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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19화 (19/160)

19화. 초대 (1)

늦은 점심을 먹은 루이반 부부는 예정보다 훨씬 늦은 시간에 베르니를 나섰다.

“레이, 오전에 아주 잘 자더군요. 겨울잠 자는 곰처럼.”

마차에 올라 단둘이 되자마자 라미엘이 테일러가 올린 서류들을 읽어 보며 무심히 말했다.

“……미안합니다.”

레이가 우물쭈물 사과를 했다.

테일러 말에 의하면 자신의 늦잠으로 오후 일정이 쭉 밀려 버렸다고 했다.

원래 오늘 루이반 저택에서 해야 할 일이었지만, 별장 구경이란 변수의 스케줄이 생기면서 별장에서도 할 수 있는 일거리들을 챙겨 왔다고.

본채였으면 라미엘의 방으로 가서 보고하면 될 일이었지만, 이곳은 ‘별장’이었고, 두 사람은 부부 침실에 있는 중이었다.

애정과 정욕 넘치는 공간인 별장에, 그것도 침실에 주인 부부가 있다는 건 모든 이들에게 ‘방해 금지’라는 공문이 내려온 것이나 다름없었다. 침실에 내외가 들어가 있을 때, 주인이 먼저 부르지 않는 이상 고용인은 접근하지 않는 것이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전날 저녁엔 부부가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문을 두드릴 수 있었지만, 그 후로 한참이 지났으니 두 사람을 진짜 부부로 알고 있는 주변의 시선을 생각해서라도 테일러는 차마 방을 찾아갈 수가 없었다.

“사과받을 생각은 아니었습니다. 다만 일정이 늦어진 걸 안 윌포프가 어찌 나올까 궁금해지네요.”

“아이, 아까 식당에서 윌포프한테 말하지 말라고 부탁했잖아요. 진짜 제가 무릎 꿇는 거 보고 싶은 거예요?”

윌포프가 이 사실을 알면 또 얼마나 달달 볶아 댈까. 레이는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다.

“윌포프한테 늦잠 잔 거 말 안 할 거죠? 하지 마요. 나 진짜 무릎도 꿇을 수 있어!”

마치 크레하를 바라보듯 저를 보는 테일러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러나 레이는 진심이었다. 윌포프의 사교육을 피할 수만 있다면 이깟 무릎 얼마든지 내어줄 수 있었다.

“레이 하는 거 봐서요.”

내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데요? 당신을 업고 다닐까?

이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가려 했으나 레이는 꾹 삼키고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앞으로 결코 일하는 라미엘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이었다.

***

루이반 공작이 약혼녀와 별장에 갔다.

이 한 문장이 귀족 사회에 준 충격은 어마어마했다. 모두가 탐내는 인물이 예상치도 못한 행보를 보였기에 더더욱 충격은 컸다.

조만간 약혼을 발표할 예정인, 즉 약혼식조차 아직 치르지 않은 예비부부가 공개적으로 별장을 이용했다는 것. 그것도 리담 곳곳에 있는 루이반 별장을 대여섯 곳이나 돌고 왔다는 사실에 귀족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별장이라니. 별장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익히 잘 아는 그들이다.

‘대체 저 루이반 공작의 마음을 흔든 여자가 누구이기에?’라는 의문을 가졌던 사람들은 상대방의 이름이 거론되는 순간, 열이면 열 전부 ‘네?’라고 반문했다.

“누가 누구랑 결혼을 해?”

태자 파르베제 역시 마찬가지였다. 보고를 올린 시종을 보며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본인의 손에 올려진 결혼 약속 각서, 일명 귀족의 혼약서를 보며 그는 몇 번이나 눈을 깜빡였다.

“라미엘 차이제임스 아틸 루이반, 레이알렉시스 아르히 다 시즈 르아넬로…… 의 결혼 약속 서약.”

약혼식은커녕 약혼 자체를 뛰어넘고 바로 결혼이라니.

귀족의 결혼은 가문과 가문의 결합인지라 확정되면 황실에 혼약서를 올려 보내야 하는 법이 있었다. 귀족 견제 수단 중 하나로 정치적 흐름을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이거 진짜인가? 혹시 내가 너무 피로한 나머지 환상을 보는 건가?”

루이반은 가만둬도 잘나가는 집안이었고, 황제가 생트집을 잡아 흔들지 않는 한 문제가 생기지 않을 가문이었다.

얼마 전엔 황실 마기사단과 마법사들을 도와 마물 토벌에도 혁혁한 공을 세워 황실을 서포트하던 루이반이다. 오히려 세력이 더 커지면 황실에 위협이 되어 눈 밖에 날 수 있으니 적당한 집안을 골라 지금의 세력을 유지하는 게 최선일 터였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적당함이 너무 지나쳤다. 귀족조차 아닌 르아넬로 가문이라니.

태자인 자신이 신흥 귀족이라 칭하며 졸부들을 포섭하는 일이 구 귀족인 루이반에겐 불편한 일이 되었을 거다.

‘그런데 이게 무슨 조합이람?’

이해할 수 없는 일인데, 소문을 듣자 하니 두 사람은 루이반 별장에서 오붓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기까지 했단다.

“둘이 눈이 맞은 거라고……?”

심지어 르아넬로가의 장녀는 이전에 그저 그런, 별 볼 일 없는 백작가와 파혼을 한 경력이 있었다. 물론 파혼은 전혀 흠이 아니었지만 그래도 약간의 전적이 있음에도 상대로 골랐다는 이야기다.

이때는 결혼이 확정된 게 아니고 약혼만 했던 상태라 혼약서가 황실까지 올라오진 않았다.

졸부와 귀족이 맺어졌다 파기되는 일은 워낙 비일비재해서 귀족들은 졸부와 결합할 때, 식을 올리고 나서도 한참 뒤에 혼약서를 올리는 경우가 허다했다. 하여 파르베제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일이었다.

그런데 이번엔 식을 올리기도 전에 보란 듯 혼약서를 먼저 올렸다는 것은 두 사람이 결혼을 꼭 하겠다는 이야기였다. 이제 이혼을 하지 않는 이상, 헤어지지 않겠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루이반 부부를 불러와.”

***

“누가 뭘 어째?”

“태자 전하께서 황실로 두 분을 초대하셨습니다.”

윌포프의 보고에 레이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파르르 떨렸다.

태자라니? 태자라니!

평생 독대할 일 없을 거라 여겼던 황족이었다.

그런데 차기 황제로 거론되는, 신흥 세력을 키우는 데 힘을 쏟는 파르베제 황태자가 귀족인 루이반을 부른다?

레이가 옆에 앉은 라미엘을 보며 물었다.

“라엘, 혹시 사고 쳤어요?”

윌포프의 미간이 설핏 움찔거리다가 빠르게 펴졌다. 표정 관리의 대명사인 그가 대놓고 얼굴을 구기는 것을 라미엘은 흥미롭게 지켜보았다.

‘미치겠군.’

며칠간 주인과 별장을 도느라 제 손에서 멀어졌던 레이의 말투에는 교양이라곤 눈곱만큼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 수준의 안주인을 루이반의 이름으로 밖에 내놓는다고 생각하니 윌포프는 아찔해졌다.

그의 안에서 레이알렉시스에 대해 알게 모르게 쌓였던 플러스 점수들은 모두 소멸하고, 그녀가 라비던의 마녀였다는 사실만 남았다.

그는 굳게 다짐했다. 황실에 가기 전까지 특훈으로 레이알렉시스의 말투를 고쳐 놓으리라고.

“쳤겠습니까?”

윌포프와 달리 라미엘은 지난 일주일간 레이와 별장 투어를 하며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그녀의 엉뚱한 대사를 무던히 흘려 넘길 수 있었다.

테일러는 몇 번 흠칫하다가 종내는 포기했던 것 같은데 윌포프는 과연 어떨지 궁금해진다.

“근데 왜 우리를 부르실까요?”

레이는 어리둥절해했지만, 라미엘은 짐작이 갔다.

귀족 사회에서 큰 파장을 일으킨 스캔들의 주인공을 본인 눈으로 직접 가까이서 보고 싶은 거겠지. 그 누구보다도 먼저.

“언젠가 한 번은 부를 줄 알았지만, 이렇게 빨리 연락을 해 올 줄이야. 태자가 꽤나 참을성이 없는 모양이군.”

짐작했다는 말에 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그날 작위 받겠다고 해.”

“예, 알겠습니다. 그리 답신 올리겠습니다.”

작위 수여식을 한다는 건 결혼이 확정됐다는 이야기니 굳이 하루 시간을 써 가며 태자 부부 앞에서 연극을 보여 줄 필요는 없다. 귀찮게 두 번, 세 번 볼 것 없이 황실 방문 한 번에 모두를 해결하겠다는 의도였다.

‘라미엘의 작위…….’

작위를 받는다니, 새삼 이제 더 이상 물러설 수 없는 곳까지 온 기분이다.

“그런데 원래 귀족들은 결혼을 황실 허락받고 해야 하는 거예요? 혼약서만 올리면 되는 거 아니었나. 그런 말 들은 적 없는데.”

이 말을 하며 레이가 윌포프에게 시선을 주었다. 만약 그렇다면 그가 결코 자신을 편히 두지 않았을 거란 의미였다.

“준비가 필요하시다면 돕겠습니다.”

윌포프 역시 그 눈빛의 의미를 바로 알아들었다.

“아, 아니. 이게 아닌데……. 준비는 필요 없어.”

윌포프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말을 이었다.

“황족을 만나시게 되는 거니 아무래도 어느 정도 공부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황실 예법 교육을 준비하겠습니다.”

레이는 울고 싶어졌다.

***

“크레하 경한테 담력 키우는 훈련을 좀 해 달랄까 봐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의 미간이 설핏 찌푸려졌다.

“대연회 때, 태자를 보지 않았나요?”

“그땐 멀리서 잠깐만 구경하듯 본 거였고, 면대면 접촉이 아니었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었죠.”

“윌포프의 교육으로 부족합니까?”

방금 전까지 집사의 특훈을 받은 레이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전혀요! 넘치게 충분해서 죽을 지경이에요!”

라미엘의 눈에 레이의 모습은 강아지 한 마리가 고개를 파닥이는 것같이 보였다.

“레이. 그런 말을 쓰는 게 윌포프의 교육열을 더 자극한다는 걸 모릅니까.”

“알아요오…….”

레이가 말꼬리를 늘이며 비밀로 해 달라고 잉잉댔다. 서재에 단둘뿐이어서 가능한 투정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생활한 지도 보름, 레이는 라미엘이 자신을 그 나름대로 배려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알맹이는 새카만 악마인 줄 알았는데 천사 같은 부분도 있네.’

투정 부리고 징징대는 것처럼 매달리는 그 어떤 부류도 절대 허용 안 할 사람인 건 일찍이 파악되었으나, 1년짜리여도 아내는 아내라서 그런지 자신에겐 놀랍도록 관대했다.

그래서 레이는 단둘이 있을 때면 아주 편하게는 아니어도 그에게 어느 정도 선을 조심조심 지키며 칭얼거릴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정말 제대로 사랑에 빠지면 ‘내 사랑’, ‘내 아내’ 하면서 물고 빨고 하겠지? 가짜한테도 이 정도 틈을 내어주고 있으니.’

원래 저런 서늘한 사람이 한번 빠지면 앞뒤 구분 못한다고 했던가.

라미엘은 애초부터 ‘가족’이라 칭하기에 곤란한 사람들 틈에서 제대로 된 애정도 못 받고 컸으니 더더욱 그 분야에서 메마른 노선을 타고 있을 것이다.

‘누가 촉촉이 적셔 줄랑가.’

자신처럼 돈 밝히는 속물도 아니고, 마음씨도 착하고 고와서 뭘 해도 다 받아줄 수 있는, 그러면서도 똑소리 나는 여자였으면 좋겠다. 같이 서 있는데 그림같이 잘 어울릴 외형도 중요하겠고.

맞은편의 라미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레이는 어느 순간 그의 미래를 생각하던 것을 잊고 저도 모르게 감탄을 뱉었다.

“……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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