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2화 (22/160)

22화. 마녀는 여전히

“재혼이요?”

“네? 아, 네. 그 바람난 남자랑 재혼하겠다고 하던데요.”

조아나가 대답하면서 레이를 힐끗거렸다. 갑자기 대화에 끼어든 그녀가 의아한 눈치였다.

“재혼이 가능해요? 어, 어떻게?”

“어, 뭐, 음. 이제 불법은 아니니까 가능하겠죠?”

유책임자의 재혼이 불법이 아니라고?

“유책임자는 재혼 못 하는 거 아니었나요?”

이 황당한 법 때문에 그동안 라비던의 이혼 싸움은 몹시도 치열했다. 어떻게든 상대방의 잘못을 끄집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편의 잘못이 확실해서 이혼한 여자에게는 남자 관리를 잘 못 했다는 부정적 시선이 따라붙곤 했다. 반대의 경우는 그저 이혼만 하고 끝이었다.

이런 시선 때문에라도 이혼을 먼저 요구하는 여자는 극히 드물었고, 이걸 악용해 바람을 피우는 남자들이 부지기수였다.

“이번에 법이 바뀐대요. 책임 상관없이 재혼 가능하도록.”

클레어의 남편인 스태너스 백작은 입법 기구에서 꽤나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니 거의 기정사실일 터였다.

“그럼, 앞으로 어떻게…….”

“앞으로 이혼해도 얼마든지 다른 짝에게 구애할 수 있게 되겠지요.”

클레어의 말에 레이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다.

‘아. 아니다. 이건 안 된다!’

이혼만 하면 만사 오케이일 줄 알았는데.

재혼이 자유로워지는 분위기가 되면 십중팔구 자신의 부모는 제가 어디 있든 찾아내 결혼 시장에 던져 버릴 게 분명했다.

라미엘이야 주변에서 결혼해라 뭐 해라 할 사람들이 없으니, 접근하는 사람들을 직위를 이용해서 다 쳐 내면 되겠지. 하지만 공작 부인에서 일반 시민으로 다시 강등될 자신에겐 그야말로 방어막이 하나도 없다. 그 방어막을 부모는 다시 결혼으로 채우려 할 것이다.

“저기, 그런데…….”

바바라가 슬쩍 레이를 향해 물었다.

“루이반 공작 각하께선 언제 정식 작위를 받게 되시는지요?”

드디어 이야기의 주제에 라미엘이 나왔다. 아마 그동안 계속 궁금해 죽을 것 같았을 터다. 겉으로야 루이반의 행방을 궁금해하는 듯 보이지만, 실제 속뜻은 ‘너희 정말 결혼하는 거 맞아?’ 되시겠다.

“태자께서 혼약서를 보시고 황실에 초청을 하셨으니 그때 받게 될 것 같네요.”

이 말은 ‘우리는 이미 황실에 결혼을 약속한 증서를 보냈으며, 그걸 본 태자가 황실로 초대했으니 게임 끝 맞단다.’ 이런 뜻이다. ‘혼약서’와 ‘황실 초대’라는 두 단어에 다들 흠칫하는 게 눈으로도 보였다.

‘이 아가씨들이 원하는 것은 내가 공작 부인이 됐다고 엄청나게 잘난 척하는 거겠지?’

레이디들의 소소한 수다가 재미있어도 마냥 고개 끄덕이며 듣고 있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악녀 레이알렉시스는 사라져선 안 된다. 그 누구도 결혼할 생각이 들지 않는 여자로 계속 남아 있어야 한다!

레이는 재빨리 방금 전 이야기들을 되감기해 보았다.

‘아까 분명 한 마음 한 뜻으로 은근히 돌려 까던 사람, 왜 욕을 했었지? 아!’

없는 집으로 유명한 자작가 딸이 돈 많은 후작가의 영식과 결혼해서 사치를 엄청나게 부린다는 내용이었다.

계약서에 ‘루이반 공작 부인’이 사용하는 모든 경비는 루이반에서 대겠다고 했다. 그러니 보석 같은 걸 잔뜩 사서 주변에 보란 듯 알리는 사치 끝판왕의 모습을 보이고, 그 보석까지 챙겨서 나오면 일거양득이다.

소문의 후작가가 돈이 많아 봤자 루이반만큼은 아닐 터. 그 이상의 사치를 두어 번만 보여 줘도 사람들은 저 마녀가 루이반 가문의 등골을 빼먹는구나, 하고 알아서 확대 재생산된 소문을 나를 터였다.

계획이 잡히자 마음이 편안해졌다.

“태자 전하와 태자비 전하 앞에 선다고 생각하니 좀 떨리네요. 떨지 않게 단단히 기합을 좀 넣어야 할까요?”

레이의 말에 네 사람은 떨떠름한 기분을 감추고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쳐 줬다.

“호호호. 기합이라뇨. 무슨 그런 것까지 해요.”

케이틀린이 까르르 웃자 분위기가 풀어졌다. 하지만 다른 세 사람에게는 이 말이 꼬투리 잡기 좋은 주제가 되었던 듯했다.

“루이반이라면 충분히 괜찮을 거예요.”

“그럼요, 루이반인데요.”

“공작님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시겠어요.”

얼핏 기운을 북돋워 주는 말 같겠지만 저 말은 ‘루이반 가문에서 널 대충 방치하나 보다?’ 혹은 ‘루이반이 너한테 뭘 해 주기 싫은가 보지?’라는, 필시 공격에 가까운 말이었다.

루이반의 명예를 위해 마님을 달달달 볶아 대던 윌포프가 들었으면 거품을 물었을 것이다.

“그렇겠죠? 공작님이 ‘마린의 거미줄’을 준비했다는데 제가 괜히 떠나 봐요.”

마린의 거미줄은 라비던 사람이라면 한 번은 들어 봤을 정도로 엄청나게 유명한 다이아몬드 목걸이로, 제작 기간만 17년이나 걸린 세상에 하나뿐인 제품이었다.

보석을 잘 모르는 저도 알고 있을 정도로 떠들썩하게 유명한 제품이니 당연히 비쌀 것이란 생각에 내지른 말이었다. 계약금으로 10로베를 선뜻 부르는 집안이니 그보다 싼 목걸이 정도야 별것도 아닐 거란 계산이 깔려 있기도 했고.

‘루이반은 날 위해 이렇게까지 최선을 다하고 있단다.’ 하는 사치성 발언에 세 사람뿐만 아니라 케이틀린까지 눈동자에 지진을 일으켰다.

“……마린의 거미줄이라고요?”

클레어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물었다.

“네.”

레이가 턱을 조금 치켜들고 거만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걸 고, 공작님께서 부인을 위해 샀다고요?”

조아나가 회색 눈을 몇 번이나 깜빡이며 물었다.

“네. 마린의 거미줄, 그걸 절 위해 준비하셨다더군요.”

기묘한 침묵이 잠시 테이블에 내려앉았다.

“루이반 공작께서 부인을 아주 많이 사랑하시는가 봅니다.”

침묵을 깬 건 케이틀린이었다.

“제가 갖고 싶다 한마디 한 것뿐인데. 호호.”

레이는 더 재수 없어 보이기 위해 턱을 좀 더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긴. 라미엘 님이 다른 사람들처럼 결혼할 거라곤 생각 안 했죠.”

바바라의 말에 다들 동요하는 눈치였다.

“맞아요. 루이반 공작님은 워낙 천사 같으셔서.”

‘천사’다 보니 ‘마녀’까지 구제한다는 뜻이겠지만 레이는 이들의 말에서 비로소 라미엘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으로 맺어진 부부 놀음을 하겠다는 그의 의도를.

‘라미엘’이라는 천사 같은 남자는 정략결혼과 어울리지 않는다. 아무리 그가 귀족이고, 정략결혼이 당연시되어 연애결혼이 천대받는 사회 분위기라고 해도 그는 아니어야 했다.

오히려 사랑으로 맺어지고 지고지순하게 한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야 그에게 어울리는 이미지였다. 그가 천사의 가면을 쓴 이상 귀족 사회에서 별 잡음 없이 살려면 사람들이 원하는 이미지대로 행동해야 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지 않게 되는 것이다.

이미 태생부터 주변 사람들에게 온갖 시끄러운 꼴을 당해 온 사람이니 더 예민했을 터다. 결국, 그에게 결혼이란 궁극의 이미지 관리인 셈이었다.

‘남편의 이미지를 위해 나는 더 악독해져야 하나? 악마 곁에 있으면 천사는 더 빛나는 법이잖아.’

반응을 보아하니 기가 질린 얼굴들이었다. 본인들이 생각한 것보다 과했음이 분명했다. 이대로 저들이 돌아가면 앞으로 마녀의 사치 문제까지 거론되어 돌아다닐 테니 잘된 일이었다.

‘앞으로 한두 번 정도만 더 사치 부리면 되겠다.’

레이가 작정하고 뻐기고 있는 때, 케이틀린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머나!”

케이틀린 맞은편에 앉아 있던 클레어가 감탄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케이틀린 뒤쪽 수풀로 향했다.

“와아.”

레이는 눈에 보이는 풍경에 저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솜털이 보송보송한 강아지 네 마리가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노란빛 털에 풀을 잔뜩 묻힌 래브라도 리트리버 새끼들이 깡깡대며 케이틀린에게 달려들었다. 그녀는 강아지들의 머리를 한 마리씩 쓰다듬어 주며 방긋 웃었다.

“마침 잘됐어요. 영애들께 이 아이들을 소개하고 싶었어요.”

“아, 혹시! 지난번 그 아이들인가요?”

“네. 이제 젖은 다 뗐답니다.”

다들 레이알렉시스의 은근한 잘난 척에 짜증이 살짝 오르는 중이었는데 때마침 화제가 바뀌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너무 귀엽네요. 어쩜.”

“목에 스카프는 케이틀린이 매어 준 건가요?”

“네. 아이들을 구별하려고 묶어 줬어요.”

목에 스카프를 맨 강아지라니. 심장에 무리가 올 정도로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너무너무 귀엽다. 어쩜.”

레이마저 넋을 놓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테이블 의자에서 내려와 바닥에 쭈그려 앉았다. 그러자 강아지 네 마리가 쪼르르 달려와 그녀를 감쌌다.

“공작 부인께서도 데려가시겠어요?”

“네?”

“오늘 티파티에 오신 분들께 입양 보낼 아이들이랍니다.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거든요.”

케이틀린이 레이에게 말을 하는 사이 테이블에 있던 세 명이 저마다 마음에 드는 강아지들을 품에 안아 올렸다.

“제가, 저도요?”

그렇게 잘난 척을 하고 별로였는데? 이런 나한테도 강아지를 입양시킨다고?

세상에. 케이틀린 얘 진짜 천사구나. 아까 자기 눈동자, 머리카락 색이랑 똑같은 꽃들 심어 놓은 거 보고 자기애 쩐다고 살짝 생각했는데. 그거 취소다, 취소.

“그럼요.”

“근데 방금 다섯 마리라고 하지 않았어요? 한 마리는 어디 있나요?”

물어봐 놓고 아차 싶었다.

‘꼽사리 껴서 얻어 가는 주제에 남은 두 마리 중에서라도 고르겠다고 뻐기는 것 같잖아?’

내뱉은 말을 얼른 취소하려는데 강아지들이 나왔던 수풀이 흔들리면서 무언가가 불쑥 튀어나왔다.

“아. 어머나. 너도 나왔니?”

케이틀린이 조금 당황한 목소리를 냈다.

앞의 네 마리와는 다른 검은색 강아지가 목줄을 매단 채로 달려와 케이틀린의 발치에 몸을 비벼 댔다.

“아, 얘가 다섯째구나!”

레이의 목소리에 검은 강아지가 달려와 그녀의 다리에 양발을 올렸다.

“죄송해요, 공작 부인.”

“너무 귀엽, 네?”

“못 나오게 잘 묶어 뒀었는데 줄이 풀렸나 봐요.”

케이틀린의 말에 세 사람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말했다.

“마음이 약해서 케이틀린이 세게 못 묶어 둔 거지요.”

“그런 생물까지 챙기다니. 어쩜 그렇게 마음이 예쁠까요.”

“케이틀린이 신경 쓴 것 잘 알아요.”

세 사람의 말에 케이틀린이 말했다.

“아녜요. 검은 개가 영애들 눈에 띄지 말았어야 했는데. 혹여 마음 상하셨을까 걱정이에요. 제가 좀 더 잘 매어 뒀어야 했는데.”

리담에서 검은 개, 검은 고양이는 불길한 존재로 통했다. 온통 검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존재들을 흉하다 여겼다.

레이 역시도 리담 사람이니 근거도 없는 이 괴담을 별생각 없이 받아들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유주의 검은 푸들 까미가 얼마나 귀여운 매력덩어리고 사랑스러운지 깨달았기에 저 괴담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이야기인지 알았다.

“어머, 얘 봐라. 날 언제 봤다고.”

레이에게 귀여움을 받던 검은 강아지는 이내 바닥에 누워 자신의 배까지 보이고 있었다.

사람들이 그렇게 불길하다 여겨도 개는 이토록 사람을 좋아한다. 작은 생명이 주는 무한한 애정에 레이는 울컥하는 기분이 들었다.

“푸헹! 프엥치!”

꽃가루가 코에 들어가기라도 했는지 강아지가 재채기를 했다. 그런 와중에도 꼬리는 맹렬하게 흔들고 있었다.

“저기, 영애. 이 강아지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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