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1화 (21/160)

21화. 티파티

“정말 올까요?”

“오지 않겠어요? 케이틀린 영애 분위기를 보니 답신을 받은 것 같더군요.”

“어휴, 얼마나 잘난 척을 해 댈지 벌써부터 머리가 다 아프네요.”

케이틀린이 주최하는 후작가의 티파티 참석자는 주최자와 레이를 포함해 다섯 명으로, 파티의 규모는 아주 작았다.

마그스너 후작가의 후원은 케이틀린이 손수 공들여 가꾸어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그녀의 외모를 빼다 박은 분홍 장미와 보랏빛 겹튤립이 곳곳에 피어서 은은한 향기를 풍겼다.

후원은 후작가의 명망에 비해 다소 검소한 크기이나 곳곳에 케이틀린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하나도 없었다. 그야말로 꽃같이 아름다운 사람이 가꾸는 꽃 같은 정원이었다.

이곳에 마련된 하얀 티테이블 위로 설치된 그늘막 레이스가 하늘하늘 바람에 펄럭였다.

그 아래에 약속 시간보다 일찌감치 모인 것은 일명 ‘케이틀린 수호대’였다. 혹여나 모진 레이알렉시스가 케이틀린에게 막말을 퍼부을까 걱정되어 미리 방어막을 치고 나선 것이었다.

“그렇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다들 너무 뭐라고 하지 말아요. 공작 부인이 난감해하겠어요.”

케이틀린이 저지했다.

“케이틀린은 마음이 정말 너무 고와요.”

“이번에는 너무 무르지 않게 대하는 게 좋겠어요. 케이틀린 영애가 주최한 파티이니 엄연히 그럴 권한이 있고요.”

모인 이들 중 가장 언니이자 유일한 기혼자인 클레어가 케이틀린에게 조언했다.

귀족 영애들의 사교에서 남편의 직위와 나이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의 세계에서 얼마만큼이나 위력을 떨치는가가 가장 중요했다.

세력가의 사람이어도 사교 모임에서 두드러지는 유명인이 아닐 수도 있고, 이름 모를 미미한 가문에서 사교계의 신이 등장하기도 했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이상 좋든 싫든 사교계에 진출해 어느 정도 활동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그곳에서 좌중을 휘어잡는 건 순전히 본인의 역량이었다.

케이틀린은 이런 곳에서 명실상부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은 사람이었다.

마그스너 후작가는 건실했고, 후작 부부는 온화한 성품으로 영지민들을 잘 돌보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의 딸인 케이틀린은 천사 같은 외모와 심성으로 주변 사람들을 절로 끌어들이는, 그야말로 사교계의 왕이다.

이처럼 마그스너 후작가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 낸 것처럼 완벽한 가족이었다.

“어머, 왔나 봐요.”

조아나가 부채로 입을 가리며 입구를 쳐다보았다.

루이반가의 마차가 입구에 멈춰 서고, 마부가 내려서서 계단을 설치했다. 이윽고 문이 열리면서 예상 못 한 인물이 모습을 보였다.

“루이반 공작님 아닌가요?”

보고도 믿을 수가 없어 클레어가 사람들에게 되물었지만 다들 부채로 벌어지는 입을 가리고 눈만 휘둥그레 뜨고 있었다. 케이틀린조차 눈망울을 떨 정도로 놀라운 광경이었다.

대체 그 누가 부인의 티파티에, 그것도 파티라 부르기도 어려울 정도의 소규모 친분 모임에 친히 배웅을 온단 말인가?

하물며 ‘루이반’ 공작이다. 갑작스러운 결혼 발표로 수도를 당황하게 만든 ‘그 루이반’ 공작.

마녀와 결혼이라니 분명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다, 뭔가 거래가 있다는 소문이 분분한 루이반 부부였다. 그 누구도 두 사람이 사랑해서 맺어졌을 거라고는 절대 예측 안 하는 그런 부부란 말이다.

그런데 저 광경은 대체 뭘까.

라미엘이 마차에서 먼저 내린 뒤 문에서 살그머니 나온 손이 그의 손 위에 가벼이 올려지고, 이내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붉은색 드레스를 매끈하게 잘 소화한 레이알렉시스가 마차 계단을 밟자마자 몸을 비틀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라미엘이 그녀를 부축했다.

“……아. 몸이 좀 안 좋아서 공작님이 직접 데리고 오셨나 봐요.”

케이틀린의 말이 잠시 티테이블의 침묵을 깼으나 이내 다시금 정적이 내려앉았다.

루이반 공작이 마녀 아내의 건강을 걱정해 여기까지 함께 왔다는 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하나의 결론을 도출하게끔 했다.

사, 랑…….

말도 안 된다. 그게 있을 수 있는 일이야?

티테이블의 경악을 모르는 두 사람은 남들의 눈에는 아주 다정해 보였다.

“미안, 미안해요. 라엘.”

레이가 바들바들 떨며 사과를 하고 다리에 힘을 주어 똑바로 서려고 했다.

‘망할 수박바!’

담력 키워 달랬더니 크레하는 레이의 체력을 키우려고 했다.

“이도 저도 다 싫으면 몸으로 직접 부딪는 수밖에요.”

“몸으로?”

“몸이 조금 고되면 다른 생각이 잘 안 납니다.”

“그래서?”

“마님께 간단한 호신술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이게 발단이었다.

간단하다고 해서 덜컥 받아들였더니 운동이라곤 숟가락 드는 게 전부였던 제가 하기에는 높은 강도였다. 그러나 제 입으로 하겠다 했으니 무를 수도 없고, 일주일 남은 황실 초대를 생각하면 거절할 수도 없어서 훈련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다.

이제 이틀 차.

레이는 첫날 훈련을 마치고 몸살이 날 것처럼 온몸이 뻐근해서 꼼짝을 못 했다. 이대로 포기하려는데 이 상태로 가만두면 몸이 더 아프다고 해서 오늘 훈련도 겨우 마치고 오는 길이었다.

“그래도 어제보단 훨씬 낫군요.”

라미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첫날은 꼼짝도 못 했는데, 크레하의 말처럼 이튿날인 오늘은 계단 오르내리기만 빼고 혼자 거동이 가능했다. 지지할 부분이 있으면 붙잡고 오르락내리락할 만했는데, 문제는 그렇게 되면 모양이 너무 빠진다는 것이었다.

소규모라 해도 루이반 부인의 첫 공식 외출이다. 체면 구길 일이 벌어져선 안 됐다. 하여 루이반 마님의 이미지를 고려해 ‘사랑하는’ 그녀의 남편이 잠시 수고해 주기로 결론이 났다.

“아, 정말 내 입이 문제예요. 왜 오기를 부렸을까. 그깟 태자가 뭐라고.”

“크레하의 훈련이 효과가 있군요. 벌써부터 태자가 X밥인 거 보니.”

라미엘의 말에 레이가 빵 터졌다. 까르르 웃는 소리가 후원을 울렸다.

“계속할 건가요?”

“칼을 뽑았으면 무라도 썰라고 하잖아요. 일주일 정도니까 한번 해 보죠.”

‘칼? 무?’ 라미엘은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이 말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아들을 수 있었다.

재미있는 말이었다. 시작했으면 뭐라도 해라.

“혼자 잘 걸을 수 있겠습니까?”

“네. 계단만 아니면 괜찮아요. 바쁜데 여기까지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라미엘 님.”

“모임 끝날 때쯤 오죠.”

귀찮음이 덕지덕지 붙은 표정이었으나 저 멀리 라미엘의 뒤통수만 보고 있는 이들은 이 사실을 모르리라. 레이는 조금 씁쓸해졌다.

“네. 이따 봐요.”

라미엘을 태운 마차가 훌쩍 떠나고 레이는 천천히 파티장을 향해 걸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멍하던 표정들이 갈무리되는 게 보였다.

‘다들 한국에서 배우 해도 되겠네.’

“어서 오세요, 공작 부인.”

케이틀린이 화사한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뒤에 후광이 비치는 것처럼 찬란한 미소였다. 라미엘 곁에 있으면서 미인에 무뎌진 줄 알았는데, 그렇지도 않은가 보다.

“초대해 줘서 고마워요.”

레이가 준비해 온 초대 답례품을 내밀며 인사했다. 윌포프가 마님의 첫 파티라며 고심해서 골라 넣은 선물이라고 했다.

케이틀린은 마녀에게 답례품 같은 예의는 기대도 하지 않았던 터라 속으로 내심 놀랐지만, 동요하거나 티를 내지 않고 우아한 미소를 유지했다.

조금 전 그녀가 무례하지 않을 거라 대꾸한 건 빈말이었는데, 레이알렉시스가 이렇게 예의 있게 나올 줄은 전혀 몰랐다.

사실 이미 케이틀린을 비롯한 네 명은 살짝 기가 눌린 상태였다. 이 세계를 잘 모를 게 분명한 공작 부인에게 이런저런 예의를 알려 주려 벼르고 왔는데, ‘루이반 공작’이라는 거물의 등장에 평정이 깨졌다.

“몸이 좀 안 좋은 것 같던데…….”

이야기의 포문은 클레어가 열었다.

“괜찮아요. 라엘, 아, 공작님 걱정이 조금 과한 거예요.”

저도 모르게 애칭이 툭 튀어 나갔다가 공작님 뒤로 사라졌다. 공작 부인으로서의 공식 석상이 처음이라 조금 긴장이 된 탓이었다.

라비던에서는 정략결혼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연애결혼을 폄하하는 분위기가 있었다. 전략적으로 계약을 해야 하는 마당에 감정에 휩쓸려 중대사를 결정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런 건 서로 주고받을 것 없는 평민들이나 하는 것이라 여겼다.

그런 의미에서 라미엘이 레이에게 ‘죽고 못 살 정도로 사랑하는’ 아내를 연기하길 원했다는 건 굉장히 의외의 선택인 셈이었다.

물론 그가 그린 큰 그림은 실연의 상처를 앞세워 재혼을 차단하려는 것이었지만, 역으로 감정에 휩쓸리는 남자라는 오명을 얻을 수도 있는 다소 위험한 선택임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자기 명성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사람이구나. 하긴. 그 완벽한 남자한테 오물이 묻어 봤자지. 그런 건 보이지도 않을 테니.’

라미엘에 대해 생각하면 뭘 하나. 한다고 달라지는 것도 없는데.

그에 대한 생각을 끊고 앞에 있는 레이디들과의 파티나 즐겨 보자는 생각으로 레이가 입을 열었다.

“다들 모여 계신 걸 보니, 제가 조금 늦은 모양이네요.”

“아뇨, 제시간에 오셨어요.”

케이틀린이 상냥하게 대답해 주었다.

“그런가요? 다행이네요.”

“와 주셔서 감사해요.”

“별말씀을요.”

예상 못 한 유순하고 평범하고 부드러운 대화에 남은 세 사람은 속으로 놀라고 있었다.

레이알렉시스가 시비도 안 걸고, 비꼬지도 않고, 무례하지도 않다니? 이제 시작이라 그런가?

그러나 세 사람의 예상과는 다르게 파티는 무사히,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레이가 입을 다물고 고개만 끄덕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재미가 없으신가요?”

옆에 앉은 케이틀린이 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뇨. 무척 즐거워요.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재밌는걸요.”

파티가 아무리 재미없다고 해도 호스트에게 직접적으로 그렇다 말하는 건 분위기를 깨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진심으로 레이는 지금의 파티가 지루하지 않았다.

유행의 선두주자인 태자비의 요즘 동향과 태자비의 디자이너 이야기부터 누구네가 넷째를 임신했다더라, 그 여자 집안 거덜 낼 정도로 사치 부리는 거 봤냐 하는 소소한 이야기들은 한국에서 듣던 것과 큰 차이가 없었다. 이게 신기해서 참 재미가 있었다.

레이알렉시스는 주변에 또래 친구가 없었다. 표면적으로 만나는 비슷한 수준의 여자들뿐이라 친밀한 사이의 누군가는 없었다.

이런 소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들은 한국에 있는 친구들하고나 나누던 것들이었다. 비록 자신이 끼어들어 할 말은 없지만, 옆에서 친한 친구들끼리 수다를 떠는 걸 듣기만 해도 제법 재미있었다.

한국에 머물렀던 10년의 시간.

레이는 지금 나이에 그곳에 떨어져 서른네 살까지 지내다 왔다. 현재 몸과 마음은 스물넷일지언정 가끔 삼십대에 가까운 구석이 툭 튀어나올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굉장히 우아하고 기품 있고 성숙해 보이는 척하는, 이제 막 스무 살이 넘은 아가씨들의 대화가 마냥 귀엽게 느껴지고 있었다.

“그 여자, 재혼할 거라더군요.”

“어머나.”

얼마 전에 떠들썩하게 이혼했다는 남작 부부의 이야기였다. 부인이 다른 남자와 별장에 간 걸 들켰다던가.

그런데 재혼? 본인 귀책으로 이혼하게 된 부인이 이 라비던에서 재혼을 할 수 있던가?

“재혼이요?”

레이가 파티 시작 이래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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