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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 부부의 이혼 사정-23화 (23/160)

23화. 새로운 가족

“저기, 영애. 이 강아지 제가 데려가도 될까요?”

“네? 그 아이를요?”

케이틀린은 라비던의 마녀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불길하지만 자신의 이미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집 안에 두던 개였다. 케이틀린 같은 착한 사람은 검은 개도 버리지 않고 돌봐야 했으니까.

그런데 그걸 마녀가 훌쩍 데려간다고 나섰다.

‘진심인가?’

“저를 닮아 까맣고 귀엽네요. 제가 데려갈게요.”

레이는 사람들이 검은 머리카락의 자신을 마녀라 부르면서, 검은 개나 고양이와 비교해 욕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을 본인이 직접 입에 올렸다는 것은 ‘나도 다 알고 있다’는 일종의 경고도 되었다.

레이가 품에 강아지를 안았다.

다른 형제들이 목에 스카프를 두르고 후작저의 넓은 정원을 뛰어다닐 때, 혼자 목줄을 하고 묶여 있었을 생각을 하니 짠했다. 그래서 정이 확 더 가 버렸다.

“정말, 정말 너무 고마워요.”

진심이 담긴 눈동자가 반짝이며 케이틀린을 담았다.

그 진실된 눈빛에 케이틀린은 조금 당황했다. 레이알렉시스라는 여자가 대체 어떤 사람인지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루이반 공작은 어느 부분에서 이 여자를 선택한 걸까.

“파티는 이제 끝난 건가요?”

레이가 질문함과 동시에 저 멀리 정원 입구에 각 가문의 마차들이 속속 도착했다.

귀가하는 레이디들을 모셔야 하는 마차였다.

“그건 뭡니까?”

라미엘이 마차 앞에 선 레이를 보며 물었다.

“강아지요. 티파티 선물로 받았어요.”

할 말이 많아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라미엘은 입을 닫고 레이를 부축해 마차에 올렸다.

그리고 문이 닫히고 마차가 움직이자마자 물었다.

“검은 개를 선물로 줬다고요? 마그스너 영애가?”

자신도 잘 아는 ‘진짜 천사’인 여자가 불길하다는 검은 개를 줬을 리가 없다.

“케이틀린은 금빛 강아지를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왜?”

“얘 털 색깔이 내 머리 색이랑 똑같은 게 너무 이뻐서 제가 이 아이로 달랬어요.”

라미엘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고작 그런 이유로?’라고 표정으로 말하고 있다.

“나 아니었음 얘는 애정 결핍으로 살았을지도 몰라요. 까만 게 뭐 어떻다고.”

리트리버는 사람 좋아하고 똑똑하기로 유명한 견종이다. 그런 개가 제게 흐르는 주인의 무정을 모를 리가 없다.

그동안 얼마나 서러웠을까. 앞으로 사랑 많이 줘야지.

레이가 강아지를 꼭 끌어안았다.

“라엘이 얘 불길하다고 쫓아내면 나도 따라 가출할 거야.”

말 같지도 않은 협박이지만 라미엘은 친절히도 대꾸를 해 주었다.

“불길하다고 여긴 적 없습니다만.”

뜻밖의 말에 레이가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요? 진짜로 라미엘 님, 소문 안 믿어요?”

“털색으로 길하니 흉하니 하는 걸 믿으라니. 그럼 흰 마물은 어떻게 설명합니까.”

실전으로 깨달은 사실이었나 보다. 라미엘이 그런 미신을 믿지 않아 다행이었다.

“루이반 주인께서 허락하신 거죠? 그럼 이제 우리 새 식구 이름 지어 줘야지.”

“푸엥! 푸엥치!”

강아지가 레이의 품에서 다시금 재채기를 했다.

“아하하하. 얘 아까부터 재채기 소리 되게 웃기네.”

검은 강아지는 레이의 붉은 드레스 위에서 그녀에게 잔뜩 예쁨을 받더니 반대편에 앉은 새로운 사람에게 눈을 돌렸다. 저 사람에게도 사랑을 받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푸엥, 칏. 멍멍!”

라미엘에게 가려고 짧은 다리를 바동거리는 강아지를 레이가 품에 안아 내밀었다.

“안아 보실래요? 얘가 라미엘 님이 맘에 든 모양인데.”

“싫습니다.”

“아, 예.”

단호한 거절에 레이는 급히 내민 팔을 거둬들였다. 제 눈에 이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귀여워하기를 강요해선 안 된다고 유주가 알려 줬었다.

“얘, 너…….”

“푸엥칫!”

강아지가 얼굴에 힝힝대는 재채기 바람이 제법 셌다.

“콧구멍에 뭐가 꼈나? 왜 이렇게 푸엥거리지?”

레이가 강아지를 눈높이로 들어 콧속을 살폈다.

“아무것도 없는데. 일단 너 저택 도착하면 진찰부터 받아 봐야겠다.”

“푸엥!”

“와하하하. 얘가 대답을 재채기로 하네! 어? 아, 그래! 너 이름은 푸엥이야!”

‘멍멍’ 하고 짖었으면 ‘멍멍이’가 됐을지도 모를 검은 강아지는 ‘푸엥’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파티는 어땠습니까? 루이반 이름으로 나간 첫 모임인데.”

“나가길 잘한 것 같아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입수했거든요.”

맞은편의 보석 같은 남자를 보다가 레이는 중요한 사실을 떠올렸다.

“저기, 라미엘 님. 내가 공작 부인으로 있는 동안 사용하는 모든 것들은 정말 루이반이 지불하는 거 확실한 거죠?”

“네.”

“내가 막 보석도 사고 드레스도 사고 그래도?”

“무슨 소리가 하고 싶어서 계약서에 쓴 내용을 또 묻고 있나요?”

라미엘이 ‘확실히 다 해 준다니까 왜 그래?’라는 뜻으로 반문했다. 반응을 보니 몇 라블 정도는 그냥 봐줄 것 같아 조금 안심이 되었다.

“저기. 라엘. 혹시 마린의 거미줄 알아요?”

“목걸이?”

“맞아요. 근데 그게 정확히 어떤 목걸이인지도 알고 있어요?”

레이가 슬쩍 운을 뗐다.

“대강만 압니다. 180로베였던가.”

“푸엥!”

푸엥의 재채기 소리 뒤로 침묵이 내려앉았다.

“네? 뭐라고요?”

‘방금 ‘라블’이 아니라 ‘로베’라고 한 거 같은데. 설마 내 귀가 잘못된 거겠지.’

라블이어도 큰일인데, 로베면 정말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황실에서 태자가 태자비 생일에 선물하려다, 180로베는 과하다는 주변 황족들의 만류로 포기했죠.”

“180로베요? 라블이 아니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의 레이를 보며 그가 말을 이었다.

“온갖 좋은 기술이니 보석이니를 다 쏟아부었다고 하니 부르는 게 값인 모양입니다.”

라미엘의 말에 눈앞이 캄캄해졌다. 주인의 심리가 불안해진 걸 알아차렸는지 품 안의 푸엥이 낑낑댔으나 레이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처, 처처, 처천, 천팔백…….”

무려 1,800억 파브다. 이게 말이 되는 숫자인가!

라미엘은 갑자기 안색이 하얗게 질린 레이를 의아한 눈으로 보았다.

‘이게 그렇게 놀랄 만한 일인가.’

식은땀이 나는지 이마를 훔치기까지 하는 모습을 보니 적잖이 놀란 듯했다.

새파랗게 질린 채 한마디도 않던 레이는 저택에 도착할 무렵 라미엘 앞에 풀썩 무릎을 꿇었다.

“라, 라미엘 님! 나 사고 친 거 같아요!”

“갑자기 이게 무슨…….”

라미엘이 제 무릎에 팔을 얹고 고개를 숙인 레이를 떼어 내려고 하는데 무릎에 이상한 감각이 느껴졌다.

‘젖는다?’

“허어어엉. 난 몰라. 어떡해애.”

“레이알렉시스? 당신, 지금 울어?”

라미엘의 무릎에 고개를 묻은 루이반 마님이 하염없이 눈물을 쏟고 있었다.

***

어제저녁에 본 광경은 윌포프의 32년 인생을 통틀어 가장 인상 깊었다.

묘한 쪽으로.

주인 부부를 마중하러 나갔던 윌포프는 웬 검은 개를 안고 주인 품에 안겨 오열하는 마님과 그런 마님을 부축하며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웃는 주인의 모습에 귀택하셨냐는 흔한 인사말도 잊고 말았다.

레이가 울음을 그치고 훌쩍이며 방으로 들어가 자기 전까지도 무슨 일이었는지 몰랐으나.

“진짜 재밌는 여자네.”

주인이 피식피식 웃으며 내뱉은 자그마한 혼잣말에 티파티에서 레이가 사고를 쳤구나, 얼추 예상을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마린의 거미줄…… 말씀이십니까.”

밤새 루이반의 재정부를 뒤적이던 주인은 리담에서 가장 유명한 보석 이름을 대며 그것에 대해 자세히 알아 오라 명령했다. 구매 방법까지 포함해서.

장신구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도 아는 극강의 보석이다. 황실조차도 가격에 질려 포기한, 눈 튀어나오게 비싼 보석의 ‘구매’ 방법을 알아 오라니.

라미엘이 사랑에 미쳐 자기 사람을 위해 뭐든 다 바치겠다는 사람이라면 이해해 봄직한 말이지만, 이건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주인님,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어찌하여 그걸 구매하시려는 겁니까?”

“사랑하는 아내가 원한다는데, 그쯤이야.”

다정한 대사와는 달리 온기, 감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였다.

“진심이십니까?”

주제 넘는 질문인 건 알지만 해야 했다.

라미엘이 생각 없이 작은 마을 하나는 살 수 있을 정도의 큰돈을 쓰려 하진 않을 걸 알지만, 고작 레이알렉시스를 위한 보석에 180로베를 쓰다니. 안 될 처사였다.

“그 정도쯤 해 두면 아무도 내게 뭐라 못 하겠지.”

이혼 후의 귀찮음을 감수하기 위해서라는 말이었다.

재혼이 좀 더 자유로워질 개정안이 조만간 발효될 터였다. 짧은 결혼 생활 정도는 ‘정식 루이반 공작’이 주는 타이틀에 비하면 그리 큰 흠이 되지 않을 것이고, 라미엘은 다시금 구혼 시장의 상급 매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걸 사전에 어마어마한 돈으로 막아 두려는 것이었다.

작위를 받은 후 자신에게 다가올 사람들을 사전에 모두 치워 놓겠다는 말이 마치 윌포프에게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일도 없고 가족을 만들지도 않겠다는 말로 들렸다.

라미엘은 정말로 작위 외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했다. 심지어 루이반의 미래마저도.

윌포프는 불안해졌다. 지금의 주인은 마치 자신 이후의 루이반을 고려하지 않는 듯 보였다.

“여긴 고작 이 정도로 무너질 일 없어. 네가 더 잘 알잖아?”

아주 살짝 내비쳐진 윌포프의 불안을 그는 바로 읽어 냈다.

“테일러를 불러와.”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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