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마린의 거미줄
그 시각, 사건을 일으킨 주인공은 집안 고용인들의 눈을 피해 정원에서 푸엥과 놀고 있었다.
검은 개를 볼 때마다 다들 불편해해서 어쩔 수가 없었다. 루이반 저택에서 푸엥을 신경 쓰지 않는 건 라미엘과 크레하뿐이었다.
루이반에 저런 게 들어왔다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눈초리 뒤엔 마님이 데려와서 너무 이뻐하시니 무어라 할 수가 없다는 짜증도 함께 따라왔다. 테일러나 윌포프 정도의 권위가 있는 사람도 마님을 말리지 않고, 무엇보다 주인이 놔두라고 했으니 더 이상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다들 마뜩잖아 해도 푸엥은 사람들을 너무나 좋아했다. 레이 말고도 다른 사람이 보이면 꼬리를 흔들고 웃으며 달려가 몸을 비벼 댔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나올 만큼 사랑스러운 모습이었지만, 검은 털을 보면 선뜻 쓰다듬어 주지를 못했다.
그렇다 보니 전적으로 푸엥의 케어는 레이가 도맡아 하는 중이었다. 밥을 챙겨 먹이고 배설물을 치우고 씻기고 하는, 본디 귀족이라면 절대 하지 않을 일들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반려동물을 그저 품에 안고 귀여워해 주기만 했다. 귀찮고 힘든 일은 전부 고용인 차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레이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서는 건 고용인들에게 있어 이래저래 너무도 불편한 일이었다.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을 ‘감히’ 마님이 하게 만들었다는 사실과 검은 개를 직접 만지고 돌보는 것이 불길하다는 사실 사이에서 그들은 갈팡질팡했다.
주인님이 그리 예뻐하고 아끼는 마님이신데 저런 일을 하시게 한 걸 알면 목이 잘려 나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마님은 푸엥을 애정 없이 대하거나 학대할 거면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마라, 내가 하겠다고 선포했다. 그리고 정말 그 말을 지키고 있었다.
“마님, 뭐 하십니까?”
크레하가 열심히 정원 한 귀퉁이를 삽질하고 있는 레이를 보며 물었다.
레이는 오늘도 역시 크레하의 훈련에 빠지지 않았다. 훈련을 할 때면 몸을 움직여야 해서 바지를 입는데 이 때문에라도 훈련을 착실하게 하게 되었다. 편한 옷을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푸엥이 화장실을 새로 찾은 모양이야.”
“삽으로 개똥을 치우는 귀부인이라니.”
“불만이니?”
“아뇨. 멋지십니다.”
“앙! 앙!”
레이 곁에 있던 푸엥이 꼬리를 방방 흔들며 크레하에게 달려들었다.
훈련하는 동안 혹여나 강아지가 와서 다칠까 봐 나무에 매어 놓는데, 강아지 눈엔 그가 제 주인과 자신을 괴롭히는 걸로 느껴지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푸엥은 크레하에게도 애정을 뿌렸다. 다만 그는 그게 귀찮게 여겨질 따름이었다.
크레하가 제게 달라붙는 푸엥을 발로 슬쩍 밀었는데, 푸엥은 놀아 주는 거라고 생각하는지 신이 나서 더 달려들었다. 대형견이라 그런지 강아지인데도 온몸으로 덤벼들면 제법 묵직했다.
“마님, 오늘부로 훈련은 종료입니다.”
“어? 왜?”
“앞으로 황실 초대 준비하려면 훈련 받으실 시간 없다고 하던데요.”
“누가?”
“집사가요.”
레이의 얼굴이 구겨졌다.
1,800억 파브짜리 사고를 쳐서 시키는 대로만 하고자 했는데, 피 말리게 엄격한 집사의 교육은 그 범위 밖이었다.
“……내가 한 번 창피하고 말지.”
이제 와 정신이 확 드는 것 같았다. 집사의 참교육이 펼쳐질 거란 생각이 들자 그 원흉인 목걸이가 떠올랐다.
‘1,800억이라니. 돌았나.’
라미엘을 붙잡고 울 게 아니라 티파티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제가 헛소릴 했다고 하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레이알렉시스의 이미지는 바닥이고, 다들 루이반 공작을 낚았다고 잘난 척할 거라 예상하고 있으니 그들의 기대에 맞춰 이런 허풍 정도는 한번 떨 수 있지 않은가.
원래 목표가 그 누구에게라도 결혼 상대자로 거론되지 않게 이미지를 마이너스로 만드는 거였으니 차라리 잘됐다.
“내가 진짜 미쳤었네. 1,800억짜리를 사 달라고 했다니.”
어쩐지 다들 너무 심하게 놀란다 했다. 하루 만에 정신이 들어 다행이었다.
레이는 삽자루를 크레하에게 넘기고 빠르게 저택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런 주인의 뒤를 푸엥이 야무지게 쫓았다.
“그이 어디 있어?”
“주인님께선 집무실에 계십니다.”
발치의 푸엥을 보고 흠칫하는 하인을 본 레이는 푸엥을 품에 안아 들고 집무실 문을 열었다.
방 안에는 라미엘 말고도 윌포프와 테일러도 있었다.
“마침 잘 왔어요, 레이.”
“라엘, 할 말이 있어요.”
“푸엥치!”
레이가 품 안의 푸엥을 옆에 있던 테일러에게 불쑥 안겼다.
“잠시 맡아 줘.”
얼결에 검은 개를 안게 된 테일러가 떨떠름한 얼굴로 제 품 안에 안긴 녀석을 내려다보았다.
“헥, 헥.”
온통 검은 개가 붉은 혀를 내보이며 맹렬하게 꼬리를 흔들어 댔다.
“레이, 할 말이란 건?”
“마린의 거미줄이요.”
방금 전까지 세 남자가 언급하던 주제였다. 품 안의 개를 내려다보던 테일러도 다시금 고개를 들어 레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잠시 자리 좀 비켜 줘.”
마님의 목소리에 결연한 의지가 느껴지는 것이 아무래도 긍정적인 쪽으로 이야기가 되려는 듯했다. 주인이 너무 무서운 소릴 해서 식겁했는데 마님이 수습을 해 줄 것 같아 다행인 순간이었다.
두 사람은 잽싸게 집무실에서 나간 뒤 무언으로 짧게 눈빛을 교환했다.
‘살았다!’ 하는 눈빛을.
“내가 수습할게요.”
“레이가?”
라미엘이 ‘르아넬로가가 그렇게 돈이 많아?’ 하는 어투로 물었다.
“취소하면 돼요. 말로만 떠든 거니까 얼마든지 무르면 그만인걸.”
농담이 아닌 듯 결연한 눈동자였다.
“취소가 쉽나요? 그게 안 돼서 레이가 그렇게 울었던 것 아니었나.”
라미엘의 무릎에서 엉엉 울던 일이 생각나 얼굴이 절로 달아올랐다.
“흠흠. 그때는 내가 좀 어렸어요.”
“어제였는데?”
“성인이라면 하룻밤 정도면 자기반성을 할 줄 알거든요.”
사실 방금 전에 불현듯 떠오른 것이긴 했지만 어찌 되었든 사고 치고 하루 만이니 그렇다고 하자.
“1,800억 파브라니! 미쳤지, 내 체면 세우자고 그걸. 허세 부리느라 거짓말했다고 하면 돼요. 사실이기도 하고. 내가 그 목걸이 좀 안 하면 어때요?”
“그래서 허풍쟁이가 되는 걸로 결정을 내렸다?”
“네. 그러니까 라미엘 님은 이제 신경 안 써도 돼요.”
“내 아내가 거짓말쟁이가 되는데 신경을 쓰지 말라니. 나는 아내를 너무도 사랑해서 아내라면 눈이 뒤집어지는 남자인데, 그 꼴을 볼 것 같나요?”
엄청 사랑스러운 대사 같은데 목소리는 세상 삭막하기 짝이 없었다.
“마린의 거미줄만큼은 아니어도 화려한 목걸이를 하나 하고 걔 이름을 ‘마룬의 거미줄’이나 ‘마린이 걷는 중’ 같은 걸로 지으면 되지 않을까요? 너희가 잘못 들었다고 우기면 될 거 같은데.”
레이의 수습 방법을 들은 라미엘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레이.”
“네.”
“마린의 거미줄은 황실에 가기 전에 루이반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예에?”
레이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경악한 얼굴을 했다.
“라엘, 아니 라미엘 님. 계약에 너무 심취하셨네요. 아무리 사랑하는 아내라고 해도 이건 아니에요. 무슨 사랑이 1,800억이야. 살 떨리게 비싸서 못 하겠네. 라미엘 님이 진심으로 절 사랑한다고 쳐도 아내가 정신 나간 소릴 하면 말려야죠! 옆에서 휘말리면 어쩌자는 거예요!”
처음 사고 쳤다고 고백하던 때보다 레이의 안색이 더 안 좋았다. 새파랗게 질린 그녀의 얼굴엔 설핏 공포감마저 보이는 듯했다.
“재혼법 개정되는 거 알고 있습니까?”
“책임 여부에 상관없이 재혼할 수 있는 거요? 네, 알아요.”
“우린 서로 유책임자로 남길 원합니다. 하지만 그게 상관이 없어진다면 우리는, 특히 나는 더 귀찮은 일에 휘말리게 될 겁니다.”
유책임자는 재혼을 못 한다는 것을 빌미로 두 사람은 이혼 시 귀책사유를 양쪽 모두에 체크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아마도 건국 이래 유례가 없는 특이한 일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법이 바뀐다면 그 조항은 한낱 쓰레기가 될 것이고, 두 사람은 다시금 결혼 시장에 등장할 수 있게 된다. 그 때문에 레이가 티파티에서 1,800억짜리 깽판을 치고 온 것이기도 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1,800억은 아니에요.”
“레이마저 이렇게 학을 떼니 더 사야겠군요.”
“아니, 왜 그렇게 결론이 나요!”
레이의 말에 라미엘이 감정 없는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고 말했다.
“과연 1,800억 파브를 이길 수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아……!”
뒤통수가 얼얼해지는 대답이었다.
레이 본인이 ‘레이알렉시스는 상종 못 할 사람’이라는 명성을 위해 일부러 욕을 먹고 돌아다니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다.
자신이야 욕을 먹어도 크게 타격을 받지 않을 비(非) 귀족이고 앞으로 수도엔 얼씬거리지 않을 예정이니 이런 방법을 택했지만, 라미엘은 다르다.
리담을 통틀어 상위권을 차지할 만큼 매력이 대단한 젊은 귀족인 데다가 집안의 명성도 엄청나다. 전대 수장이 공공연하게 첩을 들였다는 사실조차 무마가 되는 정도니 이혼 정도는 흠이 될 리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1,800억은…….”
듣고 질릴 만한, 섣불리 접근할 마음을 없애 주는 금액이긴 해도 이 정도 거액이라면 루이반의 재정에 타격이 없을 수가 없다.
그리고 가주가 이 정도로 확고하게 결혼 생각이 없으니 루이반의 대를 누가 잇게 될지도 불투명하다. 친척 관계인 사촌이나 조카를 데려오기라도 하려는 걸까.
“루이반 괜찮아요?”
레이가 이 모든 내용을 담은 질문을 했다.
“광산 하나 없어진다고 큰일 날 가문은 아닙니다.”
예상치도 못한 큰 단어가 라미엘의 입에서 툭 굴러떨어졌다.
“네? 뭔 산? 지금 광산이라고 했어요?”
“루이반이 소유한 광산들 중에 중급 규모 마력석 광산을 하나 처분하니 목걸이를 사고도 남겠더군요.”
충격이 연타로 치고 들어왔다.
첫 번째는 루이반 가문에 광산이 여러 개 있다는 것. 그다음으로는 귀한 마력석 광산을 팔아서 목걸이 따위를 사겠다는 것.
“……이 사람 미쳤나 봐, 정말.”
라미엘은 면전에서 듣는 비난의 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
“라미엘 님, 인상 쓰지 말고 내 말 들어요. 나중에 필시 후회할 일 만들지 말고. 그냥 내가 욕 한 번 더 먹고 말게요.”
“번복 안 합니다.”
“그럼 1,800억 말고 500억 파브 정도 되는 금액 대에서 결정하는 건 어떨까요?”
“같은 말 두 번 하게 만들지…….”
“1,800억 파브면 헬라 역 지을 때 들어간 돈이라구욧!”
열차 사업 후발 주자인 르아넬로 가문이 가장 경쟁이 치열한 헬라와 수도 간 열차 사업에서 살아남기 위해 가장 최신식으로 온갖 시설을 때려 박아 만든 역이었다.
온도 조절이 되는 마력석을 여기저기 박아서 여름엔 시원하고 겨울엔 따뜻했으며, 실내 정원에는 사계절 내내 항시 꽃이 피어 있어 은은한 향기를 냈다.
VIP를 위한 휴게 시설도 따로 두고 역 이곳저곳에 사람들이 열차를 기다리며 쉴 수 있는 곳도 설치했다. 더불어 쇼핑을 할 수 있는 상점들과 간단한 게임을 무료로 즐길 수 있는 휴게 공간들도 둔 덕분에, 르아넬로의 헬라 역은 열차를 타지 않는 사람들도 놀러 와서 즐기는 명소가 되었다.
집안이 휘청일 뻔했던 사업의 비용을 공개하면서까지 레이가 절박하게 말렸지만 라미엘은 전혀 감흥이 없어 보였다.
“정말 마린의 거미줄, 나 사 줄 거예요?”
마지막으로 확답을 받아 내겠다는 듯 물어보자 그가 이제 그만 물으라는 듯한 표정을 짓고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테일러! 윌포프!”
레이가 두 사람을 큰 소리로 부르자 집무실 근처에 있었는지 10초도 채 되지 않아서 문이 열렸다.
문 앞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던 푸엥이 가장 먼저 달려 들어오고 그 뒤를 이어 두 사람이 모습을 보였다.
“이 사람 좀 말려!”
마님도 주인의 마음을 돌리는 데 실패했다는 비보가 전해졌다.