 실수를. 이러면 안 되는데 자꾸 루이반 마님을 알렉스 아가씨로 보게 되어서 그만…….”

베르니가 수도에 있는 건 아니었지만 라비던 귀족 소속의 별장이니 엄격한 분위기는 그대로 유지되고 있었다.

고용인이 고용주와 이런 사사로운 잡담을 나누거나 별도의 친분을 쌓는 일은 없었다. 수도 내 철저한 신분제 때문에도 그렇지만 귀족과 제멋대로 친분을 쌓을 수 없게 하는 분위기도 한몫했다.

신분이 높은 쪽이 먼저 친분을 허락하지 않는 이상 함부로 어울릴 수 없는 구조여서, 대부분은 자신의 신분과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놀았다.

물론 레이알렉시스는 인근에서 준귀족 취급을 받았긴 해도 엄밀히 말하면 귀족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결혼으로 명실상부 귀족 반열에 오른 셈이니 주의해야 했다.

“우리 둘만 있을 때는 편하게 해도 돼. 아무도 모르는걸.”

어차피 피터를 만날 일도 얼마 없을 터였다. 루이반 마님으로 있을 시간은 고작 1년이었으니까.

‘이혼하고 헬라에서 살까? 피터도 있는데.’

헬라와 수도 라비던을 오가는 특급 급행열차를 타면 한 시간 정도 걸려서 도착할 수 있기에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터도 그중 하나였다.

수도의 집값이 비싸 타 지역에 거주지를 두고 있는 사람들에게 열차는 그야말로 희소식이었다.

‘헬라도 수도나 다름없이 큰 도신데. 그럼 그냥 이 베르니를 계약금으로 받아 버려?’

울부짖는 윌포프의 목소리가 잠깐 들린 것 같았지만 무시했다.

“피터, 잘 먹을게. 오랜만에 먹으려니까 좋아서 손이 다 떨린다. 여기 와서 매 끼니 잘 먹었어. 역시 피터가 최고야.”

레이의 칭찬에 피터가 으쓱한 얼굴을 했다. 진심을 담은 칭찬에 언제나처럼 마음이 따뜻해진다.

“일단 이거 드시고, 전 이제 가서 아침 준비 마무리하겠습니다. 천천히 드시고 내려오세요.”

이렇게 말하는 피터의 눈빛이 아버지 오스카의 눈보다 더 따스해서 마음이 찡해졌다. 레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바로 레이의 수발을 담당한 하녀가 재빠르게 들어와 마님과 방 안을 조심스레 살폈다.

‘왜 저렇게 여기저길 쳐다보, 아!’

부부 침실에 부인이 혼자 있는데 외간 남자가 와 있던 상황이다. 다른 곳도 아닌, 부부만의 공간에 이성과 단둘이 있었던 것이다.

‘조심해야겠다.’

아무리 별일 없었고, 라미엘의 허락하에 벌어진 일이었다고는 하나 구설에 오를 수 있으니 주의해야 했다.

“라엘은 어디 있지?”

“서재에서 업무 중이십니다. 마님께서 식당으로 이동하시면 그리로 가겠다 하셨습니다.”

“나 때문에 그 사람까지 여태 굶었겠구나. 얼른 가자.”

레이의 말에 급히 뒤를 따르는 하녀들이 서로 몰래 눈빛을 교환하며 씨익 웃었다.

주인 내외가 식사를 하는 사이, 담당 하녀들은 후방에서 식기를 정리하며 신이 나서 떠들었다.

“마님을 너무 괴롭히셨나 봐요. 눈뜨자마자 뭐라도 드시게 하는 거 보니.”

“마님이 왜 늦잠을 주무셨겠어? 간밤에 못 잤으니 그렇지.”

“우리 주인님 외모만 천사인 줄 알았는데.”

“정확히는 상반신만 천사고, 아래는…… 악마인 듯.”

“꺄핫! 아이, 난 몰라아! 어머나, 세상에.”

“아직 식전이지? 벌써부터 별장이라니, 사이 너무 좋은 거 아냐?”

“어제 도착 때도 봤어요? 손 꼭 잡고 있는 거? 너무 예쁘더라. 얼굴로 부부 하기로 한 줄 알았어요.”

보기 드문 귀족 부부의 애정 행각에 다들 수다가 과열되었다.

이 열기를 잠재운 건 때마침 디저트 식기를 점검하러 온 샤메인이었다.

갑작스러운 집사장의 등장에 하녀들은 입을 급히 다물었으나, 샤메인의 미간에 깊게 팬 주름으로 그녀가 앞의 이야기들을 모두 들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곳에서 일을 하기 위해선 입조심이 가장 중요하다 말했던 것 같은데. 잊었나?”

서늘한 샤메인의 경고에 두 사람의 얼굴에 난감한 빛이 서렸다.

“죄, 죄송합니다. 저흰 그저 너무 자랑스러워서…….”

주인 내외의 애정이 일하는 이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위 신경도 쓰지 않고 주인 내외의 부부 사정에 대해 저속한 말을 내뱉는 건 문제였다.

특히나 별장이 불륜의 장소로도 유명한 상황에선 더더욱 입조심을 해야 했다. 아무리 부부가 와서 즐기고 갔다고 해도 당연지사 조용해야 했다. 별장 고용인이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은 보안 유지와 입단속이었다.

“당장 짐 싸서, 나가도록.”

샤메인의 싸늘한 명령에 두 사람의 안색이 파랗게 질렸다.

“다신 이런 일…….”

더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샤메인이 냉정하게 말을 이었다.

“혹여 베르니 밖에서, 수도에서 두 분에 대해 좋든 나쁘든 허튼소리가 들린다면 너희 둘이 입을 놀린 것이라 생각하겠다.”

두고두고 지켜보겠단 의미와 더불어 혹시라도 루이반 부부에 대한 어떤 소문이 나면 가장 먼저 족쳐질 건 두 사람이란 뜻이었다.

무장 출신의 집사장이 하는 말엔 무게와 살벌함이 실려 있었다. 잘못을 빌 틈도 주지 않고 샤메인은 등을 돌려 나갔다.

잠시 후, 두 사람이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지만, 부적절한 수준을 넘어 성희롱이었기에 그 누구도 무어라 위로의 말을 건넬 수 없었다.

“후.”

샤메인은 작게 숨을 내쉬며 식당으로 들어섰다.

저 둘이 밖에서 허튼소리를 하고 다닐 것 같지는 않지만, 혹시 변수가 생길지 모르니 그냥 내버려 둬선 안 될 것이다.

“신경 쓸 게 생겼네.”

‘차라리 마물이었으면 검으로 베어 없애 버릴 수라도 있지.’ 언제나 인간이 훨씬 더 어렵고 복잡했다. 주인 부부가 떠나면 대대적으로 저택 인원 점검이나 한번 해 봐야겠다고 결심하며 샤메인은 식당을 살폈다.

생글생글 웃는 기색이 남아 있는 마님과 곁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칼질 중인 주인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라미엘과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토벌전에서 싸운 샤메인의 감이 외쳤다. 이곳의 모든 고용인들이 세상 다신 없을 애정 커플이라 외쳐도 저건 가짜라고.

라미엘의 눈은 여전히 별 감흥이 없어 보였다.

‘결국 속임수인가.’

저 라미엘이라면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했으니 그리 놀랍진 않았다.

‘그런데 왜 르아넬로지? 어차피 여느 귀족 부부들처럼 정략혼을 할 거였으면 훨씬 더 좋은 귀족 가문이 널렸는데.’

“어라?”

주인이 데려온 본채 행정관인 테일러가 두 사람에게 다가가 무언가 보고를 올리자 레이가 무어라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샤메인은 라미엘의 미소를 보았다.

물론 순식간에 사라진 미소였으나, 그가 거짓이 아니라 진심으로 웃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웃을 줄도 알았어?’

정말 애정이 있어 레이알렉시스를 선택한 것이었나.

주인 내외를 보며 고개를 갸웃하는데 아까 하녀들이 하던 말이 떠올랐다.

“상반신만 천사고, 아래는…… 악마인 듯.”

“헙.”

샤메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갈 뻔한 입을 손으로 꽉 틀어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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